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11월 13일(목) 회상사(回想社) 방문
* 열차 내에서 종중 묘지와 봉안당 사용료 수납 상황 점검
오늘 날씨는 체감 온도가 영하 7도이고, 16년만의 수능(修能=대학 수학 능력 시험) 한파(寒波)라는 뉴스를 이른 조반(朝飯) 전에 텔레비젼 방송에서 듣고, 조선일보에서 읽었다. 한 겨울처럼 단단히 무장하고 집을 나섰다.
능곡역 8:29 발 서울역 행 전철 편으로 상경. 서울역에서 성환(星煥) 총무를 만났다. 서울역 대합실에 있는
중소기업 상품 전시장에서 면장갑을 한 켤레 18,000원에 샀다. 그 동안 사용한 가죽 장갑이 헤져서 손이 시렸기 때문에 하나 사려고 했던 참이었다.
9:35발 새마을호 열차를 타고 성환 총무와 옆 좌석에서 앉았다. 종중에 관하여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엊그제(11일 수요일) 종회 사무실에서 내가 족보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종중 묘지와 봉안당 사용료를 수납한 상황을 총무에게 주었다. 그 점검한 내용을 총무가 회장에게 결재 받아 종친에게 통지하도록 했었다. 그리고 집에 오는 전철 안에서 또 과오를 발견했었다. 시간에 쫒겨 열차 안에서 배낭에 가지고 간 '묘지와 봉안당 대장'을 열어서 성환 총무와 함께 봉안당 사용료 납부 내용을 하나씩 검토했다. 그런데 한 종친이 봉안당 1위용 함 사용료를 납부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 대전삼성초등학교 방문
열차가 조치원역을 통과하는 동안에 건호(健浩) 아저씨의 전화를 받았다. 약속 시각 12시 보다 약 30분 늦겠단다. 대전역에 11시 반 경 도착해서 약 1 시간이 여유가 있었다.
6·25 사변(동란)(현재는 6·25 전쟁이라고 표현함) 전에는 대전 삼성동에서 삼성국민학교 근처에 살았었다.
대전역에서 내려 대전삼성초등학교를 방문하러 걸어갔다. 성환 총무는 중앙시장을 둘러보겠다고 해서 헤어졌다. 오래 전부터 삼성초등학교를 가보고 싶었다. 제대로 길을 잘 찾았다. 나는 1949년에 7살(만 6살) 때, 삼성초등학교에 입학했었다. 집에서 가까운 삼성국민학교 운동장에 가서 노아의 방주(Noah-方舟) 모형의 배를 저으며 놀았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다.
교육행정실로 들어가 직원에게 찾아간 사연을 말했다. 여자 행정실장에게 말을 걸었지만 잘 대꾸하지 않고 공적인 대답만 하는데 서운했다. 경기도에서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했다고 내 소개를 했건만 반응이 없었다. 내가 문산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에, 교육행정실 여직원이 지방 신문 기자이었던 학부모에게 불친절하게 대해서 크게 봉변을 당하고 혼이 났던 기억이 스쳤다. 직원을 잘못 관리해서 신문에 보도되어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교육행정실의 대민 친절도(對民親切度)는 아직도 개선되지 않고 제로(zero)에 가깝구나. 공무원의 자세는 언제 바뀌려나.
1950년에 제 2 학년 때 대전지방법원에 민사주임으로 근무하셨던 아버님께서 나를 대전사범부속국민학교로
전학시키셨다. 그 해 6월 25일에 6·25 사변(지금은 6·25 전쟁이라고 말함)이 일어나서 아버님이 북괴군에게 피살되시어 우리는 고향 마을 반곡리(盤谷里)로 이사했고, 충남 연기군 금남면(현재 세종특별자치시)에 있는 금남국민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한 사연을 말했다.
삼성초등학교 제 1학년 재학 시절 생활기록부는 없고, 전학한 대전사범부속국민학교로 생활기록부를 보냈단다. 담당 여직원이 내 신분증을 받아, 졸업한 금남국민학교로 생활기록부를 발급 신청하였는데, 점심시간이라 시간이 약 30분 걸리겠단다. 전에 금남초등학교를 졸업한 생활기록부를 발급 받은 것이 있어 신청을 취소하였다.
하는 수 없이 체념하고 행정실을 나오는데, 우연이 현관에서 이건표 교장을 만나 동명(東明) 형님이 만들어 주신 명함을 주고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이건표 교장 선생님은 친절하게 응해주시고 학교 현황을 말해주시어 고마웠다. 옛날에는 삼성동(三省洞) 마을이 부자 동네였는데, 이제는 둔산 지구가 개발되면서, 학생이 200명밖에 안 된다고 하며, 내일 교육부에 무슨 심사를 받는다고 뭔가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교장실로 가서 차를 마시자고 했지만 사양했다. 내가 죽기 전에 이 학교를 방문하게 되어 기쁘다는 마음을 말했다. 내일 교육부 심사를 잘 받기 바란다는 기원의 말을 남기고 교정을 나섰다. 그 동안 찾아보고 싶었던 그리움이 충족됐다.
청주 종친이 한밭식당에 도착했다는 성환 전화를 받았으니 물어물어 한밭식당으로 급한 걸음으로 서둘러 갔다.
* 족보 교정쇄(校正刷) 수정본을 회상사에 제출
식당에 가보니 청주에서 오신 동린 회장님, 동만 부회장님, 건호 족보 편찬 상근위원님이 성환과 함께 방안에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갈비탕으로 점심을 먹고, 점심값을 우리가 냈다. 우리 참판공파 종회에서는 청주 큰댁 종회에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걸어서 회상사로 갔다. 담당자 하효심에게 먼저 청주 건호 아저씨가 설명했다. 그 다음에 내가 수정할 내용을 설명했다. 시집온 여자의 부(父), 조(祖), 증조(曾祖), 외조(外祖) 이름을 여자의 내용 끝에 옮겨 달라고 말했다. 성환이 요청해도 처음에는 완강하게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렇게 하려면 다시 작업을 해야 하는데,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2권 교정쇄 내용만 수정해주기로 약속 받았다. 청주의 건호 아저씨가 요구하는 해인의 선익, 정익, 광익, 귀익 계파를 구별하기 위한 제목을 붙이는 작업을 했다. 하요심 책상 옆에 계속 서서 설명하자니 다리가 아팠다.
내복을 입지 않은 성환 총무는 사무실이 추워서 혼났다고 불평하며, 회사를 떠날 때 사장에게 한마디 말했다. 나는 내복을 입어서 추운 줄 몰랐다. 회사 운영이 어려운 모양이라고 지나가는 말을 했다.
* 세계표(世系表)와 총론(總論)
건호(健浩) 아저씨가 족보를 편집하면서 휘 적경(積慶)과 휘 승경(升慶)의 모든 자손 세계표(世系表)를 작성하셨다. 엄청나게 많은 고인과 생존자의 명단을 모~두 작성하셨다. 컴퓨터 엑셀 취급 기술이 대단하시다. 우리에게 휘 승경(升慶) 후손 세계표(世系表)를 주셨다. 그 세계표를 받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놀랐으며 매우 실용적인 것이라고 극찬했다. 내용을 검토 수정하다가 명단이 완성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여 회상사로 가지고 가서 건호 아저씨에게 주며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아저씨가 완성하겠다고 우리가 수정한 원고를 가지고 갔다. 고맙기 한량없었다.
어제 용욱(容郁) 편찬위원장님께서 저에게 전화하셨다. 족보 총론 원고 전체를 수정 봐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래서 회상사에서 466쪽 분량이 되는 총론을 인쇄 받아서 내 배낭에 넣고 어깨에 짊어지니 무거웠다.
* 상경 귀가
회상사에서 청주 종친 동만 부회장님의 승용차편으로 대전역으로 갔는데, 잘못해서 동쪽 광장으로 갔다.
성환 총무가 나를 위해서 고양시 행신역까지 가는 차편을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좌석이 없단다. 하는 수 없이 16:23 발 서울역 행 KTX 표를 샀다. 대합실이 초만원이어서 앉을 자리가 없었다. 15분 간 앉아서 기다릴 겸, 도토리묵 간이식당으로 들어가 도토리묵을 사먹었다. 생각보다는 도토리 맛이 있었다. 성환 조카와 옛날 반곡리(盤谷里)에서 먹었던 도토리묵 얘기를 나누었다.
열차에 타서 역방향 좌석에 앉았다. 역방향 좌석 값은 5% 할인 받는단다. 순방향 좌석이 없어 역방향 좌석을 샀다. 막상 앉아보니 큰 불편이 없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열차 좌석에 앉으니 피로를 느꼈다. 대전역에서 삼성초등학교까지 그리고 한밭식당까지 걸었고, 회상사에서 계속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팠다. 상경하는 열차 안에서 성환 조카가 총무 업무를 집행하는 동안 돌이켜 말하는 고충담을 들으니, 지루한 줄 모르게 50분이 지나 17:20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열차가 빨라 좋았다. 돈이 있어야 살기 좋은 세상임을 새삼 느꼈다.
서울역 17:15 발 문산행 경의선 전철은 이미 떠났다. 다음 열차는 18:15 발이라고 열차 시각표를 확인하지 않은 채 건성으로 알고서 부지런히 인천공항철도 전철로 공덕역으로 가서 환승하여 능곡역(陵谷驛)에서 내렸다. 뒤늦게야 평일에는 서울역에서 6시와 7시 대에 2회 출발하는 열차가 있다는 걸 알았다. 생활 정보를 알지 못해 이렇게 고생했다. 대합실에서 에스컬레이터(escalator)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휴대전화기를 열어보았다. 18:13에 건호 아저씨의 전화 수신이 찍힌 것을 보고 바로 전화했다. 내가 이미 집에 도착한 줄 알고 전화한 것이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집에 가면 전화하겠단다.
* 족보 총론 교정쇄(校正刷) 수정 작업 시작
집으로 오는 경의선 전철 안에서 회상사에서 받은 총론 교정쇄를 배낭에서 꺼내어 수정 작업을 시작했다. 집에 와서 저녁 생각이 없어 사과 하나를 먹고 수정 작업을 11시까지 했다. 피곤하고 눈이 떨려 작업 능률이 오르지 않아 잠자리에 들었다. 신라 시대에 관한 원고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 선환(善煥) 종회 회장/족보 편찬 부위원장의 전화 통화
오늘 내가 회상사에 잘 다녀왔는지 궁금해서 알아보고, 수고했다는 격려의 말을 하려고 전화한 것이다. 이렇게 분주하게 보낸 총책을 회장이 알아주니 고마웠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감사의 한 마디는 외롭게 일하는 사람을 위로해주는 활명수이다.
사실은 족보 편집하는 작업이 나의 체력에 벅찼다. 작업하는 동안에 안구 건조증으로 안과, 목 디스크로 정형외과, 눈 밑이 떨려 신경외과, 비염이 심해 시술 받느라 이비인후과, 과로로 기관지 확장증 증세 악화로 호흡기 내과, 몸살감기로 일반 내과 의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다. 그렇지만 원망하지 않고 정신력으로 버텨 보람을 찾아 일했다.
첫댓글 동윤씨 먼저 돌변한 추운 날씨에 성환 총무 와 함께 수고하시고 고생 많이 하셨음을 먼저 위로 드리고 싶습니다. 옛 기록은 배위의 친가 와 외가의 기록까지도 되어 있고 지금도 그것을 이어 나감이 정도이나 그렇게 하지 못함이 유감이고 현재 배 밀양박순희를 배 박순희 밀양인 으로 수정을 강력 추진 중에 있습니다. 찬찬하신 동윤씨가 교정을 보시니 한결 마음이 놓이고 미덥고 든든합니다. 모쪼록 교정은 물론 여타 보첩의 마무리에 최선을 다해주실 것을 당부 드리고 초겨울 날씨에 각별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편찬 위원장님, 위로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감사공 자손이 청주와 서울에서 출발하여 대전에서 만나 족보 편집 일을 보니 정답고 흐뭇했습니다.
족보를 편집하면서 참 궁금했던 것이 바로 배위 외조부까지 거명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남자의 외조부는 말이 없고 마누라 처가의 조상을 거명했는지, 그 시대상을 연구해 볼만 하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 여자를 인정하지도 않았건만, 여자의 조상을 일일이 거명했는지? 젊은이들은 자신의 장인 이름을 대는 걸 귀찮다고 불평했지요.
(계속)
여자 이름을 기록하는 방식에서 우리 휘 승경 후손 족보에서는 여자 이름 다음에 출계인을 적었습니다.
예를 들면, '박영자 밀양인'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총론에 있는 내용도 수정을 원하시는지요?
총론에는 거의 이름이 없고 00씨로 되었지요..
총론 내용을 교정하면서 위원장님께서 말씀하시는 소원을 다 충족시킬 수 있을지 염려됩니다.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1.고맙습니다.그런데 옛족보에 여자의 조상을 일일이 거명한 것은 혈계를 중시하여 선비가는
어머니의 친가 父 즉 나의 외조부의 기록은 물론 또 어머니의 친가로 외조부 까지도 기록된바
현대인은 관심이 없어 수단자체를 옛 같이 기록 제출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처가의 조상을 기록하면 후대에 가서는 외가의 조상이 되니까 남녀의 차별은 없음.
2. 총론은 옛 문헌이고 절대 수정 불가 합니다. 금번 족보의 수단기록에 현대인의 배위에 이름이 기록되는 배위를
例 配密陽박순희 기록을 配박순희 密陽人 기록으로 수정요구 한바 회상사에서 회피하는
모양인데 강력 추진위계임. 여는 첫째 건강을 돌보시며 종사일을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