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청풍명월 원문보기 글쓴이: 고홍
서울성곽길 걷기(2일차)
1. 산행일자 : 2010년 1월 17일(일요일)
2. 산행지역 : 서울 성곽(말바위전망대~혜화문~흥인지문~숭례문~돈의문)
3. 산행코스 : 삼청공원 ~ 말바위전망대 ~ 와룡공원(정자) ~ 혜화문 ~ 낙산(팔각정) ~ 흥인지문(동대문) ~ 광희문 ~ 장춘단 팔각정 ~ 국립극장 앞 ~ 남산성곽 전망대 ~ 남산타워/팔각정/봉수대 ~ 서울시교육정보원 ~ 숭례문(남대문) ~ 배제학당 ~ 돈의문 터 ~ 월암공원/홍난파생가터 ~ 옥경이상회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4. 산행거리 : 15.53km(들머리길 0.85km 포함시 16.38km) 삼청공원 -<0.85km>- 말바위전망대 -<0.63km>- 와룡공원정자 -<1.6km> - 혜화문 -<2.5km>- 흥인지문 -<2.5km>- 장충체육관 -<6.0km>- 숭례문 -<1.5km>- 돈의문터 -<0.8km>- 옥경이상회
5. 산행시간 : 6시간 32분 (휴식시간 포함, 들머리시간 포함시 6시간 50분)
6. 산행참석 : 나홀로
7. 산행일정 : 10:28 경복궁역 ①번출구(종로마을버스 11번) 10:43 삼청공원 입구 10:50 말바위등산로 입구 11:01 말바위전망대 11:03 갈림길(↑말바위탐방안내소/?와룡공원/↓삼청공원) 11:06 말바위탐방안내소(~11:17) * 서울성곽 탐방안내도 구입차 방문 11:22 갈림길(?와룡공원/↑삼청공원) 11:32 와룡공원정자(터널) 11:53 서울과학고 후문(주차장)(→혜화문길) 12:04 천주교 외방선교회 12:13 혜화문(~12:22) 12:24 한성대역③(~12:48) 12:49 삼선교약국 (약국앞 우측 →법화종방향 / 골목 끝) 12:52 성곽길 이정표 12:57 낙산공원 탐방안내도 13:09 낙산공원 입구(마을버스 종점) 13:25 낙산공원 팔각정 13:29 흥인지문(동대문)(~13:39) 13:48 맑은내 다리 13:57 119안전센타 14:03 한양공고앞 삼거리 14:06 광희문(→수구문길) 14:21 백구컴퓨터(→성당길) 14:24 천주교 신당동교회) 14:27 장충체육관(횡단보도) 14:47 팔각정(~14:52) 14:59 자유총연맹 앞 15:03 국립극장 앞 15:16 남산성곽전망대 15:22 갈림길(↖남산타워/→국립극장) 15:36 남산타워/팔각정/봉수대(~15:50) 16:06 서울교육연구정보원 16:26 힐튼호텔 16:34 숭례문(남대문) 16:47 HSBC은행 앞 16:57 순화빌딩 앞(중앙일보 맞은 편) 17:02 배제학당 17:08 정동극장 17:17 돈의문 터 17:21 서울시교육청 17:27 월암공원/홍난파 생가터 17:33 옥경이상회
8. 산행풍경 :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삼청공원 입구
삼청공원 초가(草家)쉼터와 북악산
삼청공원내 말바위등산로 입구
말바위전망대 가는 길
박무로 흐릿한 서울 도심과 남산 타워
와룡공원 가는 성곽길
와룡공원 쉼터(정자) 성곽길 안내도
혜화문으로 이어지는 성곽길
삼각산 문수봉에서 이어지는 주능선길도 보이고.....
현대 구조물에 의해 옛 영화는 사라지고........낙산
성북쉼터(서울과학고 뒤)....도로에 의해 성곽길은 끊어지고...
경신고 뒷길(혜화문길 방향)
성곽위로 학교와.....
교회.....
그리고 주택들이 들어 서 있다.
그나마 잘 보존된 성곽길도 듬성듬성 그 허리가 잘리우고.....
엣 손길과 현대의 손길이 만난 듯....
혜화문 혜화문(惠化門)은 서울성곽의 사소문 중 하나로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했으며 서울의 북대문인 숙정문을 폐쇄하고 혜화문을 북문으로 부르기도 했다. 태조 5 년(1396)에 완공하였고 당시는 홍화문(弘化門)이라고 했으며 중종 6년(1511)에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발음이 같아서 혜화문으로 고쳤다. 1592년에 문루가 불탔으며 영조 20년(1744)에 문루를 재건하였고 일제에 의해 1928년에 문루가 1939년에는 석축과 홍예가 허물어 졌으며 1994년에 복원하였다. 원래 홍예 틀 내부의 천장에는 용이 있는데, 혜화문엔 봉황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이 주변에 새가 많아 이를 막기 위해 새들의 왕인 봉황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소 문을 지키는 출직호군(出直護軍, 성문을 지키는 병사)이 20명이고 대문은 30명 이지만 혜화문은 소문이지만 출직호군이 30명이었다.
끊긴 혜화문 성곽길.....
한성대역 3번출구에서 직진..... 삼선교약국 앞 우측길 끝자락에서 성곽길이 이어진다...
당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성곽길....
낙산 성곽길
낙산 성곽길에서 보는 삼각산....
낙산 낙산(駱山)은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의 모습이 마치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 하여 낙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낙산은 역사상으로 서울의 형국을 구성하던 내사산(남산-인왕산-북악산-낙산) 중 하나로 풍수지리 상 주산인 북악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되어 서편의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과 대치되면서 조선왕조의 수도로서의 한양 입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한양의 경계로서 능선을 따라 성곽이 축성되었다. 고려시대에 수도를 남경(南京)으로 정하여 새 궁을 앉히면서 지형의 형세에 따라 구역의 한계를 동쪽은 대봉(大峰-駱山), 서쪽은 기봉(崎峰-母岳), 남쪽은 사리(沙 里-漢南洞), 북쪽은 면악으로 하였다.
낙산의 동강난 성곽길 허리는 마을버스 주차장으로 변했고....
곳곳에 서울성곽 종주길을 안내하는 표시판이 붙어 있지만 아직은 미비한 점이 많다. 특히 주택가로 변한 곳이나 도심에서는 그 길을 이어가기가 쉽지않아 좀 더 자세한 안내도가 필요하다.
흥인지문(동대문) : 보물 제1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문으로 동대문(東大門) 이라고도 불리는데 1396년(태조 5년)에 지어져 1453년(단종 1년), 1869년(고종 6년)에 고쳐지었다. 사대문의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에서 따왔는데 이에 따라 동서남북의 사대문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지'智'를 대신 하여 정'靖'을 썼다)이다. (마지막 신은 고종 때 한양의 중심이었던 “보신각”의 이름에 쓰였다). 다른 사대문 이름이 석 자인데 반해 흥인지문만 넉 자인 것은 이는 풍수지리상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 로 지었다고 한다. 화강석으로 된 홍예문의 축석 위에 지어졌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 다포계형식 의 목재 중층건물로서 숭례문이 조선초기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되어 있어 서로 대비된다.
청계천의 맑은내 다리를 건너서...
서울패션아트홀 방향으로 직진..... 구 동대문운동장을 우회후 좌측 한양공고 삼거리 방향으로.... 회단보도 건너에 광희문이 보인다.
119 안전센타 앞, 패트병으로 만든 해태상
광희문 광희문(光熙門)은 서울성곽의 사소문 중 하나로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가 1975년 에 본래 자리에서 15m 옮겨 복원되었다. 광희문을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 屍口門)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청계천(오간수문)·이간수문이 가깝고 또 도성의 장례행렬이 통과하던 문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서울성곽의 문과는 달리 광희문 의 원래 문루는 특이하게 나무 기둥으로 연결되는 형식인데 보통의 문은 홍예와 붙어 있는 형식이었다. 조선시대 '수구문 돌가루'라 하여 이 광희문의 돌을 갈아 만든 돌가루가 만병 통 치약으로 통했었는데, 이는 '아무리 지독한 병마라도 수많은 원귀에 단련된 수구 문에는 꼼짝도 못 할 것'이라는 미신 때문이었다.
광희문과 연결된 성곽길 끝자락 골목길의 수구문길로 향하다가 백구컴퓨터 앞 우측의 성당길로 진행....
장충단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들, 열사들을 제사하기 위해 1900년 9월 대한제국 고종이 설치한 초혼단(招魂壇)이 ‘장충단’이다. 고종은 어영청의 분 소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남소영(南小營)자리에 장충단을 짓고, 봄가을로 제사 를 지내게 했다. 처음에는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영관 염도희(廉道希), 영관 이 경호(李璟鎬)를 주신(主神)으로 제향하고, 김홍제(金鴻濟), 이학승(李學承), 이종구 (李鐘九) 등 장병들을 배향했으며 다음해부터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稷)을 비롯 하여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죽은 문신들도 포함하였다. 한일 병합 후인 1919년에 장충단 일대에 벚나무를 심어 일본식 공원이 조성되면 서 창경궁과 유사하게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가 위락시설로 바뀌었다. 1959년 청계천이 복개되자 수표교를 철거하여 이곳으로 옮겼으며 1969년에는 영빈관 내 에 있던 장충단비(서울시 유형문화재 1호)를 수표교 옆으로 옮겼다. 장충단비의 ‘장충단’(奬忠壇)이라는 글씨는 대한제국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것이며, 비 뒷 면에는 민영환의 글이 새겨져 있다.
장충체육관 위 횡단보도를 건너면 성곽길이 이어진다.
시대별 성곽의 축조기법 안내도
암문
현위치를 알리는 성곽길 안내도 투사되는 객(客)의 모습
국립극장 앞 남산공원 안내도 팔각정에서 자유총연맹으로 내려와 길을 건너면 국립극장
남산공원 갈림길 이정표
남산 성곽길 아래 이정표
남산 성곽길 탐방로.....
남산타워로 가는 갈림길
남산타워 N서울타워(N Seoul Tower)는 서울시 용산구 남산공원 정상 부근에 위치한 전파 송출용 탑으로서 1969년에 착공하여 1975년 전망대를 마지막으로 완공되었으며 높이는 236.7m, 해발 479.7m이다. YTN이 2000년 인수하여 2005년에 개. 보수 하였고 “서울타워”에서 “N서울타워”(정식 명 “YTN 서울타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원래 이 곳은 조선신궁이 있었던 곳이다.
공중에 매달린 조형물....
마치 남산타워에서 다이빙 한 듯.....
남산 팔각정
국사당 터(國師堂址)
국사당은 조선시대 태조(1395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한양의 수호신사(守護 神祠)로 북악신사(北岳神祠)와 함께 남산 꼭대기에 두었던 목멱신사(木覓神祠 : 남산 산신을 목멱대왕으로 봉작)의 사당으로서 '國祀堂'이라고도 쓰며 후에 무당 (巫堂)으로 변하여 일반의 기도장으로 사용되었다. 1925년에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을 때 건물을 헐어 편액(扁額)과 사당의 일부를 인왕산 (종로구 무악동)으로 옮겼으며 현재 그 자리에는 남산 팔각정이 있다.
봉수대(목멱산 봉수대) 남산봉수대지는 남산 정상에 있던 목멱산(木覓山) 봉수대 터이다. 남산봉수대는 서울에 있다 하여 일명 경봉수(京烽燧)라고 하며,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봉수를 매일 받아 병조(兵曹)에 보고하는 중앙 봉수소였다. 조선의 봉수는 그 시설 상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인 서울 목멱산(남산)의 경봉수, 해륙과 변경의 제 l선에 위치하여 연대라고 호칭되는 연변봉수(沿邊烽燧), 경봉수와 연 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되며, 이밖에 기간 선로상의 직봉 (直線烽燧)과 그 보조선상의 간봉(間線烽燧)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목멱산봉수대는 동에서 서쪽방향으로 제1봉에서 제5봉에 이르는 5개가 있었는데 제1봉은 함경도ㆍ강원도ㆍ경기도를 거쳐 오는 봉수, 제2봉은 경상도ㆍ충청도ㆍ경 기도를 거쳐 오는 봉수, 제3봉은 평안도ㆍ황해도ㆍ경기도의 내륙을 거쳐 오는 봉 수, 제4봉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닷길과 경기도의 육로를 통해오는 봉수, 제5봉 은 전라도의 해안과 충청도 내륙, 경기도 해안을 거쳐 오는 봉수를 받았다. 서울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
빌딩숲너머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삼각산 마루금
백범광장의 "백범 김구 동상"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1949년 6월 26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교육자, 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 계몽운동 중 일본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입각, 의정원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대리, 노동국총판 등을 지냈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 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 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자(字)는 연하(蓮河), 아호는 창암(昌巖)이고, 호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 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 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본관은 안동으로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출신이다.
백법광장의 "이시영 선생상" 이시영(李始榮, 1868년 12월 3일 서울 ~ 1953년 4월 19일 부산)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으로 1948년 7월 24일부터 1951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 의 제1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경주, 자는 성옹(聖翁), 호는 성재(省齋), 시림산인(始林山人), 본명은 성흡(聖翕)이다.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다.
SK빌딩을 끼고 이어지는 성곽길.... 비록 짧은 구간이지만 성곽길을 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숭례문(남대문) 복원현장↓
숭례문 국보 제1호(1962.12.20 지정)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정문으로, 남대문(南大門)이 라고도 부른다. 1396년(태조 5년)에 창건되어 1447년(세종 29년), 1479년(성종 10년)에 고쳐지었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서울 4대문과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르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 동), 의(義 : 서), 례(禮 : 남), 지(智 : 북), 신(信 : 중앙)의 5덕 (五德)을 표현한 것으로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1907년 일제가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 성곽을 헐고 그 자리에 도로와 전차 길을 내었으며,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고 문 앞에 파출소와 가 로등을 설치하였는데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2006년 3월 3일, 도로에 의해 숭례문이 고립되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 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2008년 2월 10일 밤 8시 40분경, 방화로 인한 화재로 약 5시간만인 2월 11일 오전 2시경에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HSBC은행 앞길....
어느덧 하루 해는 저물어 간다. ............ 호암아트홀 길 맞은 편의 순화빌딩 앞 길로 진행
배제학당 배재학당(培材學堂)은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목사인 아펜젤러가 서울 에 세운 중등교육기관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학교였다. 그 명맥은, 배재중·고 등학교 및 배재대학교로 이어졌다.
서울시립미술관앞 길을 통해 정동극장쪽으로 진행
정동교회와 길 건너편의 정동극장
돌담 ........ 정동극장길을 따라 정동사거리까지 진행... 길 건너편이 돈의문 터.
돈의문 터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시대 한양의 4대문 중의 하나로 서쪽의 정문으로 서대문 (西大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래 사직동에서 현재의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태조 5년(1396) 도성을 세울 때 다른 문 들과 함께 건축되었으나 태종 13년(1413), 풍수지리설에 위배된다고 해 숙정문 (肅靖門) · 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폐쇄되었다. 그 대신 약간 남쪽에 서전문(西 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 출입문으로 사용하였으며, 세종 4년(1422)에 다시 이 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새문, 신문(新門))을 쌓고 ‘돈의문’이라는 옛 이름으로 부르게 하였다. 그래서 세종이후 서대문 안을 새문안(지금의 신문로) 으로 부르게 되었다. 돌로 쌓은 축대 가운데에 홍예문(虹霓門)이 있었고 그 위 에 단층 우진각지붕의 문루(門樓)가 있었으며 주위에 낮은 담이 돌려져 있었다. 돈의문은 1915년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경성도시개발계획에 따른 전차의 복선 화로 인해 강제로 헐렸다.
돈의문의 옛 모습
서울시교육청 옆 월암공원의 성곽길...
월암공원 한켠에 위치하는 홍난파 생가터
홍난파(洪蘭坡) 작곡가 · 바이올린 연주가 · 지휘자(1898~1941). 본명은 영후(永厚).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선구자로, 서양 음악을 보급하였다. 작품으로〈봉선화>,〈성불사의 밤>,〈봄처녀>,〈낮에 나온 반달>이 있다.
서울성길 걷기 1일차 시작점이자 2일차 종료점인 "옥경이상회"
|
|
출처: 청풍명월 원문보기 글쓴이: 고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