운동화를 빨다가
주연
운동화를 빤다
주말이 되면 얼룩으로 찌든 운동화를
미지근한 물에 담가 두었다가
긴 솔로, 앞 코부터 쓱쓱 문지르면
이른 새벽이 스멀스멀 빠져나와
고무다라 속을 까맣게 물들인다
새벽 어둠을 밀어 내듯
운동화 뒤축까지 꼼꼼히 문지르다보면
지하철 계단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르내린
남자의 가쁜 숨소리가
헉헉대며 빠져나오고,
퇴근길 지친 숨결 소리도 맥없이 빠져나온다
며칠 전 출장을 갔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발목을 삔 신음도
회식을 마치고 돌아오다
만취한 술로
택시 기사와 다투던 언쟁까지도
말끔히 씻어 낸다
휴일이면 창가에
속살까지 더듬고 들어온 햇살에 기대어
한가로이 숨을 고르다
해가 지면 고슬고슬해진 몸에
다시 끈을 조인다
**베다니 마을의 여인 매리가 예수님의 발등에 향유를 붓고, 그의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렸다는 성경말씀이 있고. 미당 서정주의 ‘귀촉도歸蜀道’에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서역 만리 먼길을 떠나는 임께 여인은, 마리칼 싹둑 잘라 신이나 삼아 드리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시구가 들어있다.
머리칼로 발을 씻어드리고 신을 삼아 드린다는 것은, 우리 몸의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최대의 존경과 사랑과 봉사와 겸양을 나타내는 마음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겠는가.
시 ‘운동화를 빨다가’에도 이러한 가족에 대한 사랑과 봉사의 따뜻한 정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베다니 여인 매리나 ‘귀촉도’속의 여인의 경우와 그 이미지가 비슷하지만 자세히 읽어 나가다보면 상당히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되고 또 느끼게 되기도 한다.
첫째, 정신과 행동의 방향성이다. 앞의 경우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정신이 먼저요, 그에 따 라 발을 씻기거나 신을 삼는 일이 뒤에 따라왔다. 그런데 이 시를 보면 신을 씻는 행동이 먼저이고 사랑과 봉사심이 나중이다. 신을 씻는 과정에서 사랑과 존경심이 우러나와 피부로 스며들고 숨결로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내로서, 엄마로서, 살림하는 주부로서 가족들에 대한 일상의 평범한 뒷바라지가 그러한 정신세계를 이끌어내고 승화시킨다는 것이다.
둘째, 앞의 경우가 고답적이고 높은 정신세계로, 퍽 형이상학적이라면 이 시의 경우는 훨씬 현실적이다. 그것은 ‘운동화를 씻는다’ 하지 않고 ‘운동화를 빤다’고 한 데에서도 느껴진다. ‘몸을 씻는다’와 같이 사람이나 생물에게는 ‘씻는다’는 말을 쓰고 물건이나 무생물은 ‘빤다’는 말을 쓰는데, 작중 화자도 운동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일상 생활중의 한 행위임을 나타내고 있어 그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도 훨씬 현실감이 있다고 하겠다.
물에 담근 운동화에서 스멀스멀 빠져나온 검은 물에서, 출근하는 새벽의 어둠이 떠오르고, ‘꼼꼼히 문지르’는 운동화 뒤축에서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는 남편의 바쁜 숨결이 느껴지며 ‘퇴근길 맥없이 빠져나오’는 지친 숨결 소리도 들린다. 표현이 이렇게 감가적인 것은 이미 그의 사랑이 그만큼 깊이 가슴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하여 일주일간 생활 속에 찌들린 그 때(垢)와 멍과 아픔을 말끔히 씻어주고 싶은 것이다.
끝 연 ‘휴일이면 창가에/ 속살까지 더듬고 들어온 햇살에 기대어/ 한가로이 숨을 고르다/ 해가 지면 고슬고슬해진 몸에/ 다시 끈을 조인다’고 마무리지은 것은 비단 운동화를 햇살에 잘 말리고 고슬고슬 마른 운동화 끈을 다시 꿰어 조인다는 뜻만이 아니라, 일요일 깨끗이 몸을 씻고, 햇볕 잘 드는 거실에서 하루를 쉬면서 내일을 준비하고 다짐하는 남편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음을 독자는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봉암 몽돌밭
김 미 선 (시주머니)
섬에 갔다
추봉도 봉암마을
몽돌밭에 한나절 놀며
물살에 씻기는 몽돌들과 함께
친구와 노래 부르며 한나절 실컷 놀았다
까만 별똥 쏟아져 내린 해변이라 칭하자
어쩌면 까맣게 타버린 하늘 꽃의 눈물
까만 몽돌들이 별의 눈물 아니었을까
크고 작은 눈물들이
추봉도 봉암마을 개 구석으로
끈을 놔 버린 눈물의 역사를 잇는
인연들을 섬으로 불러들였다
눈물이 눈물을 기댄 채 사그락사그락
밀려오는 파도를 잡고
사그락 사그락 온갖 슬픔 사그락사그락
별이 흘린 눈물 삭는다
파도 한번 밀려들 때마다
급물살 한번 타고 나면
쓸리는 파열음에 후련하게 씻기고 나면
정신을 차리게 되지
탈 대로 타버린 까만 눈물도
얼룩으로 상처를 새기는
슬픔 삭으라 삭으라
흐느끼는 소리 사그락 사그락
기쁨 사그락 사그락
까만 몽돌 햇살 따라 반들반들 빛나게 웃는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 속에 들어가 자연과 어울려 함께 놀았다. 나도 한 개 몽돌이 되어 물살에 씻기며 사그락사그락 함께 노래 불렀다. 함께 간 친구도 친구요, 몽돌도 친구다.
어쩌면 몽돌은 해변에 쏟아져내린 별똥별, 그 많은 별들이 흘린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그 눈물, 까맣게 몽돌로 한처럼 굳어져 추봉도 봉암마을 갯가로 모였다. 봉암마을 한 서린 눈물의 역사가 그들을 깊은 인연으로 불러들였다. 한데 모인 눈물과 눈물, 몽돌과 몽돌들이 서로를 기댄 채 사그락사그락, 파도에 쓸리면서 아픔과 슬픔을 삭여낸다. 급물살 한번 타고나면 슬픔도 아픔도 후련하게 씻긴다. 까맣게 한처럼 굳은 그 슬픔, ‘삭으라, 삭으라’. 사그락 사그락 파도에 밀리는 소리가 ‘삭으라, 삭으라’ 명령하며 기원하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그 슬픔 사그락 사그락 기쁨의 소리로 변하기도 한다. 까만 몽돌이 반들반들 새로운 기쁨으로 빛나기도 한다. 자연과 더불어 자연 속에 들어가니 나도 자연이 되어, 파도처럼 몽돌처럼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내며 속세를 떠나, 한도 슬픔도 다 사그라진다.
대체로 위와 같이 읽어내려가 봤지만, 좋은 착상이나 시상에 비해 그 전개나 표현이 그것을 다 구현해 내기엔 좀 미흡하다는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시는 압축이니까, 꼭 있어야 될 것만 남기고 간추려야 하고, 상상이나 이미지에 통일성을 기하면서 그 주제나 초점을 향해 집약적으로 몰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