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악은 대략 상고 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농사에 종사하기 시작한 때와 그 맥을 함께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두레라는 우리 민족 고유의 생활공동체속에서 계승 발전되어 온 향토 음악의 한 맥락이라 하겠다.
5월 파종 후의 즐거움, 농사일이 끝나는 추수철의 기쁨과 농한기의 애환을 새해가 시작되는 정월의 지신밟기 등에서 농악은 농민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대중성 있는 민속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농악은 나라의 정치적, 지리적 여건상 예로부터 외침이 많았던 것과 관련하여 군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저항심과 지킴의 정신이 군악과의 연계속에서 더욱 더 특징있는 농악으로 발전되었다.
진주 삼천포 농악에서도 군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무기나 영기, 긴나팔, 전립, 행건, 놀이마당에서의 오방진, 길군악, 별굿놀이 등이 있으며 치배들의 강하고 활동적이며 진취적 기상이 보이는 멋과 기교 등이 군악 연계설을 뒷바침해주고 있다.
특징
1차 오방진풀이
동, 서, 남, 북, 중앙으로 진을 감았다 풀어나오는 놀이이며, 빠른 덧배기가 주된 가락이다. 일명 덕석말이라고도 하며, 전쟁에서 적진을 차지한 후 사방을 경계하여 진을 새롭게 다지는 마당이다.
2차 얼림굿
느린 덧배기에서 함께 어울려 놀다가 가락이 점점 빨라지면서 다드래기 가락으로 넘어간다. 주위 경계와 진을 다진 후 안전하다고 느껴 군인들의 흥을 돋구며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얼르는 굿이다.
3차 버꾸놀이
치배 전원이 연풍대를 돌며 상모를 돌리고 신명나는 장단과 어우러져 소고수들이 몸을 땅에 비스듬히 눕혀 도는 곡예와 같은 자반뒤집기라는 기예를 보이며 논다. 전투로 지친 군졸들이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한 마당이다.
**연풍대--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360도 도는 것. 마치 회오리 바람같이.
4차 길군악
치배가 평걸음을 걸으며 앞마당에서의 거친 숨을 쉬는 마당으로 길군악에서 반길군악으로 다시 운풍대가락(구름과 바람을 의미하듯 가볍고 경쾌한 춤가락)으로 넘어가고 또다시 외연풍대(연풍대의 반대 방향으로 돈다)로 넘어가는 마당이다.
5차 영산 다드래기
외연풍대로 놀던 치배들이 원상태로 돌며 가고 중앙에 있는 쇠잽이들이 서로 어울려 논다. 이때 소고수들은 쇠잽이와 나머지 다른 치배들 사이를 돌며 흥겹게 놀고 다드래기로 넘어가서 끝맺는 마당이다.
6차 멋버꾸
상모를 돌리고 노는 소고수들은 앞돌아 앉고 뒤돌아 앉기를 세번하는 것이 특징인 마당이다. 빠른 덧배기 가락으로 넘어가서는 치배전원이 연풍대를 도는 것과 함께 소고수들은 자반뒤지기를 하며 노는 것이 억수로 흥겹다.
7차 등맞이 굿(품앗이 굿)
빠른 굿거리가락으로 중앙에서 쇠잽이들이 등을 맞대고 앉고 곧바로 돌아 앉아 마주보고는 용개통통가락으로 바꾼다. 이후 쇠를 땅에 놓고 일어서면서 춤을 추다가 점점 빨라져 버린 악에 맞춰 먹다드래기가락으로 몸을 옆으로 끝맺는 마당이다. 등을 돌리고 마주본다는 것은 군졸과 어느 여자와 눈이맞아버린 것을 암시하고 바깥에서 "용개통통", "얼쑤좋다", "야단났네" 라고 놀리며 나비춤을 추는 것이 아름다운 마당이다.
8차 앉은 버꾸놀이("앉은" = "안전한")
덧배기가락으로 치배가 연풍대를 한 번 돈 후 쇠를 막고 몸을 옆으로 하여 돌다 덧배기 가락으로 바뀌면서 몸을 바로 하고 춤을 추며 놀다가 제삼다드래기로 끝맺는 마당이다. 전투에서 이긴 병졸들이 승리감에 젖어 흥에 겨워 행진하는 모습이다.
9차 호호굿 (점호굿)
길군악가락에 맞춰 치배가 연풍대를 "호호"라는 말과 함께 돌며 노는 마당이다. 전쟁에서 전사자나 부상자, 이탈자들을 확인하는 점호굿이다.
10차 개인영상놀이
상쇠의 이끎으로 소고수, 열두발, 채상모, 장구, 북 순으로 개인의 재주를 맘껏 펼쳐 보이는 마당이다. 전장에서의 무용담을 보여주는 것이다.
11차 별굿놀이
원래 이 앞에 전사자를 추모하는 굿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드래기가락에 맞춰 노는 마당으로 사설과 함께 신명나게 논다. 치배들의 권익(술, 승진, 휴식 등)에 대한 묘한 기대감을 암시한다.
12차 흩음굿(헤침굿)
상쇠가 "헤이라 헤이라 각기 사방 헤이라"라고 외치면 모든 치배들이 마당에서 걸판지게 어우러져 신명나게 노는 일종의 뒷풀이 형태의 마당이다.
진주농악의 사적 고찰
1. 진주농악을 바르게 알자.
진주농악12차 가락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1966년에 진주12차 농악의 상쇠 기능보유자로 진주의 황일백과 삼천포의 문백윤이 지정되었다.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 황,문 두분이 작고한 뒤 진주농악의 후계자가 없어 아쉽던 중에 진주12차농악의 이수자 주에서 박염과 김선옥이 황,문 두분의 진풀이와 쇠가락을 대략 재현하는데 성공하여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진주농악의 보존과 발전계승을 위하여서는몇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첫째, 황,문 두분의 생전의 쇠소리가 가감없이 순수하게 재현되어져야 할 것이다. 민속전수 중에 가장 조심하고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는 것이 원형을 무시하고 타지방의 놀이형태나 가락을 덧붙이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의 진주농악 기능보유자나 준기능보유자의 쇠가락이 황,문 두분의 쇠가락소리와 장단, 가락, 그리고 순서, 놀이, 사설에서 많은 차
이를 나타내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둘째, 진주12차농악은 순수한 농악의 형태에서 발전하여 판굿농악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이 판굿에 따른 사설을 모두 찾아내어 갗추었을 때만이 진주12차농악이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진주농악은 자칫하면 쇠소리 중심의 사물놀이봉악으로 인도되어 상쇠전수자만을 길러내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가) 올바른 쇠소리의 재현을 통하여 전라도 농악이나 여타 지역의 쇠소리나 놀이의 잡탕스러운 혼합을 막고 순수한 진주농악의 고전적 형태를 찾고 지키며 계승발전 시켜야 할 것이다.
나) 진주농악의 판굿놀이 성격을 인식하여 판굿놀이의 형태와 판굿놀이의 사설을 찾아내어 재현시켜야 할 것이다.
세째, 진주12차농악의 원래 명칭은 가)경상우도농악 나)진주농악 다)진주12차36가락농악 라) 진주12차8진법5방진36가락농악이라고 불리워졌다.
가)경상우도농악이란 진주를 중심으로 서부경남의 모든 농악을 말하며 여기에는 진주, 진양, 산청, 함양, 거창, 의령, 합천, 하동, 남해, 거제 삼천포, 사천, 고성, 충무, 함안까지의 넓은 지역을 포함하게 된다.
나) 진주농악이란 서부경남에서 제일 큰 목사골 진주장이 서게 될 때 각 지방의 농악패 우두머리나 농악잽이인 명인들이 팔려와서 장굿을 벌이게 되고 여기에서 형성된 농악가락이 저절로 진주농악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다)진주12차8진법5방진36가락농악이란 원래 진주농악은 그특징중의 하나가 팔진해무진 굿풀이다. 제갈공명의 8진도에 유래한 36계병법을 진풀이의 특색으로 삼은 12차가락을 치고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고 놀이가 바뀌면서 진주12차5방진농악으로 줄여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네째, 진주농악의 특성을 생전의 박현봉, 황일백 두분의 증언에 의하면 ㈎질구랭이 ㈏5방진굿 ㈐8진열무굿 ㈑굿놀이 ㈒잡기놀이 ㈓열두발 상모놀이 등이 어울리는 독특한 굿놀이농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 진주농악의 내력
진주는 1000년 목사고을로써 일찌기 행정, 군사, 산업이 발달한 도시여서 닷새마다 서는 장날에 굿판이 벌어지고 이것이 일제말기와 우리나라 건국초에까지 전해져 왔다. 진주농악은 굿판 놀이판이 우리나라 건국후에 차츰 사라져 갔으나 농악의 상쇠꾼들이 1960년대까지 살아 있어서 초대 한국국악원장이요 국악인이며 상쇠꾼이었던 박헌봉의 추천으로 진
주농악12차로써농악12차 무형문화재 11호의 지정을 받게 되었다.
다음의 기록은 1966년에 박헌봉, 황일백 두분을 모시고 채록한 서부경남의 유명한 상쇠꾼들의 이야기로 그 명단을 밝히고자 한다.
1. 1920년대에 농악패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생활여건이 어렵다보니 각 고을의 유명한 농악패들은 마을굿잔치에 팔려 다녔다. 그 중에 진주장날은 큰 굿놀이판이 벌어지게 되는데 진주에는 거간꾼이 있어 장날 오후와 밤에 초롱불을 밝히거나 장작불을 지펴놓고 돈받고 굿판을 벌렸고 마지막에는 농악패, 5광대패, 장꾼, 구경꾼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휘날
레를 장식했다.
2. 이때쯤 서부경남에는 이름난 농악꾼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유명한 분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쇠 치는 사람
최봉태, 최재명 --- 산청
김성룡, 김인표 --- 하동 옥종
박헌봉, 남 사 --- 초대 국악원장
유문향, 유유향 --- 삼가
김성진
위의 사람들이 1920젼대부터 1940년대까지 경상우도농악인 진주농악을 주름잡고 판을 친 선배들이었다. 이 사람들중에 합천 삼가의 유문향, 유향형제가 유독 상쇠자리 때문에 형제간의 자리다툼은 유명했다고 한다.
진주농악단 36명의 막내들속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끼여 있었다.
㈎ 황일백 진주
황일백은 쇠치는 기능 이외에도 1940년대까지 구성진 상여앞제비 소리꾼이었고 5광대 벗구질도 잘했고 위 선배들의 진주농악놀이의 모든 사설과 연희놀이에 능통하여 박헌 봉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황일백의 후배로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 허 징 산청
㈐ 임태고 삼가
㈑ 민도중 수곡 원당
이들에 이어서 막내 농악패로서는 다음과 같은 분들이 있었다.
㈒ 문윤백 쇠 삼천포
㈓ 조판조 법고 부산
㈔ 김도생 장구 함양
㈕ 윤관형 채상(열두발) 진주
위의 사람들이 진주농악단 36인조의 중요 사람들이었다. 이 중에 윤관형씨는 열두발상모를 땅에 놓고 제자리에서 채모를 세우는 기술은 우리나라 제일의 기능자였다고 한다.
따라서, 진주12차농악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어느 한 지방에서 농악패를 이룬 것이 아니고 서부경남의 각지에서 농악기술의 고수들과 농악잽이들이 모여 이룬 농악단이었디
(1) 진주(일명 진양) 솟대쟁이패 5광대꾼
진주솟대쟁이패란 남사당패를 말하며 솟대쟁이패 5광대패, 줄패, 굿패들이 1925년부터 1932년경까지 남사당패를 만들어 서부경남을 순회공연하고 다녔다. 이전의 기록으로는 고종 4년 (1867)에 진주목사로 부임한 정현석이 지은 교방가요에 진주에서 6월의 의암별제를 마치고 3일간 국악놀이의 예술제를 벌렸다. 이로써 진주에는 개천예술제 이전에 국악예술제가 있었음을 역사적으로 찾을 수 있었다. 그 중에 잡희(雑戯)로써 사당패놀이, 풍각쟁이, 초란이, 선대놀이, 각둑, 꼭두각시, 취승 등의 놀이와 함께 잡요로써 산타령, 저타령과 단가 등의 푸짐한 예술잔치에서 그 내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주의 남사당패꾼들의 행보가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만주사변이 난 이후 치안유지법의 무단집회에 걸려 박헌봉, 황일백 등이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의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위의 36인 이외에 잡희놀이패로 진주남사당패 안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쌍 줄 : 임방울(여) 노래도 부름
외 줄 : 박선중(남)
노 래 : 하중선(여) 고전춤과 살풀이 명수
탈재비: 김성쇠(남) 삼두박첨지(꼭두각시놀이)를 잘 추었고 특히 사람얼굴의 5광대의 탈만드는 전문가
(2) 진주 농악의 쇠소리
황일백(쇠) 강수정(장구)두분을 모시고 진주12차농악의 쇠가락을 조사하였다.
조사내용은
가) 진주12차농악의 전곡 접속 연주
나) 진주12차농악의 차수별 명칭별 연주
다) 장구 다섯가지 기본형
라) 요라굿 사설
마) 박첨지동동굿 사설
바) 절간기원 사설
사) 상여앞소리 반야심경
(3) 진주12차농악의 전수자들
진주12차농악의 기능보유자인 황일백은 진주에서, 문백윤은 삼천포에서 생활 근거지를 중심으로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문화재 기능보유자에게 지급되는 생계비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고 전수생들도 현대식인 수업료 납부도 없는 상황에서 황,문 두 사람의 생계는 곤란하였다.
황일백 문화재기능보유자의 사망후애는 1979년경부터 문백윤이 생활근거지를 진주로 옮겼으나 진주 출신의 전통 이수자가 없고 다만 양산의 이영우가 기능을 인정 받았으나 생활근거지를 부산으로 옮기는 바람에 진주12차농악의 후계신청을 접수하는 과정에 사망하여 앞날이 어둡기만 했던 때가 5-6년 계속되었다.
전수자들 중에서 진주농악 11-가호에 박염이 기능보유자로, 김선옥이 준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다행히 진주12차농악의 명맥을 있게 되었다.
3. 진주농악의 바른 모습
현재 황일백의 쇠가락장단과 김선옥, 박염의 쇠가락장단을 비교분석한 바 없어 구체적인 차이점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황일백의 진주농악12차의 순서와 여러 문헌상의 기록을 적어 밝힘에 진주농악의 올바른 계승을 위한 참고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정병호는 농악(열화당 1990) p. 201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주농악
1981년 2월부터 9월에 걸쳐 진주에서 이 지역의 걸립농악인 진주농악을 조사하였다. 이지역 농악의 상쇠인 강수정(1909년생), 박봉조(1929년생)등 두사람의 구술을 중심으로 정리 기록한 것이다.
황일백상쇠가 1976년까지 진주농악을 이끌어 왔으나 그가 작고한 뒤에는 이수자인 강수정과 박봉조, 박염, 깁선옥 등과 그 밖에 진주지방잽이들로 농악단을 편성하고 있다. 진주농악의 편성법은 경북농악과 호남농악의 중간형태이다. 쇠가락은 거의 3분의 3박이며 혼합박자가 쓰이지 않는것도 호남좌도 농악과 비슷하다. 그러나 덧배기와 다드래기 그리고 호호딱딱을 쓰는 것은 경북농악과 유사하다.
농악의 편성은 전원이 전립을 쓰고 있고 개인놀이가 비교적 발달하였다. 편굿에서는 채상모놀이가 돋보이며 군사놀이인 팔진해무진(八陳解武陳)굿이 특이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가지 문제를 찾을 수 있다.
㈎ 강수정, 박봉조는 필자가 아는 바로서는 황일백의 정통수제자였다.
강수정은 황일백보다 10세 나이차이가 났고, 그 다음이 20세 차이인 박봉조로 이수자들 중에서 최고참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기술은 대부분 정당했으나 불행히다 쇠가락12차 중에 덧배기, 길군악, 반삼채, 호호굿, 반덧배기, 영산다드래기의 6차만 밝혀주고 있다. 특히 반삼채, 반덧배기 등 두 쇠가락이 '반'자가 붙은 것도 틀려 있었다. 결론은 강, 박 두사람
은 덧배기, 길군악, 삼채굿, 영산다드래기 외에는 정통의 진주농악12차의 쇠가락을 외우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 진주농악은 경북농악과 호남좌도농악의 중간형태가 아니라 경북농악(영남좌도농악)과 호남좌 도농악이 그 중심인 경상우도농악 곧 진주농악의 병용형이라는 사실이다.
㈐ 개인놀이가 비교적 발달하였다라고 한 것은 목사골 진주중심의 놀이농악 굿판농악의 흐름을 제대로 하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 군사놀이인 팔진해무진굿이 특이하다라고 하였는데 5방진굿놀이를 합친 당연한 이야기다.
㈒ 채상모놀이가 돋보인다고 하였는데 진주농악 최고의 명칭이 진주12차8진법5방진36가락농악이었다. 슬프게도 8진법 열두굿과 36가락이 이미 소실되 지금 12차5방진농악이라도 그 명맥은 이어져야 한다.
㈓ 진주12차농악이 무형문화재로서 지정될 때의 참모습은 ㉮노작농악(勞作農楽) ㉯걸궁농악(乞窮農楽) ㉰걸립농악(乞粒農楽)을 벗어넘어 연희농악 곧 굿거리농악의 최정수의 경지에 도달한 진주농악을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황일백의 12차쇠가락
황일백이 쇠를 치며 기술한 가락이름은 진주말로 하였기에 여기에서는 그대로 적고 그 밑에 강수정, 박봉조의 가락이름을 적어 읽는 이로 하여금 비교하도록 하겠다.
황일백의 진주12차농악중에 많은 놀이가사가 있다. 현재 기능보유자들인 박염, 김선옥도 암송하지 봇하고 있다. 다만, 김선옥만이 귀동냥한 것으로 옥설가(玉雪歌), 일명 월선가(月仙歌)를 찾고 있었는데 바로 그 옥설가이다.
황일백의 가사는 옥설가 외에 지청노리 법당지청노리등이 있다
여기에서는 우선 참고로 옥설가만 기술 하기로 한다
옥설가(玉雪歌)
서산이라 금산체요
생애(生涯)는 일배주(일배주)라
오늘도 하심심어 하여 옥설가나 (하나) 불러보세
얼사 절사 놀로가자 놀로 가자
월선이 방으로 놀러가자
얼사 절사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
이태백이 어디가고
거문고 한 쌍만 걸렸구나
얼사 절사 저 달도 다 보내고
이월이라 한식날에
얼사 절사 저 달도 다 보내고
삼월이라 삼짓날에
얼사 절사 저 달도 다 보내고
사월이라 초파일날
얼사 절사 저 달도 다 보내고
오월이라 단오날에
얼사 절사 저 달도 다 보내고
유월이라 유딧날에
얼사 절사 저 달도 다 보내고
칠월이라 칠석날에 . . . . . .
. . . . . . . . . . . . . . . . . .
(4) 진주농악의 특색
박헌봉, 황일백 두분의 증언에 의하면 진주농악의 특색은 다음 다섯가지로 이루어 진다.
① 연주(질군악)
② 진풀이(5방진놀이 8진열무굿놀이)
③ 굿놀이와 사설
④ 잡기놀이
⑤ 열두발 상모놀이
위의 다섯가지 전주농악의 본채를 찾아내어 재현하지 못하면 현재의 진주농악은 1) 진풀이 2) 사물패농악 3) 잡기놀이농악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농악전문가인 문화재위원은 하루빨리 진주근방에 생존해 있는 농악잽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 순수한 진주농악의 조사와 재현 그리고 보존에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