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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당진 82코스
유곡2교차로-유두골-수문목들-서원천-정곡리배올-
몸추골-구지들-월곡리계치들-다실-월곡마을회관-
대동-부곡리낡은대골-명대들-부곡2리마을회관-
점촌-방축골-필경사&심훈기념관-부곡1리회관-
부곡2교-복운3리한진공원-복운리나눔숲
20240410
1.당진 필경사의 붓으로 밭을 일구는 상록수 정신
두루누비에서는 서해랑길 82코스를, 바다를 메운 땅 위에 오손도손 모여있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코스,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웅장함을 자랑하는 서해대교로 이어지는 코스라고 소개하며, 관광포인트는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직접 설계한 집으로 문학관이 있는 '당진필경사', 서해안 시대의 관문으로, 우리나라의 국력 신장을 상징할 수 있는 랜드마크 '서해대교'라고 안내하고 있다. 주요 경로는 유곡2교차로 - 4.8Km - 정곡리마을 - 3.8Km - 월곡리회관버스정류장 - 3.7Km - 심훈기념관 - 2.0Km - 복운리나눔숲으로, 거리 14.3km, 소요시간 4시간 30분, 난도 쉬움, 시점은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유곡리 1462(유곡2교차로 부근), 종점은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 3-14(복운리나눔숲 남측)이다.
서해랑길 81코스 종점이며 82코스 시작점인 당진시 송산면 유곡리 유곡2교차로에 2주만에 다시 왔다. 2주 전에는 서해랑길 81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하였으며 이번에는 82코스를 정방향으로 탐방한다. 지난 탐방 때는 살구꽃과 매화꽃이 피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4월 초순이 지나 살구꽃과 매화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복사꽃과 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절정기를 지나고 있다. 이번 코스는 충남 당진시 송산면 유곡리, 송악읍 정곡리, 월곡리, 부곡리, 복운리 등 송산면 1개 里 지역과 송악읍 4개 里 지역을 통과한다. 8시 20분 탐앙팀 일행들이 모두 출발한 뒤 길동무와 함께 둘이서 유곡2교차로에서 출발하여 서정로를 따라간다.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산업 단지 배후의 유곡리는 거대한 아파트 빌딩숲을 이루고 있다. 유곡리 아파트 빌딩숲을 헤치고 유두골로 들어서면 여러 공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 석문선착장 해안에 자리한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굴뚝에서는 힘찬 도약의 흰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지만, 공장 지대 안쪽 유곡리 유두골 농가는 고요히 아침빛을 맞이하며 평화롭다. 농가 울타리에 자두꽃이 피어 길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어린 시절 큰 자두나무가 있는 집에서 살았었다. 자두나무에 올라가 덜 익은 자두를 따 시디신 자두를 깨물던 추억을 떠올리니 이가 시리게 느껴진다. 초록의 자두와 앙증한 흰 자두꽃(오얏꽃) 추억에 취하고 시린 이를 감각하며 드넓은 유곡리 들녘으로 나갔다.
송산면 동곡리 성구미포구 남쪽에 자리한 유곡리 간척농지는 예전에 바다였는데 지금은 간척되었다. 서해랑길은 유곡리 간척농지를 북쪽 농로 방향으로 돌아 서원천을 건너도록 하였는데, 길손은 길동무와 함께 간척농지 남쪽으로 돌아 서원천을 따라 내려와 서해랑길과 재회하기로 하였다. 서원천의 유래가 흥미롭다. 송산면 명산리에는 조선시대 유명한 재상 이안눌을 기리는 향사우, 즉 동악서원이 있었는데, 현재는 서원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서원(書院)의 앞부분, 즉 머리 부분에 해당되는 곳을 서원머리(선머리)라 부르는데, 서원머리 마을 앞을 흐르기에 하천 이름을 서원천(書院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원천은 송악읍 가학리 남쪽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흘러 송악읍 석포리와 송산면 명산리, 송악읍 정곡리를 거쳐 송산방조제 1호 밑으로 해서 현대제철 당진공장 가운데를 흘러 아산만으로 유입된다. 현재 서원천은 하천 정비공사가 한창인데 이 서원천을 거슬러 올라 송산면 명산리 지역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서원천 하류를 막은 두 번의 방조제(1974년 신흥개발 방조제와 1991년 송산방조제) 건설로 유곡리와 정곡리 지역은 바다와 차단되어 드넓은 간척농지를 얻게 되었으며, 해안에는 산업단지가 자리하여 당진의 경제 번영을 이룩하고 있다.
송산면 유곡리에서 서원천 다리를 건너 송악읍 정곡리(井谷里)로 넘어가 배올 들녘을 돌아간다. 배올(舟谷)은, 옛날에는 마을 앞에 개(浦)가 있어서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배올 들녘을 돌아나가 정곡리마을회관 입구에서 서해랑길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몸추골과 구루지(구지) 들녘로 이어간다. 정곡리 버스 종점에 이르니 주민들이 농사일에 바쁘다. 아마도 이곳이 몸추골 지역이며 그곳에서 조금 나가면 구루지(구지) 들녘이 펼쳐진다. 구지들녘을 바라보며 정곡로를 따라가면 북동쪽 해안에 송악읍 고대리 고대지구 산업단지의 흰연기들이 솟아오른다. 저곳이 아산만 안섬포구일 것이라 가늠한다.
구지 들녘을 지나 송악읍 정곡리에서 월곡리로 넘어간다. 서해랑길은 담안(談安)길이 갈라지는 석포리 갈림목에서 정곡로를 따라간다. 계치길 갈림목에서 정곡로와 헤어져 오른쪽 계치들을 끼고 계치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이곳이 아마도 월곡리 뒷구지일 것이며 더 올라가면 산골짜기에 있는 곳이 돌고지일 것이라 추정한다. 이 계치길에는 노랑민들레꽃과 흰민들레꽃이 즐비하게 피어 있다. 외래종인 노랑민들레꽃은 많이 보아왔지만 토종인 흰민들레꽃은 참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다. 민들레꽃 주위에는 보랏빛 큰개불풀꽃들이 늘어서 있다. 큰개불알풀꽃이 무리를 지어 피면 마치 땅에 비단을 깔아 놓은 듯하다고 하여 큰지금(地錦)꽃이라고도 불린다.
송악읍 지명을 유래한 송악산(松嶽山)이 월곡리 뒤쪽에 있을 것인데 계치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 출발하여 유구리 수문목들 농로에서는 송악산이 멀리 가늠되었는데 송악산 가까이 오니 송악산이 보이지 않는다. 언덕을 넘어 내려가면 월곡리 동쪽 지역으로 다라실마을이 펼쳐지고 월곡리마을회관이 두 곳이나 있다. 월곡리 다라실 마을에 수선화꽃들이 집들마다 길가마다 피어서 길손을 맞이하여 길손의 고단한 몸에 활기를 준다. 농가에는 진분홍 박태기꽃이 피어 바쁜 농사철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박태기꽃은 밥알을 튀긴 것 같은 자잘한 꽃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서 나즈막한 언덕을 넘으면 공장 지대가 있고 마을이 펼쳐진다. 이곳이 월곡리 대골마을일 것이라 추정한다. 서해랑길은 차량들이 달리는 고잔로 간선도로를 피하여 수령 500년이 넘은 대골마을 은행나무 앞으로 인도한다. 은행나무는 가지치기를 당하여 신음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목의 엄숙함도, 나무 본연의 아름다움도 길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다.
월곡리 대골(대동大洞)마을의 언덕을 넘으면 송악읍 부곡리, 이번 서해랑길 82코스 탐방 포인트인 필경사가 자리한 지역이다. 부곡리(富谷里)는 풍수 지형상 가늘고 긴 지형이 곶(串)을 이룬 모양이어서 '가는곶(細串)'이라 불리다가 '가난고지'로 바뀌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못사는 마을'이란 뜻의 '가난고지'가 싫어, 부자 마을이란 뜻의 ‘부곡(富谷)’으로 지명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부곡리 지역에 아산국가산업단지 부곡지구가 들어서 부곡리는 경제적 부흥을 이루고 있다.
낡은대길을 따라 부곡2리 낡은대골을 지나면 명대들과 점촌골이 보이고 부곡2리 마을회관의 위용이 드높다. 부곩2리 마을회관을 향하여 낡은대길에서 지방도제619호선 송악로를 가로질러 명대길로 들어섰다. 낡은대골이 있어서 낡은대길 도로명이 지어졌다면 명대들이 있어서 명대길 도로명이 지어졌을 것이다. 명대들은 밝은대들, 그렇다면 낡은대길과 호응하여 밝은대길이라고 하면 어떨까? 무식하면 용감한 법, 밝은대길로 명명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명대길은 명대들로 이어지고, 명대길 갈림길에서 서해랑길은 점촌길을 따라 부곡2리 마을회관 앞으로 간다. 점말(店村)은 옛날에 옹기점이 있었다고 하며 점말로 이어지는 길을 점촌길이라 이른다. 부곡2리 마을회관이 자리한 곳은 중터(中基) 지역으로 부곡2리 중앙에 위치하며 옛날 부곡 정미소가 있었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부곡2리 마을회관 앞에서 점촌길을 따라 상록수길로 나가서 방축골 버스정류소 앞이다. 이곳에서 필경사 방향으로 상록수길을 따라가면 곧바로 필경사와 심훈기념관 입구에 이른다.
'필경사(筆耕舍)'는 심훈(沈熏, 1901~1906) 선생의 고택으로, 1932년 서울에서 당진 부곡리로 내려와 작품활동을 하던 중 1934년에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다. 그리고 '필경사(筆耕舍)' 택호는 '붓(筆)으로 농사 짓는(耕) 집(舍) '이란 뜻으로, 조선인들의 마음을 붓으로 논밭 일구듯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심훈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1930년 7월에 발표한 시 작품 '필경(筆耕)'에 택호 '필경사'의 의미가 표현되어 있다.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위에 갈(耕)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犁)요, 유일한 연장이다./ 거치른 산기슭에 한 이랑(畝)의 화전(火田)을 일려면/ 돌뿌리와 나무 등걸에 호미끝이 부러지듯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었던고?// 그러나 파랗고 빨간 잉크는 정맥과 동맥의 피/ 최후의 한 방울까지 종이 위에 그 피를 뿌릴 뿐이다./ 비바람이 험궂다고 역사의 바퀴가 역전할 것인가/ 마지막 심판날을 기약하는 우리의 정성이 굽힐 것인가/ 동지여, 우리는 퇴각을 모르는 전위(前衛)의 투사다.// 「박탈」「아사」「음독」「자살」의 경과보고가 우리의 밥벌이냐?/ 「아연활동(俄然活動」「검거」「송국(送局)」「판결언도」 「5년」「10년」의 스코어를 적는 것이 허구한 날의 직책이란 말이냐/ 창끝같이 철필(鐵筆)촉을 배려 모든 암흑면을 파헤치자./ 샅샅이 파헤쳐 온갖 죄악을 백주에 폭로하자!// 스위치를 제쳤느냐, 윤전기가 돌아가느냐?/ 깊은 밤 맹수의 포효와 같은 굉음과 함께/ 한 시간에도 몇만 장이나 박아 돌리는 활자의 위력은,/ 민중의 맥박을 이어주는 우리의 혈압이다./ 오오 붓을 잡은 자여 위대한 심장의 파수병이여!" - 심훈의 '필경(筆耕)' 전문
심훈기념관은 필경사 오른쪽에 자리한다. 필경사 뜰을 돌아보고 심훈기념관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필경사 뜰에는 소설 '상록수'와 관련한, '주인공 채영신&박동혁과 종', 상록수 모형과 지식인의 의자, 소녀와 심훈 선생 등의 조형물들, 그리고 '그날이 오면'과 '눈밤' 시비들이 조성되어 있다. 필경사와 그 왼쪽 심훈 선생 묘소&묘비, 그리고 오른쪽에 상록수문화관이 자리한다. 소설 '상록수'에서 상록수(常綠樹)는 구체적으로 어떤 나무를 이르는 것일까? 작품을 통하여 4종의 상록수(常綠樹)가 확인된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매미 쓰르라미 소리도 점점 엷어질 무렵에는 회관 앞마당이 턱 어울리도록 두 길 세 길이나 되는 나무가 섰다. 전나무, 향나무, 사철나무(冬青) 같은 겨울에도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는 교목(喬木)만 골라서 '봄이나 가을에 심어야 잘 산다'고 고집을 하는 회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다가 옮겨 심은 것이다." 이 구절에서 전나무, 향나무, 사철나무 등 세 종류의 상록수로 나온다. "동혁이가 동리 어귀로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은 저녁 하늘을 배경 삼고 언덕 위에 우뚝우뚝 서 있는 전나무와 소나무와 향나무들이었다. 회관이 낙성되는 날 그 기쁨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회원들과 함께 파다 심은 상록수(常綠樹)들이 키돋움을 하며 동력을 반기는 듯." 이 구절에서는 전나무, 소나무, 향나무 등 세 종류 상록수가 나온다. 소설의 주인공 박동혁은 상록수를 구체적으로 전나무, 향나무, 사철나무(冬青), 소나무로 꼽고 있다. 필경사 옆에 멋진 향나무가 청청하게 자라고 있다.
현재 필경사는 노후로 인하여 개방하지 않는다. 필경사 오른쪽에 자리한 상록수문화관은 예전에 심훈문학관이었다. '심훈문학관'에 심훈과 관련된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었으나 장소가 협소해 '심훈기념관'을 새로 건립해 2014년 9월 16일에 개관했으며, 심훈문학관은 상록수문화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민들의 문화활동 공간으로 이용되는 것 같다. 대충대충 보면서 심훈기념관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전시실은 심훈의 예술세계로의 여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행의 순서는 <심훈의 일생 - 3.1운동의 참여와 수감 - 좌절과극복 - 언론인 심훈 - 희망의 빛 - 문학인&영화인 - 당진! 농촌에서 희망을 찾다 - 상록수의 시간속으로 - 그날이 오면 - 상록수정신을 잇다> 순이다.
심훈의 대표작 '그날이 오면'을 학창 시절에 읽고서 얼마나 가슴을 떨었던가?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래서 드디어 '그날'이 와서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소름이 끼치고 무서움이 일어난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는 '그날'에 대한 이 격렬한 환상은 언제나 두려운 환희가 된다. 그런데 심훈 선생은 그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장티푸스에 걸려 36세 한창 나이인 1936년 9월 16일 세상을 떴다. 1936년 8월 10일 새벽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기쁜 소식을 듣고 쓴 즉흥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 - 백림 마라톤에 우승한 손, 남 양군에게' 작품이 심훈 선생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장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삼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를 켜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 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오늘 이 땅에서 심훈 선생의 상록수 정신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상록학원, 심훈상록문화제, 상록탑, 심훈상록수기념사업회 활동으로 상록수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고 전시실에 소개되어 있다. 오늘의 민족 상황은 1930년대 민족의 상황과는 다르지만 공통되는 맥락은 있을 것이다. 상록수 정신은 소외된 이웃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기본이다. 그 정신의 바탕에서 시대의 불의와 부패에 저항하고 민족의 평화와 통일, 세계 인류평화의 정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천편일률적이라고 비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천편일률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이것을 투철히 결행하는 것이 진정한 상록수 정신이다. 말은 무성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정치꾼들과는 다른 결행의 정신이 상록수 정신이며 그 정신을 오늘날에도 이어가야 한다. 상록수 정신을 잇고 있다는 단체들이 요식 행위나 실적 보이기식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상록수 정신이 아니다. 당진 필경사의 상록수 정신이 시대와 현장에서 올곧게 결행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탐방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4.7km
전체 소요 시간 : 3시간 41분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유곡리 1462 (유곡2교차로 부근)에 서해랑길 81·82코스 안내도와 82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있다.
서해랑길 82코스 탐방을 출발하며 서해랑길 81·82코스 안내도 앞에서 기념한다.
서해랑길 안내도 왼쪽 뒤 소나무 줄기에 서해랑길 82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걸려 있다. 서해랑길 82코스 거리 14.3km, 소요시간 4시간 30분, 난도 쉬움. 안섬포구, 한진포구, 심훈 필경사, 당진항이 소개되어 있지만, 심훈 필경사만 탐방할 수 있다.
서정로를 따라가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서정2길을 따라 오른쪽 뒤의 해링턴플레이스에듀타운 정문 앞으로 이어간다.
유곡리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버드나뭇재[柳峴]와 버드나뭇재 서북쪽 둔턱에 있는 '두곡(斗谷)'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유곡리(柳谷里)라 하였다. 유곡리는 원래 면천군 창택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창택면 천골리, 유현리, 두곡리, 벌후리, 서정리, 원당리를 병합하여 송산면에 편입되었다. 유곡리는 약 400년전 해주 최씨 14세손 최순형이 무수리로 낙향하면서 그 자손이 유곡리에 터전을 잡았다. 그 뒤에 파평 윤씨 26세손 윤심형이 유곡리로 낙향하였으며, 밀양 박씨 18세손 박재숙이 유곡리로 낙향하였다. 이 세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농업에 종사하며, 자손이 번창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유곡리가 1구, 2구, 3구로 분구되고 해방 후 천곡, 유현, 벌후, 원당, 두억을 유곡리로, 소두억, 오목, 서정을 서정리로 하여 행정리가 바뀌었다. 유곡리는 동남쪽으로 송악읍 정곡리, 북동쪽으로 동곡지, 북쪽으로 서정리, 남쪽으로 도문리, 남서쪽으로 무수리와 인접한 마을이다. 현재 유곡리에는 현대 제철 고로 제철소 건설로 급속도로 산업화가 확산되면서 마을 도처에 원룸촌과 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옛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해링턴플레이스에듀타운 정문 앞을 통과하여 서정2길을 따라간다.
유곡리삽교곱창 음식점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진행한다.
유곡리삽교곱창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나와 곧바로 송산로에서 왼쪽 유두골길로 진입한다.
오른쪽 유두골길을 따라 이어간다. 이곳을 송산면 유곡리 유두골이라 이르는 것 같다.
유두골길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송산면 동곡리 지역의 현대제철이 보인다.
유두골길을 따라가면 정면 중앙 뒤에 산이 솟아 있다. 저 산이 송악읍(松嶽邑) 지명을 유래한 송악산이 맞을 듯하다.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석포리, 중흥리, 정곡리, 월곡리의 경계에 있는 산. 당진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송악읍(松嶽邑) 중앙에 있는 산이다. 송악산(松嶽山)은 대개의 산들이 산맥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는 것과 달리 혼자 솟아 있어 고산(孤山), 즉 ‘외로운 산’이라고도 불렸다. 송악산은 숭학산(崇學山), 숭악산(崇岳山)이라고도 부르며, 숭학사(崇學寺)라는 절이 있어서 ‘숭학산(崇學山)’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숭악산(崇岳山)’, ‘송악산(松岳山)’이 되었다. 옛 숭학사 아래 마을을 절아래[寺下] 마을이라 하는데, 지금도 송악면 중흥리 송악산 아래에 절아래 마을이 있다. 송악읍의 지명이 읍의 중심에 우뚝 솟아 위치한 송악산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한다. 한편 송악산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당시, 이름을 고치면서 ‘송악산’이 되었다. 옛 지도인 『해동 지도』에는 ‘숭학산(崇學山)’으로, 『1872년 지방 지도』에는 ‘숭학산’과 ‘숭학사 구지(崇學寺舊址)’로 기록되어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조선 지형도』에는 당진 기지시리 북동쪽에 ‘송악산(松岳山)’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송악산에 흔적이 남아 있는 송악산성은 석성과 토성의 혼합 형태의 산성이다. 동학 농민 운동 시에는 이곳에서 무려 3,000여 명의 동학군들이 모여 이창구 접주를 중심으로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저술된 『조선 환여 승람』에는 “송악산이 군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옛날에 봉수대가 있었다.”라고 적혀 있으며, 또한 “동학 농민 운동 때에 흙을 갖다가 성을 축성하여 난을 피하였다.”고 쓰여 있지만, 실제 송악산성은 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는 성으로 둘레가 약 250m의 산성이다. 송악산은 주민들의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고, 정상에는 정자가 건설되어 있다. 정자 주변에는 퇴락한 상태의 옛 토석성인 송악산성의 일부가 보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 종주대원들이 수문목들 농로를 가로질러 왼쪽으로 꺾어 진행하고 있다. 중앙의 산은 송악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당진시 송산면 유곡리 수문목들 유두골길을 따라 드넓은 간척농지로 나왔다.
송산면 유곡리 간척농지가 드넓다. 서해랑길은 앞의 갈림목에서 왼쪽으로 돌아서 왼쪽 송전탑이 있는 곳으로 진행한다.
서해랑길은 이곳 농로 갈림목에서 위쪽 방향으로 이어서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농로 갈림목에서 서해랑길 정코스와 헤어져 간척농지 오른쪽의 둑방길을 따라서 중앙의 송전탑 앞으로 간다.
둑방길을 따라서 왼쪽 송전탑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도랑은 수로인 것 같으며, 앞쪽에서 하천 정비공사가 한창이다.
앞쪽의 하천은 서원천인 듯. 하천 정비공사가 한창이다. 왼쪽 뒤 하얀 곤포사일리지가 있는 곳에서 서해랑길과 재회한다.
유곡리 간척농지를 오른쪽으로 돌아와서 서해랑길 정코스 방향을 바라보면 송산면 동곡리 해안의 현대제철소 공장이 보인다.
서해랑길 정코스를 이탈하였다가 이곳에서 서해랑길 정코스와 만나, 앞에 보이는 다리를 건넌다. 이 소하천은 서원천인 듯. 서원천 건너편은 송악읍 정곡리, 송전탑 옆에 345,000볼트의 전류를 송전하여 8m 이내의 접근이 위험하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서원천은 유로연장 3.99㎞, 유역면적 19.55㎢의 지방하천으로, 송악읍 가학리 남쪽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흘러 송악읍 석포리와 송산면 명산리, 송악읍 정곡리를 거쳐 송산방조제 1호 밑으로 해서 현대제철 당진공장 가운데를 흘러 아산만으로 유입된다. 송산면 명산리 서원(썬)머리 마을 앞을 지나 흐르기에 동리 이름을 따서 서원천이라 하였다. 이곳 서원머리 마을에는 조선시대 유명한 재상 이안눌을 기리는 향사우, 즉 동악서원이 있었는데, 현재는 서원터만 남아 있다. - 우현선의 포구이야기
송산면 유곡리에서 다리를 건너 송악읍 정곡리로 넘어간다. 이 도로명은 사둘구지길인데, 사둘구지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다.
정곡리는 서쪽으로 가학리에서 발원한 서원천이 북류하면서 흐르며 마을은 저산성 평야지대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서원천 주변의 남서쪽에 1991년 완공한 송산 간척지인 대규모 간척평야지대와 접한 동쪽 지역에 위치하여 농업진흥지역으로 양질의 쌀이 생산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사둘구지길은 이곳에서 배올길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이어가는데 단축하고자 하면 왼쪽으로 따라가면 된다.
단축하고자 하면 이 길을 따라가면 앞 구릉 뒤쪽에서 서해랑길 탐방로인 정곡로와 만난다.
송악읍 정곡리 배울[舟谷]은 옛 면천군 중흥면 주곡리(舟谷里) 지역으로, 옛날에는 마을 앞에 개가 있어서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담안 서쪽에 있다. 속수셈, 상골, 텃골, 숨박골, 개머리, 도랑골 등의 소부락이 있다. 속수섬은 배울의 북쪽에 있는 속수섬이었으나, 신흥 개발의 간척으로 육지가 되고 주변은 논이다. 상골은 동미의 북쪽 아늑한 야산 밑에 있는 마을로, 앞에 옛 구지 농장이 있었고 증설미[뫼]라는 산이 있다. 텃골은 상골 안 야산 밑에 있다. 좋은 자리가 있어 ‘텃골’이라 한다. 숨박골은 동미의 북쪽 옆에 인접해 있다. 개머리는 상골의 최북단 송산면 동곡리와의 경계에 3호가 거주한다. 옛날에는 바다로 구지섬의 끝에 있다. 도랑골은 증설미 능선 끝 월곡리 경계에 있다. 밧우물[外井]은 옛 면천군 중흥면 외정리(外井里) 지역으로, 담안 북쪽에 있다. 송산면 명산리와 경계에 있으며 3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북쪽은 월곡리, 동쪽으로 송악산 너머 중흥리, 서쪽으로 서원들 건너 송산면 명산리, 서북쪽으로 신흥들 건너 동곡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지방도 619호선에서 약간 벗어나 63m 높이의 야산을 중심으로 북서쪽에 위치하여 교통수단이 불편한 편이다. 정곡리 벌곶뿌리 마을에 2004년부터 친환경 농업인 우렁이 양식장 작목반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배올들녘 오른쪽 배올길을 따라 중앙 뒤에 보이는 정곡리마을회관 방향으로 이어간다.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에 속한 법정리 정곡리(井谷里)는 송악읍 소재지로부터 북방 6㎞ 지점에 있다. 평지가 대부분인 전형적인 벼농사 중심의 순수 농촌 마을이다. 마을 동쪽에 개머리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서쪽으로 서원천이 북류하면서 아산만 쪽으로 흐르고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외정리(外井里)와 주곡리(舟谷里)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정곡리(井谷里)라 하였다. 정곡리는 원래 면천군 중흥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내정리(內井里), 외정리(外井里), 주곡리(舟谷里)를 병합해 정곡리라 하여 당진군 송악면에 편입하였다. 2010년 1월 1일에 송악읍으로 승격되었으며, 2012년 1월 1일에 당진군이 당진시로 승격되어 당진시 송악읍 정곡리로 개편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배올들녘의 '배올길'을 따라와서 '정곡로'로 진입하여 걸어온 배올길을 돌아본다.
오른쪽 배올길을 따라와서 정곡로로 들어왔다. 오른쪽 뒤에 정곡리마을회관이 보인다.
대숲 왼쪽 농가는 폐가이다. 정곡로를 따라 언덕을 넘어간다.
서해랑길을 단축하는 배올길이 왼쪽 구릉 앞에서 정곡로로 나온다.
서해랑길은 정곡로를 따라 언덕을 넘어간다. 오른쪽길은 석포리(石浦里) 가는 길로 이곳에서 1.2km 거리이다.
정곡리 버스종점, 아마도 몸추골마을인 듯, 마을 앞을 통과한다. 농사일이 바쁘다.
정곡리는 담안, 함박섬, 소반창, 몸추골, 망우리, 구루지, 덕대골, 용이안, 벌그버리, 동미, 사둘꾸미, 배울, 속수섬, 상골, 텃골, 숨박골, 개머리, 도랑골, 밧우물의 19개 자연 마을이 있다. 담안(談安)은 정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함박섬, 소반창, 몽추골, 망우리 등의 소부락이 있다. 함박섬은 담안의 남서쪽에 있으며, 병모가지섬이 있었으나 연륙되었다. 소반창은 담안의 서쪽 작은 산골이 끝나는 곳에 있다. 몸추골은 담안의 북서쪽 산골 입구에 있다. 구루지와의 경계에 있다. 망우리는 담안의 남쪽 석포리와의 경계에 있다. 산뿌리가 끝나는 곳에 가옥이 있다. 구루지는 밧우물 안쪽에 있는 마을로 안우물, 내정리라고도 한다. 옛 면천군 중흥면 내정리(內井里) 지역이다. 전에 구루지 나룻터가 있었다. 덕대골, 용이안, 벌그버리, 동미, 사둘꾸지 등의 소부락이 있다. 덕대골은 밧우물의 북동쪽 산 밑에 있다. 예전에 덕대가 있었다. 용이안은 밧우물의 서쪽 들판에 있다. 신흥 개발 간척지 옆에 있는 마을이다. 벌그버리는 동미의 서쪽 신흥 개발 간척지 옆 들판에 있다. 동미는 구루지의 북쪽 구루지고개 너머 산 밑에 있다. 사둘꾸미는 동미의 서쪽 벌그버리 옆 산 밑에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지들녘을 바라보며 정곡로를 따라간다. 맨 뒤쪽에는 송악읍 고대리 안섬포구의 현대제철소 공장인 것 같다.
정곡리는 북쪽은 월곡리, 동쪽은 송악산 너머 중흥리, 서쪽은 서원들 건너 송산면 명산리, 서북쪽은 신흥들 건너 동곡리와 경계하고 있다. 지방도 619호선에서 약간 벗어나 63m 높이의 야산을 중심으로 북서쪽에 위치하여 교통수단이 불편한 편이다. 정곡리 벌곶뿌리 마을에 2004년부터 친환경 농업인 우렁이 양식장 작목반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당진시 송악읍 고대리 안섬포구에 자리한 현대제철소 산업단지를 가늠한다.
정곡로를 따라 송악읍 정곡리에서 송악읍 월곡리로 넘어간다. 서해랑길은 왼쪽 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올라간다.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에 속하는 법정리 월곡리(月谷里)는 송악읍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0㎞ 떨어진 지점에 있는 벼농사 중심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남쪽의 구릉성 지대와 북쪽의 간사지성 평야지가 대부분의 지대를 차지하고 있다. 월곡리는 마을 모양이 반월(半月) 모양이라 다라실[月谷]로 불렸으며, '다라'는 달을, '실'은 실[谷: 마을]을 뜻하므로 월곡(月谷)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월곡리는 원래 면천군 중흥면(中興面) 지역으로 다라실 또는 월곡리(月谷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신북면(新北面)의 대동(大洞), 월곡리(月谷里), 대대리(大垈里) 각 일부를 병합해 원래대로 월곡리(月谷里)라 하여 당진군 송악면에 편입되었다. 2010년 1월 1일 송악면이 송악읍으로 승격되었으며, 2012년 1월 1일 당진군이 당진시로 승격되어 당진시 송악읍 월곡리로 개편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길은 담안길로 이곳에서 석포리 1.6km 거리이다. 서해랑길은 왼쪽 정곡로를 따라가다가 왼쪽 뒤 갈림길에서 정곡로와 헤어져 계치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계치길에 토종 민들레인 흰민들레꽃이 피어 있다. 주위의 보랏빛 앙증스런 꽃은 큰개불풀풀꽃(봄까치꽃, 큰地錦꽃)이다.
정곡로를 따라오다가 오른쪽 뒤 솔숲 앞에서 계치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다. 왼쪽 들녘을 개치들이라 이르며 오른쪽 지역을 뒷구지(後串)라 이르는 것 같다.
월곡리 뒷구지[後串]는 다라실 뒤쪽 바닷가에 있는 마을로 부락 지형이 곶(串) 모양이었다. '곶이'가 '고지'로, 또 '구지'로 변했다. 현재는 간척이 되어서 간사지가 논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계치길을 따라 계속 올라간다. 송악산은 앞쪽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돌고지마을이라고 추정한다. "돌고지는 다라실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돌이 곶을 이루었다. '돌곶이'가 '돌고지'로 변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계치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와서 오른쪽 계치길을 따라간다.
계치길을 따라 언덕에서 송악읍 월곡리 병악골과 다라실을 내려본다. 월곡리마을을 오른쪽으로 돌아 왼쪽으로 나간다.
다라실은 옛 면천군 중흥면 월곡리 지역으로, 원래의 '다라실' 지역을 말한다. 달아실, 다래실이라고도 부른다. 월곡리의 중심 마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계치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오는데 주택 입구에 목장승과 솟대가 조성되어 있다.
맨 오른쪽 뒤 장승과 솟대가 있는 곳에서 월곡리마을 입구를 돌아 월곡로로 나왔다. 맨 오른쪽 앞에 월곡리마을회관이 있다.
월곡리마을회관을 거쳐 월곡로를 따라 언덕을 내려오면 월곡리 들녘과 공장 지대가 나타난다. 이곳이 대골 지역인 듯.
월곡리는 송악산 능선이 북쪽으로 길게 늘어져서 마을 중심을 지나 고합농장에 이르러 마을을 동서로 나눈다. 가학리에서 발원한 서원천이 마을의 북서쪽을 지나 현대제철 공단 중앙을 통과하여 아산만으로 유입되며, 주변의 간석지를 개척하여 미곡 생산의 곡창 지대를 이루고 있다. 월곡리에는 다라실, 대골, 돌고지, 뒷구지의 4개 자연 마을이 있다. 다라실은 옛 면천군 중흥면 월곡리 지역으로, 원래의 '다라실' 지역을 말한다. 달아실, 다래실이라고도 부른다. 월곡리의 중심 마을이다. 대골[大洞]은 다라실 북쪽에 있는 큰 마을이며 옛 신북면 대동 지역이다. 대동, 대곡 등으로도 불린다. 600여 년 된 보호수인 은행나무가 있다. 돌고지는 다라실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돌이 곶을 이루었다. '돌곶이'가 '돌고지'로 변했다. 뒷구지[後串]는 다라실 뒤쪽 바닷가에 있는 마을로 부락 지형이 곶(串) 모양이었다. '곶이'가 '고지'로, 또 '구지'로 변했다. 현재는 간척이 되어서 간사지가 논이 되었다. 북쪽은 고대리, 동쪽은 한진리, 남쪽은 중흥리, 동남쪽은 부곡리와 오곡리, 서쪽은 정곡리, 남서쪽은 석포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송산 방조제 축조 이전인 1977년까지는 리아스식 해안으로 어업이 번창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뒤 월곡리마을회관을 거쳐 언덕을 넘어 공장 지대 앞을 통과하였다.
오른쪽 월곡로를 따라와서 송악농협미곡종합처리장 입구에서 고잔로로 진입하여 뒤돌아본다.
오른쪽 점보공업사 앞 고잔로를 따라 직진한다.
송악읍 월곡리 고잔로 지선 갈림길에서 간선 고잔로와 헤어져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뒤쪽은 송악읍 고대리 지역이다.
고잔로 간선도로에서 고잔로 136번길을 따라 이어간다.
오른쪽 물류창고 앞 고잔로 136번길을 따라간다.
왼쪽 뒤 점보공업사를 거쳐 고잔로 간선도로에서 오른쪽 고잔로 136번길을 따라오고 있다.
송악읍 월곡리 대골마을인데 대동(大洞), 대곡(大谷)으로도 불린다. 600여 년 된 보호수인 은행나무가 있다. 서해랑길은 맨 오른쪽 뒤 언덕으로 올라가 송악읍 부곡리로 넘어간다.
지정일자 1982년 10월 15일, 수령 500년, 나무 높이 25m, 그렇다면 현재 수령은 544년이 된다.
고잔로 136번길을 따라 대골마을 앞 수령 500년 은행나무를 거쳐 언덕길에서 뒤돌아본다.
송악읍 월곡리에서 언덕을 넘어 송악읍 부곡리로 넘어왔다. 고잔로를 횡단하여 건너편 낡은대길로 진입한다. 이곳이 중터(中基) 서쪽에 있는 낡은대골 지역으로, 비산비야 지역으로, 옛날에는 물이 건조했다고 한다.
충남 당진시 송악읍에 속한 법정리 부곡리(富谷里)는 큰봉[65m]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산촌 마을이었다. 예전에는 마을이 야산지로 이루어진 산간 마을이었으며 일부 과수원이 있었다. 지금은 부곡 공단이 개발되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심훈의 고향 필경사가 유명하다. 1935년에 개설한 619번 지방도가 기지시리를 경유하여 당진으로 통한다. 부곡리는 풍수 지형상 '가는 곳'[세곳]이 '가난고지'로 되었는데 '못사는 마을'이란 뜻이 싫어, 부자 마을이란 뜻의 ‘부곡(富谷)’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원래 '가는 곳'은 지형이 좌측은 '영천 개', 우측은 '명대 개'를 끼고 송곳처럼 가늘고 긴 능선 뿌리가 중터에서 구례[복운리]까지 약 2㎞ 정도 곶을 이루어 붙여진 지명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낡은대길을 따라 송악로로 나간다. 송악냉동이 송악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낡은대길에서 송악로 부곡2리 버스정류소 앞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뒤 들녘을 명대들이라 이르는 듯.
부곡리는 본래 홍주군 신북면(新北面)의 지역으로 부곡리(富谷里)라 하였는데,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면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북면 소대리(小大里)와 대동(大洞), 오사리(梧寺里)의 각 일부를 병합해 부곡리라 하여 당진군 송악면에 편입되었다. 2010년 1월 1일 송악면이 송악읍으로 승격하였으며. 2012년 1월 1일 당진군이 당진시로 승격되어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로 개편되었다. 1900년대 예산 광시면 가덕리 사람 이순득을 선두로 부곡리 산54번지에 가마터를 만들고 옹기를 만들어 팔면서 합덕 천주 교회를 다녀서 신앙생활을 한것이 계기가 되어 점촌이 형성되었는데, 이 점촌 마을이 송악면 최초의 천주교 발상지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송악로에서 오른쪽 부곡2리 명대길로 진입한다. 오른쪽에 부곡2리마을회관이 보인다. 왼쪽 뒤가 점촌골인 듯.
낡은대길에서 부곡2리 버스정류소가 있는 송악로로 나와서 부곡2리 명대길을 따라왔다. 왼쪽 들녘이 명대들인 듯.
명대길과 갈라져 점촌길을 따라 부곡2리마을회관 앞으로 이어간다. 이 뒤쪽 지역이 점촌골인 듯.
점말[店村]은 즘말이라고도 불리는데, 안성댕이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옹기점이 있었다고 전한다. 안성댕이는 중터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에 안성당이 있었다고 한다. 낡근대골은 날근대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중터 서쪽에 있는 마을로 비산 비야지이며, 옛날에는 물이 건조했다고 전한다. 중터[中基]는 부곡리 서쪽, 즉 2구 가운데에 있는 마을로, 옛날 부곡 정미소가 있었고, 현재 마을 회관이 있다. 부곡리는 북쪽은 한진리, 동쪽은 부곡 공단에 접한 아산만에, 동남쪽은 복운리, 남쪽은 명대들판 건너 옥고리, 서쪽은 고대리와 월곡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1995년에 아산만 바닷가에 부곡 공단이 크게 조성되어 큰봉을 비롯한 소모리산, 닭의 머리산, 원내들 등이 사라지고 현재는 수십개의 공장들이 입주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점촌길을 따라 상록수길로 나가 필경사로 이어간다.
점촌길을 따라가다가 앞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점촌길을 따라간다. 오른쪽 뒤에 상록수교회가 보인다.
왼쪽의 점촌길을 따라 올라가면 상록수길과 만난다.
점촌길에서 상록수길로 나오면 건너편에 방축골 버스정류소가 있다. 왼쪽 뒤에 상록수교회, 그 뒤에 상록초등학교가 있다.
원래 부곡리 서남쪽은 야산간 지대로 농사와 과수원, 동북쪽은 아산만과 접하여 소규모 어업을 해 왔다. 현재는 갯벌의 공유 수면과 일부 야산 등을 개발하여 공단이 조성되었다. 상록초등학교 근처를 옛부터 백토재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장석이 산출되어 1952년부터 한진 장석이 광업 허가를 받아 도자기 원료로 공급하기 시작하였으며, 1991년 삼정 산업이 인수하여 영업을 하다가 1995년 경제성이 없어 폐업했다. 부곡리 방축골[防築谷]은 상록 초등학교 뒤쪽 백토재 남쪽의 솔밭 안에 있는 마을로 전에 방죽이 있었다고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상록초등학교와는 반대 방향의 심훈기념관 방향으로 상록수길을 따라간다.
사라진 부곡교회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곳이 보도막골인 듯.
상록수길을 따라가면 왼쪽에 필경사와 심훈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앞에 심훈기념관 안내도, 당진 필경사 설명&안내도, 당진시 관광안내도, 그 왼쪽에 조형물, 왼쪽 뒤에 심훈묘비와 필경사, 오른쪽 뒤에 상록수문화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과 박동혁 그리고 종'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 한 치(寸) 두 치 마당 가득 쌓이는 밤엔/ 생각이 길어서 한 자(尺)외다, 한 길(丈)이외다./ 편편(片片)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편지나 써서 온 세상에 뿌렸으면 합니다.
왼쪽에 상록수와 지식인의 의자, 소녀와 심훈 선생 조형물, 왼쪽 뒤에 심훈 선생 묘소&묘비와 필경사, 오른쪽에 상록수회관과 그 앞에 1993년 당진시에서 세운 '그날이 오면' 시비가 있다.
당진필경사는 1997년 12월 23일 충정남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정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어 당진시에서 상록수 문화관, 심훈 기념관과 함께 보존·관리하고 있다. 당진필경사는 심훈이 충청남도 당진으로 내려와 작품 창작에 전념하던 중에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일대에서 농촌 계몽 운동에 헌신하고 있던 맏조카 심재영과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에서 농촌 교육에 헌신하다 과로로 숨진 최용신을 모델로 하여 쓴 일제 강점기 농촌 계몽 소설의 대표작 『상록수』를 탈고한 심훈 문학의 산실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앞에는 심훈 선생과 소녀, 뒤에는 상록수와 지식인의 의자가 조성되어서, '필경사(筆耕舍)'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필경사(筆耕舍)'란 '원고지에 농사 짓는 집'이란 뜻으로, 조선인들의 마음을 붓으로 논밭 일구듯 표현하고자 하는 심훈의 의지가 담겨 있다.
왼쪽에 독립유공자 작가 심훈 선생의 묘소와 묘비, 오른쪽에 심훈 선생의 집 '필경사(筆耕舍)'가 있다.
당진필경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초가집이어서 외관으로 보면 전통적인 '一' 자형 초가집 모양을 하고 있으나 일본식 도시 주택의 특징도 함께 지니고 있다. 당진필경사는 동남향으로 자리 잡아 집 앞으로 넓은 들이, 동북쪽으로는 서해가 인접해 있다. 당진필경사 마당 앞에는 경기도 안성에서 이장한 심훈의 묘소와 상록수 문화관, 심훈 기념관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당진필경사에는 심훈이 사망한 이듬해부터 인근에 살던 김태룡 장로 가족이 살다가 한국 전쟁 후에는 피난민 황보은도가 살았는데, 1951년 권유희[심훈의 둘째 형인 목사 심명섭의 부인]가 추진해 이용남, 황보은도, 강도원, 이해용 등이 처음으로 당진필경사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기도처가 설립되었다. 이후 1972년까지 14대 담임 전도사가 파견되면서 당진필경사는 상록수교회[부곡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1954년 당진필경사는 부곡 감리교회에 매매되었다가 1970년 심훈의 맏조카 심재영이 당진필경사를 다시 매입하였고, 이후 당진시에 희사하여 현재 당진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택 내부 시설의 노후로 인하여 개방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게시되어 있다.
주택 전면을 바라보고 우측에서 2번째 간을 현관으로 하고 현관을 들어서면 우측에 전후 2칸을 터서 큰 방을 만들어 이 방을 집필실로 사용하였다. 현관을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횡으로 2칸 반을 터서 마루방을 두었다. 마루방 뒤편 한쪽은 안방이고 다른 한쪽은 현관 뒤쪽 한 칸과 합쳐 부엌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2칸의 부엌 중 한 칸은 상부에 다락을 두고 안방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 다락은 마루방과도 통하도록 문을 내었다. 주택의 좌측에는 앞뒤로 길게 반 칸을 나누어 화장실과 욕실을 배치하였는데 화장실과 욕실은 안방을 통해 드나들도록 하였다. 욕실에는 커다란 무쇠 가마솥을 걸고 밑에서 불을 지필 수 있도록 아궁이를 만들었다. 당진필경사의 전면과 측면에는 유리창을 달아 채광을 좋게 하였고, 마루방과 집필실 창문 바로 아래에 작은 목조 베란다를 만들어 화분 등을 올려놓을 수 있게 하는 섬세함도 보인다. 현재 당진필경사 내부에는 심훈이 읽었던 책, 등잔, 이불과 옷가지, 부엌살림 일부와 아궁이, 욕조 등이 재연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당진 필경사, 충청남도 기념물 제107호. 필경사(筆耕舍)는 심훈(沈熏, 1901~1906) 선생이 1932년 서울에서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당진 부곡리로 내려와 작품활동을 하던 중 1934년에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다. '필경'은 심훈 선생의 1930년 7월 작품으로, 조선인들의 마음을 붓으로 논·밭을 일구듯 표현하고자 하는 심훈의 의지와 함께 자신의 집을 '필경사'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필경사는 대지 661㎡에 건평 62㎡인 아담한 팔작지붕의 목조집이며, "ㅡ"자형 초가지붕 아래 목조기둥으로 세워져 있으며 벽체는 황토를 짓이겨 바른 예전 농촌의 전형적인 초가이다. 필경사 내부에는 심훈 선생이 읽었던 책들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고 등불과 옷가지, 부엌의 아궁이, 화장실까지 당시의 모습을 재연해 놓았다. 심훈 선생은 민족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지닌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필경사에서 1935년 농촌 계몽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상록수』를 집필하였다.
필경사 앞에서 뜰 전체를 조망했다. 왼쪽에 심훈기념관이 보인다.
심훈 선생 부조상(浮彫像)과 그 뒤에 상록수문화관이 있다. 상록수문화관에서 전시하던 심훈 선생 유품 등을 새로 지은 심훈기념관으로 옮기고 이곳은 주민들의 문화활동 공간으로 이용되는 것 같다. 상록수문화관 앞을 거쳐 심훈기념관으로 내려간다.
심훈이 『상록수』를 집필한 필경사 바로 옆에는 '심훈문학관'이 있다. '심훈문학관'에도 심훈과 관련된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었으나 장소가 협소해 전시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따라 당진시는 '심훈문학관'에서 동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심훈기념관'을 건립해 2014년 9월 16일에 개관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벽에 '상록수'의 문구 "오오··· 너희들은 기나긴 겨울에 그 눈바람을 맞구두 싱싱허구나! 저렇게 시푸르구나!"가적혀 있다.
심훈의 예술세계로의 여행 관람동선은 <심훈의 일생 - 3.1운동의 참여와 수감 - 좌절과극복 - 언론인 심훈 - 희망의 빛 - 문학인&영화인 - 당진! 농촌에서 희망을 찾다 - 상록수의 시간속으로 - 그날이 오면 - 상록수정신을 잇다> 순이다. '그날이 오면' 공간에는 '오오, 조선의 남아여! - 백림 마라톤에 우승한 손, 남 양군에게' 시 작품과 관련 사항이 게시되어 있다.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장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삼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를 켜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 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1936년 8월 10일 새벽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기쁜 소식을 듣고 쓴 즉흥시로 이 시는 심훈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심훈은 영화배우와 감독, 평론가로서 활약한 영화인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의 이수일 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발표하였고, 식민지 현실을 다룬 '먼동이 틀 때'를 각색, 감독하여 1927년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아산만과 송악산이/ 마르고 닳도록/ 정들고 아름다운/ 우리 한곡 만세// 우리들은 가난하고/힘은 아직 약하나/ 송백같이 청청하고/ 바위처럼 버티네// 한줌 흙도 움켜쥐고/ 놓치지 말아라/ 이 목숨이 끊기도록/ 북돋우며 나가세// (후렴) 비바람이 험궂고/ 물결은 사나워도/ 피와 땀을 흘려 가며/ 우리 고향 지키세// 애향가, 심훈선생이 공동경작회원들에게 만들어 준 곡(애국가 곡조)
소설 '상록수'의 실제 인물 심재영과 최용신, 심재영의 공동경작회와 최용신의 샘골부녀회 활동을 소개한다.
심훈의 작품들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시스템과 심훈의 상록수 정신을 잇는 노력이 마지막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심훈의 시는 정신사적 측면에서는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중국형 독립운동가들에 맥락이 닿아 있으며, 투사적인 면을 지니면서도 예술가로서의 품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만해나 상화와 연결된다. 또한 그의 시가 전투적 지성과 예언자적 지성을 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30년대 후반 육사의 시로 연결됨으로써 이 땅 저항시상에 우뚝한 봉우리로서 자리한다.
- 김재홍 문학평론가 한국현대시인연구』 1권 138p
심훈의 예술세계로의 여행을 마치고 입구로 나왔다. 입구 벽에 1층 전시실 공간 구성이 게시되어 있고, 그 왼쪽에 이석훈 화백이 1936년에 그린 심훈(1901~1936)의 얼굴, 그 아래 심훈에 대한 평가가 적혀 있다.
이석훈의 '작가인상기[중앙 1936년 5월호]' 중 심훈의 얼굴. 저항의식과 예언자적 지성, 민중적 생명력을 문학으로 표현하다 : 천부적인 예술가 기질과 진보주의적 정열을 함께 지닌 시인, 영화예술인, 소설가, 언론인으로서 온 몸으로 항일 저항운동을 펼치며, 현실과 민족의식을 작품에 담았다. 대표작으로는 「상록수』와 『동방의 애인」, 『영원의 미소」, 「직녀성」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 시 「그 날이 오면」, 「통곡 속에서」 등이 있다.
심훈기념관 1층 전시실 관람을 마치고 기념관 2층 옥상으로 올라간다.
심훈기념관 2층 옥상에 '그날이 오면' 시 작품과 심훈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 뒤 벽에는 '7월의 바다'가 게시되어 있다. 뒤쪽에 아산국가산업단지 부곡지구 공장들이 솟아 있으며, 그 뒤쪽에 상록수공원, 그 왼쪽에 채영신과 박동혁이 만나는 한진포구가 있다.
심훈기념관 옥상에서 내려와 기념관 입구를 바라보니 기념관 입구의 조형물은 '필경(筆耕)'의 붓 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심훈은 일제 강점기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이었다. 심훈의 대표적 농촌 계몽 소설인 『상록수』를 집필한 곳이 현재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길 97에 있는 필경사이다. 심훈이 『상록수』를 집필한 필경사 바로 옆에는 '심훈문학관'이 있다. 심훈문학관에도 심훈과 관련된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었으나 장소기 협소해 전시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따라 당진시는 심훈 문학관에서 동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심훈기념관을 건립해 2014년 9월 16일에 개관했다. 일제 강점기에 쓰여진 심훈의 농촌 계몽 소설 『상록수』를 집필한 곳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심훈의 항일 및 계몽 정신을 후세에 선양하기 위해 '심훈기념관'이라 명명했다. 심훈기념관은 심훈 문학관의 협소한 전시 공간을 해결하는 한편 심훈가의 후손 및 여러 관계자들이 기증, 위탁한 유물들, 특히 심훈의 3남 심재호가 수집해 놓은 심훈의 유물 일부와 원고의 영인본을 전시하게 되었다. 또 『상록수』의 남자 주인공 박동혁의 모델 심재영과 관련된 공동경작 회원 기념 사진 등의 자료도 전시되어 심훈에 대해 체계적이며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심훈기념관은 소장 자료와 유물의 전시·관람 업무, 소장품의 보관·진열·수리·모사·복원, 심훈의 생애 및 업적에 관한 자료의 수집·조사·연구 등을 맡고 있다. 또 심훈의 문학성 조사·연구 및 문학에 관한 교육 운영도 주요 업무의 하나다. 2017년 현재, 심훈가의 후손 및 여러 관계자들이 기증, 위탁한 유물들이 '민족 의식의 태동', '저항의 불꽃', '희망의 빛', '그날이 오면...'이란 주제로 기승전결 형식으로 전시되어 있다. 주변에 심훈이 상록수를 집필한 필경사와 상록수의 주인공인 박동혁의 모델인 심재영의 고택, 여주인공 채영신이 박동혁을 찾아왔던 한진포구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필경사와 심훈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상록수길을 따라오면 부곡1리 경로당&마을회관이 왼쪽에 있다.
부곡리는 북쪽은 한진리, 동쪽은 부곡 공단에 접한 아산만에, 동남쪽은 복운리, 남쪽은 명대들판 건너 옥고리, 서쪽은 고대리와 월곡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1995년에 아산만 바닷가에 부곡 공단이 크게 조성되어 큰봉을 비롯한 소모리산, 닭의 머리산, 원내들 등이 사라지고 현재는 수십개의 공장들이 입주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부곡1리 마을회관 앞에 애향가비가 세워져 있다. 애향가는 심훈선생의 '애향가'를 조금 고쳐지었다.
아산만과 송악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부곡 만세/ 비바람이 험궂고 물결은 사나워도/ 피와 땀을 흘려가며 우리 고향 지기세// 한줌 흙도 움켜쥐고 놓치지 말아라/ 이 목숨이 끊기도록 북돋우며 나가자/ 비바람이 험궂고 물결은 사나워도/ 피와 땀을 흘려가며 우리 고향 지기세// 우리들은 가난하고 설움은 깊으나/ 송백같이 청청하고 바위처럼 버티세/ 비바람이 험궂고 물결은 사나워도/ 피와 땀을 흘려가며 우리고향 지키세//
부곡1리 자연부락 이름 : 가는곶이, 짐막골, 큰말, 보두막골, 방축골, 영철미, 잿무당살이, 영안, 닭기머리, 쇠머리산, 소당골, 새말
2018년 10월 31일
부곡1리 마을회관 앞을 거쳐 상록수길을 계속 따라오다가 짚막골 버스정류소에서 서해랑길은 왼쪽 길을 따라가서 상록수길로 나온다. 오른쪽 상록수길을 따라 진행해도 된다.
오른쪽 SMC서울마린 당진본사 옆을 통과하여 다시 왼쪽의 상록수길로 나왔다.
서해랑길은 상록수길 간선도로에서 왼쪽 상록수길 지선으로 진입한다.
송악읍 부곡리에서 부곡2교를 건너 송악읍 복운리로 넘어간다.
부곡2교를 건너 송악신도시 복운3리로 들어왔다. 부곡교차로 부곡교 옆에 복운1리(伏雲1里) 방향 표석이 세워져 있다.
충남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는 송악읍 소재지로부터 동쪽 11㎞ 지점에 있으며, 동쪽의 대부분 지역이 간척평야 지대인 농촌마을이다. 북쪽 부곡공단, 남쪽에는 대규모 이주단지가 형성되어 동광아파트, 미소지움아파트 등 신도시를 이루고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복포리(伏浦里)와 상운리(上雲里)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복운리(伏雲里)라 하였다. 복운리는 면천군 중흥면(中興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운리, 하운리(下雲里), 복포리와 초천면(草川面)의 대조동(大鳥洞), 고도원리(古桃源里)의 각 일부를 병합해 복운리(伏雲里)라 하여 당진군 송악면에 편입되었다. 2010년 1월 1일에 송악면이 송악읍, 2012년 1월 1일 당진군이 당진시로 승격되어 당진시 송악읍 복운리로 개편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부곡교차로에서 신복운로 횡단보도를 건너 중앙 뒤에 보이는 국도제38호선 북부산업로 육교를 건넌다.
북부산업로 육교 위에서 부곡교차로와 부곡교를 바라본다. 도로 왼쪽은 복운2리 한진공원이다.
국도제38호선 북부산업로 육교에서 아산방향을 바라본다. 도로 왼쪽은 아산국가산업단지 부곡지구이며 앞에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서해랑길 82코스 종점은 서해안고속도로 앞 북부산업로 왼쪽에 있는 복운리나눔숲 입구이다.
복운리는 동쪽으로 서해와 가까이 인접해 있으며, 마을 북서쪽에는 큰개원들, 굿두믈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복운리에는 복개, 우덩밧골, 물양가리, 강그련, 샘골, 활터, 승저골, 구레, 오릿골, 광대동, 굴머니, 상운, 장두원, 선재, 구억말, 한샘, 양학굴, 하운, 솔째, 구두물, 막돈, 뫼뿌리, 행운, 상나무백이, 큰마당재, 구뜸, 뒷골의 27개 자연 마을이 있다. 복개[伏浦]는 옛 면천군 중흥면 복포리(伏浦里) 지역으로, 하운 동쪽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이다. 복포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곳에서 중국과 서울로 곡식을 실어 날랐다. 구레는 송악읍 동북쪽 끝, 즉 복운 1구 동북쪽 끝 아산만 바닷가에 있는 마을로 행담섬이 마주 보인다. 구례산 밑에 있는 마을로 한나루 가던 사람들이 머물던 원(院) 터가 있었다. 복운리는 북쪽으로는 부곡리와 오곡리, 서쪽으로는 중흥리, 남쪽으로는 도원리, 동쪽으로는 초대천 주변의 신평면과 접하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고 송악 IC가 개설되어 있다. 복운리는 원래 곶으로 리아스식 해안선을 이루며 갯벌이 많아서 해산물이 풍부하여 대부분 어업에 종사했다. 1950년대부터 간척 사업이 시작되어 한진염전, 광양염전 등 염전이 많았다. 1976년 제일 농장[해바라기 농장] 완공으로 수리 시설과 경지 정리가 되어서 송악 최대의 미곡 생산지가 되었다. 한진염전 터는 부곡공단의 주민을 이주시켜 2005년부터 도시가 조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북부산업로의 육교를 건너 서해안고속도로 방향으로 가다가 뒤돌아 본다. 도로 왼쪽 지역은 부곡3리 한진공원이다.
북부산업로 위를 가로지르는 서해안고속도로 방향으로 국도제38호선 북부산업로를 따라간다.
오른쪽 북부산업로가 서해안고속도로 아래를 지난다. 부곡공단로 횡단보도를 건너 복운리나눔숲 입구의 서해랑길 82·83코스 안내도 앞으로 간다. 왼쪽으로 가면 송악읍 동북쪽 끝, 아산만 바닷가에 있는 구레(구래)마을로 행담섬이 마주 보인다고 한다.
서해랑길 82·83코스 안내도와 함께 서해랑길 82코스 탐방 종주를 기념한다.
거리 14.3km, 소요시간 4시간 30분, 난도 쉬움. 탐방 결과 14.7km, 3시간 41분이 걸렸다. 심훈기념관 탐방이 미진한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