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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장이 확실시 되는 장충리틀야구장. 40여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장충리틀야구장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만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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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가 출범 28년 만에 누적 관중 1억 명을 돌파했다. 국내 프로스포츠 가운데 최초다. 그러나 야구의 미래는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아직 야구는 ‘하는 스포츠’보다 ‘보는 스포츠’에 머물고 있다. 고교 야구부는 해마다 줄고 있으며 인프라 역시 여전히 제자리다. 그나마 희망이라면 야구의 근간인 어린이야구가 부흥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리틀야구의 메카 장충리틀야구장
“1억 명이요? 앞으로 28년이 더 지나보시오. 1억 명은 고사하고 1천만 명도 넘기 어려울 거요.” 지난 5월 30일 ‘제6회 남양주 다산기 전국 리틀야구대회’ 왕중왕전에서 만난 한 원로야구인은 ‘프로야구 1억 명 시대가 도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기뻐하는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프로야구의 경사에, 여기다 리틀야구계의 잔칫날에 어째서 그가 풀죽은 목소리를 내는지 궁금했다. 그는 “아이들의 ‘꿈의 구장’이 곧 사라지기 때문”이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한 ‘꿈의 구장’은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끝자락에 있는 장충리틀야구장이었다.
2007년 개축 이후 3년도 안 돼 장충리틀야구장은 존폐 위기에 몰렸다. 근시안적인 행정으로 개축비 10억 원이 사라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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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개장한 장충리틀야구장은 한국 리틀야구의 메카이자 한국 야구사의 산증인이다. 장충리틀야구장이 개장하며 비로소 한국 리틀야구가 본궤도에 올랐다고 봐도 무방하다. ‘리틀야구’ 자체가 생소했던 1970년대, 리틀야구 전용구장 건설을 주창한 이는 당시 대한야구협회장이었던 김종락 씨였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형으로 잘 알려진 그는 한일은행(현 우리은행) 전무로 근무하던 1966년 대한야구협회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최장수(14년) 협회장을 역임하며 세계야구연맹 부회장, 아시아야구연맹회장을 맡는 등 한국야구를 국제무대에 부각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나 야구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66년 10월 지금은 사라진 서울 동대문야구장에 국내 최초로 조명탑이 설치된 건 순전히 김 회장 덕분이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무슨 조명을 켜고 야구를 하느냐”는 부정적 여론과 “막대한 전기료가 든다”는 정부의 난색에도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조명탑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가 바로 김 회장이었다.
김 회장의 설득으로 박 대통령은 조명탑 착공을 지시했고, 1966년 10월 8일 조명탑 점등식에 참가해 직접 축하 테이프를 잘랐다. 이때부터 한국야구는 야간경기를 하며 경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1978년 서울시의 잠실 스포츠타운 건립계획에 야구장이 제외되자 서울시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며 잠실야구장 건립에 써달라고 사재 1억 원을 털어 헌금으로 낸 것도 김 회장이었다. 김 회장의 집념이 없었다면 잠실올림픽 메인스타디움 옆엔 지금의 야구장이 아니라 축구장이 생겼을 일이다.
김종락 전 대한야구협회장(사진 오른쪽). 그는 한국야구를 지금의 위치에 올린 주인공이다. 역대 야구관련 협회장 가운데 그처럼 혼과 정성을 다해 야구발전에 힘을 기울인 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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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리틀야구장 역시 김 회장의 작품이었다. 1968, 1969년 세계리틀야구선수권대회에서 각각 일본과 타이완을 우승을 차지하며 두 나라엔 리틀야구 바람이 불었다. 리틀야구가 성인야구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그 인기 때문에 많은 어린이가 야구를 시작하는 걸 보고 김 회장은 한국에도 리틀야구붐이 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즈음 ‘한국리틀야구리그’라는 국내 최초의 어린이 야구연맹이 결성되면서 김 회장은 리틀야구 전용구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때 김 회장을 도운 이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 고 육영수 여사다.
1970년 어린이날 행사에서 육 여사를 만난 김 회장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야구장이 없다”며 “학교 운동장에 주전자로 선을 긋고 야구를 하는 실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육 여사는 곧바로 박 대통령에게 리틀 전용구장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박 대통령은 관계기관에 “서울 중심부에 리틀야구 전용구장을 지을 것”을 지시했다. 김 회장은 이때도 개인재산을 털어 장충리틀야구장 건립에 보탰다.
1년 뒤인 1971년 장충리틀야구장이 완공되자 육 여사는 가장 먼저 화환을 보내 개장을 축하했다. 어린이날엔 직접 장충리틀야구장을 방문해 손뼉을 치며 경기를 관전했다. 1974년 8월 15일 육 여사가 문세광의 흉탄에 서거하자 리틀야구계 인사들이 누구보다 목놓아 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장충리틀야구장이 배출한 스타들 양준혁은 장충리틀야구장을 밟았던 유소년야구선수 출신이다. 그는 "장충리틀야구장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장충리틀야구장이 개장한 이듬해인 1972년 한국은 뒤늦게 세계리틀야구연맹에 가입했다. 그해 세계리틀야구선수권대회 극동예선에 참가하며 국제리틀야구대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장충리틀야구장의 효과가 나타난 건 1984년이었다. 장충리틀야구장에서 꿈을 키운 한국 리틀야구 대표선수들이 그해 미국에서 열린 세계리틀야구선수권대회에서 타이완, 일본, 미국 등 세계 강호를 물리치고 사상 처음으로 우승컵을 거머쥔 것이다.
전국에 리틀야구장이라곤 장충리틀야구장이 유일했던 시절이라, 세계대회 우승은‘기적’으로 통했다. 장충리틀야구장이 생기기 전까지 한국은 일본과 타이완은 고사하고 필리핀, 괌에도 이기지 못했다. 한국 리틀야구팀은 1985년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대회 2연패의 쾌거를 이뤘다.
그즈음 장충리틀야구장을 밟은 대표적인 이가 양준혁(삼성)과 박찬호(뉴욕 양키스)다. 1981년 소년동아일보가 주최한 회장기쟁탈 전국국민학교(초등학교)야구대회에서 대구 남도국민학교의 양준혁은 타율 5할8푼3리로 타격 2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양준혁은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양준혁은 지금도 장충리틀야구장 그라운드를 처음 밟았을 때를 기억한다.
“당시 장충리틀야구장은 야구소년들에겐 ‘꿈의 무대’였다. 국내 유일의 국제규격 리틀 전용구장인데다 큰 대회만 열리는 통에 누구나 장충리틀야구장에서 뛰고 싶어했다. 처음 장충리틀야구장에 들어섰을 때 드디어 ‘꿈의 무대’를 밟았다는 설렘과 기쁨에 가슴이 벅찼다. 그때의 벅찬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진작 야구를 그만뒀을지 모른다.”
2000년부터 고향 공주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박찬호기 어린이야구대회’를 개최하는 박찬호는 공주 중동초등학교 재학 당시 처음 장충리틀야구장을 밟았다. 그곳에서 그는 ‘제2의 선동열’을 꿈꿨고, 그때의 감동을 가슴 속에 새기며 야구에 전념했다. 몇 년 뒤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되며 자신의 오랜 꿈을 이뤘다.
장충리틀야구장이 배출한 스타는 두 선수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이승엽(요미우리), 조인성(LG), 홍성흔(롯데), 정근우(SK), 김주찬(롯데), 윤석민(KIA)도 장충리틀야구장에서 야구선수의 꿈을 키운 야구소년들이다.
철거가 기정사실화 된 장충리틀야구장 2007년 개축 당시 서울시는 "자연과 함께 하는 야구장을 만들겠다"고 했다. 실제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개축을 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남산의 경관을 살린다"는 이유로 장충리틀야구장을 폐장하려 한다. 많은 이는 서울시의 앞뒤가 다른 말에 혼란을 느끼고 있다
‘한국리틀야구의 메카’ 장충리틀야구장에 첫 번째 위기가 찾아온 건 개장 20주년이 되던 해였다. 1991년 서울시는 ‘남산 제모습 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장충리틀야구장 철거를 계획했다. 장충리틀야구장을 남산의 자연녹지를 훼손하는 잠식시설로 본 까닭이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1993년. 서울시는 철거 안을 공론화했다. 당시 야구계는 “대체구장 논의 없는 일방적 철거는 무효”라며 극렬하게 맞섰다. 당시 야구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라, 야구팬들도 장충리틀야구장 철거 반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마땅한 대안이 없던 서울시는 결국 철거 계획을 원점으로 돌렸다.
2007년 스포츠토토 지원금 등 10억 원을 들여 최고급 인조잔디를 깔며 구장을 개축했을 때만 해도 장충리틀야구장은 영원히 ‘리틀야구의 메카’로 남을 듯했다. 하지만, 지난해 서울시가 ‘남산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하나로 장충리틀야구장을 철거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두 번째 위기가 닥쳤다.
서울시 고위관계자는 “오세훈 시장의 시정 목표인 ‘디자인 서울’의 기본전략과 연계해 남산의 경관을 보호하고 효율적인 이용방안을 모색하자는 게 ‘남산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목적”이라며 “녹지와 산책로를 만들어 남산의 자연을 복원하자는 계획을 진행하려면 부득이 장충단 공원 옆에 자리 잡은 장충리틀야구장을 철거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서울시가 야구장을 남산의 자연녹지를 훼손하는 대표적인 잠식시설로 규정하는 건 16년 전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서울시의 방침대로 장충리틀야구장이 철거된다면 2007년 12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서울 동대문야구장에 이어 한국 야구사를 대표하는 야구장이 또다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리틀 전용구장은 고사하고 일반 야구장도 없어 리틀야구선수들은 축구장에서 훈련을 하곤 한다. 목동구장 옆에 위치한 리틀야구연습장도 사실 미니축구장에 야구장 라인을 그린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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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관 한국리틀야구연맹회장은 “미국에선 야구장이 ‘볼파크(Ballpark)’ 즉 공원이고, 야구도 스포츠를 넘어 문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어째서 서울시가 생태공원을 짓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이들의 야구공원인 장충리틀야구장을 철거하겠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니까 공원을 짓겠다면서 공원을 철거하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 회장은 지난해 연말부터 정·관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장충리틀야구장 철거계획의 부당성을 알렸다. 지난 5월에는 서울시가 철거를 강행하려 하자 장충리틀야구장 앞에서 대규모 반대 시위를 계획했다.
대한야구협회 강승규 회장도 오 시장과의 면담에서 장충리틀야구장의 보존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장충동 체육공원, 남산 테니스장이 철거에 동의한 예를 들어 형평성 차원에서 철거가 불가피하다는 뜻을 밝혔다. 한 회장은 장충리틀야구장이 사라지고 난 뒤의 후폭풍을 걱정한다.
“2006년 20개 남짓했던 리틀야구팀이 올해 110개로 불어나며 가뜩이나 부족한 리틀야구장이 태부족해졌다. 서울과 경기도를 합쳐 리틀야구장이라고 해봤자 장충리틀야구장과 경기도 남양주 리틀야구장 둘뿐이다. 대회라도 치르려면 선수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서울 장충동과 남양주를 오가며 경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만약 장충리틀야구장이 대안없이 사라진다면 그건 리틀야구의 종언과 함께 한국프로야구의 젖줄이 끊기는 걸 의미한다.”
한국리틀야구연맹 한영관 회장. 한 회장은 리틀야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다. 그의 고군분투로 장충리틀야구장의 대체구장은 기존 1면에서 2면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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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다. 국내에서 국제규격에 맞는 리틀 전용구장은 장충리틀야구장과 남양주 리틀야구장이 유이하다. 국제규격 구장이 없으면 국제대회를 치르기 어렵다. 2006년까지 장충리틀야구장은 좌우와 중앙펜스까지 거리가 60m에 불과해 ‘홈에서부터 좌우 펜스까지 61m, 중앙 펜스까지 70m 이상’이라는 국제규격에 미달했다. 그 바람에 1987년 이후 세계리틀야구선수권대회 극동 예선전을 20년 동안 주최하지 못했다.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남양주 리틀야구장'. 장충리틀야구장이 사라지면 국제규격의 리틀 전용구장은 이 구장이 유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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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에 개장한 남양주 리틀야구장은 2007년 장충리틀야구장이 개축하기 전까지 국내 유일의 인조잔디 리틀야구 전용구장이었다. 국제규격에도 유일하게 부응하는 리틀구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과 떨어져 있고, 관중석이 150석에 불과해 국제대회를 치르기엔 역부족이다.
하지만, 시설은 성에 차지 않아도 장충리틀야구장이 개축하고 남양주 리틀야구장이 생기며 리틀야구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2005년 21개였던 리틀야구팀이 5년 만에 110개 팀으로 증가한 것이다. 초등학교 야구부를 포함하면 어린이 야구팀은 200개를 훌쩍 넘는다. 한국리틀야구연맹은 2012년 이후 리틀야구팀이 200개 팀 이상으로 늘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장충리틀야구장이 사라진다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리틀야구의 성장세가 단번에 꺾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식경기를 할 수 있는 국제규격의 야구장이 남양주 리틀야구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6회 남양주 다산기 전국 리틀야구대회’엔 총 57개 리틀야구팀이 참가했다. 리틀야구연맹은 57개 팀을 A, B조 나눠 장충과 남양주에서 대회를 진행했다. 참가팀은 많고, 리틀 전용구장은 2개뿐이다 보니 대회기간 열흘 동안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쉴 새 없이 경기를 치러야 했다.
리틀야구연맹의 관계자는 “그나마 57개 팀이 출전해 다행이지 110개 팀 모두가 출전했다면 눈앞이 깜깜했을 것”이라며 “장충리틀야구장이 사라지면 리틀야구대회의 파행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털어놨다.
강동구 고덕동에 대체구장 2면 지어도 역사는 사라진다
장충리틀야구장 뒤편에 서 있는 신라호텔. 이 호텔에 투숙하는 외국인들은 장충리틀야구장을 내려다보며 여행의 피곤함을 잊곤 한다. 외국인 투숙객 가운데 일부는 호텔 측에 "구장 티켓값이 얼마냐"며 묻는 등 큰 관심을 나타낸다고 |
한 회장은 ‘남산 르네상스 프로젝트’가 국가적 사업임을 잘 안다. 그래서 무턱대고 반대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환경을 복원하려는 나라의 계획과 어린이들의 꿈이 함께 공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체야구장 건설이다.” 한 회장이 내놓은 솔로몬의 지혜다.
애초 리틀야구연맹은 서울시에 장충리틀야구장을 철거하는 대가로 대체 리틀야구장 3면을 요구했다. 그래야 정상적인 리틀야구대회를 치르고, 아이들에게 한 번이라도 그라운드를 밟을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대체구장 건설에 난색을 나타냈다. 그러다 지난 3월 “2012년까지 강동구 고덕동 인근에 대체구장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서울시가 긍정적 자세를 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일이었지만,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서울시는 장충리틀야구장 철거를 야구계에 공식 통보한 적이 없다. 한 회장도 매번 언론을 통해 철거계획을 접했다. 그러니까 서울시가 철거 계획을 언론에 흘리면서도 정작 당사자인 리틀야구연맹엔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회장은 고덕동에 대체구장을 짓겠다는 서울시의 계획도 주변에서 들었다.
“지난해 봄 ‘서울시가 장충리틀야구장을 허무는 대신 고덕동에 대체구장을 짓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동구 고위 공무원에게 물었더니 펄쩍 뛰며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하도 강하게 부인하기에 그때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다. 고덕동에 대체구장 1면을 짓기로 확정했다는 소식이 계속 들렸다. 다시 강동구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그제야 ‘맞다’고 했다. 어째서 ‘금시초문이라고 거짓말했느냐’고 물었더니 ‘대체구장 예정지가 그린벨트라, 혹시나 야구장을 짓는다고 소문나면 금세 땅값이 오를까 봐 걱정돼 숨겼다’고 했다.”
서울시가 대체구장 건설을 약속했지만, 리틀야구연맹은 동대문야구장 철거 당시 서울시가 6개 대체구장을 건설한 예를 들어 고덕동 대체구장에 야구장 1면을 추가로 조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존 3면 건설에서 한층 양보한 안이었다.
서울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최근 들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산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서울시 푸른도시국 고위 인사는 최근 한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고덕동 대체구장 부지에 리틀야구장 2면을 짓도록 노력하겠다”고 구두 약속했다.
리틀야구계의 대체구장 2면 요구를 서울시가 수용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이제 장충리틀야구장 철거는 확실해졌다.
한 원로야구인은 “2008년 철거된 동대문야구장에 이어 장충리틀야구장마저 사라지면 누가 한국 야구사를 증언할 수 있겠느냐”며 “리틀야구연맹의 노력으로 대체구장 2면을 약속받았지만, 야구역사는 무엇으로 대체하란 말이냐”고 가슴을 쳤다.
장충리틀야구장의 마운드. 이 마운드를 밟은 수많은 야구소년들이 훌륭한 프로선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제 역사는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야구가 기록의 스포츠인 이유는 야구가 유독 역사를 존중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야구장은 돈을 쓰면 쓸수록 더 좋은 구장으로 거듭날 수 있지만, 역사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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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일본 효고현의 고시엔구장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선 한창 구장 존폐를 놓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82년 역사의 낡은 야구장을 허물고 최신식 구장을 지어 지역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자’는 세력과 ‘일본야구의 ‘성지(聖地)’ 고시엔구장을 없앨 수 없다‘는 이들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나 대결은 싱겁게 끝났다.
“아이들이 일본야구의 성지이자 역사인 고시엔구장에서 뛰도록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어른들이 할 일”이라는 의견에 모두가 수긍한 까닭이다.
당시 고시엔구장의 한편엔 ‘아이들이 뛰노는 이곳이 자연이고 천국’이란 팻말이 있었다.
오래된 야구장을 허물고 새로운 야구장을 짓는 것에 익숙한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에게 공원은 무엇이냐”고. 혹시 “‘잔디보호! 들어가지 마시오!’의 팻말이 당신들의 공원이 아니냐”고. 결국, 당신들에게 자연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수풀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 아니라 그저 조경이 아니냐고.
장충리틀야구장이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면 구장이 사라지기 전에 한 번쯤 방문하길 바란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와 이별하는 무력하지만, 유일한 방법이다.
첫댓글 가슴이 아픈 현실이네요...근시안적인 정책으로 아이들의 꿈이 사라질까 걱정이네요..이참에 구리도 리틀야구장을 멋지게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네요....
어찌 이런일이~~~~ 대로변에 있는 푸른구장이 어찌하여 남산의 자연녹지를 훼손하는지 잘 모르겠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