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 생활나눔]
열왕기상 19장
"엘리야는 두려워서 자기 사환을 데리고 유다의 브엘세바로 도망하였다. 그는 사환을 그 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 하루 종일 혼자 광야로 들어가 싸리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바라며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내 생명을 거둬 가소서. 내가 내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고서 그는 그 나무 아래 누워 잠이 들었다. 갑자기 한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어라.' 하였다. (…) 엘리야는 그 곳이 있는 어느 굴에 들어가 그 날 밤을 보내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여, 나는 주를 위해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와 맺은 계약을 어기고 주의 제단을 헐며 주의 예언자들을 모두 죽이고 살아 남은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는데 그들은 나마저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너는 나와서 내 앞에 서 있거라.' 하셨다. (…) 그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이을 예언자가 되게 하라 (…) 내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아직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그 우상에게 입을 맞추지 않은 사람 7,000명을 남겨 두었다.’”
역설적이게도 많은 경우 우리의 최악의 영적 침체는 최고의 영적 승리 바로 다음에 옵니다. 18장에서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갈멜 산에서 홀로 맞서 싸워 이겼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단을 사름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국이 회개하고 변화될 줄 알았던 그의 기대와는 달리 핍박은 더욱 심해지고, 민중들도 하나 둘 그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왕비 이세벨로부터 24시간 안에 찾아죽이겠다는 청천병력 같은 사형선고를 듣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엘리야는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140킬로미터(서울-대전) 이상 떨어져 있는 브엘세바로 도망갑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탈진한 엘리야는 모든 소망을 놓아버린 채 깊은 체념에 빠져듭니다. 그 때, 싸리나무 아래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엘리야를 찾아온 것은 하나님의 천사였어요. 그를 어루만지며 막 구운 빵과 물 한 병을 건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먹어라.” 엘리야는 그것을 먹고 다시 누워요.(제 모습 같네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다시 찾아와 “네가 갈 길이 멀다”며 그를 다시 일으키시고 먹이시죠. 엘리야는 힘을 얻어 40일 밤낮을 걸어 시내산(출애굽 공동체가 언약의 말씀을 받았던 곳)으로 갑니다. 아마 이 때까지도 엘리야의 마음은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의 종이 고난을 당하며 악인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산에 올랐을 것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러니 시내산에 도착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지 않고,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는 어두운 굴 속으로 들어가 숨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영어번역으로는 What are you doing here? 여기서 뭐하냐? 너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니?) 라고 묻자 엘리야가 항변합니다. “나 진짜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안 되더라고요. 이제 못 하겠어요. 다 죽고 나만 남았어요.” 그 한심한 대답에 열폭하신 건지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로 자주 등장하는 바람, 지진, 불로 산을 뒤흔드시더니… 부드럽게 속삭이는 소리로 엘리야를 부르십니다. “나와서 내 앞에 서라”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셔요.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었다. 너는 이제 기름을 부어 사람을 세워라” 죽음의 위협 앞에 무력하게 누워 죽기를 기다리던 엘리야를 일으켜 세운 말씀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어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떡과 말씀으로 힘을 얻은 엘리야는 말씀을 따라 여생을 예언자 공동체를 일구며 예언자 생도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얼마 전, 저는 깊은 영적침체에 빠져있었어요. 스스로의 어둔 기운에 매몰되어 있어 지난 케이예배에도 함께 하지 못했어요. 식당에서 하는 몸노동이 고되 체력적인 지치기도 했고, 기도생활을 놓치면서 불평과 체념의 생각에 제 마음을 지키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예수를 따르는 길이 얼마나 많은 자기부인이 필요한지 배울수록 점점 그 길을 외면하고 싶어지더라고요. 마음 한켠에는 그 길 걷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괴로웠어요. 그러던 중 지지난주 없이있는마을에서 다같이 한국공동체협의회 한마당 대잔치를 가게 되었어요. 예수원에서 인도하는 아침기도 시간, 도망하던 제게 하나님은 오늘 이 말씀으로 다시 또 찾아오셨어요. 엘리야가 먹고 다시 잠드는 모습, 동굴에 숨는 모습, 나 애썼다고 그만두겠다고 칭얼대는 모습이 얼마나 인간미 있던지… 그토록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나와 다르지 않았구나 하는 사실에 위로와 용기도 얻었어요. 포기할 법도 한데… 오르락내리락 하는 내 모습은 스스로 보기에도 부끄럽고 한심한데… 하나님은 갈 길이 멀다며 저를 다시 먹이시고 일으켜 세우셨어요. 그리고 전국에서 예수제자로 살아보겠다고 분투하며 앞서 이 길 걷고 있는 선배들, 동지들 제 눈 앞에 보여주시며 말씀하셨어요. ”넌 혼자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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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장
- 예언자의 생도 50명이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 두 사람은 요단 강가에 멈춰 섰다.
- 그때 엘리야가 가기 겉옷을 벗어 말아 가지고 그것으로 물을 치자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갔다.
- 그들이 강 저편에 이르렀을 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내가 네 곁을 떠나기 전에 너에게 무엇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지 말해 보아라.' '선생님의 영적 능력을 내가 두 배로 받게 해 주십시오.'
- '네가 정말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내가 네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네가 그것을 보지 못하면 네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 이렇게 그들이 말을 주고받으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불말들이 끄는 불수레 하나가 나타나 그들 사이를 지나가며 두 사람을 갈라 놓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 엘리사는 이 광경을 보고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전차와 마병이여!' 하고 외쳤다. 엘리야가 사라지고 다시 보이지 않자 엘리사는 슬퍼서 자기 옷을 잡아 둘로 찢고
-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요단강으로 돌아왔다
선지자 공동체의 지도력 엘리야의 생이 다해 갈 무렵, 엘리사는 스승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눕니다. 엘리사의 입장에 한 번 서 봅시다. 죽음을 무릎쓰고 담대하게 왕 앞에 회개의 복음을 전했던 스승, 하늘에서 불과 비가 내리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준 스승님이 이제 곧 떠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상황은 여전히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부패한 권력과 고통받는 민중들, 만연한 바알 숭배 문화와 이방민족과의 전쟁까지… 엘리사는 마음이 무겁고 간절해졌던 것 같아요. 부패한 정부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죽창을 들었던 동학소농들과 불의한 권력에 맞서 피와 밥을 나누었던 광주의 시민들의 모습을 보고 배웠으나, 정작 오늘의 현실 속에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제자의 기운을 눈치 챈 스승은 엘리사에게 “무엇 해주길 원하는지” 묻습니다. 자신을 무력함을 절감한 엘리사는 힘을 구합니다. “선생님의 영적인 힘을 2배나 받게 해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조금 이상한 것은 내가 사라지는 것을 보아야 네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5.18을 공부하며 함께 읽은 <철학의 헌정>에서는 “기념한다는 것은 타인의 경험과 기억에 참여하는 것이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것은 오직 서로의 기쁨과 슬픔의 기억에 참여할 때이다.”라고 했지요.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죽음은 마주하기 힘든, 외면하고만 싶은 사건이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고통의 사건을 나와 함께 통과하자고 제안하는 이유는 내가 너(타자)의 고통에 응답할 때에 진짜 힘이 생기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내가 떠나가는 게 유익하다. 내가 가면 보혜사(성령)를 너희에게 보내주실 것이다”라고 하셨나봐요.
결국 엘리사는 승천하는 스승 엘리야의 모습을 피하지 않고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았어요. 엘리야가 승천하고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엘리사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엘리야는 떠나면서 남긴 하나의 물건, 그것은 그가 평생 입고 다니던 겉옷 한 벌이었어요. 그 옷은 병자를 고치고, 바알 선지자를 물리치고, 아합 왕을 대적하여 공의를 실현하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던 사랑의 옷이었어요. 성령의 감동이 배어 있는 옷이었습니다. 엘리야의 겉옷은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싸시는 것에 대한 상징이었어요. 엘리사는 자기 겉옷을 둘로 찢어 버렸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무장하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리고 나서 엘리사는 성령이 베어있는 스승의 겉옷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겉옷으로 요단강 물(죽음)을 가르며 자신의 동료들이 있는 공동체로 되돌아갑니다.
저는 케이에서 함께 동학과 518광주민중항쟁을 공부하는 내내 알 수 없는 부담감을 느꼈어요. 불의한 힘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민중항쟁의 역사와 인격적으로 마주하고, 나 또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그 고통의 부름에 헌신적으로 응답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이었어요. ‘오늘도 무사히’를 비는 1인분짜리 인생을 강요받으며 형성된 체질 탓인지… 특히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죽창을 들고 기관총 앞에 섰던 소농들, 마지막 항전지 전남도청에 남기를 선택했던 이들의 결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외면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이웃의 고통 앞에 평범한 민중들이 보여준 자발적 희생과 연대, 분노에 찼으나 희망을 잃지 않은 그들의 말과 글을 읽고 보면서… 점차 그 간절함에 물들어갔던 것 같아요. 인간공동체 안에 내재된 ‘죽고 죽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진실되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싶었던 개체적 부담이 점차 ‘서로 사랑하라’는 공동체적 부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부름에 응답하고 싶다, 우리를 부르는 그 날의 눈빛들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심겨졌어요. 그러나 우리도 이전의 옷으로는 이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죽음과 폭력의 그늘이 드리워진 시대를 사는 우리는 엘리사와 같이 우리 선배들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동학 소농들의 흙 묻은 옷, 광주 시민들의 피묻은 옷,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