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경북 ▷일정 :1박 2일 ▷계절 : 가을 ▷위치 : 영주시 ▷주요
포인트 : 죽령옛길, 희방사, 인삼시장, 소수서원, 선비촌,
부석사 ▷코스 : 중앙고속도로 단양IC → 5번 국도 →
죽령옛길 → 희방사 → 인삼시장 → 소수서원/선비촌 → 부석사
인삼으로 유명한 영주시
풍기읍에도 가을색이 들면 여지없이 인삼축제가 열리고, 소백산이 가을의 문턱에 접어들면 그야말로 가을정취의 진가가 나타난다. 특히 소백산의
죽령옛길을 따라 뚝뚝 떨어지는 가을을 만끽한다면 이 보다 더 훌륭한 가을여행도 없을 것 같다.
중앙고속도로 단양IC로 나가서 영주 방면의 5번 국도를 타고 가면 죽령휴게소로 향하는
죽령옛길의 추억을 만들 수 있다.
가을정취 듬뿍 머금은 죽령옛길
소백산 죽령옛길은 영주시 풍기읍과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걸쳐 있다. 약 2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 길은, 죽령주막에서 희방사역에 이르는 약 2.5km의 길이다. 조선시대에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영남지방에 있던 선비들이
이 길을 따라 한양을 향했다고 한다. 죽령옛길은 산책하기 좋은 길인 동시에 가을에는 단풍을 맛보는 데에도 손색이 없는 길이다.
최근 영주시청과 풍기읍이 옛길을 복원하는 데 힘을 기울여 죽령옛길이 산책로로 정비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천년고찰을 품고 있는
소백산의 한 끝에 선 길이여서인지, 아니면 소백산을 조망하는 가을단풍의 풍취가 이를 수 없이 아름답기 때문인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옛 선비들이 걸었던 과거길이지만 고행이라기 보다는 휴식에 가까운 길이다.
소백산 죽령옛길을 따라 소백산을 만나는 데에 희방사가 나온다. 매표소를 들어서면 얼마 가지 않아 희방사에 이른다.
희방폭포 사이로 단풍이 얼굴 내미는 희방사
소백산 국립공원 내의
희방폭포를 왼쪽으로 끼고 계곡 옆 오솔길을 따라 층계에 오르면 호젓한 골짜기 사이로 희방사가 눈에 띈다. 6.25전란으로 법당과 훈민정음의
원판, 월인석보 등 귀중한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그 후 1953년에 새로 중건하여 규모는 왜소하나 1천5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라의
고찰이다. 은은한 종소리로 유명한 희방사 동종(도 유형문화재 제226호)이 보관되어 있다.
선덕여왕
12년(643년)에 두운대사가 신라계림부 호장의 딸을 호환으로부터 구해준 후 그 은혜를 갚고자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다. 희방사라는 이름의 유래는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다`는 의미의 `기쁠 희(喜)`자와 두운대사의 참선방을 상징하는 `모 방(方)`자를 함께 붙여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희망사의 길목에 위치한 희방폭포는 국내 최대 크기를 자랑한다. 거대한 암벽을 뚫고 쏟아지는 28m 높이의 웅장한 물줄기와 커다란 잡목들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게다가 가을 단풍까지 물들면 희방폭포의 아름다움이 극치에 이를 것이다.
희방사에서 나와서 풍기 방면으로 가다 보면 풍기역 부근에 있는 인삼시장을 만날 수 있다.
풍기인삼의 명성이 켜켜이 쌓인 풍기인삼시장
1990년 9월에 경북 영주시 풍기역 앞에 개설된 풍기인삼시장은 건평 1,436평의 넓은 시장
내에 질 좋은 수삼과 백삼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연일 장사진을 이루는 전문시장이다. 풍기인삼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분기점에 있는 고원지대인
풍기를 중심으로 재배된 것으로서, 내륙성 한랭기후와 지리적 특성이 사포닌의 함유량이 많은 양질의 인삼재배를 가능케 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인삼의 이야기 중에는 인삼의 효력을 말해 주는 구절이 있으니, 신라 성덕왕 33년 당 현제에게 산삼
200근을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신라시대부터 소백산에는 산삼이 자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산삼에만 의존하던 것을 벗어난 때가 조선
중종 때 신재 주제붕 선생이 전국의 토양과 기후를 조사하며 산삼 자생지와 비슷한 환경을 찾아낸 곳이 바로 풍기였으니, 이때부터 풍기에서
인삼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조정에서는 풍기인삼만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 또한 풍기인삼의 효력을 반증하는 예이다. 항암작용과
혈압조절, 피로회복 등에 효과가 높은 풍기인삼을 홍보하기 위해 해마다 가을에 인삼축제가 열리고 있다.
인삼도 캐고 재미 있는 가을도 캐는 2005 영주
풍기인삼축제!
올해 10월 1일(토)부터 10월 5일(수)까지 열리는 영주 풍기인삼축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너는 역시 `인삼캐기체험`이다. 인삼을 직접 캘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는 데다, 인삼캐기체험도 하고 현장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인삼을 구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삼축제장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인삼캐기체험장에는 인삼 캐는 방법을 알려주는 채굴도우미까지 있어 한결 손쉽게
인삼캐기체험을 할 수 있다. 이밖에 인삼을 펼쳐놓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인삼을 깎아내는 인삼깎기대회, 인삼으로 만드는 갖가지 요리가 선을 보여
입맛을 유혹하는 인삼요리경연대회는 물론 소백팝스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선율이 소백산 한 자락을 장식하고, 줄타기공연과 난타초청공연이 이어져
시원하고 경쾌한 가을날을 만들어 준다.
인삼시장에서 931번 지방도를 타고 부석면 방면으로 오르면 순흥면 읍내리를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
소수서원을 둘러보려면 그
길목에 있는 소백산에서 발원한 맑은 옥계수의 풍광에 잠시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옥계수 위로 경자바위와 취한대가 노송과 어우러져 있는 차분한
광경은 서원의 고결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7년(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것.
고려말 유학자인 안향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세웠다가 명종5년(1550년)에 퇴계가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상주함으로써
`소수서원`이라는 임금이 내린 사액을 받게 되면서 호칭이 바뀌었다.
사립고등교육기관으로
공인되기도 한 소수서원 내에는 유생들이 강학을 하던 강학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학구재, 명륜당, 영정각, 전사청 등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된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서원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곳 사료전시관에는 안향의 일대기를 적은 <회헌선생실기>를
비롯해 서원 원장 등 각 직책을 맡았던 원임들의 인사기록인 <원임제명목>, 소수서원에서 수학한 유생들의 이름을 기록한
<임원록>, 서원 방문 인사들의 방명록인 <심원록> 등 160여 점의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선비촌
조상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선비촌은 2004년에 완성된 옛 마을로 소수서원과 함께 자리잡고 있어서 더욱 옛마을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긴다. 만죽재 고택, 해우당 고택,
안동장씨 종택 등 기와집과 김규진 가옥, 두암고택 가람집 등 초가집이 자리잡고 있는 이곳에는 정자와 누각, 연자방아, 물레방아, 원두막을 비록해
저자거리까지 재현돼 있다.
붓글씨쓰기, 탁본하기 등의 선비문화체험과 화전놀이, 짚공예, 전통복장입어보기 등의 전통문화체험이 준비돼 있어 자녀들과 함께 전통체험에
동참할 수도 있다. 또 주중에는 농악과 다도시연, 붓글씨 강연, 전통혼례 등이 마련돼 우리 전통문화를 엿보고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숙박하면서 옛 정취를 느껴볼 수 있어 더욱 이색적이다.
931번 지방도로 계속해서 가다 보면 부석면 사거리에 이르러 935번 지방도 방면, 부석사 방면으로 길이 나타난다.
무량수전에 깃든 가을정취 보여주는 부석사
부석사 경내로 들어서면
배흘림 기둥을 하고 있는 무량수전을 만난다. 국보 제 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광고에도 등장하는 이름이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정취는 더욱 가을을 향해 치닫는다. 무량수전을 거쳐 조금만 올라가면 선비화도 찾아볼 수 있다. 의상대사의 지팡이에서 꽃을 피웠다는 이
선비화는 잎을 따먹으면 아이가 생긴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한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16년(676년)에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왕명을 받아 창건한 절로, 봉황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하던 의상대사가 당 고종이 신라를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부석사를 창건했고, 이후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라는 이름은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아래 위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 데서 연유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또 다른 설화가 전한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불도를 공부할 때에 의상을 사모하던 선묘낭자가 있었는데, 의상이 고국으로 떠나자 죽어서라도 의상의 앞날을 지켜주겠다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의상이 호국사찰을 건립하려 할 때 이교도의 방해가 있었는데, 선묘낭자의 넋이 큰 바위를 공중에 들었다 놓으니, 이에
놀란 이교도가 물러갔고, 이 때문에 사찰 이름을 `부석사`라 칭했다는 것이다. 1916년 해체 보수 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에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에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 3년 (1377)
조사당이 재건되었다고 전한다.
첫댓글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