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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장은 아들과 천사의 비교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들은 보좌에
앉아서 원수가 발등상 될 때까지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총지휘하십니다.
천사는 구원 얻을 후사들의 부리는 영으로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천사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 2장에서는 11절 말씀을 요절로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단수)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우리들(복수)입니다.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3장1절에도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 된 거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혈육에 속하여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고 사망에서 탈취하여 생명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리고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비롭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신 이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동선을 완전히 파악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와 같은 대제사장을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문젭니다.
바로 오늘이라 하는 날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완고하게 되지 않는 겁니다.
율법 아래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강퍅하게 들었습니다.
뭐 그럴까봐 웃기네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다 선민으로서 이미 구원을 받았고
다 된 줄 알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구원은 다 끝난 줄 압니다.
더 이상 복음을 들을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4-25) 성경은 끝까지 복음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 이것 하나만 복음인줄 알고
자기는 구원의 문제는 다 끝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이 천국에
데려갈 날만 기다린답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구원이 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예정론을 잘못 도입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말로 하나님이 다 해 놓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앞으로 하나님이 다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미 해 놓으신 일에 내가 한 걸음씩 따라
올라갈 때 마다 점수가 달라집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대접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럭저럭 살다가 천국에 가기만 하면 되겠지만 그러나 이 땅에서
자신을 만들어내서 하나님께 가져가기도 하고 그 열매를 이 땅에 남겨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이 어떤 신앙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다 하는 평가를
자손 대대로 남기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걸 하나님께 가져가는 거죠.
잘못하면 예정론이 팔자론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다 하실 것이다 하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주체가 하나님이실 때는 하나님이 다 하시는 것 같고 내가 주체일 때는
내가 다 해야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려다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 많아
내가 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하실 일에 내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도 하나님이 이렇게 해 놓으셔도 이런 건 내가 해야
되는 것이다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해되시죠?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3장이 말하기를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하십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사도로 만드셨고,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만들어 놓았다 하심은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행하시므로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겁니다.
이를 테면 엡2장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고 일으켜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앉히신 사실에는 우리가 손가락도 하나 쓰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11-22절까지는 그 은혜를 기초로 내가
행해야 할 선한 일이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응답입니다.
그리고 3장의 요절은 14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처음에 확실한 것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호 로고스입니다.
그걸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4장에 들어와서 또 '그러므로'로 시작됩니다.
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 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문 열었을 때에 들어오시오’
이 말입니다. 계3:20에도“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하십니다. 성경에서 천국은 먹고 마시는 장면으로 늘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은 주님의 생명의 양식을 먹고 내가 거룩하게 될 때 안식이 오는 겁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계21장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임했다고 말씀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계21:3) 물론 나중에는 하늘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흰 보좌 심판을 끝내시고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때는 우리는 다시
하늘차원으로 점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새 하늘과 새 땅이
사람들 중에 내려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면 하나님이 임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잡으려고 하늘에 올라갈 필요도 없고 그리스도를
끌어올리려고 음부에 내려갈 필요도 없이 다만 그 분과 하나가 된 사실을
말씀을 통하여 믿고 시인하면 되는 것입니다.(롬10장) 이와 같은 구원을 위한
시간은 아직도 남아 있으므로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염려 하십니다
그러나 부족하다는 것이지 아니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볼 때에
저 사람은 아니야 하면 아직은 아니라는 말일 뿐 가짜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판단을 할 때에 틀린 것과 부족한 것을 구분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아직 못 깨닫고 있다' 이렇게 말을 할 줄 알아야지
저건 가짜야 하고 사람을 두고 쉽게 못을 박으면 안 됩니다.
다만 사망과 생명은 구분하여 저 사람은 아직 사망 아래에 있기 때문에
현재 스코어는 그대로 죽으면 불 못이라는 말은 해 줄 수가 있습니다.
요즘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꼭 자기 쪽에 와야만 구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엘리야가 그런 적이 있습니다. ‘나는 열심이 특심하므로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나만 남았습니다’ 하니까 하나님이 ‘허허 얘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 칠천이나 남겨 놨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칠천이란 말은 칠천 명이라는 말만이 아니라 칠이란 완전 숫자에 천이란
충만의 숫자를 붙여서 땅에 쫙 깔아놨다는 뜻입니다. 그로부터 하나님이
엘리야를 엘리사로 임무교대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피곤한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주셨지만 그에게 호렙산에 가서 임무교대를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지금 나뿐입니다’
이런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말은 망발입니다.
나만이 깨달았다. 나만이 정통이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2절은 왜 부족한가를 설명합니다.
2절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왜 우리가 믿음의 결부(화합)를 이루지 못하는가?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고린도교회도 복음 전함을 받은 교회입니다.
고전15장에 보면 바울이 ‘내가 너희로 복음을 알게 한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받은 복음을 내가 다시 설명해서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겠다는 겁니다.
고전15장은 참 놀라운 복음의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그 말씀을 이미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처럼 받아 놓기까지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그 부활의 복음을 받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과 장차 올 부활만 알고 있을 뿐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계셔서 아담
안에 죽었던 나를 다시 살리시고 우리 안에 부활과 생명으로 계심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25) 하는 말씀은 ‘나는 과거에 부활이요 생명이었다.
나는 미래에 부활일 것이다’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현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어디나 부활이며 그 분이 계신 곳은 어디나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받았다면 부활을 받은 겁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받은 겁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나를 믿는 자는”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현재) 자입니다.
믿었던 사람도 아니고, 믿을 사람도 아니라 바로 지금 믿고 있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나중에 신령한 몸의 부활은 통째로 바뀌는 것이죠. 번데기가 나방이 되듯이...
하나님이 만든 형상에는 사람의 형상, 새의 형상, 물고기 형상, 짐승의 형상
네 가지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 인간이 물속에서 살려면 허파를 바꾸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 가서 살려면 몸을 바꿔야죠. 그러기 위해서 몸의 형체를
바꾸는 과정이 남았다는 말입니다. 다른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미 받았는데 껍데기만 마지막 날에 바꾸는 겁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살기 알맞도록 바꾸는 이 절차만 우리에게 남았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부정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시대의 사람이나 현재의
은혜시대의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시대에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호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계시를 통해 다 들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했습니다(히11:26)
모세는 율법의 대표입니다. 율법의 대표이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애굽의 보화보다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림자요
율법을 통해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내다보았다는 겁니다. 모세나 모든
선지자가 다 그렇습니다. 이걸 사람들이 원근통시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원근통시가 뭐냐면 산 정상을 오르다보면 앞산이 있고 그 뒤에 또 산들이 있어
산이 첩첩이 보이잖아요. 앞산도 보이고 또 뒤에 있는 산이 보이고 그 다음에
또 산이 보입니다. 율법을 보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보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보좌에 앉으시고 성령이 임하셔서 내 안에 임하실
새 언약까지 동시에 본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당시에 이루어진 건 아닙니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끌어당겨서
이미 된 것처럼 믿은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입니다(히11장)
그걸 원근 통시라 합니다.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에 있는 것을 한꺼번에
보는 것입니다. 이는 개혁주의 신학자 안토니 후크마가 말한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란 씨를 받았습니다. 그 씨를 받은 다음에는 그 씨가
우리 속에서 자랍니다. 불신의 눈으로는 한 알의 씨 밖에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그 씨 속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나무를 보고 저 나무에 사과가 몇 개 열릴까 셈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이 씨 한 알 속에 사과가 몇 개 열릴 것인가
까지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바로 계시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씨를 보면서 나무와
그 열매를 함께 보는 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보는 눈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는 믿음인 겁니다.
성경은 이 씨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다고 하십니다. 그걸 믿는
믿음이 바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므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믿음이 우리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겨자씨와 같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생명이 있습니다.
점점 커갑니다 계속 자랍니다. 이 생명력 있는 믿음은 우리가 믿으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아들의
계시가 그토록 중요합니다(갈1:16) 그래서 바울은 유명한 사람들이 그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에게 계시로 보여줬다고 말하는 겁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내가 간절히 비노니 지혜와 계시의 영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바디메오처럼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내게 있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해야 됩니다.
고전13장을 보면서 이 시대에 교회들이 믿음과 소망은 갖고 있으나 사랑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은 사랑하라지만 말씀이 체화되어야 사랑이 됩니다.
말씀이 들어와서 바로 사랑이 되는 건 아닙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내 속에서
소화흡수 되어야만 비로소 사랑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으로 끊임없이 속에서 이루어 가야만 사랑으로 완성이 됩니다.
빌립보서 3장을 보면 바울이 율법에는 완전한 사람이지마는 그리스도를 알고
붙잡힌 것을 붙잡으려고 쫓아간다고 했습니다. 이는 현재 진행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으로 그 사랑을 붙잡으려 계속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이야 말로 바로 제대로 된 믿음이며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복음을 전함을 받았지만은 유익되지 못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안식을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듣는바 그 말씀이 믿음이
안 되었습니다. 듣는바 말씀이 믿음화 되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오래 걸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내부에 이루시려는 것이 있고 외부적으로 이루시려는 것이 있습니다.
중심사상이 있고 변두리 사상이 있습니다.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본질입니다.
그리고 외부적인 것은 하나님께 충성하라 전도하라 윤리적으로 깨끗하라 남을 섬겨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중심사상은 놓치고 변두리사상만 강조합니다.
성경의 중심사상은 족보 얘깁니다. 생명 얘깁니다. 그리고는 우리로 하나님의
이름이 실추되면 안 되기 때문에 변두리 사상에도 충실 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복음은 중심사상 곧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복음이라고 말씀합니다(롬1:2)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에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교훈은 변두리 사상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가르침은 결코 믿음화 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 믿음화 되고 그 믿음에 의해 사랑으로 진화해 갑니다.
중심사상만 정립해 놓으면 변두리 사상은 시간적으로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교회에서 처음부터 변두리 사상에 치중하다보면 중심사상이 커질 않습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모양은 만들어졌는데 내용이 안 큽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교회의 일과 업무를 수행하는 일은 척척 아는데
그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는 되지 않는 걸 봅니다.
성경에는 중심사상과 변두리 사상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믿음은 들으면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 말씀으로 말미암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유익’이라는 말은 말씀과 우리가 화합(결부)한다는 말입니다.
계란과 기름 그리고 식초를 넣고 믹스기에 돌리면 마요네즈가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겁니다.
말씀이 들어가서 성령과 더불어 우리 인격과 조화되어 오랫동안 빙빙 돌리니
말씀만 한 구절씩 입에서 톡하고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모습
곧 다른 형태로 바뀌어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교육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원리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 아이가 납니다. 이 아이를 남녀 합작품이라고
하지 않고 자녀라 부르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가 만났을 때에 어떤 화합의
결과가 나오는데 말씀의 구절이 그대로 나오지 않고 사랑으로, 또는 기쁨으로,
감사와 찬양으로 헌신과 봉사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게 말씀이 결부되었다는
뜻이며 듣는 자들에게 유익이 되었다는 말씀의 뜻인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믿음의 화합을 이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외의 다른 남편이기 때문입니다(롬7:1-4)
과거 옛 언약에는 율법이 남편처럼 우리를 꽉 붙잡고 따라 다녔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남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더 까다로운 남편입니다. 율법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원수는 미워하고 이웃은 사랑하라 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네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십니다.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라고 시키는 무척 까다로운 남편입니다. 그런데
율법처럼 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분이 우리 안에 오셔서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기어이 그 분이 원수까지 사랑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만이 복음을 듣고 믿음의 화합(결부)을 이룰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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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