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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영상 : https://youtu.be/JBUyrIrOX4w
제목 : 행복한 빚쟁이
본문 : 롬 13:8-14
날짜 : 2026. 9. 6 주일오전예배
어느 작은 식당에 오랫동안 보관된 외상 장부가 있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한 청년은 그 식당에서 여러 번 밥을 먹고도 값을 치르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청년이 미안해할 때마다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형편이 나아지면 그때 갚으세요.’ 세월이 흘러 청년은 자리를 잡았고, 가장 먼저 그 식당을 찾아가 밀린 밥값을 모두 갚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장부를 펼쳐 보이며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청년의 이름 옆에는 ‘갚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누가 갚았느냐고 묻자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어려울 때 누군가가 당신 몫을 대신 냈어요. 그러니 나에게 다시 갚으려고 하지 말고, 당신처럼 어려운 사람을 만나거든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세요.’ 청년은 돈으로는 이미 빚이 없어졌지만, 사랑으로는 새로운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빚은 마음을 짓누르는 빚이 아니라, 받은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행복한 빚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를 바로 그런 사람으로 부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세상의 빚은 제때 갚아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갚아도 끝나지 않습니다. 어제 사랑했다고 오늘 사랑할 책임이 사라지지 않고, 한 사람을 섬겼다고 다른 사람을 외면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빚은 우리를 정죄하고 억누르는 빚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죗값을 대신 갚으셨기 때문에 생긴 빚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넘치도록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평생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아가는 행복한 빚쟁이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빚을 지고 있으며, 언제 그 빚을 갚아야 하고, 어떻게 그 빚을 갚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랑은 평생 갚아야 할 행복한 빚입니다.
본문 13장 8절을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합니다. ‘빚지다’라는 말에 사용된 헬라어 ‘오페일레테’는 돈을 빌렸다는 뜻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앞 7절에서 바울은 세금과 관세를 내고, 두려워할 사람을 두려워하며, 존경할 사람을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정당한 책임을 회피하거나 약속을 미루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 하나의 예외를 말합니다.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금은 납부하면 끝나고, 빌린 돈은 갚으면 장부에서 지워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한 번 갚았다고 끝나는 빚이 아닙니다. 오늘 사랑을 베풀었어도 내일 다시 사랑해야 합니다. 어제 용서했어도 오늘 다시 용서해야 하며, 한 번 섬겼어도 또다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존 웨슬리는 이 사랑을 ‘충분히 갚을 수 없는 영원한 빚’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빚은 갚을수록 가난해지는 빚이 아닙니다. 사랑을 나눌수록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며,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빚은 부담스럽기만 한 빚이 아니라 기쁘고 복된 빚입니다.
우리가 왜 이 사랑의 빚을 졌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하고 사랑스러워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죄로 생긴 빚은 우리가 갚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갚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의 장부 위에 하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기록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대가가 아닙니다. 이미 받은 구원과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11절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한 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빚이 생긴 이유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하나님께 돈처럼 되돌려 드릴 수는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곁에 이웃을 보내시고, 그 사람에게 사랑을 흘려보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요 13장 3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기준은 상대방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느냐입니다.
바울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말씀 안에 모인다고 설명합니다. 사랑은 율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뜻을 이루게 합니다.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가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생명을 해치지 않으며, 소유를 빼앗지 않고, 그가 가진 것을 탐내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0절을 보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단지 해를 끼치지 않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죽이지 않는 것에서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도둑질하지 않는 것에서 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으로, 탐내지 않는 것에서 이웃의 복을 기뻐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2. 지금이 바로 빚을 갚을 시간입니다.
로마서 13장 11절을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의 빚을 말한 뒤 갑자기 시간 이야기를 꺼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말씀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11절의 ‘또한’은 앞의 사랑을 지금 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해야 할 때는 언젠가 형편이 좋아진 뒤가 아니라 바로 지금입니다. 화해도, 용서도, 섬김도 계속 미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시기’는 헬라어로 ‘카이로스’입니다. 단순히 시계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결정적인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미 새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재림의 날짜를 계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로 오늘의 삶을 변화시키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잠은 육체의 잠이 아니라 영적인 무감각입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상태, 화해해야 할 관계를 미루면서도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는 상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도 다른 누군가가 하겠지 하며 지나치는 상태가 영적인 잠입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을 보면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깨어 있는 사람만이 행할 수 있습니다. 잠든 사람은 곁에서 누가 울어도 듣지 못하고, 누가 손을 내밀어도 보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잠들면 가족의 아픔도, 이웃의 외로움도, 성도의 무거운 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시면 비로소 ‘저 사람이 지금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너무 쉽게 내일로 미룹니다. ‘조금 한가해지면 찾아가야지. 마음이 풀리면 용서해야지. 형편이 나아지면 도와야지. 다음에 만나면 따뜻한 말을 해야지.’ 그러나 야고보서 4장 14절은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까지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의 전화가 늦을 수 있고, 한마디의 사과가 너무 늦을 수 있으며, 손을 잡아 줄 기회가 지나갈 수 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많은 사람이 ‘살아 계실 때 한 번 더 찾아뵐 것을, 그때 사랑한다고 말할 것을’ 하며 눈물 흘립니다. 사랑은 마음에만 간직해 두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 표현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0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사람과 기회가 바로 사랑의 빚을 갚을 자리입니다. 거창한 일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인사하고, 한 번 더 들어 주며, 작은 수고를 대신하고, 상처 준 사람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면 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랑의 통장과 같습니다. 오늘 사용하지 않은 사랑의 기회가 내일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라고 말합니다. 밤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이 시대를, 낮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실 날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아직 어둠이 남아 있지만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우리까지 어둠에 익숙해져서는 안 됩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았어도 다가올 낮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해야 합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사랑하겠다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미워할 원수도, 돌보아야 할 병자도, 위로해야 할 상한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갚을 기회는 오늘,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지금이 깨어날 때이며, 바로 지금이 사랑할 때입니다.
3.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4절을 보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빚을 평생 갚아야 하고 지금 갚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한편으로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이 부족한데 어떻게 평생 사랑할 수 있을까? 나에게 상처 준 사람까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바울은 우리에게 의지를 더 강하게 만들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합니다.
‘옷 입으라’는 말은 헬라어 ‘엔뒤사스데’입니다.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드러냅니다. 군복을 입으면 군인임이 드러나고, 작업복을 입으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임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에게 바울은 다시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매일 아침 옷을 입듯이, 날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살아 내라는 뜻입니다. 오늘 내가 입고 나갈 옷은 자존심의 옷입니까, 분노의 옷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옷입니까?
골로새서 3장 12-14절은 그리스도의 옷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서로 용납하며 용서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에게서는 긍휼과 겸손과 인내와 용서가 나타납니다. 사랑은 그 모든 성품을 하나로 묶는 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로 옷 입을 수 있습니까? 먼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을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생명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결심만으로는 오래 사랑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기대에 어긋나고 나에게 상처를 주면 우리의 사랑은 곧 바닥납니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 오고, 그 사랑으로 다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긍정적으로는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하고, 부정적으로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도모하다’라는 말은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며 공급한다는 뜻입니다. 죄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쓰러뜨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전에 죄가 자라도록 먹이를 주고 길을 열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움을 마음속에서 되풀이하고, 상대방의 허물을 계속 꺼내 보고, 분노를 정당화할 이유를 모으면 결국 다툼과 시기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13절에서 바울은 방탕과 술 취함, 음란과 방종뿐 아니라 다툼과 시기도 똑같이 어둠의 일로 다룹니다. 우리는 술 취함과 음란은 큰 죄라고 여기면서도, 교회 안의 다툼과 경쟁심과 질투는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을 갚으려면 이런 어둠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미움을 키우는 대화를 멈추고, 시기를 부추기는 비교를 끊으며, 다툼의 불씨가 되는 말을 삼켜야 합니다.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내 감정대로 말하기 전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를 생각하고, 내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내려놓으셨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은 우리의 빈 주머니로 갚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채워 주시는 사랑으로 갚습니다. 내가 사랑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고, 내가 용서할 힘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를 용서하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우리의 얼굴과 말과 손길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이웃에게 전해집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빚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의 빚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갚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정죄의 빚이 아니라 사랑의 빚입니다. 이 빚은 평생 갚아도 끝나지 않지만, 갚을수록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행복한 빚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한 가족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멀어진 성도일 수 있고, 용서하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말없이 도움을 기다리는 이웃이나, 위로의 말 한마디가 필요한 성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하신다면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바로 사랑의 빚을 갚을 시간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만 믿고 나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 머물고, 기도로 주님의 마음을 구하며, 성령께 사랑할 힘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둠의 옷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분노와 시기와 다툼을 키우는 길을 끊고,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오래 참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작은 사랑 하나를 실천할 때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게 됩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먼저 내미는 손, 기꺼이 나누는 작은 물질, 진심 어린 용서가 어둠 속에서 빛의 무기가 됩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은 우리 안에만 머물도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맡겨진 사랑입니다.
세상의 빚은 빨리 갚고 자유로워져야 하지만, 사랑의 빚에서는 벗어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빚을 기쁘게 인정하고, 오늘 갚고, 내일 또 갚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랑의 빚을 충성스럽게 갚아 가는 믿음의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평생 사랑의 빚을 갚으면서도 기쁘고 감사해하며 살아가는, 참으로 행복한 주님의 빚쟁이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