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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난고 제9권 상, 하 – 세가 1편 외
세가(世家) 1편
1유원(有元) 증돈신명의보절정량제미익순공신(贈敦信明義保節貞亮濟美翊順功臣) 태사개부의동삼사상서우승상상주국충헌왕(太師開府儀同三司尙書右丞相上柱國忠憲王) 세가(世家)
유원(有元) 증돈신명의보절정량제미익순공신(贈敦信明義保節貞亮濟美翊順功臣) 태사개부의동삼사상서우승상상주국충헌왕(太師開府儀同三司尙書右丞相上柱國忠憲王) 세가(世家)
삼가 본국의 세대(世代)의 편년(編年)을 상고해보니 태조(太祖)의 성(姓)은 왕씨(王氏), 휘(諱)는 건(建), 자(字)는 약천(若天)이다.
고(考)는 금성태수(金城太守)인 휘 융(隆)이며, 비(妣)는 한씨(韓氏)이다.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4년(877) 1월 병술일에 송악(松嶽) 남쪽 집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세상을 구원할 만한 크고 깊은 도량을 간직하였다. 당 나라 소종(昭宗) 건녕(乾寧) 3년(896) 20세 때에 비로소 태봉왕(泰封王) 궁예(弓裔)에게 벼슬하여, 태봉의 서울인 철원(鐵原)의 태수(太守)가 되어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우고, 수군장군 파진찬 시중(水軍將軍波珍飡侍中)으로 옮겨져서 벼슬이 백료(百僚)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궁예는 포학을 제멋대로 하며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자, 양(梁) 나라 정명(貞明 말제(末帝)의 연호) 4년(918) 3월에 기장(騎將) 배현경(裵玄慶)ㆍ홍유(洪儒)ㆍ복지겸(卜智謙)ㆍ신숭겸(申崇謙) 등 네 사람이 왕의 사제(私第)에 나아가서 모의하기를,
“이제 궁예왕이 무도하여 그의 악(惡)이 하(夏) 나라 걸(桀)과 상(商) 나라 주(紂)보다도 더하니, 우리 무리가 여기에 모인 까닭은 공으로 하여금 백성을 구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니, 왕이 낯빛을 변하며 굳이 거절하자 모든 장수들이 이르기를,
“하느님이 주는데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죄를 받는 법입니다.
이제 덕망이 공보다 뛰어난 이가 없는데, 어찌하여 천명을 어기고 독부(獨夫)의 수중에 제약을 받으려 합니까?”
하였다.
부인 유씨(柳氏)가 장중(帳中)에 있다가 나와서 이르기를,
“정의의 군사를 일으켜 포학을 갈아치우는 것은 예로부터 많이 있는 일입니다.
이제 모든 장수들의 말을 들으니, 첩도 저절로 분발되는데 하물며 대장부이겠습니까?”
하고, 손수 갑옷을 끌어 왕에게 입히자 모든 장수들이 호위하고 나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앞서게 하고 호령하여 이르기를,
“왕공이 이미 의병을 일으켰다.”
하니, 나라 사람들이 먼저 궁문(宮門)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어대며 기다리는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그 사실을 듣고 미복(微服) 차림을 하고 암곡(巖谷)으로 도망치다가 부양(斧壤) 백성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이날 왕은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고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2년에 송악군(松嶽郡)에 도읍을 정하였다.
18년에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가 왕에게 입근(入覲)하기를 청하자 그의 나라 신하와 서민들이 모두 따랐는데, 수레와 말이 30여 리를 연하여 뻗쳤었다. 19년 1월에 백제왕(百濟王) 견훤(甄萱)이 그의 아들 신검(神劍)에 의해 금산불사(金山佛寺)에 구금되었다가, 금성(錦城)으로 도망하여 왕에게 입조(入朝)하기를 청하였다.
견훤이 이르자 후한 예로 대접하고, 왕이 삼군(三軍)을 친히 거느리고 숭선성(崇善城)에서 신검과 싸워 신검을 베었다. 왕은 말 고삐를 늦추고 서서히 가서 백제의 왕도(王都)에 이르러 백성들을 위무(慰撫)하며 이르기를,
“원흉(元凶)이 이미 멸망되었으니 백성들이 무슨 죄랴.”
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9월에 송도로 돌아와서 백관의 조하를 받았다. 친히 《정계(政誡)》 1권을 지어 백료를 경계하였고, 시(詩) 8편과 신서십조(信書十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지어 후사(後嗣)에게 경계를 내리고, 길이 귀감(龜鑑)으로 삼게 하였다. 22년에 진(晉) 나라 황제가 국자박사(國子博士) 사반(謝攀) 등을 보내어,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 현도주대도독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玄菟州大都督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26년 5월 20일(정유)에 훙하니, 아들 혜왕(惠王)이 즉위하였다.
혜왕의 휘는 무(武), 자는 승건(承乾)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체력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났다. 항상 태조를 따라 사방을 정벌할 적에 친히 무기를 손에 잡고 앞에서 인도하기도 하고 뒤에서 호위하기도 하여 사졸로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였다.
백제와의 전쟁 때는 용맹을 떨치고 먼저 성에 올라 적군을 크게 부수기도 하였다. 진(晉) 나라 천복(天福 출제(出帝)의 연호) 8년 5월에 유명(遺命)을 받들어 즉위하였다가 3년(945) 9월 15일(무신)에 훙하니, 아우 정왕(定王)이 즉위하였다.
정왕의 휘는 요(堯), 자는 의천(義天)이다. 4년 3월 13일(병진)에 훙하니 아우 광왕(光王)이 즉위하였다. 광왕의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이다. 광왕은 즉위한 처음에 아랫사람을 예로 접대하고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고 유학자를 존중하였으며, 자나깨나 오직 공경하여 형벌과 정사를 남발(濫發)하지 않았다.
6년에는 백관으로 하여금 의관의 제도를 중국의 것에 따르도록 하였다. 9년 5월 16일(병신)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쌍기(雙冀)에게 명하여 공거시(貢擧試)를 맡아보게 하고 갑과진사(甲科進士) 최섬(崔暹) 등을 뽑았으니, 과거(科擧)의 제도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26년 5월 23일(갑오)에 훙하니 아들 경왕(景王)이 즉위하였다.
경왕의 휘는 주(伷), 자는 장민(長民)이다. 온화하고 선량하고 어질고 후덕하며,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미 즉위하여서는 전조(前朝)에서 받았던 참소(讒訴)한 글들을 모두 모아서 불사르니, 중외(中外)가 크게 기뻐하였다. 6년 7월 11일(병오)에 훙하니 성왕(成王)이 즉위하였다.
성왕의 휘는 치(治), 자는 온고(溫古)니 태조의 손자다. 송(宋) 나라 태평흥국(太平興國 태종(太宗)의 연호) 6년(981) 7월에 경왕이 병으로 누워 왕을 침소로 불러들여 손을 잡고 국사를 부탁하였고 경왕이 훙하자 왕이 즉위하였다.
9년 6월에 왕은 언책(言責)의 직에 있는 자로 하여금 국가의 일이 도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기필코 고집(固執)하여 확론(確論)하게 하고, 5품 이상의 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각각 당시 정치의 득실과 민간의 이해를 말하게 하였다. 11년 5월에 5품 이상의 관직자에게 명하여, 각각 현량(賢良)한 자를 천거하되 천거된 사람의 덕행과 재주 및 학술을 그의 이름 밑에 쓰도록 하였다. 16년 12월 27일에 훙하니, 목왕(穆王)이 즉위하였다.
목왕의 휘는 송(誦), 자는 효신(孝伸)이니 경왕의 큰아들이다. 성왕이 자기의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거란(契丹) 통화(統和 성종(聖宗)의 연호) 15년 10월에 성왕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12년 2월에 강조(康兆)가 모반하였다. 3월 13일에 왕이 훙하니 현왕(顯王)이 즉위하였다.
현왕의 휘는 순(詢), 자는 안세(安世)이니, 태조의 손자다. 목왕이 아들이 없이 병들어 누워서 황보유의(皇甫愈義)를 보내어 왕을 맞아 세웠다. 왕은 전대의 궁녀(宮女) 백 명을 놓아 보내고 교방(敎坊)을 파하며 지원(池苑)을 무너뜨리고 금수(禽獸)를 놓아주었다.
1년(1010) 12월에 거란 임금이 강조를 토벌, 잡아가지고 돌아가서 그를 베었다. 23년 5월 25일(신미)에 훙하니 아들 덕왕(德王)이 즉위하였다. 덕왕의 휘는 흠(欽), 자는 원량(元良)이다. 3년(1034) 9월 17일(계묘)에 훙하니 아우 정왕(靖王)이 즉위하였다.
정왕의 휘는 형(亨), 자는 신조(申照)이다. 12년 5월 18일(정유)에 훙하니 아우 문왕(文王)이 즉위하였다.
문왕의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다. 15년 3월에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의 존호)의 묘(廟)에 참배하였다. 22년 9월 15일(갑신)에 중서령(中書令) 최충(崔冲)이 졸하니,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최충이 문하의 생도를 가르치기 위해 나누어 구재(九齋)를 만들었으니, 그 이름은 낙성(樂聖)ㆍ대중(大中)ㆍ성명(誠明)ㆍ경업(敬業)ㆍ조도(造道)ㆍ솔성(率性)ㆍ진덕(進德)ㆍ대화(大和)ㆍ대빙(待聘)이다. 공경들의 적자와 서자로부터 아래로 주현(州縣)의 거자(擧子)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이름을 적중(籍中)에 붙여서 성인의 도덕을 익히게 하였으니 문물(文物)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성하였다.
37년 7월 정유(丁酉)일에 훙하니 아들 순왕(順王)이 즉위하였다.
순왕의 휘는 훈(勳), 자는 의공(義恭)이다. 상중에 너무 슬퍼하여 병이 나서 12월 23일에 훙하니 아우 선왕(宣王)이 즉위하였다.
선왕의 휘는 운(運), 자는 계천(繼天)이다. 11년 5월 2일(임인)에 훙하니 아들 헌왕(獻王)이 즉위하였다.
헌왕의 휘는 욱(昱)이다. 2년(1095) 8월에 병으로 숙부 계림공(鷄林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다음 해 2월 갑진(甲辰)에 훙하니 숙왕(肅王)이 즉위하였다.
숙왕의 휘는 옹(顒), 자는 천상(天常)이니 문왕의 셋째 아들이다. 어려서는 총명하였고 장성하여서는 부모를 잘 섬겼으며 경서와 사기에 널리 통하였고 근검하며 과단성이 있었다.
문왕이 총애하여 항상 이르기를,
“뒤에 종국(宗國)을 다시 일으킬 자는 바로 너일 것이다.”
하고, 처음에는 계림공으로 봉하였다.
요(遼) 나라 수창(壽昌 도종(道宗)의 연호) 1년(1095) 10월 경오(庚午)일에 헌왕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11년 10월 8일(병인)에 훙하니 아들 예왕(睿王)이 즉위하였다.
예왕의 휘는 우(俁), 자는 세민(世民)이다. 3년 7월에 왕이 친히 문묘에 석전(釋奠)을 하였다. 4년 7월에 비로소 국학(國學)의 시험제도를 만들어 태학(太學) 최민용(崔敏庸) 등 70인과 무학(武學) 한자순(韓子純) 등 8인을 시험 보여 뽑고 칠재(七齋)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으니, 《주역(周易)》을 가르치는 곳은 이택재(麗澤齋), 《상서(尙書)》는 대빙재(待聘齋), 《모시(毛詩)》는 경덕재(經德齋), 《주례(周禮)》는 구인재(求仁齋), 《대례(戴禮)》는 복응재(服膺齋), 《춘추(春秋)》는 양정재(養正齋), 무학(武學)은 강예제(講藝齋)라 일렀다.
16년 6월에 크게 가물자 청연각(淸讌閣)을 열고 기거사인(起居舍人) 임존(林存)을 명하여 《모시》 운한(雲漢) 장을 강하게 하고 박승충(朴承冲)을 명하여 《상서》 홍범(洪範) 편을 강하게 하여 비를 얻었다. 17년 4월 6일(갑오)에 훙하니 아들 인왕(仁王)이 즉위하였다.
인왕의 휘는 해(楷), 자는 인표(仁表)이다.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럽고 너그럽고 인자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재예(才藝)가 많았으며 사부(師傅)를 존경하고 신료(臣僚)들을 예우하였으므로, 예왕 및 왕후(王后)가 지극히 사랑하였다.
4년에 국구(國舅) 이자겸(李資謙)이 평장사(平章事) 탁준경(卓俊卿 척준경(拓俊京)을 말한다)과 난을 일으키자 지다방사(知茶房事) 최사전(崔思全)과 병부 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이 의리로써 탁준경을 타일렀는데, 뒤에 탁준경이 깨닫고 왕을 어깨에 메고서 칼을 짚고 한 차례 호령을 하니 이자겸의 도당들이 와해(瓦解)되어 버렸다.
왕이 광화문루(廣化門樓)에 오르니 군민(軍民)들이 바라보며 환호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11년 5월에 황충(蝗蟲)이 송엽(松葉)을 먹자 왕이 여러 신하에게 교유하여 이르기를,
“《경방역(京房易 한 나라때 경방이란 사람이 지은 책)》에 이르기를 ‘녹(祿)을 먹고도 성화(聖化)에 도움이 없으면, 하늘이 사람에게 아무런 이익 없이 만물을 갉아먹는 벌레로써 경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밝지 못한 까닭으로 부적격한 자를 썼으니, 진실로 좋은 말을 들으면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공명 정직하며 절의(節義)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의 사실을 갖추어 이름을 아뢸지어다. 그러면 내가 장차 승진을 시켜 권장할 것이다. 이(利)를 탐하고 포학하고 잔인하여 인도에 벗어나는 자는 친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그의 죄를 아뢸지어다. 내가 장차 내쫓아서 경계하리라.”
하였다. 이 달부터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자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나아가서 태조의 진영(眞影)에 비를 빌어 3일 간의 큰 비를 얻었다. 24년 2월 28일(정묘)에 훙하니 아들 의왕(毅王)이 즉위하였다.
의왕의 휘는 현(晛), 자는 일신(日新)이다. 24년 8월에 정중부(鄭仲夫)가 모반하여 여러 무신들과 더불어 조신(朝臣)을 섬멸(殲滅)하였다. 왕은 거제(巨濟)에서 손위(遜位)하고 아우 명왕(明王)이 즉위하였다.
명왕의 휘는 호(晧), 자는 지단(之旦)이다. 3년(1173)에 태복경(太僕卿) 김보당(金甫堂)과 전주목사(全州牧使) 배순우(裵純祐) 등이 군사를 일으켜 전왕(前王)을 맞으려 꾀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정중부가 이의민(李義旼)을 보내어 전왕의 안부를 물었다.
10월 1일에 전왕이 훙하였다. 9년에 대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 및 그의 당여(黨與)들을 베었다. 전조의 역신(逆臣)이 모두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았으나 오직 이의민은 도망하여 면하였다. 27년에 왕위를 아우 낙랑공(樂浪公)에게 물려주고 신왕(神王) 5년(1202) 11월에 훙하였다.
신왕이 즉위하니, 신왕의 휘는 탁(晫)이다. 7년 1월 13일(정축)에 훙하고 아들 희왕(熙王)이 즉위하였다.
희왕의 휘는 영(韺), 자는 불파(不坡)이다. 세자로 있을 적에는 항상 경연(經筵)을 열고 요우(寮友)와 더불어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4년 10월 9일(을해)에 국로(國老)ㆍ서로(庶老)ㆍ효자(孝子)ㆍ순손(順孫)ㆍ의부(義夫)ㆍ절부(節婦) 및 의지할 곳 없어 외로운 사람들과 불구자나 중병에 걸린 사람들을 모아 향연(饗宴)하고 물품을 주되 각각 차등이 있게 하였다. 7년 12월에 낭중(郞中) 왕준명(王濬明)이 최충헌(崔忠獻)을 베려고 꾀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 달에 왕이 손위하고 교동(喬桐)으로 나갔는데 고왕(高王) 25년 8월 무자(戊子)일에 이르러 훙하였다.
강왕(康王)이 즉위하니, 강왕의 휘는 오(祦), 자는 법주(法柱)이니 명왕의 원자(元子)이다. 2년 8월 9일에 훙하니 아들 고왕(高王)이 즉위하였다. 고왕의 휘는 철(㬚), 자는 대명(大明)이니 이가 바로 충헌황(忠憲王)이다. 금 나라 명창『明昌: 장종(章宗)의 연호』 3년 1월 18일에 태어났고 숭경(崇慶) 1년 7월 23일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원복(元服 관례(冠禮)를 할 때에 쓰는 관)을 가하였다. 왕은 천품이 인자하고 신중하고 후덕하였으며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일찍이 명유(名儒) 유승단(兪升旦)에게 사사하여 경사(經史)에 힘썼다.
처음에 진강후(晉康侯) 최충헌(崔忠獻)이 명왕(明王) 때부터 무릇 24년간이나 국사를 전횡(專橫)하였으며, 그의 아들 진양공(晉陽公) 이(怡)가 정권을 계승한 것이 32년이며, 그 아들 진평공(晉平公) 항(沆)과 항의 아들 의(誼)가 서로 차례로 계승하여, 임금을 폐하고 세우는 일과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한 지가 4대(代)에 걸쳐 60년간이다.
그러나 왕은 근신하여 법을 지키고 진퇴(進退)를 예법으로 하였던 까닭에 권신(權臣)들이 비록 제멋대로 날뛰었으나 감히 왕을 능멸하지 못하였다. 1년(1214)에 대몽고 태조(大蒙古太祖) 성길사 황제(成吉思皇帝)가 군대를 일으켜 금 나라를 공격하여 금 나라가 크게 패하였다.
2년에 연(燕) 땅 사람들이 그 지방에 유수(留守)하고 있는 원 나라 군사들에게 술을 먹이고 취하게 한 뒤에 죽였다. 요(遼)의 유종(遺種)인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 등이 틈을 타서 일어나 대요(大遼)라 자칭하고 국왕을 수감하고는 아아걸노(鵝兒乞奴)를 원수(元帥)로 삼고, 중원의 인민들을 약탈하여 원 나라의 군사를 막기 위해 토지와 군사를 우리에게 요청하자 우리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래서 거란의 군대가 드디어 우리 지경으로 쳐들어와서 강동성(江東城)을 점령하자 왕이 좌복야 보문각 학사(左僕射寶文閣學士) 조충(趙冲), 상장군(上將軍) 김취려(金就礪)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게 하였다. 5년 12월에 성길사 황제가 원수 합진(哈眞), 부원수 찰라(扎剌)를 보내어 몽고국 행상서성(蒙古國行尙書省)이라 칭하고 동진국(東眞國)의 대장 완안자연(完顔子淵)과 함께 금산왕자 등을 정토하였다.
이때 날씨가 몹시 추웠고 큰 눈이 내려 군량이 이르지 않으므로 거란의 군사들은 요험처에 웅거하여 성벽을 굳히고 그들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 합진이 사자 12명을 보내어 우리 덕주 진사(德州進士) 임경화(任慶和)와 함께 와서 우리에게 글을 전하였는데, 대략 우리와 함께 거란을 멸하고 형제의 나라를 맺겠다는 내용이었다.
왕은 조충ㆍ김취려 등에게 조칙하여 군사를 출동하고 양곡을 운반하여 힘을 합해서 적을 부수라고 하였다. 김취려가 군중에 이르니 합진 등이 통사(通事) 조중상(趙仲祥)에게 말을 전하기를,
“만약 우리와 화친하려면 마땅히 먼저 몽고황제에게 멀리서 배례(拜禮)한 다음 만노황제(萬奴皇帝)에게도 예를 하여야 한다.”
하니, 김취려가 이르기를,
“하늘에는 두 해가 없는 것이요 백성에게도 두 임금이 없는 것인데, 천하에 어찌 두 임금이 있겠느냐?”
하고 드디어 몽고황제에게는 배례를 하고 만노에게는 배례를 하지 않자, 합진 등이 매우 기특히 여겼다.
또 그들은 김취려의 헌걸찬 용모를 보고 드디어 같이 앉아 술을 마시며 적을 쳐부술 꾀를 의논하였다. 합진이 이르기를,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형제가 되었으니 어찌 적 부수기를 걱정하랴?”
하였다.
다음날 조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니 합진이 그와 합세하므로 군세가 크게 떨쳤다. 성루(城壘)를 포위하고 사면에서 공격을 하니 적은 빠져나갈 계책이 없어 나와서 항복하고 왕자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그의 위승상(僞丞相)과 평장사 이하 1백여 인을 모두 베었다.
이에 합진 등이 조충ㆍ김취려와 함께 해를 가리키며 맹세하기를,
“만세의 자손들에게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게 하자.”
하고, 그 포로들을 나누어 약신(約信)을 삼았다.
우리는 그 포로들을 군현(郡縣)에 살게 하였으니, 이제 곳곳에 있는 거란장(契丹場)이라는 옛터가 바로 이것이다. 8년에 왕의 조카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을 보내어 문벌 있는 자제 15인을 거느리고 들어가서 독로화(禿魯花)가 되었다. 49년 3월에 왕이 친히 조회를 하려다가 병으로 하지 못하고 세자를 보내어 입시(入侍)케 하였다.
6월 그믐날 훙하니 수는 68세요, 재위 기간은 47년이었다. 유서(遺書)에 이르기를,
“여러 신료(臣僚)에게 하교하노라. 내가 덕은 박한데다 책임은 중하였고 질병이 위중하였다.
그러나 왕위는 비울 수 없는 것이요, 하물며 나의 원자(元子)는 덕이 많다고 위에 알려졌으므로 이에 왕위를 명하니, 무릇 너희 관사(官司)들은 각각 너희들의 일을 집행하고 사왕(嗣王)의 명령을 잘 따를지어다.
사왕이 원 나라에 입조하여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 사이의 군국 서정(軍國庶政)을 태손(太孫)에게서 듣고, 장사하는 제도는 검소한 덕을 힘써 따르며, 달을 바꾸는 복[易月之服 날 수를 달 수로 쳐서 상복을 일찍 벗는 것]으로 중국의 상제(喪制)를 따라서 3일 만에 제복(除服)하여, 죽은 이 때문에 산 사람이 손상되지 않게 할지어다.”
하였다.
무종황제(武宗皇帝)가 조서를 내려 봉증(封贈)을 추가하였으니 그 제문(制文)은 이러하다.
“옛날 우리 태조황제가 막북(漠北)에서 분연히 일어나시어 동쪽으로 정토하고 서쪽으로 깃발을 날리며 기전(畿甸)을 남복(南服)에 나누어 덕을 밝히고 위엄을 보이니, 향하는 곳마다 신첩(臣妾)이 되었으나 오직 그 때에 삼한(三韓)만이 국경을 서로 연하였다.
천과(天戈 천자의 군대)가 한 차례 다다르자 고 고려국왕(故高麗國王) 왕철(王㬚)이 기회와 시운을 깊이 살피어 나라를 가지고 복종하였다. 사세의 기회가 닥칠 때는 털끝만큼도 시간의 여유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니, 스스로 뜻 가짐이 단아(端雅)하고 정성스러우며 밝게 알고 멀리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능히 이와 같이 하였으랴?
또 마침 요민(遼民)의 족속들이 우리 도서(島嶼)를 참람히 절취하고 방자하게 병란을 일으켜서 날뛰고 있으므로, 거듭 번거롭게 장수를 명하여 토벌하였다. 그 때에 얼음이 얼어붙고 눈이 내려 몹시 차가워서 군사들의 궤향(饋餉)이 불통하였는데, 왕철이 이에 관대하게 접대하고 군중의 여러 물품을 조달 공급하여 군사들이 모두 편히 자고 배부르게 먹도록 하였으며, 군사를 일으킴에 여러 기장(器仗)을 도와 없는 것이 없게 하였고, 또 군사를 더 징발하여 남은 도적을 섬멸하게 하였으니, 국가의 기초를 만들고 왕실에 공훈을 세우고 인민을 안보하고 나라를 일으킨 그의 공로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토를 지켜 향유(享有)한 기간이 자못 사기(四紀 1기는 12년)나 되어 혜택이 후손에 미쳤으며, 끼친 복이 멀고멀어 아들과 손자에게까지 길이 전하였고, 우리나라와 척의(戚誼)를 맺었으니 위대하지 않은가? 이에 상작(上爵)을 추숭하고 가명(嘉名)을 주노니 영혼이 아는 바 있으면 특별한 대우를 흠향할지어다.
돈신명의 보절정량 제미익순공신 개부의동삼사상서우승상 상주국 고려국왕 시충헌(敦信明義保節貞亮濟美翊順功臣開府儀同三司尙書右丞相上柱國高麗國王諡忠憲)을 추증하노라.”
세자가 원 나라에 입조할 적에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세재(李世材), 추밀원사(樞密院事) 김보정(金寶鼎), 차장군(借將軍) 김승준(金承俊), 행수(行首) 김대재(金大才), 소경(少卿) 이응(李凝), 알자(謁子) 오헌(吳軒)ㆍ이걸(李傑), 사인(舍人) 정 균(鄭均), 녹사(錄事) 이승연(李承衍)ㆍ이군백(李君伯) 등 40인이 따랐다.
원 나라 서울에 이르니 헌종황제(憲宗皇帝)가 남쪽으로 정벌을 하기 위하여 조어산(釣魚山)에 주필(駐蹕)하였다 하기에 서울을 떠나 장차 행재소(行在所)로 나아가려 하는데, 길이 경조(京兆)의 동관(潼關)으로 돌게 되었다. 그곳을 지키는 자가 화청궁(華淸宮)으로 세자를 연접하여 이르게 하고는 온천(溫泉)에서 목욕하기를 청하자 사양하며 이르기를,
“이곳은 당 명황(唐明皇)이 일찍이 목욕을 하던 곳이다.
비록 다른 세대의 신하라 할지라도 어찌 감히 설만(褻慢)하랴?”
하니 듣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세자가 육반산(六槃山)에 이르렀는데 헌종이 붕어하였다.
아리발가(阿里孛哥)가 병정으로 삭야(朔野)를 막았으므로 제후들이 걱정하고 의심하여 따를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때에 세조황제가 강남(江南)에서 군사를 사열하였으므로 세자가 드디어 남쪽으로 행차하여 어렵게 양(梁)ㆍ초(楚)의 교외(郊外)에 이르렀는데, 세조가 마침 양양(襄陽)에서 군사를 돌려 북쪽으로 올라왔다.
세자가 폐백(幣帛)을 받들고 길에서 배알(拜謁)했는데 검은 비단으로 만든 뿔이 있는 연한 복두(幞頭)와 소매가 넓은 자라포(紫羅袍), 서정(犀鞓 물소의 가죽으로 만든 띠), 상홀(象笏)의 차림으로 미목(眉目)이 그림과 같으며 주선(周旋)함이 법받음직하고, 여러 관료들이 각각 벼슬 품계에 따라 차려 입은 제복(制服)으로 세자의 뒤에 줄을 지어 배열하니, 세조가 놀라며 기뻐하여 이르기를,
“고려는 만리나 되는 먼 나라이며 당 태종(唐太宗)이 친히 정벌을 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는데, 이제 그 세자가 스스로 우리에게 돌아오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하며 크게 포상을 더하고 세자와 함께 개평부(開平府)에 이르렀다.
본국에서 고왕(高王)이 훙함을 고하자 이에 세조가 달로화적(達魯花赤) 홀백반(忽伯反)에게 명하여 세자의 행차를 옹호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중통(中統) 1년(1260) 4월 21일에 왕위에 오르니 이가 원왕(元王)이다. 어머니는 안혜왕후(安惠王后) 유씨(柳氏)이니 금 선종(金宣宗) 흥정(興定) 3년(기묘) 3월 19일에 낳았고 을미년 1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의 휘는 식(禃), 자는 일신(日新)이다. 중통 5년 5월에 천자가 필도적(必闍赤)ㆍ홀올독(忽兀禿)을 보내왔는데, 그 조서에 이르기를,
“금년에 왕공(王公)과 여러 목민관(牧民官)들이 모두 서울에 모이게 되었으니, 왕은 역마(驛馬)를 타고 조회하라.”
하였다.
8월에 왕이 친히 조회할 적에 따르는 자가 평장사(平章事) 이장용(李藏用)ㆍ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채정(蔡禎) 등 50인이었다. 천자가 왕을 대우함이 다른 제후왕들은 감히 따를 수 없을 만큼 융숭하였다. 기미년(己未年)부터 우리나라의 백성으로 노략(虜掠)을 당한 자나 죄를 짓고 도망하여 중국으로 들어간 자는 우리나라에 돌려보냈다.
처음에 권신 최의(崔誼)가 죽으니, 고왕이 대장군 박희실(朴希實)ㆍ장군 조문주(趙文冑)를 원 나라에 보내어 고(告)하기를,
“본국의 군신(群臣)들이 사대(事大)의 정성을 다하지 못하였던 것은 다만 권신이 정사를 전천(專擅)하여 귀국에 종속(從屬)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때문이었으나, 이제는 최의가 죽었으니 곧 물에서 나와 육지로 나아가서 귀국의 명을 듣겠습니다.
그런데 귀국의 군인들이 우리나라 국경을 제압하기를 비교하자면 마치 굴에 들어있는 쥐를 고양이가 밖에서 지키고 있어 감히 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하였다. 헌종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명하여 병정을 파하고 두 사람에게 금부(金符)를 주어 본국으로 보냈다.
이때에 미쳐 추밀부사(樞密副使) 임연(林衍)이 해양공(海陽公) 김인준(金仁俊) 및 그의 당여들을 죽이고 국정을 전횡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죄가 많으므로 반드시 원 나라로부터 토벌당할 줄을 알고 흉모(凶謀)가 더욱 심하여졌다. 10년 6월 20일에 왕의 모제(母弟)인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제멋대로 세워 왕으로 삼았다.
왕은 서궁(西宮)에 나가서 거처하자 조야(朝野)에서 상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세자 심(諶)이 원 나라에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오는 도중 파사부(婆娑府)에 이르러 왕을 폐하고 다른 왕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원 나라에 들어가서 이 사실을 아뢰니 세종황제가 알타아불화(斡朶兒不花)ㆍ이악(李鶚) 등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기를,
“고려국의 문무신료들에게 고유하노라.
세자가 와서 주달하는 말에 의거하면 ‘본조의 신하가 제멋대로 국왕을 폐하고 그의 아우인 안경공 창으로 왕을 삼았다.’ 하니 짐이 처음 듣고는 생각하기를, 사실인지를 증거할 수 없어 깊이 믿을 수 없다고 하였노라. 국왕이 사위(嗣位)한 이래로 과실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설사 참으로 과실이 있었다 할지라도 간하여 개전(改悛)치 않으면 마땅히 조정에 아뢰어 짐의 처분을 따라야 할 것이어늘, 조정에 아뢰지도 않고 신하가 제멋대로 폐립(廢立)하였으니 예부터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는가?
이제 사신 알타아불화ㆍ이악 등을 보내어 먼저 가서 자상히 그 사실을 묻게 하노니, 만약 전해 들은 바가 그릇되어 왕의 몸에 해가 없다고 하면 너희에게 그 무엇을 꾸짖겠는가마는, 만약 과연 그러하여 감히 국왕 및 세자와 그의 족속을 아울러 한 사람이라도 장해(戕害)한 일이 있다고 하면 짐은 반드시 그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짐의 마음을 분명히 알고 신하의 절개를 깊이 생각하여 마땅히 조목을 갖추어 아뢸지어다.”하고, 이어 흑적(黑的)ㆍ서중웅(徐仲雄) 등을 보내어 와서 왕에게 명하여 왕위를 회복하고 친히 조회하게 하였다.
임연은 걱정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등창이 나서 죽었다. 그의 아들 장군 임유무(林惟茂)는 왕이 두연가국왕(頭輦哥國王)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말을 듣고 이에 주군(州郡)에 첩문(牒文)을 보내고 군사를 이끌고 해도(海島)로 들어가 스스로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왕의 명을 거역하려고 하자, 대장군 송송례(宋松禮)ㆍ중승(中丞) 홍문계(洪文系)가 임유무를 잡아 죽였다.
그런 후에 강화도(江華島)에서 나와 송도(松都)로 도읍을 옮겼다. 임유무의 여당(餘黨)들은 사녀(士女)를 약탈하고 국고를 털어가지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도(珍島)에 웅거하였다가 또 탐라도(耽羅島)로 옮겨 들어가자, 왕이 추밀부사(樞密副使) 김방경(金方慶) 및 원 나라 원수 아해(阿海)를 보내어 모두 토평하였다.
이에 황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요즘 임연의 반역으로 인해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출동케 하여 그대의 나라를 무정(撫定)하게 하였다. 이제는 죄인들이 섬멸되고 경이 옛서울에 전거(奠居)하여 무사하게 되었으나, 내가 생각하건대 이 변고로 말미암아 동토(東土)의 사람들이 놀라고 요동됨이 없지 않았을 것이니, 이후부터는 경이 백성들을 보전하고 짐의 뜻으로 고유하여 백성에게 각각 생업에 안정하고 혹시라도 시기와 이간을 함부로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할지어다.”하였다.
15년 6월 19일에 훙하니 수는 56세요 재위 기간은 15년이었다. 무종황제가 봉증(封贈)을 추가하였다. 그 제문(制文)은 이러하다.
“생각건대,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하늘이 용맹과 지혜를 주시어 만방을 바루셨고, 이에 그대의 국가를 돌보아 대대로 충정(忠貞)을 돈독히 하여 치적(治績)이 있었도다. 대개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며, 덕이 두터운 자는 내려올수록 그 후세의 혜택이 빛나는 것이다.
고려국왕 왕식은 훈계를 공경하여 의방(義方)에 지향하였고, 몸을 닦아 도(道)에 따라 길하였다. 유아(儒雅)에 패복(佩服)하고 재유(才猷)에 분려(奮勵)하였도다. 처음에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진귀(珍貴)한 공물(貢物)로 조회왔도다. 그 기회에 환숙(桓肅)이 서쪽으로 천요(川徼)에 순수(巡狩)하였고, 세황(世皇 원 세조(元世祖))은 남쪽으로 강유(江瓀)를 순무(巡撫)하였도다.
행리(行李 행장(行裝), 전(轉)하여 사절(使節)의 통(通)함을 기대하였으니, 세월이 바뀌는 것을 어찌 걱정하였으랴. 길이 막혔으니 내란(內亂)으로 집 걱정을 만났고, 호령이 선포되니 환납(還納)이 주접(晝接)에 응(膺)하였도다. 중통(中統 원 나라 세조의 연호)의 풍운(風雲)이 곧 열리자 삼한(三韓)의 강토에 거듭 다다랐도다.
종용(從容)하게 사기(事機)에 맞추었고 급한 때라도 예법(禮法)을 잊지 않았도다. 밝은 조정에 폐백(幣帛)을 먼저 보내어 선량한 큰아들이 왔도다. 이강(釐降 공주를 신하에게 시집 보냄)하여 친의를 펴니 우악(優渥)한 은덕(恩德)을 보이는 것이 타성(他姓)보다 특수하였고, 복근(服勤)하여 임금을 높였으니 정성을 바치는 것이 중성(衆星)이 중천(中天)을 향하는 듯하였도다.
손순하지 않은 자를 정벌하매 여러 차례 선봉이 되었고, 임금에게 조회 받들기를 삼가하여 떳떳한 기한을 잃지 않았도다. 황제의 딸을 손자가 계승하여 짝을 지었으니 국가에서 큰 보좌(輔佐)가 되었도다. 일도 하고 뜻도 지키어 감제(勘濟)의 공을 세웠고, 좋을 말을 많이하여 필해(弼諧)의 소망에 맞았도다.
어찌 옛 어진 사람을 정포(旌褒)하여 아름다운 명칭(名稱)을 빛나게 하지 않으랴. 태사(太師)는 오직 나라의 담장이기에 벼슬로 그의 귀함을 모시고, 군자는 나라의 복지(福祉)와 같기에 예제(禮制)로 그의 어진 것을 높이노라. 거의 기왕(旣往)의 훈계를 따랐다 하겠으며, 또한 아름다운 의식을 거행하노니, 아, 이것으로써 갚았다는 말이 아니라 영원히 좋게 지내려 한 것이로다.
은혜는 조서(詔書)에 따라 자주 내리고 오직 덕이 있는지라 복도 그와 같아서 계통(系統)이 압록강(鴨綠江)과 함께 원대하도다. 단성봉화 보경량절 강제좌리공신 태사개부의동삼사 상서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 시 충경(端誠奉化保慶亮節康濟佐理功臣太師開府儀同三司尙書左丞相上柱國高麗國王諡忠敬)을 추증하노라.”
세자의 휘는 심(諶)인데 뒤에 거(昛)로 고쳤다.
어머니는 순경왕후(順敬王后) 김씨(金氏)니, 충헌왕 23년 2월 정묘일에 낳았다. 충경왕이 원 나라에 입조하였다가 돌아오기 전에 충헌왕이 훙하였는데, 군국(軍國)의 정무(政務)를 태손(太孫)에게 들어 처리하라고 유명(遺命)하였다. 중통 1년에 충경왕이 즉위하고, 8월에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국가의 전고(典故)와 조종(祖宗)의 법도에 밝았으며 희로(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아 너그럽고 후덕한 분이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글을 읽고 대의를 알았다. 일찍이 대사성(大司成) 김구(金坵), 국자좨주(國子祭酒) 이송진(李松縉)과 창화(唱和)한 글이 문집으로 세상에 행해졌다. 지원(至元) 6년에 원 나라에 입조하였고, 8년에 또 문벌 있는 자제 20인을 인솔하고 원 나라에 입조하여 독로화(禿魯花)가 되었고, 11년에 홀독겁미사공주(忽篤㤼迷思公主)가 세자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이 해에 충경왕이 훙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고려국왕의 종족 및 대소 관원과 백성들에게 고하노라. 국왕이 생존하던 때에 ‘세자가 쇠퇴한 국운(國運)을 계승할 만하다.’고 여러 차례 말을 하였으므로, 이제 세자에게 국왕을 승습하여 국사를 담당하게 하노라. 무릇 소속(所屬)되어 있는 자들은 모두 세자의 명을 따를지어다.”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8월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이때 난리를 치른 뒤라서 민물(民物)이 피폐하고 궁핍하였으며 공주가 성격이 엄명하고 과단성이 있어 조야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왕이 관유(寬柔)하게 처리함으로써 일에 과실이 없었다. 수년 동안에 국가가 편안해졌고 풍속이 돈후하게 되었다.
본국의 관제(官制)가 원 나라와 같다 하여 중서성(中書省)ㆍ상서성(尙書省)을 고쳐 아울러 첨의부(僉議府)라 하고, 추밀원(樞密院)을 밀직사(密直司), 어사대(御史臺)를 감찰사(監察司), 이부(吏部)ㆍ예부(禮部)를 아울러 전리사(典理司), 형부(刑部)를 전법사(典法司)라 하였으며, 그 밖의 관시(官侍)의 이름도 모두 고쳤다.
시중(侍中)을 중찬(中贊), 평장사(平章事)를 찬성사(贊成事), 참정(參政)을 참리(參理), 금자광록(金紫光祿)을 광정(匡靖), 은청광록(銀靑光祿)을 봉익(奉翊)이라 하였으며, 그 밖의 품계와 벼슬 이름도 고쳤다. 이 해에 왕의 종제(從弟)인 대방공(帶方公) 왕징(王徵)을 보내어 원 나라에 입조하게 하여 독로화(禿魯花)가 되었다.
이에 앞서 황제가 일본국왕에게 서신을 하사하여 입조하라고 하였고, 또 조양필(趙良弼)을 선무사(宣撫使)로 삼아 일본에 보냈으나, 마침내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이 즉위하자 황제가 김방경을 시켜 진도(珍島)ㆍ탐라도(耽羅島)를 정토하게 하였다.
김방경의 방략(方略)과 위신(威信)이 큰 일을 맡길 만하다 하여 황제가 대궐에 불러들여, 전함(戰艦)을 수리하고 원수 홀독(忽篤)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일본을 정토하라고 명하자, 그가 일기도(一岐島)ㆍ대마도(對馬島)ㆍ이만도(伊蠻島) 등을 부수고 군량(軍糧)이 다하여 돌아왔다.
충렬왕 8년(신사)은 곧 지원(至元) 18년이었다. 이 해에 또 대거하여, 흔독(忻篤)ㆍ다구(茶丘)에게는 몽고(蒙古)와 한(漢)의 군대를 거느리고 합포(合浦)를 출발하게 하고, 송(宋) 나라의 망장(亡將)인 범문호(范文虎)에게는 만군(蠻軍)을 거느리고 사명(四明)을 출발하게 하여 일본의 성(城) 아래에 이르러 합전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자 왕이 다시 김방경을 원수로 삼아 고려의 군대를 거느리고 함께 진군하려 하였으나, 범문호가 약속이 늦었고 또 큰 바람을 만나 만군들이 모두 몰사하였으며, 흔독ㆍ다구 등도 사졸을 많이 버리고 겨우 자신만 탈출하여 돌아왔으므로, 김방경 혼자서만 역전하여 패가대(霸家臺)에 이르렀는데, 모든 군사들이 이르지 않자 또한 군사를 인솔하고 돌아왔다.
이에 황제가 왕에게 조서를 내려 정동행성 승상(征東行省丞相)을 삼고 원리(員吏)들을 모두 왕의 천거에 따라 등용하고 평상시에 선출하던 방법에 구애받지 않게 하였다. 14년에 내안(乃顔)이 배반하자 왕이 경내(境內)의 군사를 전부 인솔하고 기일을 정하여 행재(行在)에 친히 달려갔으나, 그곳에 미처 당도하기 전에 내안이 패하였다.
황제가 이르기를,
“왕이 길이 멀어서 일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근왕(勤王)의 정성은 족히 천하를 권장하겠다.”
하고, 곧 왕에게 군대를 파하고 역마를 타고 조회하라고 하였다.
내안의 당 합단(哈丹)이 산졸(散卒)을 수합하여 그 군중을 10만이라 호칭하면서 수달달(水達達)과 여진(女眞)의 땅을 위협하며 노략하고 우리 강계(疆界)로 들어와서 군대를 두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철령(鐵嶺)으로부터 들어오고 한 부대는 죽전(竹田)으로부터 들어와서 곧장 왕경(王京)으로 달려들어오자, 왕이 만호인후(萬戶印侯) 한희유(韓希愈)ㆍ나유(羅裕)를 명하여 방어하게 하였다.
때마침 황제가 내만알(乃蠻歹)ㆍ설도간(薛闍干) 등을 보내어 군대를 인솔하고 우리나라에 오자 드디어 그들과 합세하여 합단을 연기(燕岐)의 들판에서 대파시켰으므로 말 한 필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해마다 나라 사람들이 정벌과 군량 운반 등의 일로 말미암아 농업에 실패하여 흉년이 들었으므로 황제가 절강(浙江)의 쌀 10만 석을 배로 운반하여 기민들을 구제하였다.
20년에 왕이 원 나라에 입조하니 황제가 붕하였다.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성종(成宗)을 세웠다. 황제가 왕이 선조(先朝)의 공신이요 친척이라 하여 매우 후하게 대우하고 왕이 말한 바를 모두 들어주니, 대신이나 승상인 백안(伯顔)ㆍ완택(完澤)ㆍ달한홀고손(達罕忽古孫)과 태사(太師) 월지절(月知節)도 감히 균등한 예로 하지 않았다.
24년에 공주가 훙하자 왕이 병으로 세자 원(謜)에게 손위하니, 수일왕(壽逸王)으로 봉하였다. 명년에 복위하여 또 11년 만에 훙하니 수는 73세요 재위 기간은 35년이었다. 무종황제(武宗皇帝)가 봉증(封贈)을 가하였으니 그의 제문은 이러하다.
“짐이 이제 천하를 살펴보건대 백성과 사직을 두고 왕이 된 자는 오직 삼한뿐이요, 조종으로부터 신하 노릇을 한 지가 자못 백 년이 되었도다. 아버지가 거친 땅을 개척하니 아들은 다시 즐겨 파종(播種)을 하였으며, 그는 나를 장인[舅]이라 이르고 나는 그를 사위[甥]라 이른다.
이미 공훈에다가 친척의 정의를 더하였으니, 귀하고 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대(事大)의 예를 능히 먼저하였으니 추숭(追崇)의 은전을 뒤로 미루겠는가. 고 순성수정 추충선력 정원보절공신 태위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우승상 상주국 부마(故純誠守正推忠宣力定遠保節功臣太尉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右丞相上柱國駙馬) 고려 국왕 왕거(王昛)는 효도를 충성으로 옮기었고 위엄을 은혜로 바꾸었도다.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을 닦으니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이 모두 찬연하였도다. 오직 큰 모유(謀猷)를 경영하였으며 소심(小心)으로 공경하였도다. 처음 세자 때에 이미 황제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곧바로 사왕(嗣王)을 도왔으니, 공손(公孫)이 다시 지위를 회복함과 같은 유가 아니었도다.
드디어 그 때로 바치는 방물(方物)을 파하고 도리어 종친(宗親)에게 해마다 하사(下賜)함과 같이 하였도다. 동정(東征)에는 병균(秉鈞)으로 책임지워 남면(南面)에게 전침(奠枕)을 기대하였도다. 왕에게 반역한 자를 쫓기 위하여 요수(遼水)에 솔선하여 나갔고 기병(奇兵)을 출동하여 태산으로 알[卵]을 눌렀도다.
싸우던 발꿈치 돌리기도 전에 역적의 머리를 이미 바쳤도다. 비록 왕위에 거한 지는 삼기(三紀 1기는 12년이니 3기는 곧 36년)가 되지 못하였으나 향년(享年)은 실로 칠순(七旬)을 지났도다. 중수(中壽)를 하였다고 말하나 지금 세상에 드문 일이로다. 하물며 그의 아들이 어질기가 이와 같으니, 이 사람은 세상이 없어져도 영원히 잊지 못하겠도다.
관계(官階)로부터 나아가서 사원(師垣)의 지극한 자리에 이르렀도다. 이미 현도(玄菟)의 터전에 봉하였고 창해(滄海)를 옷깃[襟]으로 삼았으니, 어찌 반드시 백마(白馬)를 죽여 맹세하고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음을 약속할 것이 있으랴.
바라노니 곧은 혼백은 휼장(恤章 임금이 신하에게 증직하는 은전)에 복종하기를. 순성수정 추충선력 정원보절 인량홍화 봉경공신 태사개부의동삼사상서우승상 상주국 부마 고려국왕 시 충렬(純誠守正推忠宣力定遠保節寅亮弘化奉慶功臣太師開府儀同三司尙書右丞相上柱國駙馬高麗國王諡忠烈)을 추증하노라.”
이것은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 요수(姚燧)의 글이다.
홀독겁리미사공주(忽篤怯迷思公主)가 지원(至元) 갑술년(1274)에 우리나라에 와서 명년 9월 19일(병술)에 세자를 낳으니, 처음의 휘는 원(謜)이었으며, 뒤에 장(璋)으로 고쳤고, 자는 중앙(仲昂)이다. 강보(襁褓)에 있을 적에 공주가 원 나라에 입조하여 세자를 안고 휘인유성황후(徽仁裕聖皇后)를 뵈니, 황후가 손뼉을 치며 부르자 세자가 문득 엉금엉금 기어가서 황후의 품에 안기었다.
황후는 이름을 지어 이르기를 익지례보화(益智禮普化)라 하였다. 세자의 나이 16세에 이르러 세조황제(世祖皇帝)에게 입조하자, 황제가 세자를 편전(便殿)에서 인견(引見)하고 안석을 비기고 누워서 묻기를,
“너희 나라에 있으면서 무슨 책을 읽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정가신(鄭可臣)ㆍ민지(閔漬) 같은 선생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같이 왔는데, 전에 숙위(宿衛)의 여가가 있으면 때로 찾아가서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질문했습니다.”
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정가신을 불러오게 하였다.
세자가 정가신을 데리고 불쑥 들어가니, 황제가 황급히 일어나 관을 쓰고 꾸짖기를,
“너는 비록 세자이지만 나의 외손[甥]이요, 정가신은 비록 배신(陪臣)이라 할지라도 유자(儒者)인데, 어찌 나에게 관을 쓰지 않고 보게 하느냐?”하였다.
인하여 정가신을 자리에 앉게 하고 본국의 전해 내려온 세대(世代)의 차서와 치란(治亂)에 대한 사실을 묻고 진시(辰時)로부터 미시(未時)에 이르도록 열심히 들었다. 그 뒤에 공경들에게 명하여 교지(交趾)를 정벌할 일을 의논하게 할 적에 고려 세자의 선생 두 사람을 불러 함께 의논하라는 조서가 있었으므로, 두 사람이 의논하기를,
“교지는 먼 곳에 있는 오랑캐이니,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는 것이 사신을 보내어 불러서 오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만약 교지가 끝내 사의(私意)를 고집하고 복종하지 않을 경우에 그들의 죄를 성토하여 정벌한다면, 한 번 정벌에 만전(萬全)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이 의논이 황제의 뜻에 맞았으므로 정가신에게는 한림학사(翰林學士)를, 민지에게는 직학사(直學士)를 제수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영화롭게 여겼다.
성종 초기에 보탑실령공주(寶塔實怜公主)에게 장가들고 충렬왕에게서 손위(遜位)를 받아 대덕(大德) 2년에 즉위하였다. 나라의 일을 어질고 유능한 사람에게 맡기고 간사한 것과 폐단이 되는 것은 혁파하였으므로, 당시에 ‘역마(驛馬)는 살이 쪄서 병이요,
역졸(驛卒)들은 발꿈치에 군살이 쪄서 병이 됐다.’는 말이 있었는데, 대개 사람이나 말이 항상 분주하게 다니다가 오랫동안 한가하게 있으면 반드시 이런 병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이 곧 원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사자(使者)가 드물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주의 유모가 본국에서 벼슬하기를 원하는 사람과 비밀히 짜고, 공주가 주상에게 실연(失戀)당하였다고 원 나라 중궁(中宮)에게 호소하였는데, 이 때문에 원 나라에서 주상을 숙위로 불러들인 지가 10년이 되었다. 무종과 인종이 황제가 되기 전에 주상과 한 집에 거처하여 밤낮으로 서로 떠나지 않았다.
대덕 11년에 주상이 승상 달한(達罕) 등과 계책을 정하여 인종을 받들어 내란(內亂)을 진압하고 무종을 맞아 세우니, 왕의 공이 제일 컸으므로 무종이 왕에게 심양왕 추충규의 협모좌운공신 부마도위 훈상주국 계개부의동삼사(瀋陽王推忠揆義恊謀佐運功臣駙馬都尉勳上柱國階開府儀同三司)에 봉하여, 총권(寵眷)이 그보다 더한 자가 없었다.
인종이 황태자로 있을 때에 주상이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었는데, 당시의 명사(名士)인 요수(姚燧)ㆍ소구(蕭㪺)ㆍ염복(閻復)ㆍ홍화(洪華)ㆍ조맹부(趙孟頫)ㆍ원명선(元明善)ㆍ장양호(張養浩) 등을 많이 천거하여 궁관(宮官)에 대배하였다.
지대(至大) 1년에 충렬왕이 훙하자 주상이 분상(奔喪)할 적에 밤낮으로 쉬지 않고 10여 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다. 장례를 거행할 적에는 참최(斬衰)를 입고 산릉(山陵)까지 도보로 가서 묘(墓)를 이룬 후에 돌아왔으니, 선대(先代)에서는 일찍이 행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이에 황제가 정동성우승상 고려국왕 겸 심왕(征東省右丞相高麗國王兼瀋王)으로 책봉하고 조금 있다가 태사를 제수하였다. 처음에 본국의 권신들이 대대로 정사를 전횡하여, 문사(文士)들 중에 재주와 명망이 있는 자를 부중(府中)에 모아 놓고 그곳을 정방(政房)이라 이름하고는 모든 관리들을 올리고 물리치는 일에 대해 모두 정방으로 하여금 주의(注擬)하게 하여, 국왕에게 계달하면 국왕은 부득이 모두 윤허하여 곧 시행을 하였으므로, 재상은 가만히 앉아서 문서만 봉행(奉行)할 뿐이었다.
그런데 권신들은 없어졌으나 정방의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는 까닭에 정사를 집행하는 승지의 권세가 재상보다 중하였다. 그러자 이때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재상으로서 관리 선발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고, 드디어 문신을 선발하는 일은 전리(典理)에 돌리되 수상(首相)이 주장하게 하고, 무신을 선발하는 일은 군부(軍簿)에 돌리되 아상(亞相)이 주장하게 하였으니 임관(任官)하는 법이 옛법에 가까웠다.
전답의 조세를 정하고 염법(鹽法 소금 만드는 사람에게 세금 받는 법)을 세우고 구황(救荒)하는 정책을 닦고 요행(僥倖)의 문을 막아 규모가 잘 갖추어졌으나, 신하들이 임금의 그 아름다운 뜻을 잘 받들어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백성에게 미치는 은택이 흡족하지 못하였기에 식자들이 지금까지도 애석히 여긴다.
황경(皇慶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계축(1313)년에 왕위를 세자 강릉군(江陵君)에게 물려주니, 강릉군의 휘는 도(燾)이고, 일명은 아자특실리(阿刺忒實里)이다. 영왕(英王)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또 위왕(魏王)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었다. 왕의 형인 강양군(江陽君) 자(滋)가 있었으나 공주의 아들이 아니라 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형의 아들 3형제가 있었는데 왕이 그들을 사랑하고 기르기를 마치 자기의 소생과 같이 하였다. 둘째 아들을 데려다가 궁중에서 길렀는데 이름은 고(暠)요 일명은 완택독(完澤禿)이다. 그로 하여금 작위(爵位)를 승습하여 심왕(瀋王)이 되게 하고 양왕(梁王)의 딸에게 장가들였다.
왕이 두 왕위를 사양하고 서울의 저택에 머물면서 병을 칭탁하고 조청(朝請)을 받지 않았다. 거처하는 집을 제미기덕당(濟美基德堂)이라 이름하고서 깨끗하게 소제하고 문을 닫고 향을 불사르며 해가 지도록 무릎을 꿇고 앉아 술을 많이 마셨다. 그러나 평소에는 한 잔 술도 들지 않고 오직 말 한 필을 먹이고 성색(聲色)의 오락과 응견(鷹犬)의 놀이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부도법(浮圖法)을 몹시 즐겨 본국의 옛 궁전을 희사(喜捨)하여 민천사(旻天寺)를 만들어 건축(建築)의 극치를 이루고, 구리[銅]로 본을 떠서 불상 3천여 좌(座)를 만들었으며, 금과 은 가루를 아교에 녹여 경(經) 2장(藏)과 흑본(黑本) 50여 장을 썼고, 번승(蕃僧 외국의 중)을 받아들여 경을 번역하고 계(戒)를 받았다.
해마다 그러지 않는 달이 없었으므로 어떤 사람이 그를 간하였으나 왕은 더욱 독실히 불경을 좋아하였다. 연우(延祐 원 인종의 연호) 초기에 선비(鮮卑)의 중이 상언(上言)하기를,
“황제의 선생 팔사파(八思巴)가 몽고의 글자를 만들어 국가를 이롭게 하였으니, 엎드려 빌건대 천하로 하여금 사당(祠堂)을 세워서 공자(孔子)와 같이 모시게 하소서.”
하니, 황제가 공경과 기로(耆老)들에게 조서를 내리어 모아서 의논을 하게 하였다.
국공(國公) 양안보(楊安普)가 앞장을 서서 그 의논을 힘써 주장하였다. 왕이 안보에게 이르기를,
“팔사파가 글자를 만들어 국가에 공적이 있었으니,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옛 전례(典禮)에 대조하여 할 일이지만, 어찌하여 반드시 공자와 동등하게 모시려 하는가?
공자는 백왕(百王)의 선생이니 공자를 천하에서 모두 제사를 모시는 것은 도덕으로 한 것이요 공적으로 한 것이 아니니, 뒷세상에 다른 의논이 있을까 두렵다.”하였다. 팔사파에게 제사를 거행하는 일은 비록 끝내 행하게 되었으나, 듣는 자들이 왕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과거(科擧)의 법을 설치할 적에 왕이 일찍이 요수의 말로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이맹(李孟)이 평장정사(平章政事)가 되자 황제에게 아뢰고 행하였으나, 그 근원은 대개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승상(右丞相) 독로(禿魯)가 파직되었으므로 이맹을 왕의 저택으로 보내어 왕을 독로의 자리에 앉힐 뜻으로 고하니 왕이 사례하기를,
“신은 소국의 번선(藩宣 번병(藩屛)의 신하로 천자의 왕화를 베푸는 일)의 기탁(寄托)도 감당하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자식에게 물려줄 것을 빌자 폐하(陛下)께서 승락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조정의 상상(上相) 자리이겠습니까? 신이 어찌 감히 영화를 탐하고 분수 없이 함부로 차지하여 폐하의 명감(明鑑)을 더럽히겠습니까. 신은 늙었으니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부처님을 섬기고 성수(聖壽)를 빌면, 이것이 신의 분수이옵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옵니다.”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이르기를,
“진실로 본디 권세를 잘 피하는 것을 알았다.”
하고 이에 그만두었으니, 왕의 근신(謹愼)함이 이와 같았다.
연우 기미년(1319)에 폐하에게 강향(降香)하기를 청하여 남쪽으로 강절(江浙)에서 놀다가 보타산(寶陁山)에 이르렀으니, 대개 시사(時事)가 장차 변해가는 것을 알고 화망(禍網)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라는 자는 본국의 소윤(少尹) 주면(朱冕)의 가노(家奴)였는데 스스로 불알을 까서 환관(宦官)이 된 인연으로 인종을 번저(藩邸)에서 섬기게 되었다.
성격이 간사하고 음험하여 불법한 일이 많았으므로 왕이 깊이 미워하였다. 백안독고아(伯顔禿古兒)도 그러한 줄을 알고 왕을 중상하려고 생각하였으나, 황제와 태후가 왕을 깊이 사랑하였으므로 그런 흉계를 발휘하지 못하다가, 황제가 붕하자 팔길사(八吉思)에게 뇌물을 주고 백 가지 꾀로 왕을 무함 참소하였다.
영종(英宗)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왕이 불경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죄를 삼아 토번(吐蕃)으로 귀양을 보냈다. 뒤에 태정제(泰定帝)가 서울로 왕을 소환(召還)하고, 왕을 본국으로 돌려보내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왕이 굳이 사양하였다.
태정 2년(1325) 5월 23일(신유)에 훙하니 수는 51세요, 무릇 재위 기간이 7년이었다. 왕이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서 무슨 일이고 한 차례만 이목에 스치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으며, 매양 하(夏)ㆍ상(商)ㆍ주(周) 삼대(三代)와 한(漢)ㆍ당(唐)의 군신들의 득실을 의논함에 있어서는 설명을 하여 끊임이 없었다.
더욱 송(宋) 나라의 고사를 좋아하여 일찍이 그의 요좌(寮佐)에게 《동도사략(東都事略)》을 읽게 하다가, 왕단(王旦)ㆍ이항(李沆)ㆍ부필(富弼)ㆍ한기(韓琦)ㆍ범중엄(范仲淹)ㆍ구양수(歐陽脩)ㆍ사마광(司馬光) 등의 명신전(名臣傳)의 사실을 들을 적에는 반드시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경모하는 생각을 바치고, 정위(丁謂)ㆍ채경(蔡京)ㆍ장돈(章惇) 등의 간신전(奸臣傳)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이를 갈며 분개해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의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대개 천성이 그러하였다.
[註解]
[주D-01]진양공(晉陽公) …… 계승하여 : 최씨 가계(家系)는 최헌ㆍ최이(崔怡 최우(崔瑀)의 개명)ㆍ최항ㆍ최의의 4대인데 원문에는 이
(怡)ㆍ항(沆)ㆍ의(誼) 위에 모두 손(孫) 자가 앞에 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본 역문에서는 이것을 빼고 번역하였다.
[주D-02]주접(晝接)에 응(膺)하였도다 : 황제(皇帝)로부터 은총받은 것을 말한다. 주접은 주일삼접(晝日三接)의 준말로 제후가 천자에
게 하루에도 세 번씩이나 친근하게 접견을 받는다는 뜻이다. 《周易》 晉卦에 “진(晉)은 강후(康侯 나라를 잘 다스리는 제후)에
게 많은 말[馬]을 주고 낮에 세 번씩이나 접견했다.” 하였다.
[주D-03]동정(東征)에는 …… 기대하였도다 : 일본 정벌의 병권(兵權)을 책임지워 국가가 안정되기를 기대했다는 말. 동정은 일본 정
벌, 병균(秉鈞)은 정권을 잡는다는 말. 원 세조(元世祖)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충렬왕을 정동행중서성성사(征東行中書省
省事)를 주어 일체의 준비를 맡게 하였다.
남면(南面)은 남쪽을 향해 앉는 뜻으로 곧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고, 전침(奠枕)은 누울 자리를 정한다는 뜻으로 곧 세상이 태평하
여 편안하게 안정됨을 말한다.
[주D-04]현도(玄菟)의 …… 삼았으니 : 고려와 원 나라가 정치적 지리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현도는 압록강 중류에
설치했던 한사군(漢四郡)의 하나로 전(轉)하여 한반도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되었으며, 창해(滄海)는 원문에 창발(滄渤)로 되어
있으나 창해나 발해는 같은 바다를 달리 부르는 것이므로 창해로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나금주 (역)┃1980
익재난고 제9권 하
사찬(史贊) 15편
서(序) 2편
책문(策問) 1편
논ㆍ송ㆍ명ㆍ진찬ㆍ잠(論頌銘眞贊箴) 15편
익재난고 제9권 하
사찬(史贊) 15편
1 태조(太祖)
2 혜왕(惠王)
3 정왕(定王)
4 광왕(光王)
5 경왕(景王)
6 성왕(成王)
7 목왕(穆王)
8 현왕(顯王)
9 덕왕(德王)
10 정왕(靖王)
11 문왕(文王)
12 순왕(順王)
13 선왕(宣王)
14 헌왕(獻王)
15 숙왕(肅王)
태조(太祖)
제현(齊賢)은 말한다.
내가 충선왕(忠宣王)을 섬길 때, 왕이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태조(太祖)의 규모(規模)와 덕량(德量)으로 중국에 나셨더라면 송 태조(宋太祖)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 태조는 주 세종(周世宗)을 섬겼는데, 주 세종은 어진 임금이었다. 송 태조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고 송 태조도 힘을 다해 주 세종을 섬겼으나, 공제(恭帝)가 나이 어려서 정사(政事)가 태후(太后)의 손에서 나오게 되매 군사들의 추대에 몰려서 주(周)의 선위(禪位)를 받았으니, 그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
우리 태조께서는 시기 많고 포학한 임금인 궁예(弓裔)에게 벼슬하셨는데, 삼한(三韓)의 땅을 궁예가 3분의 2를 차지하게 된 것은 태조의 공이었다. 세상에 드문 공을 세운 몸으로 의심을 사게 될 처지에 계셨으니, 매우 위험스러웠다고 할 수 있겠다.
국민의 마음이 자기에게 쏠리고 장사(將士)들이 추대하는데도, 오히려 굳이 사양하고 연릉(延陵)의 지조를 따르려 하셨으나, 백성을 위문하고 포학한 임금을 토벌하는 일은 그만둘래야 어찌 그만둘 수가 있었으랴?
그 살리는 일을 좋아하고 죽이는 일을 싫어하며, 상줄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며, 공신(功臣)들에게는 성의껏 대우하되 권세를 부여하지 않고, 창업하여 왕통을 전한 것이 실로 송 태조와 마찬가지였다.
송 태조로 말하면, 강남(江南)의 이씨(李氏)를 코 골고 누워 있는 데에 비유하였고, 석진(石晉)이 거란에게 할양(割讓)한 산후(山後)의 16주(州)를 마치 자기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처럼 보아서, 이미 북한(北漢)을 수복하고는 장차 군사를 휘몰아서 진(秦)ㆍ한(漢)의 옛 강역을 다 평정하려 하였다.
우리 태조께서는 즉위하신 뒤에 김부(金傅)가 아직 항복하지 않고 견훤(甄萱)이 아직 사로잡히기 전인데도, 자주 서도(西都 평양(平壤))에 행차하여 친히 북쪽 변방을 순수(巡狩)하셨다. 그 의도도 동명왕(東明王)의 옛 영토를 내집의 대대로 전해오는 보물처럼 생각하고 반드시 그것을 석권해서 가지려 하신 것이니, 어찌 신라를 취하고 압록강만을 수복하는 것으로 만족하였겠는가?
이것으로 보면 비록 형세의 대소 차이는 있지만 송 태조와 우리 태조의 규모와 덕량은 이른바 ‘처지를 바꾸면 다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하였다. 충선왕은 총명하고 고도(古道)를 좋아하여, 중국의 박아(博雅)한 선비인 왕구(王構)ㆍ염 복(閻復)ㆍ요수(姚燧)ㆍ소구(蕭㪺)ㆍ조맹부(趙孟頫)ㆍ우집(虞集) 같은 이들이 모두 그 문정(門庭)에서 놀았으니, 아마 일찍이 그들과 함께 옛사람의 행적을 논하였을 것이다.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를
무시하였다.
[주D-01]군사들의 …… 받았으니 :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주 공제(周恭帝) 밑에서 검교태위(檢校太尉)로서 귀덕절도사(歸德節度
使)를 겸하고 있을 때, 임금은 나이 어리고 나라에는 난이 빈번하므로 중외(中外)에서는 은밀히 조광윤을 추대할 뜻이 있었더니,
때마침 거란이 침략하매 조광윤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막으러 가는데, 장사(將士)들이 모여서 상의하기를 “임금이 어리니 우리
가 사력을 다해 적을 깨뜨린다 해도 누가 알아주겠는가.
먼저 검교태위를 천자로 삼은 뒤에 북정(北征)해도 늦지 않다.” 하고 조광윤의 침소로 가서 극력 추대하자, 조광윤은 부득이 응하
게 되었다. 《續資治通鑑綱目 卷1》
[주D-02]의심을 …… 있겠다 : 하루는 왕건(王建)이 궁예(弓裔)의 부름을 받고 궁내에 들어가니, “경(卿)이 어젯밤에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반역을 모의함은 무엇 때문이냐?”고 궁예가 대뜸 묻자, 왕건은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태연하게 대답하니, 궁
예는 “나를 속이지 말라 …… ” 하였다. 이때 왕건은 장주(掌奏) 최응(崔凝)의 귀띔으로 인해 거짓 자복하여, 궁예에게 정직하
다는 말을 듣고 위험을 모면한 일도 있었다. 《高麗史 世家 卷1》
[주D-03]연릉(延陵) : 춘추 시대 오(吳)의 계찰(季札)의 봉호(封號). 계찰은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소자(少子)로서 현명(賢明)하므
로 수몽이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그래서 연릉에 봉하였다.
[주D-04]강남(江南)의 이씨(李氏) : 남당왕(南唐王) 이경(李景)의 아들 욱(煜)을 가리킨다. 이욱은 왕위를 이은 뒤 국세(國勢)가 날로
위축됨을 근심한 끝에 술이나 마시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뒤에 강남국주(江南國主)라고 칭하다가 얼마 후에 송 태조에게
망하여 농서공(隴西公)에 봉해졌다. 《五代史 卷62》
[주D-05]코 골고 …… 비유하였고 : 강남주(江南主) 이욱(李煜)이 서현(徐鉉)을 송(宋)에 보내 화친(和親)을 청하자, 송 태조가 “내가
잠자는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코고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續資治通鑑綱目 卷1》
[주D-06]석진(石晉) : 석경당(石敬瑭)이 세운 후진(後晉)을 가리킨다.
[주D-07]산후(山後)의 16주(州) : 석경당이 요(遼 거란)에게 할양(割讓)한 북중국지방의 연(燕)ㆍ운(雲) 등 16주를 가리킨다.
[주D-08]처지를 …… 것이다 :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혜왕(惠王)
제현은 말한다.
우보(羽父)가 장차 태재(太宰)가 되기 위해 환공(桓公)을 죽이기를 청하니, 은공(隱公)이 허락하지 않고 또한 그를 토죄(討罪)하지도 않다가, 마침내 위씨(蔿氏)의 화(禍)를 초래하였다.
왕규(王規)가 왕의 두 아우를 참소한 것도 또한 우보의 뜻과 같았는데, 혜왕은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고 도리어 그를 측근에 있게 하였으니, 그 칼을 품고 벽을 뚫은 음모의 화를 면한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이때는 태조가 세상을 떠난 지가 얼마 되지 않으니, 왕규가 불의(不義)로써 무리를 이루는 것이 어찌 한(漢)의 조비(曹丕)나 위(魏)의 사마의(司馬懿)와 같이 할 수 있었으랴? 그런데도 그를 귀양보내거나 죽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 소인을 멀리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경계하지 않으랴?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우보(羽父)가 …… 초래하였다 : 이 말은 《좌전(左傳)》 은공(隱公) 11년 조에 자세히 보인다. 우보는 노 은공(魯隱公) 때의 공
자(公子)로 처음 태재(太宰)가 되기 위해 은공에게 환공(桓公)을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은공이 허락하지 않자, 우보는 그 일이
탄로날까 두려워서 도리어 환공에게 참소하여 은공을 죽이려 하였다. 그 후 은공이 위씨(蔿氏) 집에서 묵을 때, 우보는 도적을
시켜 은공을 위씨 집에서 죽이고 환공을 세워 위씨를 토벌하였다.
[주D-02]왕규(王規)가 …… 하겠다 : 《고려사》 세가(世家) 혜종 조에 의하면, 대광(大匡) 왕규(王規)가 혜왕의 아우 요(堯)와 소(昭)를
참소하니, 혜왕은 무언(誣言)임을 알고 짐짓 은총(恩寵)으로 왕규를 대우하였다. 그 후 왕규가 또 그의 도당을 시켜 벽 구멍을
뚫고 혜왕의 침소에 침입하게 하고 난을 일으킬 모의를 하였으나, 혜왕은 거소를 옮겨 피하고 문책하지도 않았다 한다.
[주D-03]한(漢)의 …… 사마의(司馬懿) : 조비는 후한(後漢)을 찬탈(簒奪)하였고, 사마의는 위(魏)를 찬탈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정왕(定王)
제현은 말한다.
정왕은 존귀한 왕의 신분으로 10리나 되는 절에까지 걸어가서 사리(舍利)를 봉안하고, 또 7만 석(石)의 곡식을 하루에 여러 중에게 다 나누어 주고도, 한번 하늘의 견책을 만나자 본정신을 잃어 병이 났으니, 이른바 ‘군자는 부정하게 복을 구하지 않고, 공경으로 내심을 곧게 한다.’는 옛글을 또한 일찍이 듣지 못했던가? 그러나 병이 이미 위독하자 종사(宗社)를 친아우에게 맡겨서, 왕규 같은 자로 하여금 그 틈을 넘겨다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일은 가상하다.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정왕(定王)은 …… 났으니 : 《고려사》 세가 정종(定宗) 조에 의하면, 원년에 왕은 의장(儀仗)을 갖추어 불사리(佛舍利)를 모시
고 도보로 10리쯤 되는 개국사(開國寺)에 가서 봉안하고 또 곡식 7만 석을 여러 큰 절에 바쳤다. 3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방물
(方物)을 바쳐 오매 왕이 천덕전(天德殿)에서 그것을 검열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고 우레가 울리며 어전(御殿)의 서쪽 모퉁이
에 벼락이 쳤다. 왕은 크게 놀라더니 이내 병이 났다. 병이 위독하자 아우 소(昭)에게 내선(內禪)하였다.
[주D002]군자는 …… 한다 : ‘군자는 …… 않고’라는 말은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보이고, ‘공경하여 …… 한다.’는 말은 《주
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보인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광왕(光王)
제현은 말한다.
광왕이 쌍기(雙冀)를 등용함은 옛글대로 ‘어진이를 씀에 유를 가리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쌍기가 과연 어진이었다면, 어찌 임금을 선(善)한 길로 이끌지 못하고, 참소를 믿고 형벌을 함부로 쓰는 지경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과거(科擧)를 신설하여 인재를 뽑은 일 같은 것은, 광왕이 본디 문(文)으로 풍속을 교화하려는 뜻을 가졌고, 쌍기도 광왕의 뜻을 받들어 그 아름다운 뜻을 성취시켰음을 볼 수 있으니, 보탬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오직 그가 창도한 것은 부화(浮華)한 문장뿐이었으므로, 후세에 와서 그 폐단이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송(宋)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찬하면서,
“인재를 뽑을 때 시(詩)ㆍ부(賦)ㆍ논(論) 3제(題)만을 쓰고, 시정(時政)은 책문(策問)하지 않는다. 그 문장을 보니, 당대(唐代)의 여폐(餘弊)와 비슷하다.”하였다.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어진이를 …… 것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주D-02]광왕(光王)의 …… 없다 : 《고려사》 세가 광종 조에 의하면, 광왕 7년 왕을 책봉하기 위해 주(周)의 사신인 장작감(將作監) 설
문우(薛文遇)가 오는 편에 쌍기(雙冀)가 따라왔다. 9년 5월 비로소 과거(科擧)를 실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쌍기에게 명하
여 진사(進士)를 뽑게 했다.
11년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과 좌승(左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했다고 참소하매 이들을
귀양보냈다. 이때부터 참소가 성행하고 옥사가 빈번하여 무고히 죽은 자가 많았다. 쌍기는 고려에 왔다가 병으로 인해 환국하지
못하고 귀화 하였다.
[주D-03]당대(唐代)의 여폐(餘弊) : 당대에는 시부로 인재를 뽑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문장을 보기좋게 짓는 것만 치중하고 국가의 경
륜이나 참된 학문에는 소홀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경왕(景王)
제현은 말한다.
등 문공(滕文公)이 정전제도(井田制度)를 맹자에게 물으니, 맹자는 말하기를,
“인정(仁政)이란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경계가 바르지 않으면 정지(井地)가 고르지 못하고 곡록(穀祿)이 공평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포학한 임금과 탐오한 관리는 반드시 그 경계를 등한히 합니다. 경계가 바르게 되면 전지(田地)를 분배하고 곡록을 제정하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삼한의 땅은 사방에서 주거(舟車)가 모여드는 곳이 아니라, 물산(物産)의 풍요함과 화식(貨殖)의 이익이 없으므로 백성의 생활은 다만 토지의 생산력에 의지할 뿐인데, 압록강 이남 지방은 거의 모두 산이므로 매년 갈아먹을 수 있는 기름진 전지가 많지 않다.
그러므로 경계를 바로잡는 일을 만약 등한히 한다면, 그 해로움은 중국에 비하여 훨씬 더할 것이다. 태조가 신라의 쇠란(衰亂)과 태봉(泰封)의 사치ㆍ포학한 뒤를 이어 일어나셨을 때는 모든 일을 처음으로 시작하였으므로 구분법(口分法)만을 만들었다.
4대(代)를 지나 경왕이 전시과(田柴科)를 마련하였으니, 비록 소략한 점은 있으나 옛날의 세록(世祿)과 같은 뜻이었다. 9분의 1을 조(助)로 하고 10분의 1을 부(賦)로 하는 것과 군자(君子)ㆍ소인(小人)의 우대 여부에 대해서는 논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후세에 여러 번 그것을 정리하려 했으나 마침내 구차스럽게 되고 말았다. 대개 그 시초에 경계를 긴급한 일로 삼지 않았으니, 그 수원(水源)을 분탕질하고서야 하류의 맑음을 구한들 어찌 될 수 있으랴? 애석하다, 당시 군신(群臣) 중에 맹자의 말로써 법제를 강구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힘써 행하게 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인정(仁政)이란 ……것입니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보인다.
[주D-02]구분법(口分法) : 구분전제도(口分田制度). 인구를 헤아려 토지를 분배하는 제도이다.
[주D-03]전시과(田柴科) : 경종 원년에 설치한 것으로 전지(田地)와 초채지(樵採地)를 관리에게 분급(分給)하던 제도이다.
[주D-04]세록(世祿) : 신하들에게 대대로 국록(國祿)을 받게 하는 것인데, 이는 신하를 후하게 대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다.
[주D-05]군자(君子)ㆍ소인(小人) : 여기서는 군자는 벼슬아치, 소인은 평민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성왕(成王)
제현은 말한다.
행 선관어사(行選官御事) 최승로(崔承老)가 성왕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신(臣)이 보건대,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의 사신(史臣) 오긍(吳兢)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찬해 올린 것은 현종(玄宗)에게 태종(太宗)과 같은 정치를 부지런히 닦도록 권하고자 한 것입니다. 《정관정요》를 선택한 것은, 대개 사체(事體)의 가까움이 한집안을 벗어나지 않고 정치의 아름답고 밝음이 사범(師範)이 될 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건국한 이래의 사적으로 신이 아는 것은 신의 마음에 간직하여 외고 있으므로, 이제 삼가 오조(五朝)의 정치 교화의 잘되고 잘못된 자취로서 거울되고 경계될 만한 것을 기록하여 조목별로 아뢰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우리 태조(太祖) 신성대왕(神聖大王)이 왕위에 오를 때의 시기는 백륙(百六)에 해당하고, 운수는 천 년에 해당하였습니다. 당초 난군(亂軍)을 치고 흉적(凶賊)을 평정함에 있어서는 하늘이 전주(前主 궁예(弓裔)임)를 내어 그 손을 잠깐 빌렸었고, 그 뒤에 태조께서 도참(圖讖)에 응하여 천명(天命)을 받음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성덕(聖德)을 알아보고 마음이 쏠렸습니다.
그래서 신라가 스스로 멸망할 시기를 만나고 고려가 다시 일어나는 운수를 타서, 향리(鄕里 송악(松岳))를 떠나지 않고 거기에 대궐[閒庭]을 세운 다음, 요패(遼浿 요수(遼水)와 패수(浿水)임)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땅을 얻었으니, 공덕(功德)이 누가 이보다 크겠습니까.
거란으로 말하면 우리와 국경이 연해 있으니 마땅히 먼저 수호(修好)해야 하는데, 하물며 저들이 또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요구했음에리까? 그런데 우리가 교빙(交聘)을 끊은 것은, 저들이 발해(渤海)와 서로 화친을 맺었다가 별안간 딴마음을 품어 옛날의 맹약(盟約)을 돌아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발해를 멸망시켰던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태조께서 거란은 무도(無道)하니 더불어 교빙할 수 없다 하시고, 그들이 바친 낙타도 모두 버리고 기르지 않았으니, 그 환란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발해가 거란에게 격파되자, 그 세자(世子) 대광현(大光顯) 등이 남아 있는 무리 수만 호(戶)를 거느리고 주야로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태조께서는 그들을 매우 민망히 여기고 성명까지 하사하고 또 그 본국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셨으며, 그 문무 참좌(文武參佐) 이하에게도 모두 벼슬을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그 망한 나라를 보존해 주고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일을 급하게 서둘렀으므로, 능히 먼 지방 사람을 와서 복종하게 하심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후백제 견훤(甄萱)이 흉패(兇悖)하여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고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자, 태조께서 그 소식을 듣고 침식할 겨를도 없이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성토하여 마침내 신라의 광복(匡復)을 이루게 해 주셨으니, 그 옛 임금을 잊지 않고 위태한 나라를 부지하게 한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신라 말기부터 서북 변경의 백성은 언제나 여진(女眞)이 들락거리며 도둑질해가는 피해를 입고 있었는데, 태조께서 한번 훌륭한 장수를 보내어 그 지방을 지키게 하시매 조그마한 병기도 사용치 않고서도 변경이 무사하였으니, 사람을 잘 알아서 책임을 맡기고 먼 나라를 회유(懷柔)하고 가까운 나라를 안무(安撫)하신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신라의 군신(君臣)이 운수가 다됨으로 해서 귀화(歸化)하기를 요구하자 재삼 사양한 뒤에 그것을 허락하시매, 동쪽 명주(溟州)에서부터 흥례부(興禮府 울산(蔚山))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있는 1백 10여 성(城)이 모두 인덕(仁德)을 사모하여 즉시 와서 복종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예(禮)로써 사양하시매 복종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다만 남쪽으로 백제를 평정할 때에 마지못해서 전쟁을 하셨는데, 혹은 적(敵)에 임함에 문득 항복해 온 자가 있고 혹은 소문만 듣고도 두려워 복종한 자가 있었으며, 비록 교전하더라도 살상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인자(仁者)에게는 당적할 자가 없다는 옛말 그대로라 할 수 있습니다.
견훤이 죄악을 쌓은 지 수십여 년 만에 마침내 역수(逆豎)에게 잡혀 갇힌 바 되었더니, 우리에게 도망해 와서 군사를 보내 역수를 토벌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태조께서는 비록 그 청을 들어주시되 기일을 늦추다가, 그의 청이 매우 간절함을 기다려서야 마지못해 천벌(天罰)을 행하셨으니, 인(仁)으로 말하면 살리기를 좋아하시고 무(武)로 말하면 죽이지 않기를 기하셨던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견훤은 여러 해 동안의 원수로서 맹약을 어기고 악을 자행한 그 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그가 곤액을 당할 때 후한 예로 맞이하시고 그가 죽었을 때에도 풍부한 부의를 하셨으니, 도(道)가 유명(幽明)을 꿰뚫고 의(義)가 존몰(存沒)에 두루 미친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후백제를 평정하고 나서 거가(車駕)가 도성(都城)에 들어가서 궁한 백성을 애휼(哀恤)하고 또 깊이 위로해 주시며, 군사에게 영을 내려 털끝만큼도 침범하는 일이 없게 하셨습니다. 또 남방과 북방이 오랫동안 갈려 있었고 새로 항복한 사람과 전에 있던 사람이 스스로 구별되지마는, 태조께서는 동일하게 안무하여 종시 변함이 없으셨으니, 포용의 관대하심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통일을 이룬 후로는 예(禮)로써 큰 나라를 섬기고 도(道)로써 이웃 나라를 사귀었으며, 편안한 처지에 계실 때에도 방일(放逸)함이 없고, 아랫사람을 대하실 때에는 공손한 태도로 대하시며, 도덕(道德)을 존중하고 절검(節儉)을 숭상하시며, 궁실을 낮게 지어 겨우 비바람이나 가리게 하고, 의복은 검소하게 하여 추위나 더위를 막을 뿐이시었으며,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기셨으며,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남의 의견을 따르셨으며, 공검(恭儉)하고 예양(禮讓)한 마음은 천성으로 타고나신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민간에서 생장하여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으셨으므로 여러 사람의 진정과 거짓을 갖추 아시며, 모든 일의 안위(安危)도 능히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상벌을 적시(適時)에 내리고 사인(邪人)과 정인(正人)을 명확히 분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알아보아 인재를 잃지 않고 선비를 만나면 반드시 그의 능력을 썼으며, 어진 사람에게 일을 맡긴 뒤에는 의심치 않고, 간사한 사람을 내쫓을 때에는 주저하지 않으셨으니,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방법을 알고 제왕(帝王)의 체통을 얻으심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다만 창업한 초기라 태평 정치가 이룩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예악(禮樂)에도 오히려 빠진 것이 많은데, 미처 두루 보완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으매, 이것은 국인의 불행이며 천도(天道)의 무심함이니, 크게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혜종(惠宗)은 오랫동안 동궁(東宮)에 있어 여러 번 감무(監撫)를 하였으며, 사부(師傅)를 예로써 존중하고 빈료(賓僚)를 잘 대접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어진 이름이 조정과 민간에 널리 알려졌으므로, 처음 왕위에 오르매 뭇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정종(定宗) 형제를 참소하여 반역할 뜻을 품었다고 하였으나, 혜종은 그 말을 듣고는 대답도 문책도 하지 않고 더욱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처음처럼 대우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 큰 도량에 감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덕정(德政)을 닦지 않고 신명(身命)을 너무 염려하여 좌우 전후에 항상 갑사(甲士)를 따르게 하였으니, 대개 사람을 의심함이 너무 심하여 크게 임금된 체통을 잃었습니다.
거기다 또 장사(將士)들에게만 치우치게 상을 주어 은택(恩澤)이 고르지 못하였으므로 안팎에서 원망하여 인심이 이반(離反)하게 되었습니다. 또 왕위에 오른 다음 해에 갑자기 고질(痼疾)을 얻어 병석에서 덧없이 세월을 보내니, 이에 조신(朝臣)의 현사(賢士)는 앞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시골의 소인만을 항상 침실 안에 있게 하였습니다.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화를 내는 것이 날로 더하여 왕위에 있는 3년 동안에 백성이 그 덕을 입지 못하였으며,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겨우 횡화(橫禍)를 면하게 되었으니, 원통하지 않습니까? 정종(定宗)은 번저『藩邸: 왕자의 사저(私邸)임』에 있을 때 일찍이 어진 이름이 있었습니다.
혜종이 병이 나서 오랫동안 낫지 않고 재상(宰相) 왕규(王規) 등의 음모가 있어 왕실(王室)을 넘겨다보므로, 정종이 먼저 그것을 알고 비밀히 서도(西都)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수와 계책을 세워 대비하여, 내란(內亂)이 일어나려 할 때에 위병(衛兵)이 많이 왔으므로, 저들의 간계(奸計)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뭇 흉적(兇賊)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비록 천명에 연유된 것이지만 또한 사람의 계책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습니까? 정종으로부터 지금까지 38년 동안 왕통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또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정종이 이미 태조의 둘째 아드님으로서 왕위를 계승하자 밤낮으로 부지런히 정치에 힘써서, 촛불을 켜 조사(朝士)를 인견(引見)하기도 하고 밥먹을 시간까지 늦추어 가면서 정무를 처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사람들이 모두 경하하였습니다. 후에 그릇 도참(圖讖)을 믿어 도읍 옮길 것을 결정하고, 또 천성이 강하고 고집 불통이었으며, 부당하게 세(稅)를 거두어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인부를 노동시켰으니, 비록 위에서는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에 대중 인심이 복종하지 않아, 원성이 이로 인하여 일어나고 모든 재변의 징험이 아주 빨랐습니다. 따라서 미처 서경(西京)으로 도읍도 옮기지 못한 채 영원히 세상을 떠나셨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습니다.
광종(光宗)은 예로써 아랫사람을 대접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데 밝았으며, 친하고 귀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고 항상 호강(豪强)한 자를 누르고 소천(疏賤)한 사람을 버리지 않았으며, 환과(鰥寡) 고독(孤獨)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해로부터 8년 만에 정치와 교화가 맑고 공평하며 형벌과 은상(恩賞)이 남발되지 않았습니다.
쌍기(雙冀)가 귀화(歸化)한 후부터 유술(儒術)을 존중하여 은례(恩禮)가 너무 융숭하니, 이로 말미암아 변변치 못한 재주를 가진 자가 외람하게 진출해서 순차를 무시하고 갑자기 뛰어올라, 1년도 채 못되어 곧 경상(卿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밤늦도록 인견하여 이로써 즐거움을 삼아 정사를 게을리하니, 군국(軍國)의 요무(要務)가 제대로 통하지 않고 잔치와 유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에 남방과 북방의 변변치 않은 자들이 다투어 귀화하기를 원하며, 지혜가 있고 재주가 있음을 불문하고 모두 특수한 은례(恩禮)로 응접하였습니다. 그런 때문에 후생들이 다투어 진출하고 노숙한 사람들이 점점 쇠퇴하였습니다.
비록 중국의 풍속은 존중하였으나 중국의 좋은 법은 취하지 못하였으며, 중국의 선비는 예로써 접대하였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는 얻지 못하였고, 백성에게는 고혈(膏血)의 재물을 더욱 소모시켰으며, 사방에서는 부허(浮虛)한 칭찬을 지나치게 얻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시는 정치에 힘쓰지 않고 빈료(賓僚)를 접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신하를 시기(猜忌)함이 날로 심하고 군신(君臣) 사이의 의논이 날로 막혀져서 정치의 잘잘못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거기다 또 불법(佛法)에 의지하여 소원을 이루려고 항시 행하는 재(齋)도 이미 많은데다 별도로 기원하는 훈수(薰修)가 적지 않았으며, 오로지 수복(壽福)만을 구하고 기도만을 일삼으며, 한정 있는 재력을 기울여 무한한 인연(因緣)을 맺으며, 스스로 지존(至尊)의 몸을 가벼이 하여 조그마한 선(善)을 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또 나들이하고 연유(宴遊)함에 있어서는 극도로 사치하게 하였으며, 우선 목전의 무사한 것을 가지고 부처의 힘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여, 모든 하는 일을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궁실은 반드시 제도에 넘게 짓고 의복과 음식은 극도로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으로 하였으며, 토목의 공사와 기교의 제작은 때를 가리지 않고 쉴새없이 하였으니, 보통때 1년의 비용을 대략 계산하더라도 태조 때의 10년 비용이 족히 될 것입니다. 또 만년에 이르러서는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만일 광종께서 항상 공검 절약만 생각하고 처음처럼 정사에 부지런하였더라면, 어찌 그 수명이 길지 못하여 겨우 50세만 누렸겠습니까? 더구나 경신년에서 을해년까지의 16년 동안은 간흉(奸兇)이 다투어 진출하여 참소가 크게 일어나니, 군자는 용납할 데가 없고 소인만 제뜻을 얻어, 드디어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종이 그 주인을 고소하기까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상하는 마음이 합치지 못하고 군신은 체통이 해이하여, 구신(舊臣)과 숙장(宿將)이 차례로 죽음을 당하고, 골육(骨肉)과 친척(親戚)도 모두 멸망되었습니다. 혜종이 형제를 잘 보전한 일과 정종이 국가를 보호한 일은 은혜와 의리로 논한다면 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왕은 모두 아들 하나씩 두었는데, 광종은 그 생명을 보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덕을 갚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시 그 원한을 맺었습니다.
또 만년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한 아들까지도 의심하고 꺼렸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경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언제나 불안하였는데, 다행히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아, 어찌하여 처음에는 잘하여 좋은 명예를 얻었는데도 뒤에 잘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매우 원통한 일입니다.
경종(景宗)은 깊은 궁궐 속에서 태어나서 부인의 손에서 자랐으므로 대궐 문밖의 일을 일찍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였는데, 다만 천성이 총명하므로 광고(光考 선고(先考)인 광종(光宗))의 만년에 회우(懷尤)를 면하고 왕위를 계승하여, 여러 해 동안 쌓인 참소의 문서를 불사르고 수년간 무고하게 갇힌 죄수를 방면하여 억울한 원한을 모두 씻어주니, 조정과 민간에서 온통 경하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만 정사의 체통을 알지 못하여 정권을 권신(權臣)에게만 맡겨서 해가 종친(宗親)에까지 미쳤으며 재변의 조짐이 먼저 나타났는데, 뒤에 비록 깨닫기는 했지만 책임을 미룰 데가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사(邪)와 정(正)이 구분이 없고 상(賞)과 벌(罰)이 균일하지 않으며,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지도 못한 판에 다시 정사에 태만하여 드디어 여색에 빠지게 되고 향악(鄕樂) 듣기를 즐기며, 겸하여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여 종일토록 싫증내지 않았으며, 좌우에 모신 사람은 오직 중관(中官)과 내수(內豎)뿐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군자의 말은 들어갈 수가 없고 소인의 말만을 때때로 따랐으므로, 초년에는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으나 만년에 어진 덕이 없었으니, 이른바 ‘처음은 잘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끝맺음을 잘하는 이가 적다.’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충신 의사가 그 누구인들 이를 원통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성상(聖上)께서도 친히 보아 아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경종에게도 무한히 찬미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당초 병이 나서 아직 위독하기 전에 내실에서 성상을 불러 손을 잡고 말씀하여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을 부탁한 바로 그 일입니다. 그것은 사직(社稷)의 복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민(人民)의 다행이었습니다.
오직 혜종과 경종 두 분이 왕위를 이은 것만은 모두 춘궁(春宮 태자(太子))의 몸으로 계승하였으니, 이치에 필연한 일이므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았지만, 종형제에 있어서는 분명히 부탁한 일이 없으면 다툼질의 단서가 일어날 것입니다. 혜종은 두 해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마침내 흥화랑군(興化郞君)이란 아들을 두었는데, 비록 나이 어렸지만 분명한 부탁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가 아우에게 돌아갔던 것입니다.
정종(定宗)은 군신(群臣)의 추대를 받아 대업(大業)을 이었고, 임종시에 또한 일찍이 광종에게 왕위를 전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하게 하였으니, 정종과 경종 두 임금의 유명(遺命)은 현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일찍이 보건대 혜종ㆍ정종ㆍ광종 세 임금이 서로 계승하던 초기, 모든 일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때에 양경(兩京: 개경ㆍ서경)의 문무관들은 이미 반이나 죽음을 당했으며, 더구나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소가 일어나서 형벌에 걸린 자가 대부분 무고한 사람이었으며, 역대의 훈신(勳臣)ㆍ숙장(宿將)들도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여, 경종이 등극할 때에 이르러서는 남은 옛 신하가 40여 명뿐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또한 해(害)를 당한 자가 많았는데, 모두가 후생(後生) 참적(讒賊)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것이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선조(先朝)가 오래 보전하지 못함은 대부분 이 화(禍)로 연유함이었으니, 후세에 감계(鑑誡)로 삼을 만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상성(上聖)의 덕으로 중흥(中興)의 시기를 만나 선군(先君)의 손양(遜讓)한 은혜로 인하여 열성(列聖)의 큰 업을 이으시매, 안팎이 다같이 기뻐하고 신하들이 서로 경하하니, 이른바 ‘하늘에서 주고 국민이 주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상께서 만일 태조의 유풍(遺風)을 따르신다면, 당 현종이 문황(文皇 태종)을 추모하던 고사와 어찌 다르겠습니까? 성상께서 또 4조(朝)의 가까운 일을 취사해야 할 것입니다.
곧 혜종은 골육을 보전시킨 공이 있었으니 우애한 의리가 있었다고 할 수 있고, 정종은 난이 싹트는 것을 미리 알고 가까운 인척 사이에서 일어난 난을 진압하여 종묘 사직을 다시 안정시켜 왕위를 전하여 지금에 이르게 하였으니 지모(智謀)가 밝았다고 할 수 있고, 광종의 8년 정치는 잘한 것과 못한 것이 반반이었고, 경종은 선조 적의 원통한 죄수 수천 명을 방면하고 여러 해 쌓였던 참소의 문서를 불살라 버렸으니 관대하고 인자함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4조의 정치 자취가 대략 이와 같으니, 성상께서는 마땅히 그 좋은 점은 취해서 행하시고 나쁜 점은 경계하시며, 긴급하지 않은 일은 버리고 이로울 것이 없는 노역(勞役)은 폐지하여, 당초 잘해보려는 그 마음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려 생각하시어 날마다 근신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록 훌륭하여도 훌륭한 체 마시고, 귀한 군주(君主)가 되었지만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마시고, 재덕(才德)을 풍부하게 가졌지만 스스로 교만하고 자랑하지 마시며, 오직 자신을 공순히 갖는 뜻을 돈독히 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생각을 끊지 마시면, 복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오고 재앙은 빌지 않아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니, 성상께서 어찌 만년이나 살지 않겠으며 왕업(王業)이 어찌 백세(百世)만 전할 뿐이겠습니까?
신은 비록 우매하나 정승의 자리에 있으니 이미 주진(奏陳)할 마음이 있을뿐더러 또 회피할 길이 없으므로, 삼가 비루한 생각을 기록하오니, 시무(時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모두 28조(條)인데, 장주(狀奏)에 따라 따로 봉하여 올립니다.”
그 28조는 본전(本傳)에 실려 있다. 승로(承老)가 성왕의 뜻 가짐이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있음을 알고 이 글을 올린 것이니 모두 실록(實錄)이다.
성왕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하였으며, 학자(學資)를 넉넉하게 하여 선비를 기르고 복시(覆試)로 어진이를 구하였으며, 수령(守令)을 독려하여 백성을 구휼하고, 효절(孝節)을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으며, 매양 수찰(手札)을 내리매 글뜻이 간측(懇惻)하여 풍속을 바꾸어 놓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거란이 병탄(倂呑)할 생각을 가지고 장수를 보내와 침략하자, 일찍이 서도(西都)에 친히 나아가서 안북(安北)에 진군(進軍)하였던 일은 바로 구준(寇準)이 주장한 전연(澶淵)의 계책이니, 관방(關防)을 절령(岊嶺)으로 옮기고 쌓인 곡식을 대동강(大同江)에 버리려 하였던 일은, 그 당시 용렬한 신하의 의논이요 반드시 성왕의 본뜻은 아닐 것이다.
일찍이 만약 승로가 올린 이 글을 보고 기뻐하고 유의하여 부과(浮誇)를 버리고 독실(篤實)을 힘쓰며, 옛것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정치를 행하여 게으름이 없되, 일을 너무 조급히 이루려는 생각을 경계하며, 몸소 행하고 마음속으로 깨달아서 덕화(德化)가 남에게 미치게 하였더라면, 제(齊)가 변하여 노(魯)에 이르고, 노가 변하여 도(道)에 이름을 바랄 수 있었을 것인데, 소손녕(蕭遜寧)이 어찌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는다고 무함하여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으며, 성왕이 거란이 침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몽전(李蒙戩)을 거란의 군영(軍營)에 보내어 침략하게 된 이유를 물으니, 그 장수가 “너희 나라가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우리가 하늘을 대신하여 벌을 행한다.” 하였다.
이지백(李智伯)이 어찌 감히 본토의 풍속을 개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들어 적을 물리칠 계책으로 삼았겠는가? 성왕이 중국 풍습을 즐기므로 국민이 좋아하지 않았는데, 거란의 난이 일어나자, 지신주(知信州) 이지백이 아뢰기를 “선조의 법도를 다시 행하고 남의 나라 법을 쓰지 않으면, 국가가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연등(燃燈)ㆍ팔관(八關)ㆍ선랑(仙郞) 등의 행사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늙기 전에 후계자를 세웠던 일은 국가를 위한 생각이 장원한 것이요, 죽을 임시에 사면령(赦免令) 내리기를 허락지 않은 일은 사생(死生)의 이치에 밝게 통달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뜻을 가짐이 더불어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아, 어질도다!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정관정요(貞觀政要)》 : 당 태종(唐太宗)이 근신들과, 정관 시대에 행한 정치상의 득실에 관하여 문답한 말을 모아놓은 책. 치
도(治道)의 요체(要諦).
[주D-02]오조(五朝) : 여기서는 태조(太祖)ㆍ혜종(惠宗)ㆍ정종(定宗)ㆍ광종(光宗)ㆍ경종(景宗)을 가리킨다.
[주D-03]백륙(百六) : 재액(災厄)의 연수(年數)로 난세(亂世)를 의미한다. 음양가(陰陽家)의 설에 의하면, 4천 6백 17세(歲)를 1원
(元)으로 보고 초원(初元)의 1백 6세에 양구(陽九)가 있다. 즉 1백 6세 중에 재세(災歲)가 아홉 번 있는데, 그 수가 가장 많으므
로 액회(厄會)라 한다. 9액(厄)은 양액(陽厄)이 5, 음액(陰厄)이 4로 양은 한재(旱災), 음은 수재(水災)이다.
그 다음에 또 음 9 양 9, 음 7 양 7, 음 5 양 5, 음 3 양 3이 있다. 그러므로 1원 중에 평상 해는 4천 5백 60세, 재액의 해는 57세
로 도합 4천 6백 17세가 1원이 된다고 한다.
[주D-04]천 년 : 1천 년 만에 황하수(黃河水)가 한 번 맑아지면 성인(聖人)이 난다는 말이 있다.
[주D-05]그들이 …… 않았으니 : 태조 25년 10월에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낙타 50필을 바쳤는데, 태조는 그 사신 30명은 섬에 유배하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어놓아 굶어 죽게 하였다.
[주D-06]옛 임금 : 여기서는 신라(新羅) 말 왕 경순왕을 가리킨다.
[주D-07]적(敵) : 《고려사》에는 진(陣) 자로 되어 있다.
[주D-08]역수(逆竪) : 반역한 자식. 여기서는 신검(神劍)을 가리킨다.
[주D-09]감무(監撫) : 임금이 출정(出征)할 때에 태자(太子)가 남아서 나라를 지키면 그것을 감국(監國)이라 하고, 임금을 따라 출정하
면 그것을 무군(撫軍)이라 한다.
[주D-10]인연(因緣)을 맺으며 : 불법(佛法)을 숭상하여 절을 짓는 등의 좋은 일을 베풀면 착한 인연을 심는 것이라 복을 받는다고 한다.
[주D-11]처음은 …… 적다 : 《시경》 대아(大雅) 탕(蕩)에 보인다.
[주D-12]마침내 …… 것입니다 : 이 대문이 《고려사절요》는 본문과 같으나 《고려사》에는 “마침내 흥화랑군이란 아들이 있었으나 나이
아직 어렸고 또 여러 아우에게 그 후사를 부탁하지 않았다.[終有子曰興化郞君而年少 又不能囑後事於諸弟]”로 되어 있는데,
앞뒤의 경우로 보아 《고려사》가 옳은 듯하다.
[주D-13]그 중에는 …… 않겠습니까 : 《고려사》에는 “그때에 또한 해를 당한 사람이 많았으니, 이는 모두 후생 참적들이므로 진실로 애
석히 여길 것은 없다.[其時亦有人遇害衆多 皆是後生讒賊 誠不足惜]”고 되어 있고 《고려사절요》도 《고려사》와 거의 같은데
《고려사》의 잘못인 듯하다.
[주D-14]학자(學資) : 섬학전(贍學錢)의 약칭. 국학(國學)에 소요되는 자금을 마련하여 생도들의 공궤(供饋) 등을 돕는다.
[주D-15]복시(覆試) : 초시(初試) 다음에 실시하는 과거(科擧).
[주D-16]구준(寇準)이 …… 계책이니 : 송 진종(宋眞宗) 때 거란이 침입하자, 구준이 진종에게 친정(親征)하기를 권하여 마침내 거란을
물리치고 전연(澶淵)에서 거란과 맹약을 맺고 돌아왔다. 《宋史 卷281 寇準傳》
[주D-17]제(齊)가 …… 이름 : 공자가 당시 제(齊)ㆍ노(魯) 두 나라의 풍속을 선왕(先王) 시대의 순후한 풍속으로 변화시켜 보려는 뜻에
서 한 말로 《논어》 옹야편(雍也篇)에 보이는데, 즉 공리(功利)와 과사(誇詐)를 숭상하여 오히려 패자(霸者 환공(桓公))의 여습
이 있는 제 나라는 한 차례 변화하면 현재의 노 나라에 미칠 수 있고, 예교(禮敎)와 신의(信義)를 숭상하여 오히려 선왕(先王 주
공(周公)의 유풍이 있는 노 나라는 한 차례 변화하면 옛날 주공 시대의 순후한 정치에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고려를
점차 변화시켜 훌륭한 나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주D-18]이지백(李智伯) : 《고려사》에는 이지백(李知白)으로 되어 있다.
[주D-19]죽을 …… 일 : 성종의 병이 위중하자 평장사(平章事) 왕융(王融)이 사유(赦宥)하기를 청하니, 성종은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
은 하늘에 매인 것인데, 어찌 죄수를 놓아 주면서까지 수명을 연장할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목왕(穆王)
제현은 말한다.
경보(慶父)가 노(魯)에서 예(禮)를 범했고, 여불위(呂不韋)가 진(秦)에 화(禍)를 전가했고, 제 환공(齊桓公)은 강씨(姜氏)를 죽였고, 진 시황(秦始皇)은 노애(嫪毐)를 찢어 죽였으나, 어찌 만세의 수치를 씻을 수 있으랴? 목종은 전철(前轍)을 경계하여 처음에 방지하지 못하여, 결국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그 앙화를 당하고 사직이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선양(宣讓 목종의 시호) 개인의 불행은 불행이라 할 것도 없다.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제 환공(齊桓公)은 …… 죽였고 : 노(魯)의 공자(公子) 경보(慶父)가 노 장공(魯莊公)의 부인이자 제 환공의 딸인 애강(哀姜)
과 간통하니, 제 환공이 그 딸 애강을 불러다가 독약을 먹여 죽였다. 《左傳 閔公 2年》
[주D-02]진 시황(秦始皇) …… 죽였으나 : 여불위(呂不韋)가 진 시황의 어미인 태후(太后)와 간통하고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노애(嫪
毐)를 환관(宦官)으로 삼아 태후와 간통하게 하였는데, 진 시황 9년에 노애는 삼족이 멸망되었다. 《史記 呂不韋傳》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현왕(顯王)
제현은 말한다.
시중(侍中)인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이 다음과 같이 찬(贊)하였다.
“옛글에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그것을 폐(廢)할 수 있으랴?’ 하였다.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음란 방종하였으며 몰래 나라를 빼앗으려 하였는데, 목왕은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그 일을 알고도 금하지 않다가, 병이 위독할 때에 이르러서야 백성들의 촉망(屬望)을 알아차려 천추태후의 악당(惡黨)을 제거하고, 사자(使者)를 급히 보내어 태자를 맞아 와서 왕위를 전해 주어 왕실을 튼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모(姨母 천추태후)가 끼친 화근으로 병권 가진 신하(강조(康兆)를 가리킨다)가 반역을 일으키고, 강한 이웃 나라(거란)가 틈을 엿보아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매, 경성의 궁궐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임금이 파천(播遷)하였다.
반정(反正)한 후에는 오랑캐와 화호(和好)를 맺고, 전쟁을 쉬고 문덕(文德)을 닦으며, 부세(賦稅)를 박하게 하고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내외(內外)가 평안하고 농상(農桑)이 자주 풍년들었으니, 이른바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하랴?’ 한 말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문헌공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天命)이란 것이다.
구천(句踐)은 쓸개를 씹어 회계산(會稽山)의 치욕을 씻었고, 소백(小白)은 거(莒)의 고난(苦難)을 잊었기 때문에 화를 제(齊)에 끼쳤다.
인군이 천명만 믿고 욕심을 멋대로 부려 법도를 파괴하면, 비록 나라를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세상이 다스려졌을 때에도 장차 요란하게 될까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도 장차 위태하게 될까 생각하여, 종말을 처음과 같이 삼가서 일으켜 준 천명에 보답하는 것이니, 현왕 같은 이는 공자가 이른바 ‘나는 그에게 흠잡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구천(句踐)은 …… 씻었고 : 춘추 시대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에게 패하여 회계산(會稽山)에서 항복하고 돌아와
서, 국력을 길러 마침내 오를 멸하여 원수를 갚았다.
[주D-02]소백(小白)은 …… 끼쳤다 : 소백(小白)은 춘추 시대 오패(五霸)의 하나인 제 환공(齊桓公)의 이름. 그 형 양공(襄公)이 음란하
매 화를 당할까 염려하여 거(莒) 땅으로 달아나 온갖 고생을 하다가 양공이 죽은 뒤에 돌아와 임금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관중
(管仲)의 말을 따라 패업(霸業)을 이루게 되었으나, 뒤에 가서는 소인들을 등용하여 정사가 어지럽게 되었다.
[주D-03]나는 …… 없다 : 공자가 우왕(禹王)의 공덕(功德)을 찬탄한 것인데, 《논어》 태백(泰伯)에 보인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덕왕(德王)
제현은 말한다.
경릉조(慶陵朝 경릉은 충렬왕의 능호) 때 두타산인(頭陀山人) 이승휴(李承休)가 지어 올린 《제왕운기(帝王韻記)》에,
덕은 어찌하여 사년 만에 그쳤느냐 / 德何止四年
봉새가 날아와 상서를 바쳤었네 / 鳳鳥來呈瑞
하였는데 실록(實錄)을 상고하면 그 일은 볼 수 없고, 다만 속담에 전하기를,
“봉새가 날아오니 뭇 까마귀들이 따라다니며 지저귀므로 봉새는 그만 날아가 버렸다.
국인들이 까마귀를 미워하여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활을 가지고 쏘아 잡았으므로, 덕왕 한 시대에는 경성에 까마귀가 없었다.”
한다. 대저 봉새로 말하면 날짐승의 어른인데, 뭇 까마귀에게 쫓겨갔다면 어찌 봉새라 할 수 있겠는가? 대저 《제왕운기》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덕왕은 거상중(居喪中)에 아들로서의 효도를 다하고, 정사를 하는 데는 그 아버지가 하던 일을 고치지 않고, 옛 신하 서눌(徐訥)ㆍ왕가도(王可道)ㆍ최충(崔冲)ㆍ황주량(黃周亮) 같은 이를 임용(任用)하니, 조정에는 속이고 숨기는 자가 없고 백성은 생업에 편안하였으므로, 비록 봉새가 아니라 할지라도 존호를 덕(德)이라 한 것이 또한 마땅치 아니한가?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봉새[鳳鳥] : 《제왕운기》에는 채우(彩羽)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정왕(靖王)
제현은 말한다.
거란이 욕심이 많고 사나워서 족히 믿을 것이 못되므로 태조(太祖)가 깊이 경계하였다. 그러나 한번 재앙이 있었던 것을 구실삼아 전날 좋게 지내던 우호를 끊은 것은 또한 좋은 계책이 아니었다.
현왕은 어려운 때에 반정(反正)하느라 조금도 겨를이 없었고, 덕왕은 나이가 아직 장년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싸움을 더욱 경계해야 하므로, 왕가도(王可道)의 화친(和親)을 끊자고 한 의논이, 우호(友好)를 계속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황보유의(皇甫兪義)의 의논만 못하였다.
정왕이 왕위를 이은 지 3년 만에 우리나라 대부(大夫) 최연하(崔延嘏)가 거란에 가고 4년에 거란의 사신 마보업(馬保業)이 와서 이때부터 다시 우호의 맹약을 회복하였으니, 그들을 지성으로 감동시킨 것이 아니었다면 반드시 기이한 계책을 써서 오게 하였을 것이다. 군자가 말하기를,
“선대의 뜻을 잘 받들어 그 나라를 보전하였다.”한다.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한번 …… 것 : 주 27) 참조.
[주D-02]나이가 …… 하므로 : 공자가 “나이가 장년이 되면 혈기가 한창 왕성하니 싸움을 경계해야 된다.[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
鬪]” 하였다. 《論語 季氏》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문왕(文王)
제현은 말한다.
현왕ㆍ덕왕ㆍ정왕ㆍ문왕 네 임금은 아버지가 시작하여 아들이 계승하기도 하고,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어받기도 하면서, 거의 80년 동안을 계속하였으니 훌륭하다고 할 만하다.
문왕은 근검 절약을 몸소 실천하고, 어질고 재주 있는 이를 모두 등용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학문을 숭상하고 노인을 공경하였으며, 벼슬을 적격자가 아니면 주지 않고, 권력이 친근자에게 옮겨가게 하지 않아서, 비록 척리(戚里)의 친척이라 하더라도 공이 없으면 상주지 않고, 총애하는 측근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죄가 있으면 반드시 처벌하였으며, 환관(宦官)과 급사(給使)는 수십 명에 불과하고, 내시(內侍)는 반드시 공능(功能)이 있는 자를 뽑아서 충당하였는데 역시 20여 명이 넘지 않았다.
그리고 쓸데없는 관직을 없애니 일이 간편하고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하였으며, 국고에는 해묵은 곡식이 쌓였고 집집마다 요족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당시에 태평시대라 일컬었다. 송조(宋朝)에서 해마다 포상(褒賞)하는 명을 내리고, 요(遼)에서는 해마다 왕의 생신을 경하하는 예를 표시하였으며, 동에서는 왜(倭)가 바다를 건너와 보배를 바치고, 북에서는 맥(貊)이 찾아와서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임완(林完)이 ‘우리나라의 현성(賢聖)한 임금이다.’ 하였다.
그런데 다만 한 기현(畿縣)을 옮겨 한 절을 짓되, 높은 집은 궁궐보다 사치스럽게 하고 높다란 담은 도성과 짝할 만하게 하며, 황금으로 탑을 만들고 온갖 시설을 이에 맞추어 거의 소통(蕭統)에 견줄 만하게 해서, 남이 훌륭하게 되기를 바라는 군자가 이것을 보고 탄식할 줄 몰랐을 뿐이다.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한 기현(畿縣)을 …… 짓되 : 문종이 흥황사(興王寺)를 덕수현(德水縣)에 지을 때, 그 현치(縣治)를 양천(楊川) 즉 지금의 개풍
군(開豐郡) 중면(中面) 덕수리(德水里)로 옮긴 것을 말한다.
[주D-02]소통(蕭統) : 양 무제(梁武帝). 양 무제는 불교를 매우 신봉하여 세 번이나 삼보(三寶)의 노(奴)가 되기까지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순왕(順王)
제현은 말한다.
삼년상(三年喪)은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임금 중에 재최복(齊衰服)을 입고 전죽(饘粥)을 먹으며 안색이 초췌하고 곡성이 슬퍼서, 사방 사람들로 하여금 와서 보고 열복(悅服)하게 하는 이는 적다.
순왕은 부왕의 상중에 몹시 슬퍼하다가 그것이 병이 되어 4개월 만에 승하하였으니, 비록 성인의 예제에는 지나쳤다 하더라도, 어버이를 사랑함에는 지극한 효도였다. 아, 슬프다!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선왕(宣王)
제현은 말한다.
시(詩)란 뜻의 표현이다. 마음속에 있을 때에는 뜻이 되고, 말로 나타냈을 때에는 시가 된다. 선왕이 문덕전(文德殿)에서 지은 이약시(餌藥詩)를 보면, 조맹(趙孟)이 해를 보고 한 말과 같은 것이 있음은 웬일인가? 조맹은 겨우 열국(列國)의 경상(卿相)인데도 그 말이 구차스러웠으므로 군자가 오히려 기롱하였는데, 하물며 임금이랴?
선왕의 총명으로 학문을 좋아하였으니, 성현의 글이 아닌 것은 읽지 않아 구차스러운 뜻이 없었다면, 명군(明君)과 양상(良相)이 화답하는 시가(詩歌)는 바랄 수 없더라도, 대풍가(大風歌) 같은 강개스러운 시가야 어찌 짓지 못하랴? 3년이 채 못 되어서 군신(群臣)을 버리고 승하하였으니, 슬프다.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조맹(趙孟)이 …… 말 : 《左傳》 昭公 元年에 의하면 조맹이 태양의 그림자를 보고 “아침에 저녁을 알지 못하는 법인데, 누가 5
년을 기다릴 수 있나.” 하여 자기의 명을 태양의 그림자에 비하여 무상함을 예언하였다.
[주D-02]명군(明君)과 …… 시가(詩歌) : 순(舜) 임금이 신하들과 노래로 서로 화답하기를 “원수는 밝고 신하는 어질다.” 하였다. 《書
經 益稷》
[주D-03]대풍가(大風歌) : 한 고조(漢高祖)가 천자가 된 뒤에 고향인 풍패(豐沛)를 찾아가 부로(父老)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노래하
기를 “큰바람이 일어남이여 구름이 흩날리도다. 위엄이 사해를 덮음이여 고향에 돌아왔도다. 어떻게 맹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꼬.
[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하였다. 《史記 高祖紀》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헌왕(獻王)
제헌은 말한다.
우(禹)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였음은 후세를 염려한 뜻에서였고, 유복자(遺腹子)를 세우고 선왕이 입던 옷을 걸어 놓고 조회를 하게 해도 천하가 요동하지 아니함은 본래 분(分)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현왕의 세 아들이 형제간에 왕위를 서로 전해서 순왕에 이르렀는데, 순왕은 거상중에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요사(夭死)하여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왕위가 선왕에게 전해지고, 선왕이 승하하며 태자(太子)가 그 왕위를 이었으니, 이분이 바로 헌왕이다.
국인(國人)들이 현왕의 아들이 형제간에 서로 전한 것을 보고 듣는데 익숙하였으므로, 선왕이 다섯 아우가 있었는데도 어린 아들을 세웠다 하여 그것을 그르다 여기니, 생각하지 못함이 어찌 그리 심한가?
오직 주공(周公) 같은 친족이나 박망후(博望侯) 같은 신하를 얻어서 위임하여 돕게 하지 못하였으니, 그 위태롭고 어지러움이 곧 오게 되었던 것뿐이다. 후세에 불행히 강보(襁褓)속에 있는 어린 아들에게 벅차고 어려운 왕업(王業)을 전하게 되는 이는,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야 할 것이다.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우(禹)가 …… 뜻에서였고 : 요(堯) 임금이나 순(舜) 임금처럼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지 않고 신하에게 전하면, 후세에 쟁탈(爭
奪)의 난이 일어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우 임금은 아들에게 전하는 법을 정하였다는 뜻이다.
[주D-02]유복자(遺腹子)를 …… 아니함 : 한(漢) 나라 가의(賈誼)의 상소에 “법제가 정해지면 임금이 죽은 뒤에 아들이 어리면 전 임금
이 벗어 놓은 옷을 걸어 두고 조회를 하게 하여도 천하가 무사하다.” 하였다.
[주D-03]분(分)이 …… 때문이다 : 《呂氏春秋》에 “들에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여러 사람이 다투어 쫓다가 한 사람이 먼저
잡고 나면, 다른 여러 사람이 발을 멈추는 것은 분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4]주공(周公) …… 박망후(博望侯) : 주 성왕(周成王)이 어릴 때 즉위하였으므로 그의 숙부인 주공이 섭정(攝政)으로 잘 보좌하
였고, 한 소제(漢昭帝)가 어릴 때 즉위하자 박망후 곽광(霍光)이 잘 도와서 나라를 안정시켰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숙왕(肅王)
제현은 말한다.
한 고조(漢高祖)의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지혜로도 늘 혜제(惠帝)는 유약(柔弱)하고 조왕(趙王) 여의(如意)가 자신을 닮았다 하여, 여러 번 태자를 바꾸려 하면서, 대왕(代王 문제(文帝))이 마침내 태평천자(太平天子)가 될 줄을 모르고 그를 변군(邊郡)에 봉하였다. 그러나 대왕이 여씨(呂氏)의 화를 모면한 것은 고조의 총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 태종(唐太宗)의 현명함으로도 후계자를 옳게 정하지 못하고 마침내 혼암한 자[昏童 고종(高宗)]를 세웠다가 흉한 암탉[凶牝]으로 하여금 그 자손을 쪼아 거의 다 없어지게 하였으니, 더욱 탄식할 일이었다.
양한(兩漢) 4백 년 동안 천자 노릇한 자는 모두 효문제(孝文帝)의 후예요, 당(唐)의 3백 년 동안 중종(中宗)ㆍ예종(睿宗)으로부터 소종(昭宗)ㆍ애종(哀宗)에 이르기까지 역시 태종의 후손이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하늘의 뜻이지 사람이 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 문왕은 아들이 열 아홉이었는데도 나라를 중흥시킬 것을 나이 어린 숙왕에게 기대하더니, 숙왕이 번후(藩侯 지방에 봉한 왕자)로서 대통(大統)을 이어, 지혜는 난을 평정하고 인덕(仁德)은 태평을 이룩하였으며, 아들과 손자가 현명하고 착해서 대대로 이어받아 지금까지 4백 년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옛글에 ‘아들을 알아보는 데는 아버지만한 이가 없다.’ 하였는데, 그것은 문왕을 두고 한 말이리라.
[註解]
[주B-01]사찬(史贊) : 사실(史實)을 들추면서 포폄(褒貶)을 가하는 문체(文體)의 하나. 익재(益齋)는 본 사찬에서는 ‘신제현왈(臣齊賢
曰)’이란 문구를 서두로 하였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을 다룬 것이다. 그러나 본 번역에서는 경어를 쓰지 않기 위해 신(臣) 자
를 무시하였다.
[주D-01]흉한 암탉[凶牝] : 《서경》에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 하였는데, 여기서 흉한 암탉은 무후(武后)를 가리킨다.
[주D-02]그 자손을 쪼아 : 한 성제(漢成帝)의 후(后) 조비연(趙飛燕)이 황자(皇子)들을 해쳤으므로 당시에 “제비가 황손(皇孫)을 쪼아
먹는다.”는 동요(童謠)가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익재난고 제9권 하
서(序) 2편
1 제비전 서(諸妃傳序)
2 종실전 서(宗室傳序)
제비전 서(諸妃傳序)
부부(夫婦)가 있은 뒤에 부자(父子)가 있고, 부자가 있은 뒤에 군신 상하가 있게 된다. 예의(禮義)가 여기에서 시행되는 것이니, 부부는 인륜(人倫)의 근본이므로 국가의 치란(治亂)이 이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제비 알이 상(商)을 낳고 용의 침이 주(周)를 멸하였으며, 초(楚)는 번희(樊姬)로 말미암아 창성하고, 식(息)은 위씨(嬀氏) 때문에 망하였으니, 경계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제비전(諸妃傳)을 기술하되, 그 중에 아들이 없거나 크게 잘한 일, 또는 크게 잘못한 일이 없는 자는 생략한다.
[註解]
[주D-01]제비 알이 …… 멸하였으며 : 《史記》 殷紀에 “제곡(帝嚳)의 비(妃)인 간적(簡狄)이 제비 알을 먹고 잉태하여 설(挈)을 낳으
니, 설이 최초로 상(商)에 봉해지게 되었다.” 하였고, 《史記》 周紀에 의하면 “하(夏) 나라 말기에 용의 침을 받아 궤 속에 넣어
두었었는데, 주 여왕(周厲王) 때 그 궤를 열어 보았더니, 용의 침이 뜰에 흘러 검은 자라로 화하여 궁중으로 들어가매 궁중에 있던
동첩(童妾)이 그 자라를 보고 잉태하여 딸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포사(褒姒)이다.” 하였는데, 포사는 뒤에 주 유왕(周幽王)의
비(妃)가 되어 유왕을 유혹하여 주 나라를 멸망하게 했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종실전 서(宗室傳序)
국가의 제도에 종실(宗室)을 제왕(諸王)으로 칭한 것은 마치 한(漢)의 여러 유씨(劉氏)와 당(唐)의 여러 이씨(李氏)와 같으니, 동성(同姓)을 뜻한 것이지 벼슬이 아니다. 친존(親尊)에게는 공(公)이란 벼슬을 봉하고 그 다음은 후(侯)를, 소원(疏遠)한 자에게는 백(伯)을, 어린 자에게는 사도(司徒)ㆍ사공(司空)을 봉해서 안으로는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밖으로는 위세가 높게 하되, 그들로 하여금 벼슬을 하여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조종(祖宗)이 친척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김관의(金寬毅)의 《왕대종록(王代宗錄)》과 임경숙(任景肅)의 《경원록(瓊源錄)》은 종녀(宗女)와 종자(宗子)를 함께 열기(列記)하였으므로. 그 세보(世譜)를 펼쳐보면 혼란해서 분별할 수가 없으니, 소백(小白)은 제(齊)의 임금을 했으되 고모와 자매는 시집보내지 못했고, 조보(稠父)는 오(吳)에 장가들었으나, 오 맹자(吳孟子)라고 한 것은, 이에 비하면 족히 기롱할 것도 못된다.
그러나 표장하여 드러내니, 이 어찌 《춘추(春秋)》에서 노(魯) 나라의 일이라 해서 숨겼던 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종녀는 비록 친근하고 귀하다 하더라도 부인의 외부모가(外父母家)는 생략해도 좋다.
[註解]
[주D-01]소백(小白)은 …… 것 : 소백은 제 환공(齊桓公)의 이름. 《荀子》 仲尼에 “제 환공은 오패(五霸)의 으뜸이었으나 내행(內行)을
살펴보면 그 고모 자매 중에 시집가지 못한 자가 일곱 사람이나 있었다.” 하였으니, 즉 시집보내지 않고 자기 아내로 삼았던 것이
다.
노 소공(魯昭公)의 이름이 조(稠)인데, 《論語》 述而에 “노 소공이 오 나라에 장가들었는데, 동성인 까닭에 오맹자라 했다.” 하
였다. 자(子)는 송(宋) 나라의 성인데, 노 나라와 오 나라의 성이 다같이 희(姬)이기 때문에 동성을 숨기기 위해 송 나라의 성을 붙
인 것이다.
[주D-02]《춘추》에서 …… 아니겠는가 : 공자는 노(魯) 나라가 부조의 나라라 해서 노 나라의 불미스러운 일은 《춘추》에 기록하지 않았
다. 여기서는 왕실에서 동성끼리 혼인한 것을 밝히기 난처하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익재난고 제9권 하
책문(策問) 1편
책문(策問)
묻노라.
《논어(論語)》를 읽을 때에는 언제나 여러 제자들이 물은 것을 자신이 직접 묻는 것처럼 하고, 부자(夫子 공자(孔子))의 말을 오늘날 귀로 듣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 또 사서(史書)를 읽을 때에는, 그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어떤 일의 기회(機會)에 대해, 자신의 몸이 그런 경우에 있는 듯이 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옳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를 판단한 뒤에야 보탬이 있을 것이니, 선유(仙儒)들도 대개 이러한 말을 하였다.
또 번지(樊遲)가 농포(農圃) 배우기를 청한 것이나 자장(子張)이 간록(干祿) 배우기를 청한 것이나, 계로(季路)가 귀신 섬기는 것을 물은 것이나, 안연(顔淵)이 나라 다스림을 물은 것 같은 것들은 역시 각각 자기들의 포부를 말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제생(諸生)들이 만약 부자(夫子)의 문하에 있었다면, 물어서 배우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관중(管仲)은 소백(小白)을 섬기고 호언(狐偃)은 중이(重耳)를 섬겼는데 그들이 비록 인(仁)을 핑계로 세력을 부리고 음모로 승리를 취하였으나, 모두 이적(夷狄)을 물리치고 왕실(王室)을 높였다. 그러나 끝내 관중은 공렬(功烈)이 보잘것없다는 기롱을 들었고 호언은 간휼(奸譎)하여 바르지 못하다는 비방을 들었으니, 이도 잘한 일이라 할 수 없다.
숙손통(叔孫通)이 고조(高祖)를 위하여 예의(禮儀)를 제정하지 않았다면, 술에 취해 부르짖으며 칼로 기둥을 치는 행패가 반란에 이르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선왕(先王)의 예의를 잃은 것은 숙손통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조조(鼂錯)가 경제(景帝)를 위하여 제후(諸侯)의 땅을 줄이지 않았더라도 얼마 되지 않아 어찌 난이 일어나지 않았을까마는, 7국(國)의 군사가 일어난 것은 조조가 재촉한 것이다.
제생들이 만약에 관중과 호언의 소임을 맡았다면 허물은 없이 공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또 숙손통과 조조의 시대를 만났다면 책망을 받지 않고 그 폐단을 없앨 수 있었겠는가? 과장도 겸손도 하지 말고 사실대로 진술하기를 바라노라.
묻노라.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하후씨(夏后氏)는 50묘에서 공세(貢稅)를 받고, 은인(殷人)은 70묘에서 조세(助稅)를 받고, 주인(周人)은 1백 묘(畝)의 철세(徹稅)를 받았으니, 그 실상은 모두 10분의 1이다.”
하고, 또,
“어진 정치는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경계가 공정하지 않으면 토지의 구획이 고르지 못하고 곡록(穀祿)이 평등하지 못하며, 경계가 공정하면 토지를 분배하고 녹을 정하는 것은 앉아서도 제정할 수 있다.”
하였다.
이처럼 경계(經界)ㆍ정전(井田)ㆍ십일(什一)의 세법은 천하 국가를 경영하는 데 의당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상앙(商鞅)이 정전법(井田法)을 폐지하고 천맥법(阡陌法)을 마련함으로부터 진(秦) 나라가 날로 부강해져서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천맥법을 마련한 그 이익이 정전법보다 나은 것 같다.
맹자의 말이 과연 옳다면, 한 고조(漢高祖)가 관중(關中)에 들어가 진(秦) 나라를 대신해서 그 가혹한 법을 없애고 민심을 수습하려 할 때, 어째서 정전법의 복구는 의논하지 않았으며, 그 후 효문제(孝文帝)처럼 백성을 사랑하고 효무제(孝武帝)처럼 옛것을 좋아하는 임금이 있었는데도 어째서 가의(賈誼)와 동중서(董仲舒)가 역시 정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 조종(朝宗)이 나라를 세우고 지켜온 지 지금까지 4백 년이라,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와 백성에게 세를 받아들이는 제도가 대략 옛날 제도와 부합되고 후세에 전할 만하다.
이른바 내외 족반(內外足半)의 군정ㆍ전록지위(轉祿之位)의 역분(役分)ㆍ구분(口分)ㆍ가급(加給)ㆍ보급(補給)의 명칭과 조세의 후박(厚薄)을 9등급으로 나누고 5종(種)으로 나누는 제도가 있으며 그 밖의 부(負)니 결(結)이니 하는 것은 토지를 측량하는 것이며, 두(斗)니 석(石)이니 하는 것은 곡식을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옛날에 경계(經界)ㆍ정전(井田)ㆍ십일(什一)의 법과 같은 것인가, 같지 않은 것인가?
법제가 이미 4백 년 동안이나 오래 시행되었으니 폐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은가, 혹은 고치는 것이 좋은가?
근래에 와서 공신록권(功臣祿券)의 사패전(賜牌田), 불사(佛寺)에 판정(判定)으로 시주해서 바치는 토지, 행성이문소(行省理問所)의 순군(巡軍)ㆍ홀적(忽赤)ㆍ내승(內乘)ㆍ응방(鷹坊)에 하사한 토지, 권호(權豪)들이 겸병한 것,
교활한 무리가 빼돌린 것 등이 백성들에게 해독을 입히고 나라를 좀먹어 그 폐단이 분분히 일어나서, 국고에 들어오는 것은 강화도(江華都)에서 난을 겪을 때에 비교하여도 10분의 2~3도 되지 못하니 만약에 3년이나 5년의 수재와 한재가 있게 되면 어떻게 그 급함을 구제할 수 있으며, 천백 명의 군량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작년에 전 정승 왕탈환(王脫歡)과 좌정승 김나해(金那海)가 중국에 들어갔을 때에 돌아가서 토지를 정리하게 하라는 천자의 명이 있었다. 두 정승이 돌아와서는 정리도감(整理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사송(詞訟)과 분쟁이 수없이 일어나고 체포와 심문이 끝없이 잇달았으므로, 교활한 무리들이 자못 두려워할 줄은 알게 되었으나 비방과 원망을 막을 수 없었다.
한갓 기삼만(奇三萬)이란 자의 죽음으로 이미 조정의 힐책을 받아 그 형세가 다시 떨치지 못할 것 같으니, 앞에서 이른바 백성에게 피해를 입히고 나라를 좀먹게 하던 자들이 어찌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하지 않겠는가? 대개 천자의 명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세상에 드문 혜택을 아랫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면, 조정의 의논이나 천하의 공론에 어떠하겠는가?
남북(南北)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동방(東方)에다 하나의 성(省)을 세워 그 고장의 풍속을 변화시키자고 청하였으나, 다행하게도 조정에서 ‘우리는 의리를 생각하여 근왕(勤王)한 공이 있고, 세조황제로부터 우휼(優恤)하라는 조서가 있었다.’ 하는 글을 올려, 이에 힘입어 여러 번 물리쳐 시행이 되지 못하였다.
이제 혹시라도 기회를 틈타 성(省)을 세우자는 말을 하지 않을까? 대개 하기 어려운 때에 무엇인가를 이룩하는 것이 어려운 일을 능히 한다는 것이다. 제생(諸生)들은 모두 국가의 일에 마음이 있을 것이니, 그 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해주기 바란다.
묻노라.
제왕의 계통은 사철이 서로 교대하는 것과 같아서 문란할 수가 없으며 천명과 인심의 돌아감을 또한 속일 수 없다. 삼황 오제(三皇五帝)의 이전은 아득히 멀어서 비록 사적에는 실려 있으나 상고하여 증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서경(書經)》을 산정(刪定)할 때 당우(唐虞) 시대부터 주(周) 나라까지만을 끊어서 적었다. 주 나라가 쇠미한 뒤에 동서(東西 동주(東周)ㆍ서주(西周)를 가리킨다)로 나누어졌다가, 조룡(祖龍 진 시황(秦始皇)을 가리킨다)이 드디어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고, 이세(二世)에 이르러 한(漢) 나라가 대신하였다가, 12대에 거군(巨君 왕망(王莽)의 자)이 찬탈하였으니, 조룡과 거군은 분명 정당한 정통의 왕위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런데 자장(子長 사마천(司馬遷)의 자)이 진(秦) 나라를 제기(帝紀)로 찬술하고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의 존칭)이 신(新) 나라를 천자의 기년(紀年)으로 포함하여 엮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동한(東漢)이 나뉘어 삼국(三國)이 되었다가 후에 서진(西晉)이 어지러워지자 오호(五胡) 시대가 되었다. 이때에 탁발씨(拓跋氏)ㆍ고씨(高氏)ㆍ우문씨(宇文氏)ㆍ하륙혼씨(賀六渾氏)ㆍ유씨(劉氏)ㆍ이소씨(二蕭氏)ㆍ진씨(陳氏)가 남북으로 버티고 서서, 서로 색로(索虜)니 도이(島夷)니 하며 시비가 벌떼처럼 일어났으니, 이른바 제왕은 사시(四時)가 서로 교대하는 것같이 운수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은 과연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수당(隋唐)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오계(五季)에 이르러서 환란이 극도에 이르렀고, 거란이 이미 북쪽을 차지하고 있어서 송(宋) 나라 강토는 백구(白溝)에 그치고 말았으며, 강왕(康王)이 비록 남쪽으로 파천하였으나 금(金) 나라 군사가 장강(長江)을 건너지 못하였으니, 이때에 인심과 천명의 돌아감이 또한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모두가 분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치(漢雉 치(雉)는 여후(呂后)를 가리킨다)ㆍ당조(唐曌 조(曌)는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말한다)를 제기(帝紀)에 나열하였으니, 맹견(孟堅 반고(班固)의 자)ㆍ영숙(永叔 구양수(歐陽脩)의 자)의 사필(史筆)이 과연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얻었다 하겠는가?
정이천(程伊川)은 무씨(武氏)를 여와씨(女媧氏)에 비교하여 비상한 변통이라 하고는 여씨(呂氏)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또한 할 말이 있는가? 공손신(公孫臣)의 무리들의 종시오덕론(終始五德論)이 또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내 이제 제생들에게 묻는 것은 또한 스스로가 그 의심되는 것을 질의하고자 할 뿐이다.
묻노라.
《논어(論語)》에,
“이미 사람이 많으면 부(富)하게 할 것이며, 부하게 되었으면 가르칠 것이니라.”
하고, 또,
“선인(善人)이 백성을 가르친 지 7년 만이면 그들로 하여금 전쟁에도 나가게 할 수 있다.”
하고, 또,
“선인이 1백 년 동안 국가를 다스리면 악한 사람을 교화시켜서 사람 죽이는 일을 없앨 수 있다.”
하고, 또,
“정치로 선도하고 형벌로 다스리게 되면 백성들이 죄에 빠지는 것이야 면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르고, 덕으로 선도하고 예로 다스리게 되면 부끄러움도 알고 또 올바르게 된다.”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성인의 말로 학자들이 마땅히 깊이 체득해야 할 바이다.
국가에서 원(元) 나라를 섬기고 나서 중외(中外)가 걱정이 없고 여염이 즐비하며 행인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백성은 날로 은부(殷富)해지고 들판은 날로 개간되어, 염분이 많은 땅은 논을 만들고 황무지는 화전으로 경작하니, 그 어찌 백성이 많게 된 것이 아니랴.
그러나 명전(名田)을 받아 부역을 바치는 자가 1백분의 2~3이 되지 않아도 호부한 집은 그릇을 금과 옥으로 만들고 장사치의 아내들도 비단옷을 입고 다니니, 어찌 부하다 하지 않으랴. 그러나 의식(衣食)이 떨어지고 이식(利息)을 갚느라 헐벗고 굶주린 자가 10에 8~9는 되었다.
다행하게도 성대(聖代)를 만나 천하가 같은 문자(文字)를 쓰게 되어 집집마다 정주(程朱)의 책이 있고 사람마다 성리(性理)의 학문을 알고 있으니, 그 교화하는 방법이 또한 어지간하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로서 학문을 넓히고 행실을 독실히 하는 자가 과연 누구이며, 벼슬아치로서 덕을 이루고 나라의 재목이 될 만한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선비로도 오히려 이런데 백성에게야 어찌 허물하랴.
전에 이미 권신(權臣)을 소탕하고 개성에 다시 도읍하였다. 충경(忠敬)ㆍ충렬(忠烈)이 먼저 일어나고, 충선(忠宣)ㆍ충숙(忠肅)이 그 뒤를 이었는데, 중책(重責)을 맡길 만한 신하들이 많이 나와 능히 그 악(惡)을 바루고 임금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정치를 이룩하였으니, 대개 백성을 교화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오래라 하겠다.
그런데 벌떼처럼 일어나는 왜적들이 배를 이끌고 와 강토를 침범할 때에는 그들을 쫓아내고 잡는다는 모사가 결국 가난한 백성을 짜내서 그 비용과 식량을 충당하고, 농부들을 몰아다가 군사와 마필을 보충하되, 법으로 금지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한갓 결망(觖望)의 헛소문만 듣게 되니, 어찌 이른바 전쟁에 나가게 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또 얻은 것을 잃을까 걱정하는 비부(鄙夫)와 불평을 품은 무리들이 감히 내란을 꾸며 기시(棄市)되는 것을 자초(自招)하였으니, 어찌 이른바 악한 자를 교화시켜서 죽이는 일을 없앤다 하겠는가. 합좌(合坐)가 있어 큰 일을 계획하고 정방(政房)이 있어 출척(黜陟)을 단행하며, 감찰(監察)을 맡은 관리는 죄를 다스리고 잘못을 바루며, 법(法)을 맡은 관리들은 의문을 밝히고 옥사를 판정하는가 하면,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어질고 검소하여 풍류나 사냥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성색(聲色)을 멀리하고 기로(耆老)들을 방문하며, 대신들을 예우하여 전에 없던 예문(禮文)을 닦고, 종묘(宗廟)에 친히 제사를 올리니, 그 덕의와 예절로써 인도하고 다스렸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조정에는 덕으로 양보하는 풍속이 없고 민간에는 태평한 기상이 없으며, 시비가 분분하고 도둑이 일어나고 있으니, 오히려 요행으로 면하는 것도 얻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그 부끄러움을 알고 감화되기를 바라겠는가? 무릇 이렇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제생들은 기탄없이 말할 수 있는 조정을 만났고 잘 다스리기를 원하는 임금을 만났으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원대히 하여 이와 같은 폐단이 생기게 된 이유를 추구하고, 이 백성을 새롭게 할 방도를 진술하라. 유사자(有司者)가 장차 우리 임금에게 올려서 국가에 실시하게 하도록 한다면, 이 어찌 작은 도움이라 하겠는가.
[註解]
[주D-01]숙손통(叔孫通) : 처음에는 진(秦) 나라에 벼슬하다가 한(漢)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당시 한(漢)의 공신들이 난폭하게 칼로 대
궐 기둥을 치며 공을 다투므로, 그를 억제하기 위한 예의(禮儀)를 제정하였다.
[주D-02]조조(鼂錯) : 한 경제(漢景帝)를 위하여 제후(諸侯)의 봉지(封地)를 줄이라고 제의하다가 오(吳)ㆍ초(楚) 등 7국이 조조를 토
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조조는 동시(東市)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주D-03]내외 족반(內外足半) : 족반은 족정(足丁)과 반족정(半足丁)을 말한다. 고려 시대에 병역(兵役)에 보충되는 자를 위하여 분배
되는 토지의 단위로서 족정은 17결(結), 반족정은 7~8결이다. 혹은 20~60세의 남정(男丁)을 족정, 16~20세의 미성년 남정을
반족정이라 하기도 하여 정설(定說)이 없다.
[주D-04]전록지위(轉祿之位) : 전시과(田柴科)를 말함인데, 전시과는 고려 때 벼슬아치에게 그 관급(官級)에 따라 토지와 땔나무를 댈
임야(林野)를 반급하던 제도. 원칙으로 세습(世襲)이 아니었으나 공신(功臣)에게 주던 공음전시(功蔭田柴)와 관청에 급전(給
田)으로 주는 공해전시(公廨田柴)는 대를 물리게 하였다.
[주D-05]역분(役分) : 공신(功臣)에게 그 공의 차등에 따라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주는 역분전(役分田)을 말한다.
[주D-06]구분(口分) : 자손이 없이 죽은 관원의 아내, 부모가 모두 죽은 출가 전의 딸이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자손이 없이 죽은 군인의
아내에게 그 등분에 따라 주던 토지를 구분전(口分田)이라 한다.
[주D-07]왕탈환(王脫歡)과 …… 김나해(金那海) : 《동서강목》 등에는 왕후(王煦)와 좌정승 김영돈(金永旽)으로 되어 있다. 탈환과 나
해는 이들의 원 나라식 이름인 듯하나 미상.
[주D-08]종시오덕론(終始五德論) : 오행(五行)의 덕(德)으로 상승하는 논리. 제왕(帝王)이 바뀔 때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ㆍ
토(土)의 덕으로 서로 전승함을 이름인데, 한 문제(漢文帝) 때 공손신(公孫臣)이 오덕(五德)의 제정에 따라 정삭(正朔)ㆍ의복
(衣服)ㆍ제도(制度)를 개정하자는 의론을 임금에게 진술하였다. 《漢書 文帝記》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익재난고 제9권 하
논ㆍ송ㆍ명ㆍ진찬ㆍ잠(論頌銘眞贊箴) 15편
1 범증론(范增論)
2 오운(伍員)ㆍ소불위(蘇不韋)에 대한 논
3 삼왕묘(三王廟)를 배알하고 각각 송(頌)을 올리다
4 진성명(秦城銘)
5 식영암(息影菴) 벼루의 명
6 최춘헌(崔春軒)의 호시명(壺矢銘)
7 김추밀(金樞密)의 사정명(思亭銘)
8 백낙천 진찬(白樂天眞贊) 복건(幅巾)과 야복(野服)으로 지팡이를 짚고 홀로 걷는 모양.
9 소동파 진찬(蘇東坡眞贊) 황관(黃冠)에 지팡이를 옆에 끼고 돌 위에 앉아서 휘파람 불고 있다.
10 송광 이 국사 진찬(松廣李國師眞贊) 왕명을 받들어 찬하다.
11 죽헌 김 정승 진찬(竹軒金政丞眞贊)
12 안겸재 진찬(安謙齋眞贊) 병서(竝序) 문성은 안향(安珦)의 시호.
13 익재진 자찬(益齋眞自讚)
14 면주(沔州)의 지(池)ㆍ대(臺)ㆍ당(堂)ㆍ정(亭)의 명(銘) 소경(少卿) 곽충룡(郭种龍)이 군수로 있을 때 지어 놓은 것이다.
15 삼축잠(三畜箴)
범증론(范增論)
누가 묻기를,
“한(漢) 나라는 삼걸(三傑)을 써서 왕이 되고, 초(楚) 나라는 범증(范增)을 쓰지 않아서 망했으니, 그렇다면 범증과 삼걸과는 누가 더 나은가?”하기에, 나는, “범증은 진평(陳平)과 견주어도 오히려 못하다 할 수 있는데, 더구나 삼걸에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한 고조(漢高祖)의 관대함과 항우(項羽)의 잔포한 것은 범증이 아는 바이다.
약속을 어기는 것보다 더 불신(不信)은 없는데 항우는 관중(關中)에 들어가기 전에 한 약속을 어겼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불인(不仁)은 없는데 항우는 이미 항복한 군졸을 묶어 죽였으며, 임금을 시해(弑害)하는 것보다 더 불의(不義)는 없는데 항우는 초 회왕(楚懷王)을 죽였다. 그러고서도 5년이나 뒤에 망한 것은 오직 요행 때문이다.
고조(高祖)는 처음 관중에 들어갈 때에 오성(五星)이 동정(東井)에 모였으니 하늘이 준 것이요, 한중(漢中)에서 임금이 되매 기꺼이 따르는 초 나라의 자제와 제후 백성들이 수만 명이나 되는가 하면, 항우의 조아(爪牙) 같은 신하들이 또한 한 나라로 귀순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준 것이다.
왕릉(王陵)의 어미는 그 아들이 한 나라를 배반하고 초 나라에 붙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자살을 달게 여겼으니, 고조가 꼭 임금이 되고 항우가 꼭 망할 것은 필부(匹婦)까지도 환하게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범증은 꼭 망할 사람을 따르고 꼭 임금이 될 주인을 따르지 못하였으니, 그 지혜가 밝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항우로 하여금 범증의 계책을 쓰게 했더라도 끝내 망함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범증이 이미 항우에게 몸을 바쳐 죽음을 맹서하고 신하가 되었는데, 비록 그가 꼭 망할 것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배신할 수 있겠는가?”
하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처음에 회왕이 송의(宋義)를 상장(上將)으로, 항우(項羽)를 차장(次將)으로, 범증을 말장(末將)으로 삼아 북쪽에 가서 조(趙) 나라를 구하게 하였으니, 그 당시에 범증이 어찌 항우의 신하였겠는가.
항우가 제 마음대로 상장을 죽이고 거짓말로 회왕에게 보고하였으니 무도하다 할 수 있고, 또 전날 양성(襄城)을 공격할 때에 양성 사람을 씨도 없이 죽이므로, 여러 장수들이 모두 항우를 먼저 관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증은 끝내 항우를 따르다가 의심을 받아 죽게 되고, 진평은 항우와 함께 천하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칼 하나만을 차고 한 나라에 귀순해서 모신(謀臣)이 되었다. 그러므로 진평에게 견주어도 오히려 못한데, 더구나 삼걸과 비교하겠는가.”
하였다.
[註解]
[주D-01]삼걸(三傑) : 한(漢)의 세 공신(功臣)인 한신(韓信)ㆍ장량(張良)ㆍ소하(蕭何)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오운(伍員)ㆍ소불위(蘇不韋)에 대한 논
동한(東漢) 사람 소겸(蘇謙)이 사예교위(司隸校尉)인 이고(李暠)와 틈이 있었다. 이고는 어떤 사건을 빙자해 소겸을 옥중에서 고문하여 죽인 다음 그 시체에까지 형벌을 가하였다.
소겸의 아들 소불위(蘇不韋)는 이름을 바꾸고 집안의 재산을 털어 검객(劍客)을 모집한 다음 제릉(諸陵)이란 곳에서 이고를 만나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자, 형제들과 함께 태농(太農 농사를 관장하는 관청의 이름)의 여물 곳간에 들어가서 땅 밑으로 구멍을 뚫고 이고의 집 침실까지 들어가 그의 아내와 어린아이들까지 죽였으나, 이고는 방비가 있어 죽이지 못하였다.
그는 곧 위군(魏郡)으로 달려가 이고 아비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머리를 잘라 소겸의 무덤에 제사를 올렸다. 그리하여 이고는 분통이 터져 피를 토하고 죽었다.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은 대개 소불위가 마른 백골에게 죄를 돌린 것을 비판하였으나, 오직 임성(任城)의 하휴(何休)만은 그를 오운(伍員 자는 자서(子胥))에게 견주었다.
곽임종(郭林宗)이 이 말을 듣고,
“오자서(吳子胥)는 합려(閤閭 오왕(吳王)을 가리킨다)의 위엄을 빙자하고 옛 영(郢 초(楚)의 수도)에 들어가 설원하였다. 그러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베었을 뿐 후주(後主)에게 칼날을 대는 보복은 못했으니, 어찌 소겸의 아들과 같이 아무 의지할 데도 세력도 없이, 엄금하는 명령을 범해가면서 해골을 가르고 머리를 베며 살아 있는 사람에게까지 그 원독이 미치게 하여, 이고로 하여금 그 목숨을 부지 못하게 한 것과 같으랴. 오운과 비교할 때 역시 오운보다는 낫지 않은가.”
하였다. 나는,
“곽임종이 소불위를 오자서보다 낫다고 한 것은 옳거니와, 그 나은 이유를 말한 것에는 잘못된 점이 있다. 만약에 복수한 것으로 논하면, 오자서가 꼭 못할 것도 없고 불위만이 유독 나을 것도 없다. 그러나 만약 대의(大義)로 논하면, 두 사람의 우열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하면, 군부(君父)는 인륜의 큰 근본이며 충효(忠孝)는 신하와 자식의 큰 절의인데, 오자서는 두 가지를 모두 잃었다. 당초에 초왕(楚王)이 오사(吳奢 오자서의 아버지)를 잡아가두고 오자서를 부르면서 ‘네가 오면 네 아비의 죄를 면해 주겠다.’ 하였으나, 오자서는 가지 않았다.
대개 아비가 임금에게 죄를 얻었으면 오히려 자진해서 자신으로 대신해 주기를 청하여 임금을 깨우쳐 감동시켜야 할 터인데, 하물며 그 아비의 죄를 면해 주기로 하고 부르는 경우에랴. 비록 그 일이 진실이 아닌 줄 알았더라도, 수레의 멍에를 맬 틈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바삐 달려가는 것이 인정일 것이다.
그러나 오자서는 뒤에 복수하겠다고 핑계를 대고 마침내 가지 않았으니, 이는 아비의 죽음을 재촉한 것이다. 군자(君子)는 본국을 떠나 도망나올 때도 조국과 원수간의 나라에는 가지 않고, 대부사(大夫士)가 떠날 적에는 스스로 자기는 죄 없이 쫓겨났다고 남에게 말하지 않는 법인데 오자서는 독사와 시랑 같은 오(吳) 나라를 유인하여 종국(宗國)을 유린하고, 능묘(陵墓)를 발굴하여 그 임금의 시체를 매질하였으니, 불효와 불충이 이에 더할 수 없다.
소불위는 이고와는 진실로 같은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의리가 있고 또 분수를 어기고 임금을 죽인 죄가 없는데, 곽임종이 이 점을 힘써 강조하지 않고, 구구하게 그 복수하기 어렵고 쉬운 차이만을 분변하여 우열을 삼으려 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랴.”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삼왕묘(三王廟)를 배알하고 각각 송(頌)을 올리다
우(禹)
옛날의 9년 홍수(洪水) 천하가 다 그 난리라, 백성들이 모두 해독을 입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네. 우 임금이 이를 다스리지 않았던들 우리는 물고기가 되고 말았으리. 세 번이나 문 앞을 지나면서 어린애가 울어도 못 들은 척하였다오. 백성들의 허덕임이 근심이요. 내 손발 곪아 터진 것은 괴로움 아닐세. 도랑 쳐서 그 물을 쏟아내었어라 구주(九州)가 비로소 흙을 보였네. 백성이 그 덕을 입음이 어찌 천만 년뿐이랴. 장성(將聖 공자(孔子)를 가리킨다)의 하신 말씀 ‘나는 조금도 험잡을 수 없다.’ 하였네.
탕(湯)
아, 위대하신 천을(天乙 탕 임금의 이름이다)이시여 은(殷) 나라 상서를 여셨네. 초야에서 어진이를 맞아들여 그에게 배우고 또 신하를 삼았도다. 그물의 삼면(三面)을 열어 놓으니 온 천하가 인(仁)에 돌아왔구려. 즐거운 뜻으로 갈(葛)을 섬겼고 하걸(夏桀)을 쳐서 민심에 순응했네.
그 덕을 밝히지 아니하였던들 어떻게 백성에게 믿음을 주었으랴. 격언(格言)이 여기에 있거니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라.’
문왕(文王) 주(周) 나라 공을 쌓기는 저 후직(后稷)으로부터라네. 서백(西伯 문왕(文王)을 가리킨다)이 발흥하여 사방의 모범이 되었네.
백이(伯夷)와 강자아(姜子牙)가 대우를 받았고, 우(虞)와 예(芮)는 송사를 바루었네. 《주역(周易)》의 상(象)을 발휘하고 송성(頌聲)을 만들어내셨도다. 천하를 3분하여 그 2분을 가지고도 은 나라 섬김에 허물이 없었다네. 문(文)이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덕이 그토록 지극하셨네.
[註解]
[주D-01]나는 …… 없다 : 공자(孔子)가 우(禹) 임금의 선치(善治)에 대해 감탄한 말. 《論語 子罕》
[주D-02]나날이 …… 하라 : 《서경》 탕(湯)의 반명(盤銘)에 있는 말.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 1980
진성명(秦城銘)
진(秦) 나라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니 육국(六國)도 끝장나고 사해(四海)가 통일되었다. 어리석기는 검수(黔首)보다 더하며 참서(讖書)는 고월(古月)에 현혹되었다. 만리의 장성(長城)을 쌓은 것은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갈석(碣石)에서 끝났거니, 변방 구름을 휩쌌고 바다의 해[日]에 닿았다.
소와 염소가 왕래할 때 죽은 사람의 백골을 밟게 되었나니, 원통한 혼백의 눈물은 비오듯 하고 원통히 흘린 피는 시내처럼 흘렀구나. 백성들은 모두 병들어 지쳤건만 흙 다지는 절구질 소리는 그치지 않았네. 궁궐 안 불알 깐 환관(宦官)에게서 화가 생길 줄 뉘 알았으랴.
조고(趙高)가 멸족되자 자영(子嬰 진시황(秦始皇)의 손자 이름)은 흰 수레를 탔네. 장성은 허물어지지 않았건만 함양(咸陽 진(秦)의 서울)은 폐허로 변했나니, 좀먹는 나무처럼 껍질은 멀쩡해도 속은 비었구나. 아무리 잘 보호해도 끝내는 넘어지고 말았네. 재주는 웅걸(雄傑)하나 식견이 어두우니 불쌍하다 저 정(政 진시황의 이름)이여!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식영암(息影菴) 벼루의 명
무겁고 단단한 것은 하늘에서 얻었고, 씻어서 새롭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렸도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최춘헌(崔春軒)의 호시명(壺矢銘)
병은 그 속이 비었고 화살은 곧고 바르거니, 곧은 것이 아니고 빈 것이 아니면 병도 아니요 화살도 아니다. 반드시 삼가고 맞혀서 사냥꾼이 틀을 놓은 것같이 하라. 속여서 짐승 10마리를 잡아도 그렇게 이김은 기롱을 듣게 되거니, 세게 던지다가 떨어뜨리지 말고 돌려 넣으려다 비뚤어지게 말지어다. 군자의 유희이며 군자의 규모로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김추밀(金樞密)의 사정명(思亭銘)
날아갈 듯한 저 정자 사정(思亭)이라 이름하였다. 누구를 생각함이뇨, 그는 바로 아버지의 올바른 가르침과 어머니의 사랑이라. 만세토록 편히 누우신 그 분묘를 산에 올라 바라보도다. 뽕나무를 받들어 공경하고 쑥풀의 서러움이라, 밤낮으로 길이 사모하여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도다. 너의 세록(世祿)을 믿고 너의 천자(天資)만 자랑하여 만족히 여기고 놀기만 한다면, 사정이란 편액을 볼 때 부끄럽지 아니하랴. 그대여 여기 익히 생각할지어다.
[註解]
[주D-01]뽕나무를 …… 공경하고 : 주 유왕(周幽王)이 포사(褒姒)에게 현혹되어 신후(申后)와 태자(太子) 의구(宜臼)를 내쫓으므로 아
들이 아비를 원망하여 지은 시(詩). “저 뽕나무와 재나무도 부모가 심으신 것이면 반드시 공경하는 것이다.”에서 인용된 구절이
다. 《詩經 小雅 小弁》
[주D-02]쑥풀의 서러움이라 : 어느 효자(孝子)가 집이 가난하여 부모를 잘 봉양하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지은 시(詩) “잘 자란 좋
은 나물, 캐고 보니 좋은 나물이 아니라 먹지 못할 쑥풀이로다[蓼蓼者莪 匪莪伊蒿]”에서 인용한 말이다.《詩經 小雅 蓼莪》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백낙천 진찬(白樂天眞贊) 복건(幅巾)과 야복(野服)으로 지팡이를 짚고 홀로 걷는 모양.
낙타는 벌써 팔아버렸나, 그림에는 그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용문산(龍門山) 천석(泉石) 사이에 표연히 홀로 다니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 ┃ 1980
소동파 진찬(蘇東坡眞贊) 황관(黃冠)에 지팡이를 옆에 끼고 돌 위에 앉아서 휘파람 불고 있다.
대궐에 출입하는 것 영광이 아니거니 장기(瘴氣) 어린 해변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야인의 차림새에 누른빛 갓을 쓰고 천고를 굽어보며 긴 휘파람 불고 있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송광 이 국사 진찬(松廣李國師眞贊) 왕명을 받들어 찬하다.
국사의 꾸준한 노력이여 그 덕망과 연령이 모두 높았구나. 임금의 명으로 화상을 그려내어 그를 쳐다보며 경의를 표하노니, 그 몸은 상(相)에서 떠난 것이며, 그 법은 전(詮)에서 떠난 것이다. 그림에 대하여 찬(贊)을 지으오나 신의 글솜씨 도리어 부끄럽나이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죽헌 김 정승 진찬(竹軒金政丞眞贊)
맑은 눈매에 치솟은 그 눈썹이며, 높은 광대뼈에 수척한 그 얼굴이며, 붉은 입술에 수염은 희나니, 이는 외모로 보는 죽헌이다.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잊었고 믿음을 지켜 속이지 않았다. 단단하고 곧으며 자상한 그 인품은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한결같았나니, 이는 뜻과 절조로 죽헌을 평론함이다.
잘되고 못 되는 것 아랑곳없고 일찍 죽으나 장수하는 것을 한가지로 보았나니, 그 정신은 우주 밖에 노닐며 아무것도 없는 자연의 세계에 소요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죽헌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어떻게 나타내며 문장으로 어떻게 형용할 수 있겠는가.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안겸재 진찬(安謙齋眞贊) 병서(竝序) 문성은 안향(安珦)의 시호.
안 문성공(安文成公)은 일대의 유종(儒宗)이다. 내가 20세도 채 못 되었을 때 한 번 길에서 뵙고 드디어 사랑을 받았으며, 이어 그의 손자인 겸재(謙齋)를 알게 되었다. 그 후 10년에 나의 아버지 동암공(東菴公 이진(李瑱)의 호)이 과거의 고시관으로 있을 때에 겸재는 책(策)으로 응시하여 과거에 올랐다.
이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사귐이 가장 깊게 되었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경자년(1360, 공민왕 9)에 겸재가 죽었다. 이듬해 가을에 남아 있는 그의 화상을 보고 섭섭하여 그 옆에 적는다. 겸손하면서도 고루하지 않았고 온화하면서도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며, 확고히 법도를 지키고 엄연히 아름다움을 발휘하였으니, 그는 문성공의 자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았도다. 실천에 노력하고 말은 매우 적었으며, 온자한 그의 문장이었고 평담한 그의 시(詩)였으니, 동암(東菴)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았도다.
벼슬은 양부(兩府)를 거쳤으니 출세하지 못했다 할 수 없고, 나이는 70이 넘었으니 수를 못했다 할 수 없다. 다만 그의 벼슬이 재상에 이르지 못하고, 공덕이 백성에게 흡족히 미치지 못하여, 사람의 여론은 오히려 유감으로 여긴다. 그러나 산수간에서 마음대로 지내던 생활은 유량(庾亮)도 못 당할 것이요,
시주(詩酒)로 즐겁게 놀던 풍류는 계륜(季倫)도 비할 바 못 될 것이니, 이것이 곧 우리들이 그의 평생을 생각하여 잊기 어려운 것이며, 남긴 화상을 바라보며 더욱 감개 깊은 것이로다.
[註解]
[주D-01]책(策) : 과거에서 선비를 시험보이는 문체(文體) 중의 하나. 대개 시(詩)ㆍ부(賦)ㆍ표(表)ㆍ책(策) 네 가지가 있다.
[주D-02]유량(庾亮) : 진(晉) 나라 사람. 유량이 무창현(武昌縣)에 봉(封)해져 있을 때 가을 밤이면 늘 남루(南樓)에 올라 산수의 자연을
즐겼다.《晉書 庾亮傳》
[주D-03]계륜(季倫) : 진(晉) 나라 산간(山簡)의 자. 산간은 술 마시기를 즐겨서 항상 고양지(高陽池)에 술을 두고 만취해 돌아오곤 하였
다.《晉書 山簡傳》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익재진 자찬(益齋眞自讚)
홀로 공부하여 고루하니 도(道)를 들은 것은 자연 늦었도다.
불행은 모두가 자신이 만든 것이라 어찌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랴.
백성에게 덕을 보인 것이 무엇이기에 네 번이나 대신이 되었단 말인가.
요행으로 그렇게 된 일이기에 모든 비난을 불러들였다.
못생긴 내 얼굴 그려두면 무엇하랴만
나의 후손에게 알리기 위함이니,
한 번 쳐다보고 세 번씩 생각하여
그런 불행 있을까 경계하며 아침저녁으로 꾸준히 노력하라.
만일 그런 요행 바라지 않는다면 행여 불행을 면하게 되리라.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면주(沔州)의 지(池)ㆍ대(臺)ㆍ당(堂)ㆍ정(亭)의 명(銘) 소경(少卿) 곽충룡(郭种龍)이 군수로 있을 때 지어 놓은 것이다.
군자지(君子池)
곽군(郭君)이 그 가운데에 연(蓮)을 심고, 염계(濂溪)의 애련설(愛蓮說)을 취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꽃과 열매가 동시에 열리노니 진흙에서 나도 더럽지 않아, 이것이 군자와 같기로 염계(濂溪)에게 사랑을 받았도다.
구준대(衢罇臺)
사람들이 모두 나의 동포라 한 것은 장횡거(張橫渠)의 말인데, 혼자 즐김은 무엇을 즐김인가. 구준(衢罇)이 여기에 있네.
치의당(緇衣堂)
열 집밖에 없는 작은 동네에도 진실하고 충성된 사람은 있는 법, 어진이를 좋아하던 교화로 집집마다 봉(封)해 줄 만하구나.
강구정(康衢亭)
담대멸명(澹臺滅明)이 지름길로 다니지 않는 것은 《논어(論語)》에 기록되었네. 숫돌같이 당당한 길이 있으니 군자가 다니는 곳이로다.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삼축잠(三畜箴)
묘잠(猫箴)
귀가 있고 눈이 있고 발톱도 있고 어금니도 있건만, 쥐들이 저렇게 들썩여도 어찌하여 잠만 자고 움직일 줄 모르느냐.
구잠(狗箴)
꼬리로는 아첨을 부리고 혀로는 핥고 빤다. 싸우거나 장난쳐서 울타리를 헐지 말라.
계잠(鷄箴)
시간을 지켜 울며 싸울 때에는 지지 않으려 한다. 똥을 쪼아먹어 살이 쪄서 사람들이 잡아먹기를 재촉하는가.
ⓒ한국고전번역원┃송지영 (역)┃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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