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내소사 / 김문주
세상에 수런거리는 것들은
이곳에 와서 소리를 낮추는구나, 변산
변방으로 밀려가다 잠적하는 지도들이
일몰의 광경 앞에 정처없는 때
눈내린 오전의 내소사 전나무 숲길은 아름답다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도 풍경이 되고 어느새
동행이 되는 길의 지혜
작은 꺾임들로 인해 그윽해지고 틀어앉아
더 깊어진 일은
안과 밖을 나누지 않고도 길이 된다
나무들은 때때로 가지들어 눈뭉치를 털어놓는다
숲의 한쪽 끝에 가지런히 모여앉은 장광같은 부도탑들
부드러운 육체들이 햇빛의 소란함을 안치고 있다.
봉래루 설선당 해우소 산사의 마당에는
천년의 할아버지 당산과 요사까지
저마다의 높낮이로 중심을 나누어 가진 집채들
부푸는 고요
몸으로 스며드는 시간의 숨들
숨길이 되고 집채 사이를 오가다, 아
바람의 꽃밭, 열림과 닫힘의 자리에
바래고 문드러진 수척한 얼굴들
슬픔도 연민도 모두 비워낸 소슬무늬꽃문
난만한 열망들이 마른꽃으로 넘는 저, 장엄한 경계
대웅보전 앞마당에 발자국들 질척거리고
진창을 매만지는 부지런한 햇빛의 손들이여
내소사 환한 고요 속에 오래도록 읽는다
서해 바람의 이 메마른 문장을
<2007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심사평]
“서정시의 ‘결’ 불교적 사유로 잘 표현”
249명, 모두 1500여 편에 가까운 시편들을 읽고나니, 먼저 우리 시단의 양적 풍요로움이 전해져왔다. 이렇게 많은 응모자들로 신춘문예가 성황을 이룬다면 아직도 우리 문학은 큰 희망이 있다고 느껴졌다. 신문의 특성 탓인지 불교 관련 소재가 눈에 많이 띄었으며, 대체로 크게 다를 바 없는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도 많았다.
불교적 가르침이란 중요한 뜻을 함축하고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시 작품으로 승화 내지 변용시키는가 하는 것이 우리들의 중대한 관심사이다. 독자적인 목소리를 지닌 신인을 탄생시키는 것 또한 신춘문예의 역할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열대야’ , ‘사월초파일’, ‘소리 항아리’, ‘불꽃무늬 항아리’, ‘연못’, ‘백담사 살살이꽃’, ‘추이불이선란도’, ‘겨울 내소사’ 등 여덟 명의 작품들이 그 나름의 수준을 보여 주어 마지막 검토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더 축소시켜 최종적으로 ‘추사불이선란도’와 ‘겨울 내소사’ 두 편을 놓고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정할지 고심하였다. 이 두 작품은 각각 그 장단점이 있어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추사불이선란도’는 선미가 승하고 시적 통찰이 빛나고 있었으나, 시적 구성과 언어적 세련미는 ‘겨울 내소사’에 조금 뒤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아 있다.
‘겨울 내소사’는 일반적인 서정시의 결을 잘 살리면서도 불교적 사유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저마다의 높낮이로 중심을 나누어 가진 집채들/부푸는 고요/ 몸으로 스며드는 시간의 숨들”에서 포착되는 섬세한 화자의 눈길은 시행의 분절로 드러내면서 고요 속에서 “진창을 매만지는 부지런한 햇빛의 손들”을 통해 장엄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읽어내는 동시에 신생의 열망을 표현하는 능력은 그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시작 수련을 거쳤음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추사불이선란도’는 마지막 결구에서 “내게 있어 추사의 붓끝은 너무 아득하고 깊어 보였다”라고 하는 설명적 진술로 마무리되어 결과적으로 시적 긴장을 약화시킨 것이 결정적 아쉬움이었다.
전반적으로 금년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시조 부문은 응모자의 수와 질적인 면에서 이제 본격적인 도약기를 마련한 것 같다. 그 자체가 하나의 경사이자 축복이다.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아낌없는 격려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최종 당선자에게는 진심에서 우러난 축하의 박수를 전해드린다.
<최동호/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