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12제자는 아니다.
유다 이스카리웃 대신으로 초대교회에서 사도로 뽑은 분이다.
그 과정은 사도행전 1장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12사도를 선택한 것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따라서 스승을 떠난 유다의 자리를 채우는 것은 시급한 일이었다.
작업은 베드로의 주도 아래 시작되었고 다음 조건이 제시되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주님께서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1.21-22)"
이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두 사람이 선별되었다.
요셉 바르사빠스와 마티아였다.
사도들은 기도 후 제비뽑기를 통해 마티아를 선택했다.
유다인의 풍습을 따른 것이다.
구약의 대사제는 속죄일이 되면 숫염소 두 마리를 제단 앞에 세웠다.
그리고는 제비뽑기를 통해 선택된 염소를 속죄 제물로 바쳤던 것이다
(레위 16.7-9).
이렇게 볼 때 마티아는 공생활 초기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녔음을 알 수 있다.
다는 제자들과 함께 가르침을 받았고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도 목격했던 분이다.
따라서 열 두 사도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측근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짝지어 파견한 72제자 가운데 1명이었다고 한다
(루카 10.1-2).
마티아는 사도 단에 합류한 뒤 유다 지방에서 선교하다 북쪽으로 나아갔다.
말년에는 콜키스 지방에서 선교하다 그곳에서 순교했다.
콜키스는 오늘날 흑해 동부 지역으로 현재는 조지아(그루지아)에 속한 땅이다.
훗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는 사도의 유해를 로마로 옮겼지만,
황제에 의해 다시 독일의 국경도시 트리어로 이장되었다.
현제도 트리어는 마티아 사도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도끼 혹은 미늘창으로 살해되어 순교했다.
그의 초상화는 십자가를 들거나
미늘창(도끼와 창을 합친 무기)을 들고 있는 그림으로 묘사되고 있다.
축일은 5월 14일이며 예전에 부르던 마지아는 마티아를 한자 표기한 것이다.
마티아는 당시 흔한 이름이었다.
히브리어 마티타이에서 유래되었으며 주님의 선물이란 뜻이다.
~ 신은근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