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하루 종일 대구 서문시장 입구, 계성학교 담 옆 길바닥 땡볕에서 콩나물을 파느라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었고 허리는 그야말로 반으로 접어놓은 듯 심하게 구푸려져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온종일 매연이 심한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나 크겠는가마는 그래도 그 할머니는 교회의 여러 일들을 위하여 과부의 두 렙돈을 아낌없이 바치던 믿음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예배며 철야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 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그 얼굴을 보면 천국의 기쁨을 혼자 독차지나 한 듯한 행복이 가득하였다.
그 당시 내가 섬기던 서현교회는 그런 가난한 교우들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 아니 전국에서 최초로 지상 10층, 지하 2층짜리 대형교육관을 건립한 것을 보면 교우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일들을 위하여 아낌없는 헌금을 드렸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나의 또 다른 분노의 원인이기도 했으니 나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참으로 가슴을 치며 많이도 울었고 몸부림치며 아파하기도 했었다.
특히 나의 아픔은 바로 그 콩나물 팔던 할머니로 인하여 더한 아픔이기도 하였다.
그 긴 슬픔들을 다 말씀드리기가 쉽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하나님의 교회가 정말 어떻게 그 성결함을 유지하여 나아가야만 하는가를 들려드리기 위하여 잠시 말씀을 드리려 한다.
어느 교회건 간에 그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주어진 음부의 권세를 능히 멸하는 사명을 올바로 다하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의 리더가 우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하며 거기에는 정말 예외가 없는 듯하다.
가정도 마찬가지고 그 어느 집단이라도 그러하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사탄이 파 놓은 구덩이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다시 내가 왜 그렇게도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가슴 아프게 울었던가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그 당시 그렇게 길바닥에서, 공사장에서, 행상도 하고 막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자신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더 윤택하게 하는 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헌금한 교우들의 믿음의 열매를 소위 교회의 리더라는, 그것도 기업체를 운영하며 기름지게 잘 먹고 잘 살며 그 위에다 교회 와서는 큰소리는 마음대로 질러대고 교회를 좌지우지하던 몇몇 힘 있는 장로들이 뒷구멍으로 빼돌려, 허리가 휠대로 휘어진 채로 길바닥에서 돈을 벌어 하나님께 바친 그들의 두 렙돈을 자신들의 기름진 배를 채우기 위해 착복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교회공동체에서 떠나게 되었으나 남은 자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나 아픔은 실로 컸었고 더구나 나와 같은 또래의 청년들이나 어린 후배들 - 대학부를 비롯한 중고등부 학생들 - 의 상실감이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요즈음도 마찬가지이다.
연일 뉴스에서 터져 나오는 뇌물착복으로 인한 것이나 공금횡령으로 말미암은 불미스러운 일들을 대하노라면 그 당시의 일들이 어쩔 수 없이 주마등처럼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사람이 돈을 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타락한 본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타락한 본능에 이끌려 그것의 추잡한 노예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며 오직 푯대이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달려가는 존재들이다.
특히 정치권에 머물고 있는 일부 탐욕스러운 자들이 여러 사람들의 더러운 돈을 받아 삼키고도 뻔뻔스러이 그러한 일이 없다고 잡아떼는 것을 보면 그들의 그런 치졸함이 돈 받아먹은 그 자체보다 몇 천배 몇 만배 더 악독하고 비열하며 추잡스럽게 여겨진다.
나 같으면 돈이 탐이 나서 좀 받아먹었다고, 그러나 생각해 보니 너무 경솔했고 잘못된 일이어서 부끄럽기 짝이 없으니 용서를 구한다고 솔직하게 말이나 한마디 하겠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덜 부끄러울 것 아닌가.
그들이 그것을 알리야 없겠지만 말이다.
사람이 정도(正道)를 걷지 아니하면, 그것으로부터 이탈하게 되면 파멸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절대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타락한 사람의 생각에 우둔해 보여도 그것만이 오직 사람을 살리는 유일무이한 길과 진리와 생명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러하다.
세상의 오염되고 타락한 풍조를 좇아가는 것이 가시적으로 잘되고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잠시 일뿐….
곧 사라지고 말 안개와도 같은 허망한 것일 뿐….
하나님 바깥의 세상의 길과 인생의 무지는 멸망의 선봉인 것이다.
요즈음 이 정도(正道)에 대하여 자주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요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정도(正道)는 무엇인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그러하다.
우리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의 정도(正道)는, 푯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분의 말씀인 것이다.
오직 그 말씀에만 우리의 향방을 두고 우리 각자의 달려갈 길을 최선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늘 죄를 꿈꾸며 무지와 연약함 속에 허덕이며 육신의 정욕 가운데서 욕정의 몸부림을 치며 뒹구는 인생의 허잘대 없는 것들이, 즉 사탄화된 타락한 속성들이 인생을 생명으로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분명히 살아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고 죄로 말미암아 병들어 죽은 인생을 다시 하나님의 생명으로 회복하고 살릴 수 있는 것은 천상천하에 전무(全無)함을 깊이, 심령 더욱 깊이깊이 각인하여야만 할 것이다.
나는 아마 일평생을 그 콩나물장사 할머니를 기억하며 그리워할 것 같다.
내가 한참 후배들과 함께 아파하며 울어 지낼 그 당시 그분은 하루의 고된 벌이를 마친 후 수요저녁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로 오려고 길을 건너다 그만 난폭운전자가 모는 차에 치였고 급히 바로 앞의 동산병원 응급실로 옮겼으나 모진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하늘 아버지의 품에 안기셨다.
그때, 저녁예배를 드리며 그 비보를 접하고 나를 비롯해서 그분을 아끼며 사랑하던 수많은 교우들이 몹시도 가슴아파하며 울었던 것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분께서 금요철야기도회 때 하층 예배당 마룻바닥 맨 앞에 앉아서 하나님을 향해 간구 드리며 기쁨의 찬양을 드리던 그 평화로왔던 주름진 까아만 얼굴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을 사실 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정말 단언컨대 그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전부터 계신 주께서 영 죽을 영혼을
보혈로 구해 주시니 그 사랑 한 없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나 예수 의지 하므로 큰 권능 받아서
주 앞에 구한 모든 것 늘 얻겠습니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그렇다.
그 사랑스러웠던, 그리운 사람들을…
요단강 건너가 내가 만나리…
잠시잠간 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