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 송씨부(宋氏婦) 墓誌
아, 내 손녀는 사인 호산(壺山) 송익보(宋翼輔)의 처이며, ①관찰사 송공(宋公)과 정부인(貞夫人)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며느리이다. 그 부친은 파평(坡平) 윤행교(尹行敎)이며 모친은 은진 송씨(恩津宋氏)이다. 정묘년(1687, 숙종13) 10월 25일에 태어나 계사년(1713, 숙종39) 2월 26일에 죽었다. 기질은 맑고 깨끗하며, 외모는 단아하고 발라 마음은 곧기가 한결같고 행실은 효성스럽고 인자하였다. 게다가 지조와 식견까지 갖추어 여자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복이 박하고 명이 짧아 나이 겨우 27세에 자식도 없이 요절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병으로 오랫동안 음식을 들지 못하다가 원기가 갑자기 허해지더니 이틀 사이에 죽고 말았다. 병이 악화되어 그 어미가 손을 잡고 울자,
“제가 평소 슬픔과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없었으니, 명이 짧아 죽는 것이 무에 가슴 아프겠습니까.”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고 인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말하였다. 다만, 시부모를 다시 뵙지 못할 것을 임종하면서 가장 큰 한으로 여겼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시아버지 관찰공이 마침 ②충청우도(忠淸右道)를 춘계 순시하다가 며느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달려와서 곡하였고 입관하는 것을 보고는 나에게 말하기를,
“며느리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와서 행동거지에 예법을 준수하므로 조부모와 부모가 집에서 자주 칭찬하였으며, 친척도 모두 현숙한 며느리가 들어왔다고 축하하였습니다. 시부모를 섬김에 10년을 한결같이 공경과 효성을 다하였습니다. 몸이 약해 병을 잘 앓았으나 시부모가 가서 보려고 하면 아무리 아프다 하더라도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하여 감히 헝클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병이 조금 낫기라도 하면 머리를 빗고 아침저녁으로 시부모에게 문안을 올렸습니다. 혹 집안일을 시키면 마치 귀한 옥을 들고 있는 양 조심하였으며 제사 때면 음식을 매우 신중히 장만하였습니다. 남편의 자매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 사랑을 다하였으며, 상자 속에 소중히 간직해 오던 물건도 남들이 갖고 싶어 하면 조금도 아까운 기색 없이 곧장 내주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조금의 시빗거리도 남기지 않아 집안에서 이간질하는 말들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며느리의 지행(志行)이 식견 있는 군자라 하더라도 거의 미치지 못할 정도인데 그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으니 누가 다시 알아보겠습니까. 부디 광중(壙中)에 덮어 놓을 몇 줄의 글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재삼 부탁하고, 시조부인 ③참의공 또한 편지를 보내어,
“우리 집안이 불행하여 이런 훌륭한 며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하였는데, 슬퍼하는 마음이 글에 넘쳐흘렀다.
아, 시댁 두 어른의 며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아마도 우리 손녀가 평소 예법을 어기지 않았는가 보다. 마침내 그분들의 말씀을 삼가 기록하여 묘지를 짓는 바이다. 아, 슬프도다. 그 남편이 관을 싣고 영평현(永平縣) 금주산(金柱山)의 선영 아래에 귀장(歸葬)하니, 그해 4월 12일이다.
조부 유봉 노인(酉峰老人)은 눈물을 머금고 쓰노라.
① 관찰사 송공(宋公) : 송정명(宋正明:1670~1718)을 가리킨다.
② 충청우도(忠淸右道)를 춘계 순시하다가 : 송정명은 1713년(숙종39) 당시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었다.
③ 참의공 : 송징은(宋徵殷:1652~1720)을 가리킨다.
孫女宋氏婦墓誌
嗚呼。吾孫女。士人壺山宋翼輔之妻。而觀察使宋公貞夫人金海金氏。其舅姑也。其父曰坡平尹行敎。其母恩津宋氏。其生以丁卯十月廿五日。而其死以癸巳二月廿六日。其氣質淸淑。其外雅潔。而其中貞一。其行孝謹慈良。而且有志操見識。女子之難得者也。獨惜乎福薄而命短。年僅二十七。無子而夭。哀哉。病久不能食。元氣暴虛。兩日之間。遂不可救。病革。其母執手而泣。乃言曰。吾平生不見悲苦之事。短命而死。何傷也。了無怛化之色。有似達士之言。但以不得更見舅姑。爲臨絶之至恨。哀哉。其舅觀察公。適春巡右道。聞其死。馳歸哭之。見其就木。旣而謂余曰。婦自歸吾家。動止率循禮法。王母曁嚴慈。在堂亟稱。愛之親黨。亦咸以得賢婦相賀。事舅姑。肅泰誠孝。十年如一日。淸羸善病。舅姑就視。則雖甚憊惙。輒蹶然起。整理衣裳。不敢見惰容。少愈卽櫛頮。晨昏省視舅姑。或使之戶事。則洞屬如執玉。遇享祀執爨俎甚謹。處夫之姊妹間。盡其歡愛。凡箱篋中物。見人欲得之。卽與之無吝色。自初至今。未嘗有一毫非儀。閫內無間言。其志行之美。雖有識之君子。殆不及矣。顧其生草草。誰復知之。願爲數行文字。以掩其壙。再三言之。其祖舅參議公。又以書來言。私門不幸。失此賢婦。悼傷之意。溢於辭表。嗚呼兩世尊人之愛念於終始者。至於如此。是女也。平日其庶乎不愆於禮也夫。遂謹次其語。以爲之誌。嗚呼哀哉。其夫挈其柩。歸葬於永平縣金柱山先塋之下。是年四月十二日也。其祖酉峯老人。含淚而記。ⓒ 한국고전번역원 | 최채기 (역) | 2008
송익보宋翼輔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원직(元直). 경기도 용인 출신. 송광순(宋光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휘은(宋徽殷)이고, 아버지는 송정명(宋正明)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의 딸이다.
1714년(숙종 40) 진사시에 합격한 뒤 교관(敎官)을 거쳐, 1731년(영조 7) 강서현령으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임금에게까지 알려졌다. 174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지를 지내고, 다음 해 충청도관찰사로 재직 중 인척 송익휘(宋翼輝) 사건에 연루되어 삭직되었다.
1742년 대사간을 거쳐 그 다음 해 평안도를 순찰하고 서울로 돌아와 그 지방의 군비실태와 군민(軍民)의 어려움을 사실대로 보고하여 정책에 반영하였다. 1744년 황해도관찰사, 다음 해에 대사간·승지를 역임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증 (尹拯)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 유봉(酉峰).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였다.
1642년(인조 20) 아버지 윤선거와 유계(兪棨)가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할 때 함께 공부하며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647년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주자(朱子)에 관해 배웠고, 1657년(효종 8)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懷川)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이듬 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랑 · 사헌부지평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669년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학질주1을 앓다가 1714년 정월 세상을 떠났다.
1722년(경종 2) 소론파 유생 김수구(金壽龜) · 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해 복직되었다.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