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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은 1450년(세종 32)에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황(晄),
자는 명조(明照)이며
세조가 즉위하자 해명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 형인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가 세자로 책봉된 지 2년 만인 1457년(세조 3)에 죽어서 둘째 아들인 그가 세자의 자리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랐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성품이 영명과단(英明果斷, 총명하고 일에 과단성이 있음)하고 공검연묵(恭儉淵默, 공손하고 겸손하며 속이 깊고 말이 없음)하며, 서책에 뜻을 두어 시학자(侍學者)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씩 진강(進講)하게 하고, 비록 몹시 춥거나 더울 때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덕업(德業)이 일찍 이루어지고 여망(輿望)이 날마다 높아지자 세조는 "세자가 육례(六藝,
禮·樂·射·御·書·數)에 이미 통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라며 칭찬했다. 예종은 효성이 지극해 세조의 병환이 깊어지자 수라상과 약을 직접 챙기며 극진히 간호했는데, 이 때문에 본인의 건강이 나빠졌다.
병세가 깊어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세조는 죽기 하루 전날인 1468년(세조 14) 9월 7일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세조로부터 직접 면복을 건네받은 예종은 수강궁에서 즉위했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세자 시절인 1460년(세조 6)에 한명회의 큰딸과 혼인했다. 그러나 한씨는 세자빈에 책봉된
이듬해에 큰아들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다.
한씨는 후일 장순왕후(章順王后)에 추존되었다. 예종은 두 번째 부인으로 당시 우의정이던 한백륜(韓伯倫)의 딸을 맞아들였다. 1462년(세조 8)에 세자빈으로 책봉된 한씨는 예종 즉위 후 안순왕후(安順王后)에 봉해졌다.
안순왕후는 제안대군(齊安大君)과 현숙공주(賢肅公主)를 낳았다.
훈신 세력과 종친 세력의 대립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예종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모후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具致寬) 등 원상(院相)들의 정사 관여 때문이었다. 원상은 세조 말년에 도입된 제도로, 세조는 측근인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을 원상으로 임명해 그들로 하여금 예종의 정무를 돕도록 했다. 그들은 수시로 승정원에 드나들며 정무에 참견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고 왕권은 그만큼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훈신 세력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 있다. 바로 '민수(閔粹)의
사옥(史獄)'이다. 민수는 세조 조에 춘추관에서 사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세조가 죽고 사초를 제출하라는 명이 떨어지자, 민수는 자신이 당대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훈신 한명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기록한 사초가 마음에 걸렸다.
혹여 한명회가 이를 보고 노여워해 자신에게 불이익을 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민수는 자신이 제출했던 사초를 몰래 빼내 고쳐 썼는데 이것이 발각되고 말았다. 예종은 민수를 비롯해 이 일에
관련된 강치성(康致誠), 원숙강(元叔康), 이인석(李仁錫) 등을 처벌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이 과정에서 예종은 사관들이 훈신은 두려워하면서 왕인 자신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예종을 불안하게 하는 세력은 훈신 세력만이 아니었다. 종친 세력이 훈신 세력에 대적할 만큼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이시애의 난을 겪으면서 훈신 세력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대항마로 종친 세력을 키우고자 했다. 종친 세력의 중심은 이시애의 난으로 부상한 구성군과 남이였다. 구성군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아들, 즉 세종의 손자였다.
그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이 된 데 이어 병조판서와 영의정까지 지내는 등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조정의 실력자가 되었다.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자로,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와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의 손자다. 그는 훈신인 권람(權擥)의 사위이기도 했으며,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라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몸에 받았다.
예종은 세자 시절 부왕 세조가 자신의 정적이 될 수 있는 종친 세력을 키우는 것을 불안해했다. 세조에게 "성상께서 구성을 지나치게 사랑하시니 신은 이를 그르게 여깁니다."라고 발언했던 것에서도 예종의 심정을 알 수 있다. 특히 예종은 남이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던 중 유자광(柳子光)이 남이의 역모를 다음과 같이 고했다.
오늘 저녁에 남이가 신의 집에 달려와서 말하기를 "혜성이 이제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는데, 너도
보았느냐?" 하기에 신이 보지 못했다고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이제 천하 가운데에 있는데 광망(光芒)이 모두 희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다." 하기에, 신이 《강목(綱目)》을 가져와서 혜성이 나타난 곳을 헤쳐 보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광망이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두 해에 큰 병란이 있다."라고 했는데, 남이가 탄식하기를 "이것 역시 반드시 응함이 있을 것이다." 하고, 조금 오래 뒤에 또 말하기를 "내가 거사하고자 하는데, 이제 주상이 선전관으로 하여금 재상의 집에 분경하는 자를 매우 엄하게 살피니, 재상들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수강궁은 허술해 거사할 수 없고 반드시 경복궁이라야 가하다." 했습니다. - 《예종실록》 권1, 예종 즉위년 10월 24일 이말을 들은 예종은 남이를 잡아다가 문초를 했다. 남이는 "유자광의 집에 가서 이야기하다가 곁에 있는 책상에서 《강목》을 가져다가 혜성이 나타난 한 구절만 보았을 뿐이고 다른 의논한 것은 없습니다."라며 항변했다. 하지만 때를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남이에게 불리한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남이는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공모자로 지목된 강순(康純)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시애의 난 이후 성장한 종친 세력과 무인 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20세의 젊은 나이로 죽다
예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분경 금지, 겸판서 폐지, 대납 금지, 면책특권 제한 등 훈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일련의 정치적 결단을 실행에 옮겼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 와중에 훈신 세력을 견제하던 종친 세력이 '남이의 옥'을 계기로 힘을 잃게 되자 이를 기회로 훈신 세력은 더욱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그런 그들의 유일한 방해물은 오로지 왕인 예종뿐이었다.
예종이 계속해서 훈신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정책을 고수한다면 정치적 대결도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훈신 세력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469년(예종 1년) 11월 28일, 승정원에 모여 있던 원상들은 예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를 곧바로 정희대비에게 알렸다. 예종의 죽음은 그야말로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예종은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는 하나 죽기 전날만 하더라도 정희대비에게 문안을 드리고 일상적인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신숙주가 "신 등은 밖에서 다만 성상의 옥체가 미령(未寧)하다고 들었을 뿐이고, 이에
이를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라고 한 것이나 정희대비가 "주상이 앓을 때도 매일 내게 조근(朝覲)했으므로, 나도 생각하기를 '병이 중하면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느냐?' 하고 심히 염려하지 않았는데, 이제 이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한 것으로 보아도 예종이 죽기 전의
상태가 그리 위중한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정희대비와 원상들은 왕이 죽은 바로 그날 일사천리로 덕종(의경세자, 예종의 형)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者山君)을 왕으로 지목하고 즉위식까지 마쳤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이다. 왕위 계승 서열로만 따지자면 자산군은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우선 예종과 안순왕후 사이에서 낳은 원자(제안대군)가 있었다. 원자가 너무 어려서 안
된다면, 그다음 계승 순위는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군(月山君)이 되어야 옳았다. 그런데도 정희대비는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원자가 바야흐로 어리고, 또 월산군은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으며, 홀로 자산군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세조께서 일찍이 그 도량을 칭찬해 태조에 비하는 데 이르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을 삼는 것이 어떠하냐? - 《예종실록》 권 8,
예종 1년 11월 28일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산군은 다름 아닌 당대의 권력자 한명회의 사위였다.
그래서 이를 한명회와 정희대비의 정치적 결탁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고, 때문에 예종 독살설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정희대비와 훈신 세력의 좌장 한명회가 왕의 뒤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이상 이러한 의혹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아쉬움과 의혹만을 남긴 채,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때
나이 20세였다. 시호는 양도(襄悼)이고, 능은 경기도 고양에 있는 창릉(昌陵)이다.
첫댓글 어떤 드라마와 영화제목인지 궁금합니다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 예종역으로 이선균 그리고 안재홍이 출연한다고 합니다.(아직 개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