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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학눌
그대들은 밥도둑이 아닌가… 어찌하여 방일한가
판사라는 ‘화려한 직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출가한 효봉학눌(曉峰學訥, 1888~1966)스님. 스님은 생사문제 해결을 위해 오직 참선수행에 몰두하며, 후학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다. <효봉법어집>과 비문 등의 자료를 참고하여 효봉스님의 수행일화를 정리했다.
“그대들은 밥도둑이 아닌가… 어찌하여 방일한가”
판사로 사형선고후 생사문제 ‘관심’
촛농 모아 촛불 밝힐 정도로 ‘검소’
○…“사람이 사람을 벌 할 수 있는가. 범부인 내가 어떻게 같은 사람을 벌할 수 있단 말인가.” 1923년 평양복심법원 판사로 근무하던 스님은 직책상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해야만 했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고뇌를 거듭한 결과 아무리 세속에서 출세가 보장된다고 해도, ‘생명의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다. 부인과 세 자녀도 있었지만 사표를 던진 스님은 3년간 엿판 하나 메고 팔도강산을 방랑하는 고행(苦行)에 나섰다.
○…엿장수로 나선 스님은 엿판과 옷 두벌이 전 재산이었다. 남루償嗤� 판사로 있으면서 사람을 ‘단죄(斷罪)’할 때보다는 편했다. 뒤따라오는 아이들에게 공짜로 엿을 나눠주어 밑천이 떨어져 솔잎과 물에 불린 콩으로 배를 채운 적도 있었다. 울산 방어진 바닷가에서는 돌 줍기에 정신을 빼앗겨 밀물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다가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했다.
<사진> 인자한 모습의 효봉스님 진영. 출처=효봉법어집
○…금강산 보운암에서 석두(石頭,1882~1954)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오로지 “생사의 고뇌에서 해탈하겠다”는 일념으로 수행정진에 몰두했다. 1927년 여름. 금강산 신계사 미륵암에서 안거에 들어갈때 스님은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반야의 인연이 엷은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 없습니다. 입방선(入放禪)도 경행(經行)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 정진하겠습니다.” 이후 스님은 한철 동안 미동도 없이 화두를 참구했다. 어느 날 공양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엉덩이 살이 헐어 진물이 흘렀다고 한다. ‘절구통 수좌’라는 별칭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1931년 스님은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깨닫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며 흙으로 입구를 봉했다. 하루 한 끼 공양을 들여보낼 창문 하나와 용변을 처리할 수 있는 구멍을 뚫었을 뿐이다. 방석 석장과 입은 옷 하나로 18개월의 ‘전투’를 거쳐 화두를 타파한 후 당시 심경을 시로 옮겼다. <효봉법어집>에 실린 우리말 풀이는 이렇다.
“海底燕巢鹿抱卵(해저연소녹포란) 火中蛛室魚煎茶(화중주실어전다)
此家消息誰能識(차가소식수능식) 白雲西飛月東走(백운서비월동주)”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금강산에서 만공(滿空,1871~1946)스님을 만났다. 효봉스님이 “천하에 살인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는 누굽니까”라고 질문하자, 만공스님은 “오늘 처음으로 보겠구나”라고 답했다. 이에 효봉스님이 “화상의 머리를 갖고 싶습니다”라고 재차 묻자, 만공스님은 머리를 숙여 그 앞에 대니 효봉스님은 절하고 물러났다.
이번에는 만공스님이 물었다. “세존께서 대중을 거느리고 길을 가시다 어느 지점을 가리키면서 절터가 아주 좋다 하시니 제석천왕이 풀 한 포기를 거기 꽂아 놓고, ‘절을 다 세웠습니다’할 때, 세존께서 미소만 짓고 답하지 않으셨으니 그 뜻이 무엇인고”라고 했다. 이에 대해 효봉스님은 “일찍 듣자하니 화상께서는 절 짓기를 매우 좋아하신다더니 과연 그렇습니다”라고 답했고, 만공스님은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효봉스님은 1948년 12월21일 덕숭산 정혜사에서 열린 만공선사 대상법요(大祥法要)에 참석해 법문을 했다. 스님은 “10년 전에 이 산에 왔을 때는 그 사람만 보고 산은 보지 못했더니, 10년 후에 이 산에 오니 그 사람은 볼 수 없고 산만 보이는 구나”라고 법문했다. 이어 효봉스님은 “향을 사르고 꿇어 앉아 흐느껴 우니, 두 눈에서 젖지 않는 눈물이 비처럼 내린다”며 만공스님의 원적을 안타까워했다.
○…1946년 11월 가야총림 방장으로 추대된 효봉스님은 송광사를 떠나면서 “무엇 때문에 이 조계산을 떠나는가. 인천(人天)의 큰 복밭을 갈고자 해서라네”라고 했다. 효봉스님은 직접 쓴 <가야총림 방함록 서(序)>에서 “사자의 힘줄과 코끼리의 힘으로 판단하여 지체 없이 한칼로 두 동강을 내야 한다”며 수행자들의 정진을 당부했다. 우리말로 옮긴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맹하고 예리한 몸과 마음으로 지금까지의 비린내 나는 장삼과 기름기에 전 모자를 벗어 던지고, 천지를 덮는 기염을 방출(放出)하고 부처님과 조사를 뛰어넘는 위광(威光)을 발휘해야 할 것이니, 그래야만 그와 벗할 수 있고 또한 씨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활구(活句) 밑에서 깨달으면 영원히 잊지 않겠지만, 사구(死句) 밑에서 깨달으려 하면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 만약 불조(佛祖)와 더불어 스승이 되려면 모름지기 활구를 밝혀 가져야 할 것이다.”
○…정초가 되면 제자들이 인사를 드리려고 효봉스님을 찾아왔다. 그때마다 당부하는 말씀이 있었다. “어디에 있든지 정진 잘 하면, 내 곁에 있는 것이나 같은 것을, 뭐 하러 살림 중에 결제(結制)를 깨뜨리나, 나는 늘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있네.” 효봉스님의 생활은 검박했다. 흘러내린 촛농을 모아 심지를 박아 다시 불을 밝혔으며, “걸레도 너무 심하게 짜면 빨리 떨어진다”며 살살 짜라고 했을 정도였다.
<사진> 효봉스님이 주석하던 순천 송광사.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출처=송광사
○…1959년 7월15일(음력)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효봉스님은 수좌들의 용맹정진을 당부한 법어를 했다.
“그대들은 밥도둑이 아닌가. 두 도둑이 집안의 보배를 훔쳐 가려고 하니 취모검(吹毛劍)으로 육문(六門)을 지키되 용감하기 적병을 대하듯 해야 한다. 적을 막지 못하면 저들로부터 내 자신이 피해를 입을 텐데 어찌하여 스스로 방일(放逸)한고.
졸음과 망상 두 마구니가 침입하지 않던가? 남의 시은(施恩)을 지고 그 은혜 갚겠는가? 그림의 떡이 능히 배부르게 하던가? 범부가 성인되려고 하는데 누가 막던가? 삼도(三途)의 괴로움이 그대의 집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닦지 않는가. …
신도들은 듣고 믿으라. 믿음(信)이 도(道)의 근원이요 공덕(功德)의 어머니 이니라. 그리고 비구니들에게 한마디 하겠는데, 무행승(無行僧)을 따르지 말라.”
○…효봉스님과 경봉(鏡峰)스님이 교환한 서신이 <삼소굴소식>에 실려 있다. 칠언절구의 시 형식으로 효봉스님이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로 주석할 무렵 보낸 서신이다. <삼소굴소식>에 실린 한글풀이를 옮겼다.
“人間一葉落公山(인간일엽낙공산) 色有內外正秋葉(색유내외정추엽)
這裡雖似有秘密(저리수사유비밀) 更奇一花落後葉(갱기일화락후엽)”
“인간의 한 잎이 팔공산에 떨어지니 /
빛깔에 안팎 있어 바로 가을잎이어라 /
그 가운데 무슨 비밀 있는 듯 하나 /
다시 한 송이 꽃 떨어진 잎에 붙이네”
<사진> 1945년 송광사에 머물 무렵의 효봉스님.
■ 행장 ■
석두스님 은사로 출가
정화불사 ‘정신적 지주’
효봉스님은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석리에서 이병억(李炳億) 선생과 모친 김씨의 5형제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평양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1913년부터 1923년까지 경성지방법원과 함흥지방법원을 거쳐 평양복심법원에서 법관으로 일했다. 1923년 처음으로 사형 선고를 한 후 “내가 갈 길은 따로 있다”며 스승을 찾아 나섰다.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원명(元明)스님으로 다시 태어났다. 36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해 ‘늦깎이’로 불렸지만, 오히려 남보다 더욱 정진했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은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어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 결과 스님은 1년6개월 만에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다. 45세 되던 해(1932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스님에게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효봉스님은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등의 선원에서 정진했으며, 1937년부터는 순천 송광사에 주석하며 납자들을 맞이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스님은 합천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통영 미래사에 주석했다. 종정(宗正)도 역임했다. 종단정화불사에 참여할 당시 스님은 “大厦將崩(대하장붕) 衆力扶持(중력부지)”라는 내용의 ‘불교정화불사 송(頌)’을 지어 격려했다. “큰 집이 무너지려 하니 / 여럿의 힘으로 붙들어라”는 뜻이다.
대구 동화사를 거쳐 밀양 표충사에서 머물던 스님은 1966년 10월 15일(음력 9월2일) 표충사 서래각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79세, 법랍 42세.
송광사=이성수 기자
<모든 말은 쓸데없는 군더더기>
효봉 원명
한평생 내가 말한 모든 법
이 모두가 쓸데없는 군더더기
누가 오늘 일을 물어 온다면
달은 저 일천강에 잠긴다고 하리
법관, 엿장수를 하다가 구도의 길로 들어선 큰스님
효봉 스님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최초의 법관이었다.
그는 일제하에 법관을 하다가 큰 사건이 일어나 한 인간에게
사형을 선고하면서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을 내릴 수 있는가’에 회의를 느껴 출가를 했는데 그는 입고 있던 법복을 팔아 3년간 엿장수를 하며
구도의 고행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과 고은 시인의 은사이기도 하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당시 무시무시한 경무대를 방문했던 스님은 대통령이 생일을 묻자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 어찌 중한테 생일이 있겠소?’ 하고 직탄을 날렸다.
그는 또한 ‘마음을 비우면 본성이 나타나고 뜻이 깨끗하면 마음도 밝아진다.
사람이 사람다운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얄팍한 재능이나 이해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효봉 스님의 열반송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던지는 말들은 어찌 보면 쓸데없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주워 담지 못할 말들을
너무 많이 하며 살아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하등 가치 없는 말들이다.
물론 효봉 스님이 말한 일체의 법은 ‘부처의 법, 인간이 만든 법’을 의미하고
있지만 그것조차 군더더기에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통렬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누가 오늘 일을 묻는다면 달은 저 일천강에 잠긴다고 하리’는 하나의
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효봉 스님이 인간에게 던지는
하나의 화두이다.
효봉스님에겐 ‘달이 고요한 천강에 비치듯이 하나도 걸림이 없는 삶’이
바로 필생이지 않은가 싶다.
‘그대도 자신의 삶을 거울 같이 고요한 강물에 비추어 보라.’
첫댓글 고요한 강물에 비추어보라 자신들의 삶을 ㅡ
효봉 스님과 엿장수 가위라는 내용을 몇년전 조용헌 칼럼에서 일었는데 오늘의 내용은 아주 더 구체적이군요. 감사드림니다.
법정스님의 은사스님 이시기에 한 번 더 존경의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냥 편하게 살고 싶어요, 너무 지쳐서 이젠 ,,,
어떠한 계기가 한 사람의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는다는게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슈바이쳐 박사가 어릴때 옆 집아이와 싸웠는데 옆 집아이 말이 너처름 나도 고기를 먹었으면 너 한테 이길수 있는는데... 이후로 박사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삼배로 받드옵니다 ^^*_()()()_
감사합니다.
삼배로 받드옵니다 ^^*_()()()_
인생이란,,, 정해진 운로가 있어서 그렇게 되는 걸까요???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스물한살부터 여지껏나랏밥을 축내고있으니 그동안사표도몇번 던졌건만 ? 운명이나 운로가 있음을 느낍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