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속집 제4권 / 묘갈(墓碣)
운포 이달 묘갈명 병서(雲圃 李達 墓碣銘 竝序)
공의 성은 이(李), 휘는 달(達), 자는 명숙(明叔)이며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10대조는 시중(侍中)을 지낸 이홍(李弘)이다.
9대조는 검교호군(檢校護軍)을 지낸 이자수(李滋秀)이다. 8대조는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을 지낸 이운길(李云吉)이다.
7대조는 대구 현령(大邱懸令)을 지내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이즐(李騭)이다.
6대조는 성균관 생원으로 호조 참판에 추증된 이원로(李元老)이다.
5대조는 진해 현감(鎭海縣監)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된 이미(李美)이다.
고조는 이의형(李義亨)인데 사헌부 집의를 지냈으며 호는 행헌(杏軒)이다. 이 분이 진주(晉州)에서 고성(固城)으로 이거하여 드디어 고성현 사람이 되었다. 증조부는 이후(李詡)로, 생원이다. 조부는 이천령(李千齡)으로, 참봉을 지냈다.
부친은 이세렴(李世廉)인데 은덕을 갖추었다. 모친은 완산 최씨(完山崔氏)로, 최운걸(崔云傑)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 16) 4월 8일에 마암리(馬巖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만력(萬曆) 46년 무오년(1618, 광해군 10) 5월 14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였다.
12월 17일에 고성(固城) 포도(葡島)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어릴 적에 퇴계 이 선생 문하에서 《소학》을 배웠고, 선생이 돌아가시자 백형인 처사 이규(李逵)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사서일경(四書一經)을 통독하였고 겸하여 무예를 익혔다.
임진왜란 때 공은 부친상을 당했는데, 왜적들이 부친의 무덤을 파헤치자 필마로 단검을 지닌 채 곧바로 적진으로 들어가 세 명의 왜적을 목 베어 그 머리를 무덤 앞 나무에 매달고, 고유제를 지낸 다음 무덤을 옮겼다. 곧이어 표종숙(表從叔) 최강(崔堈)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워서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훈련원 정(訓鍊院正)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조정에서는 권무(勸武)하는 의미로 급제를 하사하고, 곧 벼슬도 초계(貂階)에 올려주었다.
갑진년(1604, 선조 37)에 양산(梁山) 군수에 제수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라 공사(公私)가 모두 탕잔(蕩殘)되었는데, 공이 온 마음을 기울여 백성들을 위무하자 군민들이 그 덕을 잊지 못해 비석을 세워 공을 기렸다. 그 비석에는 ‘청덕선정(淸德善政)’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병오년(1606, 선조 39)에는 관례에 따라 첨지에 제수되었고, 정미년(1607, 선조 40)에는 함경남도 병마우후(咸鏡南道兵馬虞侯)에 제수되었는데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체직되어 돌아왔다. 갑인년(1614, 광해군 6)에 특별히 선전관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행차가 판교에 이르렀을 때 폐조에서 영창대군을 죽이려는 논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는 핑계로 절구 한 수를 짓고 돌아왔다.
그해 가을에 삼도통제우후(三道統制虞侯)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공의 재주와 국량으로 한 지역의 책임을 맡기에 충분하였지만 지위가 삼품에 그쳤으니 알 만한 사람들은 아쉬워하였다.
공은 기질과 풍모가 너그러웠으며 신중하고 말수가 적었다. 평소에 하는 일은 오직 실질적인 일에 힘쓰는 것이었고 허황되고 보기에만 좋은 일은 하지 않았다. 공의 백형 이규(李逵)는 유자(儒者)로서의 품행을 갖추었고, 성품 또한 굳세고 깨끗하였다.
공은 마치 부친을 대하듯 섬겼는데, 백형 앞에 나아가 뵐 때마다, 비록 지위가 높아진 뒤라 해도 공경과 예모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멀리서 백형의 모습을 바라봐서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이 있으면 감히 나아가지 않았고, 반드시 심기가 평안해지고 안정된 뒤에야 들어가 뵈었다. 평생토록 형제간에 한 번도 감정을 상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공은 처음에 칠원 제씨(漆原諸氏)와 결혼했는데, 고려 시대 중랑장(中郎將)을 지낸 제문유(諸文儒)의 후손으로 한성 서윤(漢城庶尹)에 추증된 휘 제락(諸洛)의 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홍정(李鴻程)으로 현신교위(顯信校尉)이다. 딸은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 조면도(趙勉道)에게 시집갔다.
아들 이홍정은, 거창 신씨(居昌愼氏)와 결혼했는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신식(愼寔)의 딸이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맹영(李孟榮), 이중영(李仲榮), 이계영(李季榮)이고 딸은 김팔휴(金八休)와 이경(李瓊)에게 각각 시집갔다.
조면도는 6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조함승(趙咸勝), 조함변(趙咸抃), 조함번(趙咸蕃), 조함광(趙咸匡), 조함기(趙咸岐), 조함설(趙咸卨)이고, 딸은 이원영(李元英)에게 시집갔다. 공의 후취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판서에 추증된 박오(朴旿)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승의랑(承議郎) 이홍경(李鴻卿)이다. 이홍경은 강양 이씨(江陽李氏)와 결혼하였는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이호(李瑚)의 딸이다.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태영(李泰榮)이고 두 딸은 각각 조전(趙沺)과 노한주(盧漢舟)에게 시집갔는데, 나머지 하나는 아직 어리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36년이 되는 계사년(1653, 효종4) 5월 20일에 박씨가 회산(檜山) 별서(別墅)에서 세상을 떠나자 공의 묘 아래에 합장을 했다. 아! 공은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지만 충성과 효성과 의리라는 세 가지 절개를 행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대장부라 이를 만하지 않은가.
그 외손 조함변이 자신이 평소에 듣고 보았던 것을 기록하여 묘갈명을 청했는데, 나로 말하자면 공의 후처인 박씨 부인이 내게 재종 친척이 되고 함변이 또 나의 후사를 잇기에 모두 분수와 의리가 있는 터에다 나 역시 일찍이 공에게 지우를 입었고 공을 공경하며 우러러본 지가 오래되었으니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공에게 재주를 주어 / 天畀公才。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인재가 되었네 / 干城偉器。
씩씩한 모습에 훤칠하게 큰 키 / 仡仡長身。
궁마에도 재주가 능했네 / 弓馬能技。
일찍이 시서를 익혀 / 早業詩書。
문무를 겸비했네 / 文武兼備。
형님을 아버지처럼 섬겨 / 事兄猶父。
집안의 규범도 아름다웠네 / 家行之懿。
적진에 뛰어들어 오랑캐를 목 베고 / 突陣殱酋。
선친의 무덤에 입은 치욕을 갚았네 / 先壟雪恥。
왜적을 토벌하고 공을 세워 / 討賊立功。
나라를 지키고 옳은 일 바로 세웠네 / 扶邦正誼。
늦게 무과에 급제하여 / 晩登虎榜。
벼슬자리 두루 거쳤네 / 旋躡貂班。
은 허리띠에 옥관자를 꽂았으니 / 銀腰玉頂。
그 영광 온 집안에 울렸네 / 榮動門闌。
다스리는 고을마다 걱정하는 마음 베풀어 / 分憂各郡。
유애의 뜻이 비석에 남아있네 / 遺愛有石。
호남과 영남의 우후(虞候)를 지내니 / 佐貳湖嶺。
명성과 치적이 성대하네 / 蔚乎聲蹟。
병사(兵使)의 일을 관장했더라면 / 庶幾專閫。
대장군 깃발을 높이 세웠을 텐데 / 大纛高牙。
지위가 그 덕에 걸맞지 않았으니 / 位不滿德。
어찌 하겠는가 운명인 것을 / 命也柰何。
포도의 언덕 / 葡島之原。
여기가 공의 무덤이네 / 寔公遺宅。
공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 有欲求之。
여기 새겨진 글을 보라 / 視此鐫刻。
[주해
[주01] 초계(貂階) : 측근에서 임금을 모시는 벼슬을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이달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는 뜻으로 쓰인듯하다.
[주02] 은 …… 꽂았으니 : 3품 벼슬에 올랐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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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雲圃李公 達 墓碣銘 竝序
公姓李諱達字明叔。系出咸安。十世祖曰侍中諱弘。九世祖曰檢校護軍諱滋秀。八世祖曰成均直講諱云吉。七世祖曰贈司僕寺正行大邱懸令諱騭。六世祖曰成均生員贈戶曹參判諱元老。五世祖曰贈兵曹參判行鎭海縣監諱美。高祖諱義亨。司憲府執義號杏軒。公自晉州移居固城。遂爲縣人。曾祖諱詡生員。祖諱千齡參奉。考諱世廉。俱隱德。妣完山崔氏諱云傑之女也。以嘉靖辛酉四月初八日。生公于馬岩里第。萬曆四十六年戊午五月十四日終于家。享年五十八。十二月十七日。葬于固城葡島上子坐之原。公幼時受小學于退溪李先生之門。及先生歿。受敎于伯兄處士達。通四書一經。兼業武藝。壬辰之亂。公時遭外艱。賊掘父塚。遂以匹馬尺劍。直入賊陣。斬三倭而懸於墓樹。告祭移窆。卽與表從叔崔公堈。倡起義兵。討賊立功。參原從二等勳。超授訓鍊院正。自朝家勸武賜第。卽陞貂階。甲辰除梁山郡守。兵燹之餘。公私蕩殘。公盡心存撫。郡人懷之。立石頌功。其碑有淸德善政四字。丙午例受僉知。丁未除咸鏡南道兵馬虞侯。未及期遞歸。甲寅特除宣傳。而行到板橋。聞廢朝議殺永昌之變。佯自墮馬。托以折臂。作詩一絶而歸。是年秋除三道統制虞侯不起。乙卯陞同樞。公之才局。足當方面之寄。而位止三品。識者惜之。公氣度寬弘。沈重寡言。平生所爲。惟務實事。不爲浮華。公之伯兄達有儒行。性亦峻潔。公事之如嚴父。每進謁。雖位高之後。敬禮不衰。望見容顏。有些不平氣色。則不敢進。必待其和平舒泰然後入見。平生兄弟間。無一事失好云。公初娶漆原諸氏。高麗中郞將文儒之後。贈漢城庶尹諱洛之女也。生一男一女。男曰鴻程。顯信校尉。女適軍資監奉事趙勉道。校尉娶居昌愼氏。同知寔之女也。生三男二女。男曰孟榮,仲榮,季榮。女適金八休,李瓊。趙勉道生六男一女。男曰咸勝,咸抃,咸蕃,咸匡,咸岐,咸卨。女適李元英。後娶密陽朴氏。贈判書旿之女也。生一男鴻卿。承議郞。娶江陽李氏。同知瑚之女也。生一男三女。男曰泰榮。女適趙沺,盧漢舟。次幼。公之沒後三十有六年癸巳五月二十日。朴氏歿于檜山別墅。祔窆于公之墓下。嗚乎。公當板蕩之世。能辦忠孝義三大節。眞可謂大丈夫哉。其外孫趙咸抃。記其所聞見於平昔者。因求碣銘。余惟公之後夫人朴氏。於我爲再從親。咸抃又繼吾後。俱有分義。吾亦嘗受知於公。欽仰者久矣。其敢辭乎。銘曰。
天畀公才。干城偉器。仡仡長身。弓馬能技。早業詩書。文武兼備。事兄猶父。家行之懿。突陣殱酋。先壟雪恥。討賊立功。
扶邦正誼。晩登虎榜。旋躡貂班。銀腰王頂。榮動門闌。分憂各郡。遺愛有石。佐貳湖嶺。蔚乎聲蹟。庶幾專閫。大纛高牙。
位不滿德。命也柰何。葡島之原。寔公遺宅。有欲求之。視此鐫刻。<끝>
澗松先生續集卷之四 / 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