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것이 그것이다’라고 답을 제시하지 않으려 한다. ‘月印千江’이란 말이 있다. “달은 하나이지만 천 개의 강에 비친다.” 우리가 각각 나름대로 그 문화적 가치를 찾아나감으로써 후에 노정되어 나타나는 것이지 우리 앞에 있는 어떤 것으로 제시할 수는 없다. 나의 강에는 이러한 방법들이 비친다.
-위대한 음악에서부터 작은 음악으로- -도전자로서가 아니라 수행자로서- -대결의 음악이 아니라 스밈의 음악으로-
이 글은 이건용 교수가 쓴 「나의 음악을 지켜보는 얼굴들」이란 책에 실린 내용이다. 위의 내용에서 작곡가 이건용 교수가 문화적 가치를 고민하는 하나의 강이었다면 연주자인 나에게 그는 하나의 달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곡들은 자연스럽다. 자연과 닮아있다. 자연의 솜씨를 닮은 이건용 교수의 곡을 인간의 솜씨로서 내가 다시 빚는다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시심(詩心)이 충만한 이건용 교수의 곡들이 달빛 노래라면 여러 연주자의 마음의 강에 비추어 갖가지 형색으로 나타나고 그 강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또 다른 강에 스며든 달빛도 각양각색이리라 생각하니 은근히 재미가 생겼다. 나의 작은 강은 그 달빛을 온전히 받아들인 걸까? 그리고 그 달빛 노래를 오늘 나의 강으로 오셔서 엿보시는 여러분들의 심중에 스며든 달빛은 무슨 색깔이며 어떤 모양일까? 나의 저녁노래는 사실 일 년 여 동안 수행해온 내 마음의 노래들이다. 전통의 고유한 맛에 길들여진 내가 서양음악을 먼저 접하신 이건용 교수의 곡들을 맛볼 때 나는 전통의 맛을 간직한 가야금에, 비장의 무기인‘농현’이라는 표정을 가미하여 이 시대 우리가 즐기는 전통음악으로 만들고 그 곡에 나를 실어서 하나가 되고자 노력했다.
이건용 교수의 ‘고즈넉한 달빛’을 나의 감수성이란 강에 품어 안은 노래가 오늘 저녁 여러분이 들으실 음악이다. 여기 모인 분들이, 달빛 은은한 저녁나절에 나의 연주를 들으며 한낮에 받았던 뜨거운 스트레스와 응어리들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길 기대한다. 특히 이건용 교수가 나를 위해 새로이 편곡해 주신 오늘 저녁 초연되는 이 시대 새로운 가야금 병창, <그렇지요(하종오 詩)>, <사랑(문익환 詩)>, <상한 영혼을 위하여(고정희 詩)>를 감상하시며 ‘詩心’과 ‘樂心’을 함께 만나시길 바란다.
이건용 교수의 음악은 쉽지 않다. 어렵지만 진지하면서 깊은 예술적 감동을 준다. 그러한 작품들을 통해 나의 가야금 여정에 꼭 필요한 고민과 반성을 되새기게 해준 이건용 교수께서 올해 회갑을 맞으신다.
존경하는 교수님의 이순(耳順)에 나의 연주를 올린다.
- 프로그램 -
25현가야금 독주곡 다악 <잎·물·빛>, <별과 詩> * 행다시연/반야로 채원화님
25현 가야금 중주곡 <저녁노래Ⅳ> * 가야금Ⅰ/김일륜 , 가야금Ⅱ/박경선, 가야금Ⅲ/우아련, 가야금Ⅳ/이유림 <저녁노래Ⅴ> * 비올라/오순화(한예종 교수)
가야금 병창 <사랑>, <그렇지요>,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가야금 병창/김일륜 * 25현가야금Ⅰ/박경선, 안희수 * 25현가야금Ⅱ/이유림, 장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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