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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먼저 돌이키다
2022.11.20.(성령강림후마지막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1/ "그러나 이제 살아 남은 이 백성에게는, 내가 이전같이 대하지 않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12/ 뿌린 씨는 잘 자라며,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고, 땅은 곡식을 내고, 하늘은 이슬을 내릴 것이다. 살아 남은 백성에게, 내가, 이 모든 것을 주어서 누리게 하겠다. 13/ 유다 집과 이스라엘 집은 들어라. 이전에는 너희가 모든 민족에게서 저주받는 사람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니, 너희는 복 받는 사람의 표본이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을 내어라! 14/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 조상들이 나를 노하게 하였을 때에, 나는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작정하고, 또 그 뜻을 돌이키지도 않았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15/ 그러나 이제는,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기로 작정하였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16/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하다. 서로 진실을 말하여라. 너희의 성문 법정에서는 참되고 공의롭게 재판하여, 평화를 이루어라. 17/ 이웃을 해칠 생각을 서로 마음에 품지 말고, 거짓으로 맹세하기를 좋아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다. 나 주가 말한다." (스가랴 8:11-17)
들어가는 말
인간은 스스로 망가뜨린 자연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요? 지구 온난화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위적인 요인이 더 크다는 것은 거의 모든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다간 언젠가는 임계점에 도달하여 더 이상 어떤 노력에도 회복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온난화로 인한 지구 종말은 점점, 막을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인구증가 속도와 계속되는 산업화 경쟁, 그리고 각 나라가 가진 이해관계의 대립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해를 넘길 것처럼 보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끝없는 소모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쟁은 불안한 이웃 국가들에 극우 정치가들이 득세하도록 합니다. 이들은 이웃을 적대시하면서 자신들만의 요새를 쌓으려고 할 것입니다. 두려움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성향을 드러냅니다.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안전한 장치는 폭력입니다.
하지만 현대 기술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무력은 보호가 아닌 공멸의 결과를 가져올 정도로 거대해졌습니다. 무력의 충돌은 종말의 위험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전쟁 중인 러시아는 서방이 개입한다면 핵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인류는 이러한 모든 종말적 위험을 이겨내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인류는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현대 물질문명을 이룩해온 과학이 바라보는 세계관은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결국 위험을 이겨낼 것이라고 말이죠. 과학은 그렇게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과학기술을 통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인류의 종말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과학적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기독교와 크리스천은 존재의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아옴
스가랴서의 말씀은 성전 재건의 시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무너진 뒤, 남아 있는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살아남은 이 백성에게는, 내가 이전같이 대하지 않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11)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과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살아남은 백성들입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건건 하나님을 분노케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예언자들을 시켜 당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제사 대신 서로를 향한 정의와 사랑을 원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분노로 대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일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이 나를 노하게 하였을 때에, 나는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작정하고, 또 그 뜻을 돌이키지도 않았다.”(14) 조상들을 향해 뜻을 돌이키지 않으셨던 하나님이 뜻을 돌이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돌이키도록 했을까요?’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분노를 돌이킬 만한 이스라엘의 헌신과 회개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의 헌신과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한 기도와 헌신과 금식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하나님은 그 결과 진노를 누그러뜨리시고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누리는 축복의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가랴서는 하나님이 살아남은 백성들에게 다시 축복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나는 시온을 열렬히 사랑한다. 누구라도 시온을 대적하면 용서하지 못할 만큼 나는 시온을 열렬히 사랑한다.”(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너무나 사랑하셨고,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이 분노를 거두고 시온으로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시온으로 돌아왔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살겠다. 예루살렘은 ‘성실한 도성’이라고 불리고, 나 만군의 주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릴 것이다.”(3) 이스라엘이 성전을 쌓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돌아오셨기에 예루살렘은 ‘성실한 도성’, ‘거룩한 산’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그들의 온갖 패악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들 곁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우리의 충성이 누구보다도 뛰어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돌아올 수밖에 없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사랑은 이전의 모든 분노를 덮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쏟아 붓습니다. “뿌린 씨는 잘 자라며,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고, 땅은 곡식을 내고, 하늘을 이슬을 내릴 것이다. 살아남은 백성에게, 내가, 이 모든 것을 주어서 누리게 하겠다.”(12)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게 될 지금의 풍요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그에 따른 축복의 결과들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잘 보여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눈물 나도록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들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우리의 어떠한 공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공을 내세운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사라질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과거 모습은 20세기 한국사회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비교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지배와 가난했던 시절 그리고 성장기에, 한국교회 목사들이 이스라엘과 한국을 비교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유다 집과 이스라엘 집은 들어라. 이전에는 너희가 모든 민족에게서 저주받는 사람의 표본이었다.”(13)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국사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오늘날 젊은이들에겐 남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정말이지 저주받은 민족이라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니, 너희는 복 받는 사람의 표본이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을 내어라!”(13) 가난한 시절 우리는 이 구절을 붙들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니 이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은 우리의 헌신에 대한 보답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라나 이제는,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기로 작정하였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15) 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이미 보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잘못을 덮고도 남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충성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조건 없이,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우리를 먼저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아 아무리 큰 잘못을 하고 떠났어도 그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가 나타나기만 한다면 그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먼저 다가갈 것이며, 그를 한 없이 축복할 것입니다.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야 그를 향한 사랑하는 자의 바램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탁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축복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하다. 서로 진실을 말하여라. 너희의 성문 법정에서는 참되고 공의롭게 재판하여, 평화를 이루어라.”(16)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시는 부모의 당부처럼 들립니다. 하나님 자신에게 잘하라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겐 무너진 예루살렘을 회복시킬 힘이 없습니다. 성전을 건축할 힘도 없고 옛 이스라엘의 영광을 재현할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집을 세울 힘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하다’며 부탁하신 하나님의 말씀들을 실천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역시 대단한 것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서로 진실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힘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공정한 판단을 통해 서로 평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지옥에서 살기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해칠 생각을 서로 마음에 품지 말고, 거짓으로 맹세하기를 좋아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다.”(17)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과거에 우리는 이웃을 해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이웃을 해칠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정말이지 우리는 극악무도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거짓으로 맹세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받으면서도 거짓으로 맹세하기를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과거의 습성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한 없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렇지만 인류는 끊임없이 그 품에서 벗어났던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과 자연 앞에서 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몇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는 것일까요? 그 동안 인간의 도저히 봐줄 수 없는 패악질에도 하나님은 그 죄를 모른 채 하시고, 다시금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파멸을 향해 걸어 들어가지만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남겨진 사람들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남겨진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아무 조건 없이 그분의 사랑과 축복을 그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부탁하실 것입니다. 서로 평화 가운데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온난화를 되돌리고, 바다를 재생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실천할 수 있는 진실, 평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축복 가운데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집인 자연은 스스로 축복의 땅이 될지도 모릅니다. 반복되는 세계사 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성숙해 갈 수 있을까요?
나가는 말
지구 온난화와 환경파괴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초래한 것입니다. 신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집인 지구는 인간의 잘못으로 파괴될 것입니다. 거주자인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죽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것은 인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동식물들이 이미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불리던 예루살렘의 파괴처럼, 우주를 탐험하게 된 인류가 그 어느 우주 한 구석에서도 찾지 못한 아름다운 지구는 파괴되고 있습니다. 인류는 그것을 피할 수 없겠지만, 누군가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살아남는 자가 생각보다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렇게 남은 자들은 다시 하나님의 품에서 진실과 공정과 평화와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는 과제를 안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구약성경은 성전 재건을 위해 쏟는 끝없는 애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워지는 성전은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성전재건은 우리가 파괴한 하나님의 터전을 다시 세우는 것이지만 그것은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요원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성전 재건을 다르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전의 재건은 사랑과 정의가 숨 쉬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와 정의는 인간이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의심한다면 그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인류는 지구재건의 꿈을 같이 꾸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그 꿈이 사랑과 평화와 공의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계속해서 외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살아남은 자’로서의 실천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