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뜨거운 순교의 피가 흐른다
‘한국판 창끝’ 김창식·박은희 선교사 부부와 두 아들 바울과 바나바 이야기
“선교 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선교의 둥지를 튼지 4년만에 괴한의 흉기에 찔려 순교한 김창식 선교사와 그 가족에 얽힌 아프고도 감동 넘치는 사연. 한국판 ‘창끝’ 이야기다. 선교지에서 아버지를 잃고, 그 이후 또 십년만에 바로 그 땅에서 엄마까지 잃은 아들 ‘김바울(21세)과 김바나바(18세)’ 이 두 학생의 가슴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하디 진한 선교의 피가 흐른다.
일곱 살과 네 살의 어린 나이에 선교지로 따라간 두 아이는 선교지(연해주)에서 자랐고, 이제 대학생과 고등학생 된 이들은 선교지의 언어와 문화가 한국의 그것보다 더 익숙하다. 엄청난 슬픔과 함께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까? 얼마나 힘겨울까?
이들은 스스로 ‘선교사’의 족쇄를 채운 것인지, 오직 한길로만 뚜벅뚜벅 걷고 있다.
“우리는 선교사역 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어요!”
그들의 고백이다.
첫 번째 이야기- 어린 선교사들 이야기
신학대학에서 북방선교를 꿈꾸면서 만난 젊은 부부 김창식-박은희 선교사는 열 살도 채 안된 어린 아들 둘과 함께 1996년 여름, 발해 역사가 숨쉬는 연해주,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고려인들이 다시 정착하기 시작한 땅 우수리스크로 건너갔다.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을 잇는 요충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뜨겁게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4년만인 2000년 8월, 교회 앞에서 한 고려인과 싸우던 러시아인의 칼에 찔려 아버지 김창식 선교사가 목숨을 잃었다. 김 선교사는 42세의 젊디젊은 나이였다. 온 가족이 보는 앞에서 느닷없이 벌어진 기가 막힌 일이었다. 김 목사가 고려인처럼 보인 이유 밖에 없다. 4인의 가족 중 한 사람은 가고 세 사람이 남았다.
김 선교사의 아내 박은희 선교사와 어린 두 아들의 충격이 어떠했을지 감히 가늠해보기도 어렵다. 남은 사역은 남은 자들의 몫. 어린 아이들 키우랴, 남편 선교사가 벌여놓은 사역을 추스르며 선교센터가 될 교회건축을 위해 추진하던 예배당 지으랴, 현지인들 돌보랴… 우수리스크에서 교회건축을 허가받아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박 선교사는 이뤄냈다.
병약하던 박 선교사는 자신의 건강을 돌볼 겨를도 없이 사역에 몰두했다. 건축도 마쳤고, 우수리스크 최초로 일곱 집사를 세우기도 했고 선교지의 열매가 맺혀가고 있었다. 할 일이 태산 같은 선교지에서 동분서주하다가 결국 지병이 악화되어 남편 선교사가 떠난 지 꼭 10년만인 지난 해 여름, 하늘나라로 떠났다. 어린 ‘바울과 바나바’를 사역지에 두고 떠나는 엄마의 피눈물 쏟는 기도가 느껴진다.
“아빠가 가실 때는 저희가 너무 어려서 잘 몰랐어요. 엄마가 계셨으니까요. 그런데 엄마가 가시던 그 9월 1일은 개학날이었어요. 바나바는 아직 어리잖아요. 엄마가 고통을 견디다 못해 한국에 가셨는데, 여러 가지로 참 쓸쓸한 기분이 들던 중이었어요. 한국에서 전화가 왔는데…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소식이었어요.”
두 아이, 엄마 선교사와 또 사별
형 바울이 말했다.
“뭐라고 말할 수 없죠. 그때의 마음을… 그저 엄마께 아들로서 아무 것도 해드린 게 없다는 생각, 고생만 하다 가신 것 같아 가슴이 메어졌어요. 제가 사춘기를 지나면서 엄마에게 짜증을 냈던 일이 생각나서….”
어린 바울은 초등학교 4학년 때(바나바는 1학년) 아빠를 잃었고, 대학교 2학년 때(바나바는 고등학교 2학년) 엄마와 사별했다. 선교지에 달랑 남은 두 아이. 그들이 느낀 중압감이 얼마일까? 얼마나 마음이 힘들까?
아빠 가신 이후 초등학생이던 바울은 병약한 엄마를 도와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통역에서부터 잡일까지, 엄마 사역을 돕는 어린 선교사 역할이었다.
큰아들은 박 선교사에게 다시없는 선교 동역자였다. 착하고 든든한 아들 바울도 사춘기가 있었다. 그때 어쩌다 엄마에게 짜증냈던 기억이, 엄마의 비보를 듣던 그날 바울을 힘들게 했다.
“저희가 사실 어리잖아요. 너무 어린 때부터 어른들이나 하는 일을 책임도 지고, 도맡아 하다 보니 마음이 참 힘들어요. 더구나 부모님을 잃은 충격과 갑작스런 환경변화가 느껴져 더욱 힘겹지요.”
솔직한 고백이다. 힘들다는 생각이 스칠 때마다 바울은, “엄마는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좀 더 잘 해드릴걸…”하며 마음을 추스른다. 지금도 엄마를 생각하면 이 두 아들은 때마다 아리다. 이제 어린 두 아들만 선교지에 남았다.
바나바, 국제 콩쿠르서 두각
“동생 바나바가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어요. 연해주 전체에서는 늘 1등을 했고요, 상트 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에서 열린 국제 콩쿠르 1차에서 바이올린 부문에 3등을 하더니 며칠 전,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 러시아에서는 알아주는 음악도시)에서 열린 2차 국제 콩쿠르에서는 피아노 부문 1등, 바이올린 부문 2등을 하여 양 심사위원들이 놀라움을 표했대요. 내년 5월 스페인에서 열리는 파이널 콩쿠르에 나갈 자격을 얻은 거예요. 장하잖아요. 엄마아빠가 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했어요. 하늘나라에서도 다 보고 계실테니 큰 선물이 되겠지요!”
형 바울은 동생 자랑이 늘어진다. 바나바도 이 재능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 바칠 거라고 다짐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히 사람이 평가할 수 있으랴. 아빠를 죽인 범인이 살아있는 곳, 부모님을 잃은 땅, 그곳에서 부모님이 꿈꾸던 중국과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선교사역에 인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하며 준비하는 두 청년의 심장을 세속의 때 묻은 눈으로 어찌 다 볼까.
“우리 둘 다 선교사가 될 거예요!”
바울과 바나바의 삶의 목표는 분명하다. 형 바울은 미래에 정말 선교사가 될거냐고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선교지에서 자랐습니다. 자라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선교의 중요성을 늘 들었고, 공감했고, 이견도 의심의 여지도 없이, 선교사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이곳은 바로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선교 피가 뜨겁게 흐르는 땅입니다. 당연히 그 사역을 계승하고 그 뜻을 펴는 데 삶을 바치는 것이 부모님의 뜻이라 믿어요. 당연히 저희 꿈이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리라 믿어요!”
두 아이만 남은 선교지를 생각하는 집안 어른들, 그리고 후원교회는 마음이 늘 짠하다. 모두들 궁리 끝에, 지난달에는 아예 아이들의 이모부를 우수리스크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들을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는 바로, 소천한 김창식 선교사의 형 김안식 목사가 섬기는 강서교회(강서구 화곡1동 소재)다.
강서교회 선교위원회는 그 슬프고 아픈 사연을 가장 세밀하게 알고 있었기에, 선교위원회 관계자들이 나서서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이모부 조성연 목사를 파송한 것이다.
이제 이 사역이 김 씨 집안에 머물지 않고, 김 씨 집안과 박 씨 집안, 이제는 조 씨 집안으로…. 그리고 그들을 아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사역으로 확대되었다. 김안식 목사와 강서교회, 그리고 이 사연을 아는 많은 후원자들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순전한 그리스도인 두 청년이 연해주에서 꿈꾸는 선교, 인간의 한계를 넘은 영롱한 영혼의 노래로 피어나리라.
두 번째 이야기-“당신을 용서합니다”
아우 김창식 선교사가 괴한에 피습되어 돌연 떠났을 때, 형 김안식 목사(강서교회)는 비감한 마음으로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우수리스크 공원묘원에 안장한 직후, 아우를 죽인 범인 러시아인을 감옥으로 찾아갔다. 그를 권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그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평범한 사람의 마음을 넘은 빛깔이다.
“28세의 전과2범인 안드레이(루카녀브 안드레이 아나톨애비츠)는 약물중독자의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이땅에 복음을 심으러 왔다가 사역도중에 간 아우를 생각하며, 그가 못다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들죽인 살인자를 아들삼은 손양원 목사님이 떠오른다. 다음은 김안식 목사가 살인범을 만난 이야기다.
“나는 안드레이가 죽인 김창식 선교사의 형입니다. 지금 우수리스크공원묘지에 아우를 묻고 오는 길입니다. 그의 아내와 어린 두 아들과 우리 모두는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도 많이 울고 계십니다. 안드레이!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닌가요?”
(여기서 안드레이는 힘없는 어조로, 죄인이라고 말했다. 자기 어머니도 정교회 교인이라고 하고, 잡혀 들어와서 김 선교사님이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생략) (격주간신문 아름다운동행 119호. 박에스더 기자) 4월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