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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가 되살린 茶문화는 조선 문인들의 자긍심이었다 |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발표 <남다병서>친필본 한국불교학회서 첫 공개 | ||
[미디어붓다] 탁효정 기자 2009.06.01 | 조회수 : 5 |
이제껏 세 달씩이나 빈 잔을 잡고 있으니 물 끓는 소리만 들어도 군침이 돈다 조선후기 문인 금령 박영보의 <남다병서>에 등장하는 차시이다. 늦겨울 즈음 차가 동이 났는데, 봄기운과 함께 반가운 햇차가 남도에서 올라왔다. 햇차를 맛보기 직전 물이 보글보글 끓는 그 장면을 시로 옮긴 것이다. 시 속에 이미 쌉싸름한 녹차향이 번지고 있다.
이 시가 실린 <남다병서>는 초의 선사가 조선후기 문인들과 교유했으며, 또한 차 문화가 조선후기 경화사족(京華士族)을 중심으로 부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경화사족이란 서울과 서울 근교에 거주하면서 일정한 학문적 공감대를 가지고 학계의 변화를 주도하던 지식인 그룹을 가리킨다.
그동안 이본만 전해져오던 <남다병서>의 친필본이 최근 공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은 5월 30일 동국대 덕암세미나실에서 열린 한국불교학회 제49회 전국불교학술대회에서 <남다병서>의 친필본을 처음 공개했다.
박 소장은 이날 ‘금령 박영보의 <남다병서> 연구’를 발표하면서 <남다병서>의 친필본을 공개했다. <남다병서>의 친필본은 초의차 계승자인 故 응송 박영의 스님의 소장문고 속에 포함돼 있던 것이라고 박 소장은 밝혔다.
<남다병서>는 조선후기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한 금령 박영보라는 인물이 남쪽에서 온 차, 즉 초의 선사가 보낸 차의 풍취와 우수함을 노래한 글이다. <남다병서>는 전체 20운의 장시로, 초의차에 매료된 금령이 초의에게 보낸 글이다.
박 소장은 “고려시대까지 귀족들의 향유물이었던 차는 조선 이후 불교문화라 치부되어 왕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점차 멀어졌지만 이 시기에도 차가 나는 전라 지역을 중심으로 조주의 끽다풍이 근근이 이어졌다”며 “특히 조선후기 문인들을 중심으로 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특히 고증학에 심취했던 경화사족들이 차를 매개로 초의와 교유를 했다”고 밝혔다. 또한 “금령의 <남다병서>는 조선후기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한국 차문화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한국 차의 연원을 밝힐 수 있는 희소한 자료”라고 박 소장은 덧붙였다.
<남다병서>에는 당시 경화사족들이 차문화를 폭넓게 향휴하고 있었으며, 우리 차에 대한 나름의 일가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몇가지 단서들이 포함돼 있다.
금령은 “중국차도 좋지만 우리나라에서 나는 차가 더욱 좋아 처음 돋은 차 싹, 여리고 향기롭다하네”라고 하여 자신이 이미 중국차를 접했으며 중국차보다 우리 차가 더 좋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초의가 만든 단차가 중국의 명차인 두강보다 훌륭하다는 평가다. 이는 조선후기 북학파를 중심으로 조선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경화사족들의 시대의식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초의 선사의 차는 금령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사대부들 사이에 상당히 유행했다. 금령의 <남다병서>에 화답하는 신위의 남다가병서, 정약용의 흘명소, 김명희의 사다, 황상의 걸명시에도 초의차에 대한 감상들이 전해져 초의차에 대한 애호가 금령 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와 교유하는 문인들 사이에 상당히 폭넓게 퍼져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금령은 초의 선사에 대해 “옛날부터 염불에 힘써서 농차로 적체를 씻고 진선을 참구하네. 여가에 글 쓰는 일로 깊은 시름을 밝혀서 당시의 명사들이 존경하고 따른다지”라고 말했다. 이는 초의 선사가 수행에 힘쓰고 선교에 밝았던 승려이자, 조선후기 문인들과 깊은 교유를 지닌 인물임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금령은 <남다병서>에서 차의 효능을 “옛날엔 차를 마시면 신선이 되었고 (신선) 못된 사람도 청현(淸賢)함을 잃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차를 마심으로서 맑아진 몸과 마음으로 이사를 통달한 현자가 되고자 하는 유가의 다도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박 소장의 설명이다.
박동춘 소장은 “고려시대 이후 쇠퇴한 차 문화가 조선후기 경화사족을 중심으로 부흥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주도한 것이 초의였다는 사실을 <남다병서>를 통해 알 수 있다”며 “이러한 중흥의 첫째 배경은 초의가 <다신전>에 이어 <동다송>을 저술하여 한국 차의 이론을 정립하였던 것이고, 둘째는 경화사족들이 한국 차에 대한 자긍심이 강했으며, 또한 그들은 차의 맑은 품성이 선비의 학문적인 이상과 수신에 필요한 가치를 지녔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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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