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소설의 대표 작가라 할 수 있는
현진건의 작품 <B 사감과 러브레터>는
아마도 문학지나 교과서를 통하여
누구나 접해봤고 읽어봤을 것이다.
봉건시대가 서서히 저물어 가면서
근대 사상과 문물이 한창 밀려들던
20년 대의 여학교 기숙사를 배경으로
이 기숙사에서 사감을 맡고 있는
B는 한 마디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남자 혐오증에 걸린 환자처럼
남자는 믿지 못할 것,
여자를 잡아먹는 마귀,
연애가 신성하다는 것은 헛소리고
모두 악마가 지어낸 소리라며
여학생들을 닦달해 가며
B사감은 마치 자신이
순결의 수호신이라도 된 양
두꺼운 돋보기 너머
매섭기 짝이 없는 눈초리로
학생들의 행실을 낱낱이 감시하였다.
그녀가 죽기 살기로 매달리고 있는 건
각종 러브 레터들의 원천 봉쇄와
모든 남자들의 면회 금지.
그게 아버지나 오빠라 할지라도
남자다 하면 B사감은 얄짤 없이
무조건 다 잘라버리고 말았는데
이런 걸 하려고 이 땅에 태어난 건가?
싶을 정도의 사명감을 넘어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여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해가며
호소를 해도 소용없었고
교장까지 나서서 뜯어말렸지만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논스톱 질주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달짝지근한 사랑의 고백이 담긴
편지가 발견되기라도 할라치면
해당 학생은 단단히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녀는 학생을 불러 세워놓고
손발까지 발발 떨면서
문제의 러브레터를 구겨 쥐었다가
말아 쥐었다가 해가며
분에 겨워 언성을 높이는가 하면
급기야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어린 양을 구해 달라는 기도를 하곤 했다.
(기독교인 조롱 같아서 슬픔ㅠ)
바들거리는 불쌍한 어린 양을
만들고 있는 건
정작 본인이면서 말이다.
노처녀 히스테리인가?
B사감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그녀는 사십이 다 되어가는 노처녀로
완고한 독신주의자에 찰진 야소꾼이고
얼굴은 주근깨투성이에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주름 잡힌 이마는 훌렁 벗겨져 있고
숱이 적어서 엉성하게 빗어넘긴
머리꼬리가 뒤통수에 빈약하게
달라붙은 모습이 벌써 늙어가는
자취를 감출 길이 없었으며
뾰족한 입을 앙다물고 쌀쌀한 눈으로
노려볼 때엔 보는 이로 하여금
몸서리를 치게 할 만큼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우리의 B사감은 너무나 고상한
정신을 가지고 있던 나머지
이토록 엄격하게 굴었던 걸까?
그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의
결말에서 쇼킹한 반전과 함께
보여주고 있는데
그 반전이 거의 식스센스 급이다.
한밤중이 되면 기숙사 어딘가에서
난데없는 속살거림과 깔깔대는 웃음이
들려오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연히 잠에서 깨어 이 목소리를 들은
여학생 세 명은 이 수상한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곳을 쫓아 따라가 보다가
그만 기겁할 광경을 목격해 버리는데
그 소리는 다름 아닌 사감실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이제 그만해요, 키스가 너무 길잖아요.
행여 남이 보면 어떡해요."
"길수록 더욱 좋지 않아요?
나는 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키스를 한다고 해도 결코 길다고
말하진 못하겠습니다."
간드러지는 여자의 말과
피를 뿜듯 내뿜어 내는 남자의 말
모두 한 사람의 모노 드라마 연기였다.
학생들에게 압수한 러브레터를 대본 삼아
안경까지 저쪽으로 벗어던지고
남녀 목소리를 번갈아 내가면서
남자에게 고백받는 장면을 상황극으로
혼신을 다하여 몰입 중인 B사감.
세 명의 학생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놀란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한 명은 황당하다고 했고
또 한 명은 미친 거 아니냐고 했으며
마지막 한 명은 사감이 불쌍하다면서
어느새 눈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조용히 씻어내고 있었다.
낮과 밤의 모습이 극과 극으로
달랐던 B사감이 치를 떨며 혐오했던
러브 레터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받고 싶었던 것.
자신 안의 본능적인 갈망과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B사감은 엄격함의 탈을 뒤집어 썼지만
끝내 그 강렬한 욕망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억제하면 억제할수록
억눌렸던 만큼 용수철처럼
튕겨나오는 자신의 감정을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을 틈타
마음껏 발산해 내야만 했다.
그러한 B사감에 대해 연민을 보이며
눈물을 훔치는 마지막 학생의
인간적인 동정이 작가의 시선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우리 모두 B사감의 모습이
한 켠에 있을 테니까.
위선과 허세로 나 자신을 감추고
다른 이들 앞에서 다른 얼굴로
살아가는 모습이 나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카페 게시글
용띠들동행
반전의 묘미-B 사감과 러브레터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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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23:03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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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비님
실감나게 읽으며
추억을 소환해 봅니다~
읽은지 수십 년은 된 것 같네요 ㅎㅎ
독후감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참 잘 쓰시네요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