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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5현 회재 이언적의 삶과 철학(1) - 양동마을
경주에서 신라가 아닌 조선을 만나다.
경주는 신라의 도읍지이고 경주에 가면 보통 사람들은 신라를 보고 온다. 하지만 경주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이 있다. 양동마을은 단일 성씨 집성촌이 아니라 손씨와 이씨 성이 공존하는 마을이라는 고유성과 함께 조선중후기의 촌락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마을이다. 오늘부터 총 4회에 걸쳐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을 중심으로 동방 5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의 삶과 철학에 대해서 집중 조명하는 답사를 해보고자 한다.
먼저 간단하게 양동마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010년 7월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깊은 양반마을이다.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양반가옥과 초가 160호가 집중되어 있다.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양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손소와 손중돈, 이언적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다.
1코스(하촌) :안락정→이향정→강학당→심수정(20분 소요)
2코스(물봉골) :무첨당→대성헌→물봉고개→물봉동산→영귀정→설천정사(1시간소요)
3코스(수졸당) :경산서당→육위정→내곡동산→수졸당→양졸정(30분 소요)
4코스(내곡) :근암고택→상춘헌→사호당→서백당→낙선당→창은정사→내곡정(1시간 소요)
5코스(두곡) :두곡고택→영당→동호정(30분 소요)
6코스(향단) :정충비각→향단→관가정→수운정(1시간 소요)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는 하촌(下村)과 상촌(上村),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이 이어지며,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분재기(재산 상속에서 나눈 기록)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마을의 유래
양동민속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청동기 시대 묘제(墓制)의 하나인 석관묘(石棺墓)가 마을의 안산(案山)인 성주산 정상의 구릉지에 100여기나 있었다는 고고학자들의 보고로 보아 기원전(B.C. 4세기 이전)에 사람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또 이웃 마을 안계리에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에서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오씨(吳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가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다.
경북 지방 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고,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민속마을이 외손마을이라 불리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며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실제 남자가 처가를 따라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풍덕 류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손소 선생 결혼해 처가가 있는 양동마을에 들어오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곳은 여강이씨의 집성촌에 손소 선생이 결혼해서 들어와 살게 되면서 손씨와 이씨가 공존하는 마을이 되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그럼 손소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손소영정
1433년(세종 15)∼1484년(성종 1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일장(日章), 호는 송재(松齋). 아버지는 증병조참판 손사성(孫士晟)이다.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직되고, 승정원 집현전의 후신인 예문관의 겸예문관 병조좌랑을 거쳐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었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기도 하며 1469년(예종 1) 성주목사를 거쳐 공조참의와 안동부사를 역임하고 계천군(雞川君)에 봉해졌다.
1476년(성종 7) 11월 진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갔으나 왕이 특명으로 녹봉(祿俸)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다스리되 친자식같이 하였다.
일찍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기근이 극심하게 들었으나 극진한 마음으로 구휼하여 희생자가 없어서, 그곳 이민(里民)의 호소로 임기가 연장되기도 하여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성주·진주·안동 등의 외관직은 경주에 있는 그의 노부를 봉양하기 위하여 스스로 원하여 왕의 특지(特旨)로 임명된 벼슬이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손소의 집안이 처가에 기댈 정도로 몰락한 양반가였거나 하지는 않은 듯하다. 경주에 본관을 둔 꾸준히 벼슬을 하며 세조 때 등용되어 차근차근 승진하고 임금의 총애를 받아 외관직의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선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남자가 처가에 얹혀사는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 그리 흠이되는 일은 아니었나 보다. 겉보리 서말이면 처가살이하랴는 속담과 같이 처가살이가 곤욕스런 일이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란 것이다.
여하튼 처가가 있는 양동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손소는 이 양동마을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곳에 집을 짓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양동마을의 서백당이다. 우선 서백당에 가보도록 하자.
서백당을 중심으로 마을지도의 제4코스 또는 내곡코스로 불리우는 코스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마을을 품고 있는 산 설창산 아래 자리잡은 양동마을에서 비교적 높은 지대의 코스를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4코스(내곡) :근암고택→상춘헌→사호당→서백당→낙선당→창은정사→내곡정(1시간 소요)
안동 하회마을은 물돌이 마을이란 이름처럼 물이 돌아나가는 지대에 형성되어 있어 비교적 높낮이가 크게 차이나지 않으며 마을 전체가 개방적이면서 집과 집의 대문이 마주보지 않는 식으로 배치되어 친족끼리도 사생활은 보호해주려 애를 쓴 반면 양동마을은 네개의 큰 구획으로 나누어지며 지대의 높낮이 차이도 꽤 있는 편이며 폐쇄형으로 바깥에서 안쪽이 잘 안보이는 집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근암고택
정조 4년에 이정수가 세운 집이며 그 4대손인 이희구의 호인 근암을 따 근암고택으로 바꿔 부르는 집이며 사랑채가 안채 담밖으로 떼어놓아 중부지방이나 호남지방에서도 보기 드문 배치방식으로 꾸몄다. 이는 집주인의 전통 남녀유별 사상이나 생활관이 작용한 결과로 짐작하는데 방 2칸과 대청 1칸의 작은 크기로 간소하게 만들었다.
대체로 소박하고 간소하게 지은 집으로 주거 공간의 기능에 따라 구성을 달리 배열한 특색있는 변화를 보이고 있어 가치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상춘헌
조선 영조 6년(1730)경에 지었다고 하며, 양동마을에서 일반적인 튼 'ㅁ'자형 기본 평면을 가진 양반집이다.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ㅡ'자형의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안마당에서 볼 때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툇마루를 둔 건넌방, 왼쪽 끝칸에 안방, 안방 밑으로 부엌을 둔 'ㄱ'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보통 부엌을 두는 왼쪽 끝칸 자리에 안방을 놓은 점인데 이는 중부지방 민가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다.
사호당
이 집은 사호당 이능승 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사호당고택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헌종 6년(1840)에 지었으며 일반적인 'ㅁ'자 기본 평면을 가진 양반집이다.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자형 안채에 '一'자형 행랑채가 놓여 'ㅁ'자형을 이루고, '一'자형 사랑채가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다음은 내곡코스의 중심이며 양동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잘 알려진 서백당이다. 양동마을에서 이택원 가옥과 함께 가장 오래된 살림집 서백당
서백당은 양민공 손소(孫昭)가 1454년 건축한 집으로, 월성손씨종택 또는 서백당(書百堂)이라고도 한다. 손소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孫仲暾)과 외손으로서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李彦迪)이 태어난 곳이다.
一자형 대문채 안에 ㅁ자집의 안채가 있고, 사랑 뒷마당에는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문간채는 정면 8칸, 측면 1칸의 홑처마 기와 맞배지붕이며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납도리집이다. 몸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자집 평면으로 행랑채보다 상당히 높게 쌓은 기단 위에 납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다.
안채 역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대청 정면의 기둥만은 모두 두리기둥 4개로 처리하였다. 특히 안방과 건넌방의 귓기둥과 측면 제2기둥에 각각 두리기둥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정원에는 경상북도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건축 당시에 심은 향나무가 있다.
서백당은 사랑채의 편액이며 송첨이라 쓰인 편액도 보인다. 대청의 난간이 참 인상적이다. 서백당의 서백이란 참을 인자 100번을 쓰면서 인내를 배운다는 뜻으로 최근에 지어진 당호라고 한다. 현재는 손소의 20대손인 손성훈씨의 소유이다. 서백당은 건축연대가 양동마을의 모든 가옥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그 가치가 크며 대문채에서 한단을 높여 지은 사랑채가 특징이다.
낙선당
월성손씨(月城孫氏)의 종가인 손동만(孫東滿) 가옥의 북측 산중턱에 있다. 서향집으로, 대문채·사랑채·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낙선당 손종로 선생의 호를 따라 지어진 당호이며 손종로 선생의 집이다.
건축연대는 1540년경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언덕 위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대문채와 마주하는데, 대문채는 중앙에 대문을 두고 좌측에 마구간, 우측에 1칸 행랑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와 대문채 사이의 좌측으로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곳간채가 있고, 우측 끝에 방1칸을 들였다.
낙선이란 착함을 즐긴다는 것이며 세조충효라는 편액은 굳이 해석하자면 충효를 세상의 담쟁이처럼 덮는다는 뜻으로 충과 효를 숭상하는 유교 양반가의 정신이 잘 드러나는 편액이라 하겠다. 창은정사
이 건물은 철종11년 창은 이남상공이 지은 집으로 건축학자들의 많은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집이다. 이남상공의 아들 이재교란 분이 영남유림을 대표하여 대원군에게 만인소를 올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영남의 가옥배치를 가졌으나 방의 용도가 특이하게 배치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며 조선 말의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높은 가치를 가진 건물이라고 한다.
정사는 정신을 수양하는 집 학문을 닦고 베푸는 곳의 의미를 가진 말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당호로 많이 사용되었고 회재 이언적의 독락당도 옥산정사란 이름이 붙어 옥산이란 자신의 호에 정사를 붙여 학문을 갈고 닦고 정신을 수양하는 주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당호라 할 수 있다.
내곡정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인 유학자 내곡(內谷) 이재교(李在嶠:1822∼1890)가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1905년에 건립한 정자로,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설창산(雪倉山) 기슭에 있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뒤쪽 중앙에 방을 덧달아 전체적으로 T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건물 앞쪽은 2층 누각 형태이나 뒤쪽은 높은 지대와 연결되어 마루로 바로 통하게 설계되었다. 전면과 측면이 계자난간으로 막혀 있어 뒤쪽으로 출입구를 내었으며, 빗물이 담 밖으로 흘러나가도록 건물을 빙 둘러 물길을 조성하였다.
4코스를 돌아보았다면 이 양동마을이 1450년대부터 1905년대까지 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관리되고 조성되어 온 마을임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초부터 조선말까지 조선의 가옥 건축 양식의 변화와 집주인이 가옥에 담으려는 정신에 따라 다양한 변화와 짜임새 그리고 지은 사람의 공간관이 다양하게 보여진다는 것이 양동마을을 둘러보는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곡정에서는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 자락의 밑에서 펼쳐져 있는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을 것 같다.
양동마을에는 식당이나 다리쉼을 하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많지는 않은데 양동마을에 갔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면 미리 우향다옥이란 곳에 민박과 식사를 해결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밥을 해먹어도 좋겠지만 귀찮다면 우향다옥에서 식사를 하고 배를 채운 후 양동마을을 계속 돌아보도록 하자. 저녁에 이 집에서 막걸리를 받아 시켜놓고 동행한 사람들과 어스름이 내린 저녁에 술 한잔하는 것도 참 좋을 듯하다. 예전에 하회마을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에는 한적한 겨울의 낭만이 있어 2만5천원 정도로 막걸리를 먹으면 방 하나를 내주는 술집이 있어 매우 좋았던 기억이 있다. 요샌 그런 정을 느낄 수가 없다는 게 참 아쉽다.
점심을 먹었다면 이제 또 부지런히 5코스와 6코스를 돌아보도록 하자.
두곡고택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6대손 이시중의 분문가(分門家)로서 1773년(영조 49)경에 건축되었으며, 그후 다른 분문인 이조원(李祖源)이 매가하여 천석의 부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주인 이희태(李熙太)는 이조원의 손자이다.
넓은 대지를 토석담장으로 둘러싸고 ㄱ자형 평면구성인 안채와 一자형 평면구성인 사랑채·아래채가 어우러져 튼口자형으로 배치되었다. 뒤쪽으로 행랑채와 방앗간채가 1채씩 있고, 앞쪽으로는 대문간채가 있는데, 그 안쪽에 마구간이 있다. 안채만 ㄱ자형 평면구성이고, 나머지는 모두 一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당
조선 선조 때 하양(河陽) 현감을 지낸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향사를 올리는 사당이다. 1636년경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에 건립되었다. 이의잠의 선정에 보답하기 위하여 하양 주민들이 바친 영정을 지역 유림에서 봉안해오다가 경주 유림으로 넘기면서 영당을 건립하여 안치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전면에는 삼문(三門)을 세우고 주위로 토석 담장을 둘렀다. 매년 중양절(重陽節:음력 9월 9일)에 추모제를 지낸다.
동호정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4대손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을 추모하기 위하여 1844년(철종 5) 후손들이 세운 정자로,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동쪽 산 중턱에 있다. 전면 4칸·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고, 양쪽 측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조성하였으며, 네모나게 다듬은 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현재 당내에는 후손 이능윤(李能允)의 '동호정기(東湖亭記)'가 새겨진 편액이 걸려 있다.
이제 6코스를 따라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안계천변을 따라서 있는 건물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정충비각
손종로의 후손 손영호가 소유, 관리한다. 낙선당 손종로는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고 남포현감을 지냈다. 1636년(인조 10) 병자호란 때 종군하여 경기도 이천의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그를 수행한 충직한 노비 억부와 함께 전사했다. 전사한 뒤 시체를 찾지 못해 의관으로 초혼장을 지냈다.
이 비각은 1783년(정조 7) 손종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왕이 명령을 내려 세운 비각이다.
향단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였을 때인 1540년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손씨 대종가인 관가정(보물 442)이 같은 양동리에 세워지자 이에 외척의 입지를 마련하고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원래 향단은 99칸이었으나 화재로 불타고 현재는 56칸의 단층 기와지붕이다. 전면의 한층 낮은 곳에 동서로 길게 9칸의 행랑채가 있고 그 후면에 행랑채와 병행시켜 같은 규모의 본채가 있다. 그 중앙과 좌우 양단을 각각 이어서 방으로 연결하여, 전체 건물이 마치 ‘日’자를 옆으로 한 것 같은 평면이다. 따라서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한 몸체로 이루어진 2개의 마당을 가진 구조로 되어 있다.
조선의 사대부가 99칸의 한계를 가진 것은 오직 임금만이 100칸 이상의 궁궐을 지을 수 있다는 원칙을 정하고 그를 지켰기 때문이다.
내부는 온돌방과 마루를 서로 번갈아 배치하였으며 동단에 큰 대청이 있고 서단에는 곳간, 중앙에 제일 큰 온돌방을 두었다.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대문간은 앞채의 동쪽에서 세번째 칸에 마련하였으며 중앙의 큰 온돌방 북쪽에는 좁은 통로가 있어 이곳을 거쳐 그 안에 있는 마당에 들어간다. 사대부가의 격식과 품격을 갖추면서, 주거문화의 합리화를 꾀한 공간구성을 보이는 주택이다.
[출처] 경주 양동 향단 [慶州 良洞 香壇 ] | 네이버 백과사전
향단은 공간을 넓게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합리적, 효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려한 독특한 구조로 양동마을에서 가장 건축학적 연구의 가치가 높은 가옥으로 유명하다. 특히 아기자기하게 공간을 활용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므로 오랜 시간 머물면서 그 독특함을 즐기면 좋을 듯하다.
특히 회재가 직접 지은 건물로서 회재의 정신 사상과 공간에 대한 합리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어 회재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가옥이라 할 수 있다.
관가정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관리로서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옛집이다. 손소의 아들 손중돈은 조카가 되는 회재 이언적과 함께 양동마을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로 꼽히는 인물이니 이 집도 양동마을에서는 아주 중요한 집이라 할 수 있겠다.
언덕에 자리잡은 건물들의 배치는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가운데의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사랑채, 나머지는 안채로 구성된다. 안채의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담으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둘러 막아, 집의 앞쪽을 탁 트이게 하여 낮은 지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보통 대문은 행랑채와 연결되지만, 이 집은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대문의 왼쪽에 사랑방과 마루가 있다. 마루는 앞면이 트여있는 누마루로 ‘관가정(觀稼亭)’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문의 오른쪽에는 온돌방, 부엌, 작은방들을 두었고 그 앞에 ㄷ자로 꺾이는 안채가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살림을 하는 공간으로, 부엌, 안방, 큰 대청마루,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의 사랑방과 연결이 된다. 네모기둥을 세우고 간소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뒤쪽의 사당과 누마루는 둥근기둥을 세워 조금은 웅장한 느낌이 들게 했다. 사랑방과 누마루 주변으로는 난간을 돌렸고, 지붕은 안채와 사랑채가 한 지붕으로 이어져 있다.
관가정은 조선 중기의 남부지방 주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수운정
이 정자는 서쪽 산정에 서남쪽으로 안강평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는데, 1582년(선조 15) 청허재 손엽이 세웠다고 한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서측에서부터 대청 4칸, 방 2칸을 두고, 전면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의 사랑방 뒤 모서리와 90°로 꺾인 곳에 작은문을 두고, 이의 북쪽으로 마루방 1칸과 행랑방 1칸으로 이루어진 행랑채를 두었는데, 이곳에서 정자생활의 뒷바라지를 한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태조의 쉬용영상을 가져와 잠시 모셨던 곳으로도 알려짐
안강의 넓은 들을 바라보며 농사를 짓는 평민들을 한가로이 바라보는 양반들의 시선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저녁 노을이 지는 무렵이나 새벽 물안개 피어오르는 이 수운정등의 방향에서 안강평야를 바라보면 그 풍광이 오감을 만족시키더라는 지인 위혜진 선생님의 감회를 여러분도 꼭 느껴보시기를 ㅋㅋ
다음 시간에는 양동마을에 남아 있는 회재 이언적의 흔적을 중심으로 양동마을의 나머지 가보지 못한 곳을 둘러보며 양동마을 기행을 마무리하도록 한다.
-- 다음에 계속
동방 5현 회재 이언적의 삶과 철학(2) - 회재 이언적의 삶을 생각하다
지난 시간에는 양동마을이 여강 이씨와 경주 손씨의 두 성씨의 가문이 공존하는 두 가문의 500년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마을이란 것을 알아보았다. 이번 시간에는 양동마을이 그 전통성을 지키며 오래도록 보존되고 지켜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한 회재 이언적의 삶과 그의 학문적 성취와 철학을 돌아보면서 소년 시절 천재에서 사화를 겪고 영남학파의 학통을 잇고 문묘에 동방 5현으로 배향되기까지의 삶을 중심으로 양동마을의 나머지 공간들을 돌아보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우선 회재 이언적 앞에 붙는 동방 5현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간단히 설명하자.
동방 5현이란?
동방 5현은 동방의 다섯 현자, 즉 우리나라에서 배출해낸 현자로 일컬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다섯 현자를 뽑는 일에서 영남학파들은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바로 회재 이언적을 집어넣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남인인 영남학파의 이런 의견은 기호학파의 서인들에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이이는 을사사화 당시 이언적이 직언을 통해 더 많은 유림을 구하지 못한 것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언적은 원칙을 중요시한 보수적 인물이었고 아무리 전횡을 일삼는 윤원형일파라 할지라도 그들과 강하게 맞서는 강경책으로 조광조같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온건적 변화를 유도해 나가는 방법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인보다 다수를 차지하고 주류였던 서인세력은 영남학파의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등은 동방 3현으로 추대하는 데 합의했지만 이황, 이언적 등에 대해서는 논란을 키워나갔으며 최초에 동방 3현의 추대된 후에 동방 5현에 이언적이 포함되도록 영남의 유림들은 서인세력과 백년이 훌쩍 넘도록 대립과 갈등을 해 최종적으로 거두어 낸 결과이다. 서자 이전인과 그 후손들이 적서차별의 엄혹한 벽을 넘어 이루어낸 명예회복이자 고난끝의 승리가 바로 동방 5현 중 일인으로 배향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묘에는 공자와 같은 중국의 성현들만이 아니라 동방 18현이라 하여 우리나라에서 배출한 유학의 현자들이 배향되어 있다. 동방 5현은 늘 소수파였고 재야였던 영남의 유림들이 조정에 강하게 압력을 행사하여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킨 일이라 할 수 있다.
문원공이란 시호를 받고 의정부 영의정 벼슬을 추증받을 때까지 그는 죽어서도 죽지 못한 죽음을 형벌로 받았다.
여하튼 여러가지 우여곡절과 난항을 거듭한 끝에 문원공이 되고 동방 5현으로 배향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 이유를 회재 이언적의 삶을 통해서 이해해 보도록 하자.
이언적의 묘 그리고 기대승이 썼다는 이언적 신도비
이언적의 묘는 포항 연일읍에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언적이 사화로 유배된 상황에서 강계에서 죽고 그를 연일읍에 묻었는데 왜 양동마을이나 옥산서원 독락당이 있는 곳이 아닌 이곳 포항 연일읍에 그의 묘소가 있는가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아마도 이언적의 후손들은 양동마을에서 죄인의 후손 신분을 피하기 위해 연일읍으로 모두 옮겨가게 되면서 경주로 운구해온 시신을 이곳 연일읍에 묻게 되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회재 이언적의 영정이 있을까 하여 찾아봤지만 회재 이언적의 영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언적(李彦迪, 1491년 ~ 1553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유학자·현신(賢臣)이었다. 이름은 원래 이적(李迪)이었는데, 중종의 명령으로 “언”자를 덧붙였다. 호는 회재(晦齋), 자계용(紫溪翁)이고, 자는 복고(復古)이다. 경주 출생이며 여주(驪州)이다.[1]
15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인동현감, 사헌부장령(掌令), 밀양부사(密陽府使) 등을 지내고 선정을 베풀어 명관으로 이름났으며, 중종 25년에는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당시 척신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극력 반대하다가 심언광(沈彦光) 등의 모략으로 물러나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중종 32년(1537) 김안로 일파가 쫓겨난 뒤에 종부사첨정(宗簿寺僉正)으로 복직하여 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고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어 선치(善治) 했으므로 경내(境內)가 평안하였다. 그뒤 수천언(數千言)의 소를 올려 국가대본(國家大本)과 정치강령을 논하여 왕의 찬탄을 받고 가선대부를 거쳐 자헌대부로 승진한 뒤 예조판서(禮曹判書),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하였다. 그뒤 1545년(인종 1년)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 되었다.
명종 즉위 후 원상(院相)의 한사람으로 서정을 주관하였고 판의금부사로 을사사화 당시 체포된 윤임 일파를 위관으로 추국하였으나 그도 다음해인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귀양갔다가 1553년(명종 8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이황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주자가례에 처음으로 정통했던 그는 예학서를 통해 후대의 예학에 영향을 미쳤다. 주자가례를 고집한 그는 자신의 서자 이전인에게 가통을 넘기지 않고, 5촌 조카 중 한명인 이응인을 양자로 입양하여 가통을 전수했다. 그뒤 이전인의 아들 이준이 이탕개의 난 진압에 기여한 공로로 서얼 허통을 하게 된다.
그럼 양동마을에서 회재 이언적의 흔적이 담긴 무첨당부터 여행을 시작하자.
종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위주로 한 건물답게 제사에 참가하는 종친들 한명의 한명의 일인 소반들을 선반에 올려놓은 모습이 인상적이고 대청에서 바라보이는 후원과 마당 풍경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무첨당 (더럽힘이 없는 집)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1491∼1553)선생 종가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세운 건물이다. 지금은 종손인 이지락 선생이 종손으로서 관리를 하고 있다. 이곳은 회재 이언적의 부친 이번이 살던 곳이라 하며 여강 이씨 대종가이며 사랑채, 안채 별당채 중에서 무첨당은 별당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장손 이의윤의 호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건물 내부를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이다. 대청은 앞면 기둥 사이를 개방하고 누마루에서도 대청을 향한 쪽은 개방되어 있으며, 뒤쪽과 옆면은 벽을 쳐서 문짝을 달았다. 평면은 ㄱ자형을 띠고 있고 둥근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배치하고 있다.
이 건물의 기능은 상류주택에 속해있는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 손님접대, 쉼터, 책읽기를 즐기는 따위의 여러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별당건축의 기능에 충실하게 지은 건축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무첨당 안채 건물
무첨당에는 여러 편액들이 걸려 있는데 물애서옥은 중국의 사신 조광이 조선에서 학문에 이름높은 학자가 제일 많은 곳을 찾아 이곳 양동마을에 들러 물봉언덕의 학문하는 집이란 뜻으로 크게 감명받아 써놓고 간 편액이라고 한다.
무첨당에서 보면 물봉고개란 곳이 있는데 이 고개의 이름은 조상에게 욕됨을 입히지 않음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과연 회재 이언적은 조상들에게 욕됨이 없는 삶을 산 것일까 한번쯤 생각해 보게 한다.
좌해금서는 흥선대원군이 대원군이 되기 전에 이 곳 양동마을에 잠시 머무르면서 쓴 편액이라 전해지는데 도난을 당해 최근에 모작 편액을 걸어두었다 한다. 좌해는 왼쪽에 바다가 있다는 뜻이니 영남지역을 말하고 금서는 거문고와 서책을 말하여 영남지역 선비들의 풍류가 드높음을 중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글이라 한다.
그밖에 세일헌 편액과 오체서실 편액 등이 있다.
무첨당은 독락당에서 말년을 은거하며 보내기 전 회재의 부친 이번이 별당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며 이언적의 친자가 아니지만 양자로 들였던 이응인이 제사를 지내는 계후자로서 양동파의 후손이 되고 회재의 맥을 잇고 독락당과 옥산서원을 세우는 데 기여하는 친자이며 서자였던 이전인은 옥산서원 중심의 옥산파의 후손으로 분류되어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잇는다. 김안로와의 대립으로 귀향했을 때 회재 이언적은 자신의 행보가 여강이씨 전체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무첨당으로 돌아오지 않고 독락당으로 가서 거기서 두번째 부인에게서 서자 이전인을 얻고 살게 된다. 이 두번째 부인이 늙으신 부모를 공양한 것으로 인해 회재는 무척 아꼈다고 한다.
보기엔 상류층의 화려함의 극치를 누리고 있는 건물인 것 같지만 회재 정도의 이력을 가진 사람에겐 이 정도가 그렇게 크고 화려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회재는 양동마을의 이 무첨당에 곡식을 담아두는 큰 성주독을 마련해 두었는데 춘궁기가 다가오면 성주독의 곡식을 퍼내어 약 100kg의 쌀로 떡을 만들어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정도로 이웃과 함께 하는 철학을 펼쳤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대성헌
18세기 중엽에 세운 목조 가옥으로, 안채·사랑채·행랑채의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ㄱ자집 형태이고, 사랑채와 행랑채는 일자형이며, 3동의 건물이 모여서 전체적으로는 ㅁ자집이다. 안채·사랑채·행랑채의 건물은 모두 소박하고 간결한 구조이다.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소로받침 없이 납도리를 받쳤다. 사랑채의 대청 앞에는 2칸에 8짝문을 샛기둥 없이 달아, 4짝씩 접어 들어올리게 하였는데, 이러한 건축양식은 다른 건축물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구성이다.
스물셋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거치며 중종의 밑에서 목민관으로서의 꿈을 키웠지만 권력 남용을 밥먹듯이 하고 정적을 공포정치로 짓눌렀던 김안로에 반대하다 고향으로 낙향했지만 김안로가 실각하고 쫓겨나 사사당하자 다시금 조정에 등용해 직제학 등을 해내던 이언적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친다. 바로 윤원형 일파의 을사사화이다.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그 자신이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윤원형의 의도에 반기를 드는 꼴이 되어 자신이 관직을 물러나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소윤의 영수이며 실권자였던 윤원형과의 대립은 그가 과연 정치를 통해서 주자의 도리를 과연 조선사회에서 관철시킬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회의와 번민의 시작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김안로에 이어 윤원형 일파에 맞선 것은 대대로 이어지는 권문세가와 선을 긋고 모난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언적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늘 논란의 핵심이 된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리론을 집대성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지만 권문세가들의 권력남용과 전횡을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일까? 난 독판을 치는 윤원형같은 권문세가들에 의해 선비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면서 정치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왕을 보좌하고 격군하는 자기가 만든 논리가 매우 무력하다는 것도 절실히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영귀정의 대문인 이호문
영귀정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세운 정자로 이후 소실된 것을 1778년(정조 2) 후손들이 중건하였고, 세월이 흐르며 심하게 퇴락하여 1925년에 재차 중건하였다. 대문채인 이호문(二呼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영귀정(詠歸亭)이라는 편액이 걸린 본채가 있다. 정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좌측 2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이다. 마루를 높이 띄우고 전면 전체에 계자난간을 둘러 뒤쪽 툇마루를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다. 현재 이언적 후손들의 모임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 벼슬 생활 중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머물며 심신을 가다듬던 공간이라 전해지고 있다.
양재역벽서사건 유배생활의 시작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이며, 정미사화라고도 불린다.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경원대군이 즉위하는 한편,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자, 소윤 세력은 역모를 씌워 대윤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사화로, 그 과정에서 사림(士林)계열의 인물들까지도 많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윤 세력이 자신들에 대한 정적으로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잔존 인물들을 도태시키려고 일으킨 것이다.
1547년(명종 2) 9월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쳤다.
윤원형·윤인경(尹仁鏡)·이기·정순명(鄭順明)·허자(許磁) 등은 이전의 처벌이 미흡하여 화근이 살아 있는 까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수(李若水)를 사사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노수신(盧守愼)·정황(鄭熿)·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김만상(金彎祥)·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이천계(李天啓)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소윤이 몰락한 후 대부분 복권되기도 하지만 이언적은 유배지인 강계에서 죽었다. 복권과 명예회복을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이응인, 이전인 중에서 이전인은 서자라는 이유로 경주 향교나 서원 등에서 배척될 수밖에 없었다. 옥산파 후손들이 서자의 후손이라는 굴레를 쓰지 않았다면 회재 이언적의 명예는 훨씬 전에 회복되지는 않았을까?
설천정사 정문 향양문
설천정사
조선 중기의 문신 설천(雪川) 이의활(李宜活)이 1602년에 건립한 정자로, 200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좌측 2칸은 대청, 우측 1칸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 앞쪽 마루를 대청마루보다 높게 설치하였으며 대청 뒤쪽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기단은 자연석을 쌓아 조성하였고 둥글게 다듬은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이의활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손자로,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호연(浩然)이다.
[출처] 설천정사 [雪川精舍 ] | 네이버 백과사전
여강이씨 일족은 회재 이언적으로 인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없었고 이언적의 후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동파의 후손들이든 옥산파의 후손들이든 회재가 복권되고 정당한 평가를 받기 전까지 오랫동안 영남학파의 학통을 잇고 퇴계 이황에게 영향을 미친 회재 이언적의 후손이라는 것은 명예라기보다는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딱지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경산서당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장손 무첨당(無忝堂) 이의윤(李宜潤:1564∼1597)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에 있다. 1838년(헌종 4) 오금리 낙산(洛山)에 세웠다가 1857년(철종 8) 안계리로 옮겨 세웠고 1870년(고종 7) 금령(禁令)에 의해 헐린 것을 1918년 재건하였다. 이후 1970년 안계댐 공사 때문에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왔다. 강당인 이선당(二善堂)과 동재, 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강당은 정면 5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동재는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출처] 경산서당 [慶山書堂 ] | 네이버 백과사전
육위정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4대손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이 분가하여 살던 곳으로, 1591년(선조 24)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중앙에 건립되었다. 이후 이곳에서 맏손자의 6형제가 태어나 그들이 번성하라는 뜻에서 육위정(六韡亭)이라고 불렀다. 정면 4칸·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좌측 2칸은 대청, 우측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마루를 높이 띄우고 전면에 전체적으로 난간을 설치하여 대청 뒤쪽 쪽마루를 통해 출입한다. 현재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으며, 건물 뒤쪽 부속채에도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양재역벽서사건 정미사화, 을사사화 등으로 사화란 붕당정치 최대의 폐해에 맞닥뜨려 학문적 동지와 친구와 선후학 등을 잃었을 이언적은 아마도 현실을 잠깐 피해 더욱 더 학문적 성취에 힘을 쏟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단칠정론의 학문적 탐구를 시작하여 퇴계 이황이 그 뒤를 잇게 된 것도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정치적 정신적 시련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수졸당
양동마을 중앙 산등성이의 중간지점 동쪽 언덕받이에 있다. 1620년(광해군 12)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4대손 이의잠(李宜潛)이 건립하였고, 그후 6대손 이정계가 증축하였다. 수졸당이라는 당호(堂號)는 이의잠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출처] 양동 수졸당 [良洞守拙堂 ] | 네이버 백과사전
양졸정
양졸당(養拙堂) 이의징(李宜澄:1568∼1596)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734년(영조 10)에 세운 정자로,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58년에 중건하였다.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고 건물 뒤쪽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기단은 자연석을 높게 쌓아 조성하였으며 낮은 초석 위에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현재 뒤뜰에 딸린 부속채에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이의징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손자로 본관은 여강(驪江), 자는 형연(炯然)이다. 1568년(선조 1) 경주 양동에서 태어나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음직으로 승사랑(承仕郞)에 올랐다.
[출처] 양졸정 [養拙亭 ] | 네이버 백과사전
거림식당
청국장찌개 된장찌개로 양동마을에서 이미 소문난집 거림식당 가서 꼭 먹어봅시다.
안락정
양동마을 어귀인 초등학교의 맞은편 언덕 위 산중턱에 자리한 월성손씨(月城孫氏) 문중의 서당으로, 여강이씨(驪江李氏) 문중의 공용서당 양동 강학당(良洞講學堂:중요민속자료 83)과 쌍벽을 이루는 건물이다.
당초 1776년(영조 52)경에 월성손씨 문중에서 서당으로 건립한 것인데, 헌종 때 수통정인 손영순을 위하여 후손들이 이 건물을 매입하여 정자로 삼았다고 한다.
[출처] 양동 안락정 [良洞安樂亭 ] | 네이버 백과사전
이향정
1695년(숙종 21)에 건립한 주택으로 온양군수를 지낸 이향정(二香亭) 이범중과 그의 맏아들 이헌유가 살던 집이다.
양동마을의 안골로 들어가는 동구 초입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아래채·곳간채로 이루어져 전체 구조는 튼口자형으로 배치된 집이다. 토담으로 된 담장을 들어서면 사랑채 동단에 있는 중문이 마주 보인다.
안채는 북측 꺾임부에 부엌을 두고 남측으로 안방 2칸, 건넌방 1칸을 두어 정면이 6칸이며, 안방에서 건넌방까지 툇마루를 두었다. 부엌의 서측 아래쪽에는 2칸의 광과 1칸짜리 방을 들였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5칸으로 중앙에 2칸의 대청을 두고 대청 좌우로 방을 두었는데, 사랑건넌방의 전면과 측면 마루는 퇴를 달아 확장하고 끝에는 아(亞)자형 난간을 돌려 누마루 같은 정취를 보인다. 아래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좌우에 2칸의 광을 두고 중앙 2칸은 흙바닥 헛간을 이루고 있다. [출처] 양동 이향정 [良洞二香亭 ] | 네이버 백과사전
강학당
여강이씨(驪江李氏) 문중의 공용서당으로 월성손씨(月城孫氏) 문중의 서당인 양동 안락정(良洞安樂亭:중요민속자료 82)과 쌍벽을 이루는 건물이다. 성주봉 언덕에 있는 양동 심수정(중요민속자료 81) 서쪽에 자리잡고 있어 북촌을 바라다보는 위치에 있다. 건립연대는 1870년경으로 추정되며, 후학들이 계를 모아 건축하였다고 한다.
서당과 행랑채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당의 평면구성은 ㄱ자집 형태로 동측 꺾이는 곳에 안방을 두고 서측으로 대청 2칸, 건넌방 1칸이 배열되어 정면은 4칸이 된다. 안방의 북측으로는 마루 1칸과 장판고 반 칸을 두었다. 막돌흩은층쌓기 기단 위에 방주를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다.
[출처] 양동 강학당 [良洞講學堂 ] | 네이버 백과사전
심수정
양동마을에 들어서면 우측 성주봉 등성이에 있는데, 맞은편 북촌에 자리잡은 향단(香壇:보물 412)에 딸린 정자이다. 건축연대는 1560년경으로 여강이씨(驪江李氏) 문중에서 세웠다고 한다. 철종 때에 화재로 전소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17년경에 본래의 모습대로 중건·복원한 것이다.
정자와 행랑채로 구분되는데, 2동 모두 ㄱ자형 평면구성이다. 정자는 정면 5칸인데 북측 꺾임부에 대청을, 동남측 끝에 2칸의 방을 두고 서남쪽으로는 방과 마루를 1칸씩 배치하였다. 마루부분은 누각이고, 난간마루 둘레에는 계자난간을 설치하였다. 행랑채는 방, 마루, 방, 부엌이 1칸씩 연결되고, 부엌을 서북쪽으로 연장하고 광 1칸이 달려 있어 ㄱ자형 평면구성이다.
[출처] 양동 심수정 [良洞心水亭 ] | 네이버 백과사전
개인적으로 양동마을의 여러 가옥들 중 심수정이 가장 멋드러진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함허루, 삼관헌 등의 편액 등도 함축적으로 공간의 의미를 더한다.
이상으로 회재 이언적의 삶과 철학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는 양동마을의 주요 건물들을 한번씩 둘러보며 회재 이언적이 김안로나 윤원형 같은 당대 권력가들과 맞선 정적으로 낙인돼 오랜 고초 끝에 유배 생활 중에 강계에서 죽어 죽은 후에도 죽음의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 뒤늦게 동방 5현으로 배향될 수 있었던 과정까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양동마을은 500년간의 손씨와 이씨 집성촌으로서 회재 이언적의 할아버지 때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두 집안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문화유적으로서 단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이제 세계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오랫동안 지키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자산임을 깨달았기를 바라며 다음 편에서는 옥산서원과 독락당으로 옮겨 양동마을에서 다루지 못한 이언적의 삶과 철학을 더 이어서 해보도록 하겠다.
- 다음 편에 계속
동방 5현 회재 이언적의 삶과 철학(3) - 독락당 지은 뜻은?
회재는 양동마을의 손소의 조카로 어린시절 양동마을에서 살다가 이곳 독락당으로 옮겨왔다 처음부터 이런 큰규모가 아니었고 500여년의 역사를 통해 조성되어 온 것임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다.
회재가 7살때 그의 아버지 이번이 돌아가셨는데 그 돌아가신 아버지때부터 이곳 독락당에 초가삼간을 지어놓고 이 곳의 자연을 즐겼다 지금의 세심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회재가 정치적분쟁속에서 파면당하고 귀향하면서 본가의 양동마을에 가지 않고 이곳 독락당에서 둘째부인과 생활하였다.
과연 이언적은 왜 본가인 양동마을을 놔두고 이곳에 머물렀던 것일까? 독락당에 담긴 회재의 삶과 철학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독락당 7년 은거
옥산서원에서 1km 정도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독락당이 나온다. 회재는 김안로에 저항하다 조정에서 쫓겨나 김안로가 탄핵당할 때까지 약 7년간 이곳에서 머물며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때를 기다렸다.
독락당의 독락이란 당호는 맹자 "진심장구" 상편에서 가져온 말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옛날 어진 선비들만이 어찌 홀로 그렇지 않았겠는가. 자신의 도를 즐겼고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
회재는 이곳 독락당에서 물 흐르는 소리에 마음을 씻고(세심) 홀로 도를 즐기며 세상의 권세를 잊고 지내고자 했다. 그러나 독락당에서의 생활이 도피나 좌절에 따른 유유자적이라기 보다는 적극적인 재도약을 위한 자기 반성의 시간이었을 가능성을 맹자의 진심장구 상에서는 다시 말하고 있다.
"막히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고 열리면 아울러 천하를 선하게 한다."
지금 당장 벼슬길로 돌아가 세상에 보탬이 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자신 스스로를 선하게 하여 두면 언젠가 되돌아갈 그 날을 위해 학문 정진에 온 힘을 쏟아야겠다는 각오를 엿볼 수 있다.
맹자의 진심장구는 학문과 교육을 상당히 강조한 경구이며 독락당에서 둘째 부인과 지내며 언젠가 바르게 쓰이게 될 때를 위해 자신을 선하게 만드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나 보다.
다시 생각해 보면 독락이란 홀로 즐겁게 지낸다는 뜻이나 맹자의 이 홀로 즐거이 지낸다는 말에 사마광은 자연이 이미 옆에 있으니 혼자가 아니고 자연과 더불어 즐긴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독락당이 훌륭한 자연 풍광 속에 자리잡은 뜻을 또 생각토록 한다.
세심대 소폭포
옥산계곡 세심대
유년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이곳에서 초가집을 짓고 사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닦고 청운의 뜻을 품었을 회재 이언적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세심대가 있는 옥산계곡은 독락당에서 은거하는 이언적에게는 세상과의 인연을 단절하는 첫번째 단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독락당을 한번 돌아보도록 하자.
독락당은 바깥에서 집안까지 단번에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있다. 집안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차를 거쳐야한다. 가장앞에 냇가를 건너는 것으로 시작해서 집안 중간 중간에 담과 문을 통하는 절차등 여러개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런식의 여러단계의 절차에서 '세상 을 멀리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 일련의 절차가 되는 것이다.
회재 이언적에게는 자기를 가르친 스승이 없다고 자신할 만큼 독창적인 학문의 틀을 갖추었던 인물이다. 물론 회재라는 호가 주희(주자)의 호 회암을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 역시 고집스럽게 주자의 학문을 따른 것이지만 딱히 이끌어준 현실적 스승은 없었다. 그는 격군론 등으로 제왕학을 정립하는 계기를 만들고 대학에 대한 주석을 새로이 하고 태극사상, 사단칠정, 인간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의 주기주기논쟁에서 주리철학의 토대를 다진 인물로 그 이름이 높다. 그런 그가 정치적 좌절 끝에 절망하지 않고 학문 정진을 자기 스스로 다지며 이 독락당의 건물을 은거의 공간으로 지으며 철저하게 은거를 위한 공간으로 설계한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영남학파의 독립적 계파를 가졌던 남명조식도 자신의 철학 사상을 자신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칩거한 당호 건물에 반영했듯이 독락당도 회재 이언적의 여러 사화가 점철되던 시대에 자신이나 유림들이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던 시대에 학문 정진을 대안으로 찾은 회재의 철학이 담긴 곳이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남명 조식의 학문과 철학에 대해서는 나중에 꼭 기획을 마련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독락당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는 별채이다. 최근 한옥체험을 하고 싶어하는 일반인들을 위해 개방되어 있고 방이 2개에 마루가 있는 구조로 미리 예약을 하고 하룻밤 정도 한옥 체험을 하고 싶다면 체험해 볼만하겠다. 회재 당시에는 공수간으로 쓰였던 곳이라 한다.
경청재
경청재는 경청재라 이름 붙이기 전에는 숨방채라고도 불리운다.
역락재
역락재의 현판은 그 유명한 명필 한석봉의 글씨라고 한다. 역락재의 역락은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호아에서 따온 것이니 아마도 이 역락재는 회재 이후 회재를 기리고자 찾아드는 많은 서생과 선비들이 잠시 머무르던 그런 공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독락당 내부 문간
동편에 옥류를 끼고 등심대, 탁영대, 관어대, 영귀대 및 세심대 등의 반석이 있어서 옥산서원으로 연결되고 이들을 둘러싼 화개산, 자옥산, 무학산 및 도덕산 등과 더불어 이른바 사산오대의 경승을 이루는 곳이다.
북쪽에 사묘를 두고 중간에 서로 어서각, 동으로는 계정이 있으며 뒤로는 양진당이 있다. 독락당은 한국 전통건축의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정면 4칸, 측면 2칸의 짝수 칸살이의 특이한 평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별당이다. 기단이 낮으며 팔작지붕으로 남향해서 오른쪽 3칸은 대청이 되고 앞을 모두 터놓았으며 왼쪽 1칸만은 칸을 막아 온돌방을 꾸몄다. 그러나 원래는 제일 오른쪽 칸도 막아서 온돌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다. 대청 전면에는 문짝을 달은 듯 지금도 문설주가 남아 있다. 기둥은 단주를 사용하였고 초익공 계통의 구성과 동일하며 기둥 위에 얹은 주두로서 직접 대량과 도리를 받쳤다. 그러나 기둥머리에 꽂힌 첨차의 형태에는 아직 주심포집 건축의 전통이 남아 있다. 대청 연등천장에서 볼 수 있는 대량과 그 위에 종량은 제법 형식을 갖추어 다듬어져 있으나 양자 사이에 받친 대공은 양봉형의 간결한 형상이다.
독락당에서는 외부의 시선은 차단하고 있지만, 사랑대청에서 시냇물을 볼 수 있도록 동쪽의 담에 살창을 뚫어 놓았다. 이 살창을 통해서 앞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특출한 공간구성(空間構成)이며, 독락당 뒤쪽의 계정(溪亭)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 주려는 의도가 깃든 집이다.
독락당(옥산정사)
정면에는 퇴계 선생의 친필인 '옥산정사'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독락당' 현판의 글씨는 영의정을 지냈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이 쓰셨다.
독락당을 우선 멀리서 봐라보면 일반 양반집과 달리 전체적으로 숨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까운 예로 회재가 양동마을에 있는 자신의 동생에게 지어진 집인 향단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상반된다 이는 회재의 당시 입장이 집에 묻어나는 부분중에 하나이다
회재는 정치계에서 밀려나면서 세상과 떨어져 혼자 자연과 벗삼아 지내려 했다할 수 있다 이는 이름에서도 묻어나온다 독! 락! 당!
집은 입구부터 미로와 같은 느낌이 들것이다 은둔의 회재답다 안채와 사랑채보다 이집에서 가장 절정은 사랑채 뒷쪽 계정이다 회재가 가장 좋아한 공간이다 계정을 보면 회재의 당시생각을 옅볼수있다 세상에겐 폐쇄적이지만 자연으로는 열어두고 있다 전체적인 평면으로 볼때도 유일하게 이 계정이 선을 벗어나 계곡쪽으로 튀어나간것도 그 이유일 것이라추측해본다
회재는 정치적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절망보다는 자연을 보면 자신의 학문의 폭을 넓혔다 훗날 회재가 재등용됐을때 회재는 학문의 깊이가 상당하여 모든이들이 회재를 존경했었다.
독락당을 짓고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은거하며 느낀 정취, 그리고 독락당이란 공간을 구현해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가시화시킨 회재 이언적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지은 시 2편을 간단히 감상해 보자.
獨樂
離群誰與共吟壇
巖鳥溪魚慣我顔
欲識箇中奇絶處
子規聲裏月窺山
무리 떠난 당신 혼자 시를 읊을 때
산새와 냇고기가 얼굴을 쳐다보는도다.
모두들 찾고싶은 기묘한 곳에 밤이 되니
자규새 우지지며 달님이 산을 몰래 쳐다보는도다.
存養
山雨蕭蕭夢自醒
忽聞窓外夜鷄聲
人間萬慮都消盡
只有靈源一點明
산속에 쓸쓸히 비내리니 잠이 절로 깨었는데
어느덧 창밖에는 새벽닭이 울어대는도다.
이제는 모든 근심 다 사라지고
영묘한 바탕(心)에 한가지가 밝아오는도다.
李彦迪
[출처] [소실점]독락당 I|작성자 목눌
독락당은 외부에 대하여 철저히 폐쇄적이고 은둔을 하려던 회재의 의지가 공간적으로 반영되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이중 삼중으로 절차를 만들어 세상과 단절하고 조용히 혼자 즐기려는 의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공간, 독락당을 둘러싸고 있는 4산 5대의 자계 옆에 낮은 지대에 집터를 닦고 건물의 기단도 낮추고 마루도 지붕도 낮게 만들어서 마치 땅에 붙박히는 듯 땅속의 굴혈에 들어앉은 듯하게 잔뜩 웅크린 팔작지붕의 건물의 모습이 마치 은거 당시의 회재의 심정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독락당 별채 양진채를 바깥에서 본 전경
독락당을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담으로 막힌 뒤뜰이 나오고 그 담에 난 일각문을 지나쳐 들어가면 독락당의 별채에 해당하는 계정 양진채에 들어서게 된다. 이 건물은 원래 회재의 아버지 이번이 쓰던 3칸짜리 초옥을 회재가 은거하면서 기와지붕으로 바꾸고 옆으로 두칸을 더 달아 계정이라 이름하였다.
양진암 편액
계정은 일명 양진암이라고도 하는데 양진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편액의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로 전해진다. 퇴계 이황은 회재 이언적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고 학문에 힘써 사단칠정론을 정립했고 이언적을 기꺼이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했으므로 이곳에서 회재의 문덕을 기리는 뜻에서 이 양진암 편액을 썼을 터다.
퇴계 이황은 영남학파 학통의 거두가 되었다. 그러므로 회재 이언적은 조선의 양대 학파인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중 영남 유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성현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 된다. 율곡 이이가 기호학파의 핵심으로서 주류인 서인들의 존중을 받는 반면 상대적으로 비주류였고 소수파였던 남인들은 영남학파로서 회재 이언적과 이황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퇴계 이황이 스스로 이언적에게 영향을 받은 학문으로 자신의 학문을 평했으므로 이 독락당은 영남학파와 영남 유림의 정신적 토대가 되는 공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터다.
양진암, 왜 불가의 암자의 암자를 붙인 걸까? 이런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이 독락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로 정혜사지가 있다. 이 정혜사는 회재와 인연이 깊은 사찰로 어린 시절 예닐곱살때부터 회재는 정혜사에 유하며 글을 읽었고 김안로를 탄핵하려다 벼슬에서 쫓겨나 이곳에 머물렀을 때는 정혜사의 스님들과 친하게 교류하며 지냈다 한다. 아마도 회재는 정혜사의 스님들이 와서 편하게 머물다가라는 뜻으로 양진암이라 이름붙여 마치 유학자의 공부방 양진재보다 양진암이라 이름붙였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정혜사지 13층 석탑
정혜사의 사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전하는 것이 없다. 향토의 사서인 동경통지에 따르면 37대 선덕여왕 원년(780)에 당의 백우경이라는 자가 당나라로부터 망명을 와서 이곳 자옥산 아래에 우거하게 되었다. 그는 경치가 뛰어난 곳을 골라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는데 왕도 행차한 바가 있었다고 하며,후에 이곳을 고쳐 세워 절을 마련했는데 곧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나마 경주 변두리지만 신라 사찰의 명맥을 유지하던 아마도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의 와중에 불타 없어졌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경주남산의 파불이나 불교천시 행위는 아마도 경주지역 향교나 서원들의 숭유억불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려 몽고의 침입이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결과로 많이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대다수 조선시대 경주의 불교 유적을 멸시하는 사대부와 유림들의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회재 이언적 같은 이들은 불가를 천시 멸시하지 않고 스님들과 교류하며 은거 생활을 했다는 것은 진정한 우리 문화는 유불선의 세가지 이념과 종교적 틀이 어우러지며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고 이렇게 배타적이지 않았던 선비들의 생각과 실천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계정 안쪽에서 계정 편액을 향해 찍은 사진
계정 편액 이 편액의 글씨 주인공도 석봉 한호의 글씨라고 한다.
계정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과 어우러짐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의 건축에 대한 정서는 우선 건물을 어떻게 기교를 부려 지었느냐 보다는 얼마나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울리느냐에 더 방점을 찍고 있었다는 것을 볼 때 계정은 아마도 자연과 어우러져 인위적 작위적인 인간의 느낌이 없어진 최고의 경지에 놓인 건물이 아닐까 평가할 수 있다.
자계천에서 올려다보면 계정 오른쪽에 인지헌이라는 편액이 붙은 누대가 있다. 이곳에 걸터앉아 관어대를 내려다보며 회재는 계속 마음이나 씻었나 보다. 어질 인 지혜로울 지 어짊의 지혜를 갖는 방이란 뜻이니 방이름 하나 정말 근사하다.
계정에서 관어대를 내려다 본 모습
가을에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질 때 계정을 보면 회재의 아버지와 회재가 왜 독락당을 짓고 이 곳을 은거지로 택했는지 절로 느껴지게 하는 것 같다. 자연과 인간의 완벽한 어우러짐, 그래서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닌 사마광이 말한 경지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건축학자들은 독락당의 건축적 정면은 바로 동쪽의 계곡쪽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동쪽 자연을 향해서는 열려진 정면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인간사회와의 절연과 자연을 벗삼기 위한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시사철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계정에서 자계를 내려다 본 모습
독락당과 개울을 구분짓는 담장의 일부에는 이렇게 나무 창살을 단 나무 창이 놓여 운치를 더하고 있다. 이런 창살을 또 건물의 창살과 겹쳐서 보면 회재가 이 곳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혼자 있으려 하면서도 자연만큼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벗으로 생각하여 소통하려 했음을 느끼게 한다.
독락당 안채
회재는 두번째 부인 정실부인이 아닌 첩의 자격밖에 없었던 아내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늙으신 어머니를 잘 봉양했고 비록 서자가 되었지만 아들을 얻었으니 젊은 둘째 부인이 무척 아꼈나 보다. 회재는 죽으면서 자신의 재산을 이 둘째 부인에게도 남겨 주었는데 이는 첩으로 차대받는 것을 막고 아들 서자 이전인과 그 후손들이 계속 받을 차별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려는 아버지의 배려였을 것이다.
이 안채에서는 독락당과 직접 통하는 문이 따로 만들어져 있어 엄격한 내외 구분을 하는 조선의 예법의 원칙 속에서도 부부간의 정을 그렇게 또 따지지 않으려는 회재의 또다른 면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비록 원칙에 의해 첩의 자격밖에 없는 아내이지만 부부로서의 정은 드러나지 않게 애틋했을 것이다. 둘째 부인의 소박하고 정갈한 손길이 나이어리고 첩에 불과한 자신에 대한 과분한 사랑을 주는 지아비에 대한 존경심의 마음이 따뜻하게 남아 있는 듯하다.
이중 삼중으로 깊숙이 은거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이 기회가 찾아오면 그동안 갈고 닦은 학문의 깊이로 또 어지러운 세상에 옛성현과 주자의 가르침이 왜 중요한지를 원칙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을 회재의 마음이 담겨 있는 독락당, 비록 윤원형 일파에 미움을 사 또다시 벼슬자리에서 밀려나 강계에 유배되었다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아들 이전인이 직접 운구해와야 하는 생애를 마감했고 죄인의 신분으로 죽었으므로 그 명예가 회복되어 문원공의 시호가 내려질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가 독락당을 짓고 독락당에서 이룬 주리철학은 조선의 많은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탁영대의 모습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굴원의 시 구절을 따 탁영대(濯纓臺)라 이름붙였다. 이밖에 자계 옥류를 따라 '시를 읊으며 돌아오고 싶구나'라는 논어의 구절을 따서 영귀대, 마음에 불을 밝히는 곳이라는 뜻의 등심대 등도 자계천을 따라 한번쯤 가볼만한 곳이된다.
독락당 뒷마당에는 지금은 조각자나무로 바꿔 부르는 주엽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유일한 주엽나무라 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아마도 중국에만 있는 이 나무를 가져와 회재의 지인들 중 누군가가 선물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 근거는 회재는 한번도 중국 사신으로 중국에 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락당에 이 나무를 심어놓고 가끔 보면서 중국 송나라의 주자를 생각하며 직접 그 성현을 대하듯 여러가지 상념에 빠졌을 법도 하다.
독락당 깊숙한 곳 왼쪽에는 어서각이라는 전각이 하나 서 있다. 인종이 세자시절에 스승 이언적에게 직접 써서 보낸 인종어찰이 보관되어 있다. 이언적이 안동부사로 떠나게 되자 멀리 떨어져서 지내게 된 아쉬움을 인종이 써서 보냈으니 이 편지를 보관하기 위해 이언적의 아들 이전인이 전각을 지어 보관하게 된 것이다. 독락당 어서각에는 1513년(중종 8)에 실시한 사마시(司馬試)의 합격자 명단인 <정덕계유사마방목 (正德癸酉司馬榜目)>, 우리나라 역대 명필들의 글씨를 석각(石刻)하여 탁본한 <해동명적(海東名蹟)>, 회재의 친필 저술 5종 13책을 비롯한 많은 서적과 회재의 유품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 어서각 현판 아래에는 경구가 하나 적혀 있는데 경상도 관찰사가 이 어서각이 보관한 서책들을 절대 밖으로 반출할 수 없다는 명령이 적혀 있다.
이러한 명령은 옥산파 후손들이 자신들이 보관해온 이언적의 유품들을 어떻게든 양동파 후손과의 경쟁 속에서 보호하고자 공권력인 관찰사에게 명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회재 이언적은 여강이씨 본가가 있는 양동마을보다 이곳 독락당에 더 정을 두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했기를 바란다. 회재 이언적 저 북한 평안도 강계 땅에서 죽었을 때 회재의 유산은 적자인 이응인에게 대부분 돌아갔으나 이언적의 정실 부인과 아들 이응인은 회재의 재산을 이들에게 나누어준다. 당시까지만 해도 적서차별로 인한 가족간의 차별의식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던지 정실 부인과 이응인이 서자인 이전인과 둘째 부인에게 재산이 나누어지는 것을 합의하고 수결한 기록이 박물관 등에 전해진다.
이전인은 분재받은 재산을 옥산서원을 세우고 이 독락당을 지키는 데 활용하면서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또 자신의 서자 신분과 후손들의 차별을 철폐하여 장벽을 넘어서는 데 활용한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직접 강계에서부터 아버지의 시신을 운구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옥산파 후손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며 보관해온 이전인이 아버지 회재의 시신을 장장 6개월에 걸쳐 운구했던 당시의 상여의 일부인 대나무의 모습이다. 6개월에 걸쳐 아버지 시신을 짊어매고 직접 운구하고 경주에 와서 3년의 시묘살이까지 했던 이전인, 분명 효자로 칭송받을 일이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서자였고 아버지 회재 이언적은 이전인을 친자로써 아꼈지만 제사를 지내는 계후자로서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는 아들 이전인의 효심과 그가 독락당의 어서각과 옥산서원을 세우고 이를 통해 아버지의 명예, 그와 그의 후손이 서얼차별의 엄혹한 장벽을 넘어 극복해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번 기획을 마무리 하겠다. 다음편을 훨씬 쉽게 이해하기 위해 최근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한 독락당 어서각은 왜 굳게 닫혀 있었나? 편을 봐두는 것도 좋다.
- 다음편에 계속
동방 5현 회재 이언적의 삶과 철학(4) - 서자 이전인과 옥산서원
조선시대 주리 성리학을 주창한 회재 이언적에게는 이응인과 이전인 등 두 아들이 있었다.
이전인은 이언적과 정실이 아닌 두번째 부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고 이응인은 5촌 조카로 이언적이 양자로 들인 아들이다. 양자 이응인은 적자가 됐으나 이전인은 뛰어난 학행과 효심에도 불구하고 서자라는 이유로 회재의 대를 잇지 못했다.
조선시대 서자들의 손발을 묶었던 태종은 고려시대 만연했던 병축(아내를 여럿 두는 풍습)을 금지하고 적첩을 철저히 구분했다. 뿐만 아니라 서자들의 과거시험을 제한하고 관직등용도 막았다.
지난 시간에 밝혔듯이 이전인은 이언적의 정실부인과 이응인 등의 동의로 재산을 물려받고 비록 제사를 받들지는 못하지만 유배지에서 죽은 아버지의 명예회복과 학통의 계승을 위해 독락당과 옥산서원을 세우고 지키는 일에 노력한다. 이번시간엔 그 옥산서원의 건립부터 이전인 후손들의 눈물겨운 적서차별 철폐를 위한 싸움과 옥산서원 서얼철폐까지의 과정을 되돌아 본다.
옥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이 안동김씨와 권문세가들의 권세를 꺾고자 전국에 1300개에 가까웠던 서원들을 철폐해 나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예외로 두며 남았던 47개 서원들 중 하나이며 현재에도 그 의미와 가치가 존중받는 소수서원, 도산서원,병산서원,도동서원과 함께 5대서원으로 손꼽히는 서원이다. 그만큼 위엄과 권위를 가진 서원 중에 서원이다.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서원건축이 갖고 있는 기능 가운데에서도 서책을 보관하고 편찬하는 기능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옥산서원은 이언적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1572년 건립했는데, 다음 해인 1573년 경주부에서 ‘삼국사기’를 옥산서원에 수장하게 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옥산서원 경각에 있는 서책 일부가 홍문관으로 옮겨졌는데, 이때 ‘삼국사기’는 홍문관으로 보내지 않고 옥산서원 근처의 독락당 어서각의 서책과 함께 도덕암에 일시 보관되었다. 그러다 난리가 끝난 후 다시 독락당 어서각에 보관되어,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유실되지 않고 전해지다가 1972년 옥산서원에 수장고인 청분각(淸芬閣)이 세워지자 독락당 어서각에 있던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과 함께 청분각으로 이관되었다. 실로 유구한 세월 동안 책을 보관하는 임무를 충실히 한 것이다.
외삼문이며 옥산서원의 정문인 역락문
지금은 훼손을 막기 위해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역시 논어의 유붕이 자원방래, 불역낙호아란 구절에서 가져와 학문의 중심임을 자부하는 서원에 찾아온 사람을 맞이하는 뜻을 갖는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정문인 역락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지만 보호를 위한 것이므로 관리사 쪽으로 들어가는 쪽문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고직사
옛날에는 서원이나 향교를 지키는 관리인들이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이렇게 고직사를 두어 머물게 하였다. 서원에 딸린 고직사는 병산서원과 이렇게 옥산서원에도 남아 있다.
무변루
외삼문인 역락문을 지나서 들어오면 보이는 누각이다. 누각의 무변루(無邊樓)는 시작도 끝도 없는 태허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중용’의 요체이기도 하고 ‘주역’에 기대자면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배우는 학생들을 어르고 때리는 매로써 그만한 게 없을 것 같다. 이 이층 무변루에는 특이하게도 온돌방이 설치되었다. 일층을 메워 적당한 높이에 고래를 들이고 이층 온돌방을 데우게 했다.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을까.
무변루는 역락문을 들어서서 서원으로 들어서기 전에 거치는 누각이며 공부중인 서생들이 잠시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곳이자 서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휴식이 되는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옥산서원 사건 때는 아마 이 무변루 일대는 엄청난 긴장과 대립이 감도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헤서는 향교, 서원 등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어야 했는데 서원 같은 곳에서는 나라에서 양반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자라는 이유로 등재를 거부하기도 하여 영남 지역 서원에서는 이런 서얼차별에 따른 갈등이 무척 심화되어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되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옥산서원에서 서원에 들어와야겠다는 서얼들 즉 회재의 아들과 손자들과 서원에서 서얼의 출입을 가로막는 숨가쁜 싸움이 벌어진 곳도 아마 역락문이나 이 무변루가 아니었을까?
동서 양재
서원의 배치 양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동재와 서재 양식이다. 동재 서재는 이른바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기숙사겸 공부방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서원들이 이렇게 동재와 서재를 대칭으로 똑같이 배치하는 구조를 가져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정신같을 보여주려고 한다.
동재, 양진재(민구재)
민구재 민첩하게 구하는 방, 학생들이 부지런히 학문의 성취를 구하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 할 수 있겠다.
양진재 현판 두 가지로 나아가는 방, 그게 인과 의일지 예와 학일지 충과 효일지 알 수는 없다. ㅋㅋ
서재, 해립재(암수재)
암수재 "어둠 속에서 마음을 닦는 집" 이란 뜻이다. 유생들이 공부하는 거처다.
해립재 편액을 액찬한 것은 노수신이란 사람으로서 그 액찬의 뜻을 살펴보면 해립재(偕立齋)의 액찬(額贊)을 보면, “경은 바르고 의는 방정하니 안과 밖이 서로 교섭한다. 오직 이것을 붙잡아서 잊지 않으면 천덕이 빛나리라(敬直義方, 內外交相, 惟操弗忘, 天德之光).”라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 그가 내적 규범으로서의 경을 중시함과 똑같은 비중으로 외적 규범으로서의 의를 중시하여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인당
서원의 강학이 이루어지는 교실이라 할 수 있다. 서원의 원장이하 선생들과 학생들이 글을 읽으며 선생의 주석을 듣고 외운 것을 검사받는 그런 공간이다.
옥산서원은 이른바 임금에게 편액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며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최초 사액은 아계 이산해의 글씨였으나 헌종 4년(1838)에 구인당이 화재를 입어 다시 사액을 받으니 현존하는 사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구인당은 인을 구한다는 뜻이니 서원의 교실이름으로서 아주 제격이라 할 수 있다.
구인당 측면
내삼문
보통 서원의 내삼문에는 삼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 문양이 그려져 있지 않다. 인을 체득한 사람인 회재 이언적의 위패가 있다는 뜻에서 체인묘란 현액을 달았다. 옥산서원은 회재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20년 후인 1572년(선조 5년)에 경주부윤 이제민과 권덕린등 도내 유림들의 공의로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원자리를 정하고 묘우를 건립하였다. 다음해에 서악의 향현사에 있던 위패를 모셔 왔으며, 같은 해에 관찰사 김계휘가 계청하게 된다.
체인묘
인을 체득한 사람 회재 이언적, 비록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지에서 죽은 바 되었으나 이렇게 죽은지 20년만에 임금의 명령으로 서원에 배향됨으로써 명예회복을 이루지만 서인 중의 주류였던 노론과 기호학파 출신이 아니라 남인이며 영남학파란 이유에서 그는 온전하게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문원공의 시호와 영의정 추증은 당대 사회가 그를 높이 평가했음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세심문
회재 이언적의 신도비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작은 문 고개를 들고 정면을 보면서 들어갈 수 없도록 이렇게 작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회재 이언적 신도비각
회재 이언적 신도비
당대 이이와 이기논쟁으로 그 이름이 잘 알려진 기대승이 쓴 신도문이 새겨진 신도비이다. 이황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당대 학자로 이름꽤나 날렸던 기대승도 이황과 함께 역시 이언적의 학문을 인정하고 그를 존경했던 듯 이언적의 묘와 이언적이 배향된 서원에 이렇게 신도비를 남기고 있다.
신도비문의 내용
신도비문의 회재 이언적의 생애를 다루고 있지만 그 중에서 윤원형에게 탄핵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유배되어 학문정진에 뜻을 두게 되는 대목을 잠깐 옮겨 보도록 한다.
"윤원형(尹元衡)은 윤임(尹任)과 원구(怨仇)가 이미 깊어졌는데 임백령(林百齡)과 이기(李芑)는 그 심복(心腹)이 되어 사림(士林)을 경함(傾陷)하여 그 간사(奸邪)를 성취시키고자 하였다. 윤원형은 밀지(密旨)라 핑계하고 대간(臺諫)을 꾀어서 윤임을 치게하니 대간이 따르지 않거늘 이기(李芑)등은 합문(閤門)에 나아가서 아뢰고자 하였다. 양전(兩殿-문정왕후와 명종)께서 즉시 충순당(忠順堂)에 함께 임어(臨御)하고 재신(宰臣) 추신(樞臣)을 들어오게하여 장차 윤임등의 죄를 가(加)하려 했는데, 이 때 임금의 위엄이 대단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조금도 그 뜻을 거스리지 못 하였다. 공은 조용히 말하기를「신하의 의리는 마땅히 제가 섬기는 데에 전심(專心)할 것이니 그 때에 있어서 대행왕(인종)에게 전심(專心)한 것을 어찌 큰 죄를 주겠습니까. 또 일을 거행하려면 마땅히 현명(顯明)하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치 않으면 사림(士林)들이 부당(不當)하게 화(禍)를 당할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는 목을 움추렸으나 공은 기색(氣色)이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금 뒤에 이기 등은 공(功)을 록(錄)하고 위사공신(衛社功臣)이라 칭호했으며, 그 날에 입시(入侍)한 재신(宰臣) 추신(樞臣)을 아울러 록공(錄功)했으므로 공도 또한 참여하게 되었다. 공은 굳이 사양하면서,「어찌 공(功)이 없으면서 공신칭호를 부당하게 받아 국전(國典-국법)을 문란하리오」하였으나 들어 주지않았다. 병오년(명종원년) 봄에 차자(箚子)를 올리되,「선현의 말에 군주의 덕을 성취시킴은 그 책임이 경연(經筵)에 있다 하니 신(臣)은 이 직책을 외람히 맡았으므로 책임을 감내하지 못할까 걱정했습니다. 삼가 선현의 격언(格言) 지론(至論)이 성덕(聖德-군주의덕)에 도움이 있고, 금일에 시행할만한 것을 취하여 조목별로 기록하여 드리오니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깊이 믿으시고 힘써 이를 행하신다면 그 성공(聖功-군주의 공부)에 도움됨이 어찌 작다고 하겠읍니까」하였다. 조금 뒤에 장차 모부인을 뵈오러 갈 새 또 차자(箚子)를 올려「학문을 강구(講究)하고 의리를 밝히며, 현인(賢人)을 친근(親近)하고 사녕(邪佞)을 멀리 하도록」청하였으니 그가 군부(君父)에게 기대한 것이 더욱 심절(深切)하였지만 그러나 빙탄(氷炭)같은 형세(形勢)는 실로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그가 임금에게 직언하고 할 말을 하는 그런 인품을 가진 대인배이며 군자로서 그를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서자 이전인의 효심과 서얼차별과의 싸움
7년간 유배지를 따라와 여러 시중을 들며 관서문답이란 책까지 쓸 수 있게 해준 아들 이전인, 그러나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아들이라 할 수 없고 이전인은 회재를 대감이라고 호칭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주검을 고향 경주까지 운구하고 시묘살이까지 한 친자이지만 서자 이전인에게 회재는 파격적으로 재산을 남겨주기 위해 먼저 둘째 부인에게 재산을 주고 아들에게도 자신이 일군 재산인 독락당을 물려줄 뜻을 양자 이응인과 정실부인에게 설득해 동의를 얻어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러한 회재의 뜻이 조선사회의 서얼차별 철폐의 시작이 된다.
옥산서원을 건립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이전인과 그 후손들은 옥산서원의 실질적인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옥산서원에 출입조차 허락받을 수 없이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러한 서얼배격은 조선 중후기 강력한 사회불만 세력으로 서얼세력을 급부상시키기도 했다.
조선 서얼차별의 시작은 태종 때 정도전을 배격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드라마 뿌나에서도 나온 이야기이지만 정도전은 서자 출신이었고 그의 반대편에서 태종의 사람들이었던 신하들은 정도전이 서자라는 이유로 서얼들의 관직 진출을 막는 법을 만들고 이를 시행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왕과 사대부는 끊임없이 대립했다. 태종은 본인의 뜻으로 서얼차대를 본격화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임금은 서자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허용하고자 했다.
사대부들은 더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영남 남인들은 노론에 밀려 중앙권력에서 밀리게 되자 지역에서의 특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얼들을 강하게 배척했다.
한편 선조 16년 병조판서였던 율곡 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자고 파격 제안을 했다.
서얼차대에 집착했던 양반들의 반대했지만 이것은 곧 서얼허통의 물꼬가 됐다. 서얼들은 왕이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힘을 모으고자 할 때 주로 상소를 올리며 힘을 합쳤다.
서얼차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가능성도 있는 양반이라는 새롭게 진입하는 사람들을 조절함으로써 양반의 권리와 권위를 보장하기 위한 꼼수였으나 정작 서얼 출신들은 양반이면서 양반이 아닌 차별 속에서 고통받아야 했다. 그 서얼들의 설움과 고통이 잘 드러난 것이 칠서의 난이고 이런 서얼차별의 문제에 공감하는 주류들은 허균이나 이이같은 극소수의 사람들 뿐이었다.
임진왜란 후 많은 관리들이 전쟁 중에 사망하고 새로 조정에서 일할 양반들이 부족하자 이이 등은 상소를 올려 서얼을 일정의 댓가를 받고 등용하며 벼슬 길을 열어줄 것을 제안하고 선조가 이를 받아들여 서얼의 과거시험이 허통된다.
조선조정은 임진왜란 등에 의해 관리들이 모자라자 서얼들에게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댓가로 쌀 등을 받았다. 이전인의 아들 이준은 쌀 1600말을 내고 관직에 나아갈 허통을 얻는다. 선조 32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 43년에는 숭정대부 청도군수직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후손들도 대대로 관직에 나아가 진정으로 양반다운 양반이 된 것이다.
이전인 기저비각
그러나 이렇게 관직의 길이 열리고 이를 국왕의 명으로 보장받은 것만으로 차별은 끝나지 않았다. 조선사회 당시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역의 삼소 즉 유향소, 향교, 서원 등에 모두 그 이름이 등재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문과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내고 난 후에도 각 지역의 양반들은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삼소에 그들을 들이는 데 반대하며 극심한 삼소 서얼허통의 분쟁이 일어난다.
이전인 기적비각
전인 일가도 서자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하여 옥산서원의 출입을 막는 양반세력과 끝없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자신은 모르더라도 적어도 자식들은 서얼의 굴레를 벗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버지 회재의 학문 전파와 보급에 열을 올렸고 그 때문에 만든 옥산서원을 허무하게 남에게 넘겨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와 그의 후손들은 어렵고 승산없어 보이는 싸움을 해서 마침내 이겨냈다. 이 승리는 남인을 견제하려 했던 노론 세력이 적극적으로 남인세력을 와해시키는데 영남학파의 서얼출신 유림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정략적 판단에 의한 거짓 도움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전인 기적비각은 이렇게 승산없는 싸움을 이겨내고 후손들에게 서얼차별의 굴레를 벗게 해준 이전인의 은공을 기리기 위한 비각이라 할 수 있으며 서자의 신분이면서도 결국 아버지 이언적의 명예를 지키고 옥산서원을 통해 아버지의 학문을 널리 알리고 계승시켜 나간 이전인의 기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서자 이전인은 옥산서원에 서얼허통에 성공하고 아버지 회재의 명예를 되살려냈다. 그리고 자신도 이렇게 서원에 배향된다. 서자는 서원출입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사회에서 서자를 배향하는 서원에 배향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옥산서원 향전
결국 서얼과 지방 사족간의 향전을 마무리하는 옥산서원사건이 일어났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서얼과 지방 사족과의 장기간의 향전이 벌어진 것이다. 1884년 서얼들의 승리로 서얼소통이 됐고 옥산서원의 서얼소통은 당시 영남의 서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옥산서원이 이렇게 서얼소통을 시작하자 더이상 지방의 양반 사대부들은 서얼소통을 가로막을 힘을 잃게 되고 최종적으로 서원 전체에 서얼이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하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초기부터 서서히 사회문제화로 되었던 조선사회의 부조리 중 하나였던 서얼차별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는 점에서 회재 이언적이 서자인 이전인을 아껴 그의 미래를 위해 독락당과 많은 유산을 물려주고 아들에게 대를 잇게하지는 못했지만 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회재 이언적의 선택 하나가 조선 사회를 느리지만 바꾸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옥산서원 박물관
유물로는 필연, 연수병, 冠帶, 紗帽, 馬上?, 冠纓, 玉笛, 職印, 遺書筒, 옥관자, 금관자, 玉竹 2본과 『회재선생문집』외 1,000여권의 문집과 책이 보관되어 있다. 이언적 수필고본은 1975년에 보물 제586호로, 김부식의 『三國史記』 완본 9책은 1970년에 보물 제525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국내 최고의 활자본인 『正德癸酉司馬榜目』 1책은 보물 제524호로, 『海東名蹟』 2책은 보물 제5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회재 이언적의 삶을 돌아보는 일을 마무리하면서 기행을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다.
회재 이언적은 보수적이고 매우 고지식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타협을 모르고 융통성이 없고 유복한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아 이리저리 늘려가며 걱정없이 한 세월을 보내며 혼자서 즐긴 고고한 선비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나면서 양반으로서의 권위의식보다는 선비이자 군자로서 갈 길을 정하고 신분차별로 고통받는 아내와 아들을 걱정할 수 있는 만큼 열린 사람이었으며 노비들이나 양민들에게 너그럽고 목민관으로서 자기 직분을 다한 사람이고 충효와 인의를 중시하고 불의와 붕당의 당쟁의 폐해를 걱정하고 막으려 했으며 유림의 양성으로 나라가 굳건히 나아가기를 바랐던 인물로 기억하는 것이 더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학문을 갈고 다듬어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길을 걷고자 했던 이언적의 꿈은 주리론의 정립과 성리학의 기본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김안로나 윤원형 등에 맞서 적극적으로 의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이를 위시한 기호학파 사람들에겐 끝까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사람 회재 이언적, 그가 동방 5현으로서 김굉필, 조광조, 정여창, 이황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동방의 다섯 현자 중 한명으로서 그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 끝
.조선 왕조에서 일어난 사대사화[四大士(史)禍]
1498년 (연산군 4년) 부터 1545년 (명종 즉위년) 사이에 발생한 4 차례의 사화를 말한다.
1)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년(연산군 4년) 김일손 등 신진 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화.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를 조의하는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댄 것으로 은유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나머지 상소문은 세조비 정희왕후 상(喪) 중에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이었다. 당시 이 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그것이 사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달려간 곳이 유자광의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함양관청에 붙어있던 자신의 글을 불태운 일 때문에 김종직과 극한 대립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김종직은 남이를 무고로 죽인 모리배라고 말하면서 유자광을 멸시하곤 함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읽어보고는 곧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 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뻔했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 부도한 행위를 했으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산군은 사림 세력을 싫어하던 차였다. 그래서 즉시 김일손을 문초하게 하였다.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김종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도하던 바대로 진술을 받아내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으며,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같은 죄에 걸린 강겸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그 밖에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양보냈으며, 이종준, 최보, 이원, 이주, 김굉필, ?! 玟譏?,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실록 자료인 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으며,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하고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 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람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해서 이를 무오사화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2)갑자사화 (甲子史禍)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복위 문제와 관련된 사화.
무오사화는 사림파와 그에 관계된 사대부들만이 해를 입은 그야말로 사화(士禍)이자 사화(史禍)였던 데 비해 갑자사화는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도 상당한 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기화로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국고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왕이 향락과 사치에 마음을 빼앗겨 급기야 자신들의 경제 기반까지 몰수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막상 왕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그동안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 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 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 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번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 로 만든 척신 세력 중의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종 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 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연산 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 사건을 들추어 낸다. 폐비 윤씨 사건은 성종이 차후에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 긴 적이 있어 그 때까지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이 알게 될 경우 윤씨의 폐출을 주도했던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에게 동시에 화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임 사홍의 밀고로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과 광폭한 만행을 자행한다.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으며,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다. 이 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 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 씨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죄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 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이원, 신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이처럼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 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 임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정치 두쟁이었지만, 갑자사화 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 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3)기묘사화(己卯史禍)
1519년(중종 14년)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파 재상들이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을 몰아내고 죽인 사화.
1519년(중종 14) 11월에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재상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화를 입은 사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파괴된 유교적 정치질서의 회복과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 장려에 힘썼다.
이러한 새 기운 속에서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조광조 등 신진사류였다.
신진사류의 대표적 존재였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인 조광조는 유숭조(柳崇祖)의 도학정치론에 감화된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예학자였다.
그는 1515년 성균관유생 2백인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왕의 신임을 받았다.
중종반정 초기에는 이과(李顆)의 옥과 같은 파란도 있었으나, 연산군의 악정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고,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 3대(하, 은, 주 시대)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서 과거제의 폐단을 혁신할 목적으로 인재를 천거, 시험에 의하여 등용하는 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많은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유교정치 구현의 터전?! ? 마련하였다.
또, 도교의 제사를 맡아보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여 미신타파에 힘쓰고,
향약(鄕約)을 실시하여 지방의 상호부조와 미풍양속을 배양하는데 힘쓰는 한편,
교화에 필요한 <이륜행실 二倫行實>과 <언해여씨향약 諺解呂氏鄕約> 등의 서적을 인쇄, 반포하였다.
이 같은 그의 지치주의 정치의 업적은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의 이상적인 왕도정치는 그 구현과정에서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적지 않아 타인의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어 정적이 생기고,
또 철인군주(哲人君主)의 이상과 이론을 왕에게 역설한 것이 도리어 강요의 인상을 주어 왕도 그의 도학적 언동에 대하여 점차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고려이래 장려된 사장(詞章)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남곤, 이행 등의 사장파와 서로 대립하게 되고, 청렴결배과 원리원칙에 입각한 도학적인 그들의 태도는 보수적인 기성세력을 소인시함으로써 훈구재상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반정중신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으므로, 조광조 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세력의 불평불만이 1519년에 있었던 반정공신(反正功臣)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이 사건은 중종반정공신 가운데 그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해야 한다고 건의한 결과,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공신호를 삭탈하고 그들의 과분한 토지와 노비를 환수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조처는 훈구세력의 부당한 재원을 막고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훈구대신에 대한 도전행위이기도 하였다.
이때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과 훈적(勳籍)에서 삭제당한 심정 등은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인 남양군 홍경주(洪景舟)와 손을 잡고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이들은 희빈홍씨를 이용하여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왕에게 밤낮으로 말하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또, 궁중의 나뭇잎에다가 꿀로 '주초위왕 (走肖爲王 : 走肖는 趙의 破子)'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에 그 문자의 흔적을 왕에게 보여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때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홍경주, 김전, 남곤,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이 밀의를 거듭한 끝에, 1519년 11월 홍경주로 하여금 조광조 등 일파가 붕당(朋黨)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 바로잡아주도록 상계를 올렸다.
이때 중종도 조광조 일파의 도학적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이라 홍경주 등의 상계를 받아들이고 유사(有司)에 명하여 조광조 일파를 치죄하게 하였다.조광조 일파가 투옥되자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이들을 당장에 처벌하게 하려 했으나 이장곤(李長坤), 안당, 정광필 등은 이에 반대하였고, 성균관 유생 1천여인은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치죄 결과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곧 사사되고 김정,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그밖에 김구(金絿), 박세희(朴世熹), 박훈(朴薰), 홍언필(洪彦弼), 이자(李자), 유인숙(柳仁淑) 등 수십명은 귀양가게 되고,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형제 등은 파직되었다.
이 옥사 이후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 박유청(朴惟淸)은 우의정이 되었다.
이 사화에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한다. 이 사화는 1515년 왕비책립 때 조신간의 대립·알력을 먼 원인으로 하고, 조광조의 지치주의 정치에 의하여 대량 등용된 신진사류에 대한 불만과, 도의론을 앞세워 사장파를 소인시한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증오 등이 삭훈사건을 가까운 원인으로 하여 폭발된 것이다.
이 사화는 무오사화와 같이 훈구파와 신진사류간의 반목과 배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정치적! 음모가 유효하였던 정쟁이었다는 점과 갑자사화와 같이 정치적 투쟁목적과 이념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조광조의 왕도정치 실패의 원인을 정치이념의 진보성과 실현수단의 과격성에서 찾고 있으나 당시의 정치체제가 왕도정치의 실현을 뒷받침해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조광조의 왕도정치의 이상이 무산된 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앞의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4)을사사화(乙巳史禍)
왕실의 외척인 대윤(수장-윤임)과 소윤(수장-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의 사옥으로 대윤이 쫒겨난 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정계 전면에서 후퇴하자 심정, 이항 등의 세력과 김안로 세력이 치열한 권력 다툼을 일으 켰다.
이 때 김안로는 심정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심정 일파가 유배중이 던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사형시키고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정권 장악에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허황, 채무택 등과 결탁하여 권세를 부렸으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은 문정왕후를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문정왕후의 숙부 윤안임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이 때 허황, 채무택 등도 함께 처형되었는데 이들 셋을 정유삼흉이라 했다.
김안로가 실각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척신으로 넘어갔다. 이들 척신들의 세력 다툼은 먼저 세자 책봉 과정에서 발생했다. 중종에게는 왕비가 3명 있었는데, 정비 신씨는 중종 즉위 직후 간신의 딸이라 하여 후사 없이 폐위되었고, 첫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 호(인종)를 낳고 7일 만에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에 일대 논란이 벌 어졌는데 그 결과 1517년 윤지임의 딸이 두번 째 계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곧 문정왕후로 경원대군(명종)의 어머니였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그녀의 친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웠다.
하지만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 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신들 또한 각각 대윤파와 소윤파로 갈라지게 됐는데, 이 양 세력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척인 대윤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윤임의 주변 세력은 대개 이언적 등 의 사림파가 많았던 관계로 인종 재위시에는 다시 사림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종은 즉위 9개월 만 에 세상을 떴으며, 12세 밖에 안된 명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명종은 나이가 어린 탓에 문정왕후의 수렴! 청정을 받아야 했고, 때문에 조정의 권력은 자연히 소윤파에게 돌아갔다.
소윤파는 윤임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대윤파를 궁지로 몰아넣어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 결 과 윤임 및 그 일파인 유관, 유인숙 등을 비롯하여 계림군,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이 처형되었다.
이 때의 사건을 흔히 을사사화라 하는데 그것은 윤임 일파에 사림 세력이 몰려 있다가한꺼번에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나머지 사림 세력과 윤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 사 건'을 기화로 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후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는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