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연운사 주지 원명 스님
“불교 사상‧문화, 출‧재가자 함께 넓히고 꽃 피워 가는 것”
고2때 심향사서 첫 불연, 학생회장 맡고 불심 돈독
‘삼천배 7일’ 후 동대 진학, 제대 후 성오스님 은사 출가
김포 신도시에 임시 법당, ‘나눔‧봉사’ 펼치며 전법
화마에 법당 완전 전소, 천막 법회‧기도로 극복
‘부처님의 위신력 믿기에, 두려워 않는다.’ 발원문 강렬
매월 1회 사찰운영위서, 재정공개 중대사안 결정
“소욕지족 지혜 전해주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필요”
“코로나19 안정세 들면, 다문화 가정 보듬을 터”
연운사 주지 원명 스님은 “현대인의 불행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며 “적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의 지혜가 필요한 시대”라고 강조했다.
“많은 사람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 법을 전하라!”
부처님의 전도선언이 유독 닿지 않은 곳이 있다.
정부 주도로 조성된 신도시다. 대규모 도시 개발이 진행되던
1995년과 2005년의 ‘인구 센서스’, ‘통계청’ 자료들은 한결같이
‘불교 약세‧개신교 강세‧가톨릭 약진’을 보여준다.
신도시의 종교용지를 확보하지 못한 불교계는 지금까지도
전법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경제‧사회·문화 수준이 급속히 높아가는 수도권 중심의
도심에 대한 포교 인식이 부족한 것에 따른 결과다.
연운사 대웅전.
경기도의 양촌읍과 장기동, 마산동, 운양동, 구래동에 걸친
대규모 개발로 또 하나의 도시 ‘김포 한강 신도시’가 들어섰다.
이곳에 전법의 중심축을 담당할 거점 사찰이 절실했는데
연운사가 창건됐다.(2013)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나주 심향사(尋香寺)를 처음 찾았다.
교복 입은 학생이 목탁을 치고 찬불가를 부르는 게 신기했다.
학생 대부분이 학교에서 크리스마스카드는 만들어보았어도
연등은 제작해본 적 없던 그 시절,
교회가 아닌 사찰에서 즐거운 노래를 들을 것이라는 건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심향사 불교학생회장을 뽑는 날 학교 대표로 나가보라는
친구들의 종용에 나섰는데 갓 들어 온 신도임에도 예상을 엎고 선출됐다.
신심은 부족했어도 책임감은 컸기에 매주 토요일이면 산사로 향했다.
찬불가를 배우고 부처님 생애와 관련한 불서를 읽어가며 불교에 젖어갔다.
대학 입학을 위해 원서를 사러 나섰는데 함박눈이 내리기에
절에서 하룻밤 묵고 떠나려 심향사로 방향을 틀었다.
절의 한 스님이 삼천배를 해 보라 권했다.
일생일대의 선택을 앞둔 상황에서 그 권유를 뿌리쳐야 했는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처음 해본 삼천배를 매일 7일 동안 지속했다.
청년의 기도를 지켜본 그 스님은 동국대 불교학과 진학을 권장했다.
희유하게도 별다른 반감 없이 받아들이고는 동국대 원서를 샀다.
군 제대 직후 집에는 “공부하러 절에 갑니다” 하고는
심향사에 주석하고 있던 보륜 성오(普輪 性悟)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1990) 원명(圓明) 스님이다.
이후 동국대(불교학), 동국대 교육대학원(종교 교육학 석사),
남부대학교(사회복지학‧2급)를 졸업했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를 맡았던 원명 스님은
백양사에서 교무 소임(2004∼2006)을 본 후
곧바로 경기도 광명 금강정사 주지를 맡았다.
금강정사 주지 소임(2006∼2013)을 마치고
출가 사찰인 심향사로 내려가려는데 신도 한 분이
안택(安宅) 기도를 청해 김포로 향했다. 무척이나 놀랐다.
2000년 전후만 해도 논과 밭이었던 곳에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곳 신도시에 법을 전하자!”
건물의 한 층을 임대라도 해서 포교당을 낼 생각이었다.
이곳저곳의 건물을 살피며 다니던 중 운유산(雲遊山) 자락의 터가
시야에 들어왔는데 ‘저 자리에 절 지으면 참 좋겠다!’ 싶었다.
끝내 마땅한 포교당 공간을 찾지 못해 부동산에 들렀는데
사장은 상가는 아니지만 절 지을만한 좋은 땅이 있다고 했다.
일단 “보기라도 하자”는 심산으로 따라갔는데
좀 전에 본 그 운유산 자락의 터였다.
1652㎡(500평)을 매입한 후 패널(Panel)로 지은 132㎡(40평)의
임시 법당을 마련했다. 그리고 사부대중은 발원했다.
‘모든 이에게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삶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나누고 하심하는 마음으로 밝고 아름다운 도량을 만들어 가는데 주역이 되고자 합니다.’
(연운사 행원발원문 중)
‘연운사 전법’은 그렇게 시작됐다.(2013)
‘대학 선택’이라는 장래가 걸려 있는 선택의 순간에 절에서 1주일 내내 삼천배를 올렸다.
함박눈이 절로 이끌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도 참 미묘한 일입니다.
2년 동안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절을 오가는 동안 불심이 돈독해졌던 듯싶습니다.”
연운사에서는 매월 한 번 사찰운영위원회가 열린다.
주지, 종무소 직원, 신도 단체 대표 등 20여명이 참여해
불사와 사업, 재정 현황 등을 공유하며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한다.
“우리 교단은 비구‧비구니에 비해 우바새‧우바이에 대한 무게감이 덜합니다.
여러 요인이 있을 겁니다. 그중 하나가 재가불자님들이
불교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재가불자님들의 협력 없이는 그 어떤 불사(佛事)도 불가능에 가깝고,
포교의 실효성은 크게 떨어집니다.
불교는 출가 수행자와 재가불자가 함께 넓히고 꽃피워가는 것입니다.
연운사는 저 ‘원명의 절’이 아니라 ‘우리 절’입니다.”
창건 직후부터 거리로 나가 연운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부처님 법을 전한 장본인은 재가불자였다.
희망드림은 2015년 출범했다.
창건 초기부터 해 온 불교의 대사회 활동을 좀 더 짜임새 있게 펼치려
‘희망드림’도 출범시켰다.(2015)
독거노인 밑반찬 배달, 소외계층 난방비 지원, 자비의 쌀 나눔 등을 전개하며
지역 사회를 대표하는 봉사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예전과 비교해 지금은 보기 어려운데 이사를 하면 이웃에게 떡을 나눠 드리지 않았습니까?
‘주민으로서 함께 살겠다’는 뜻입니다. 사찰도 그런 마음이어야 합니다.
불자만을 위한 절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연운사가 세워지고 좋은 일 많이 생긴다’는 말이 회자되어야
전법도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습니다.”
조계사 부주지 소임(2015.7∼2022.9)을 겸직하고 있어 서울에 머물 때다.
2016년 2월 한밤중 연운사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법당이 불에 타고 있습니다!” 급히 달려가 보았을 때는 임시 법당이 완전히 전소된 상태였다.
당시 느꼈을 허망함은 연운사 대중이 아니고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신도분들과 함께 울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한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불사를 시작할 인연이 닿았는가 보다.
대웅전을 짓자!’ 3000만원을 들여 99㎡(30평)의 천막 법당을 마련해
신도들과 함께 법회를 이어갔습니다.”
‘우리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원력이 결집됐다.
그 정성이 모여 불사금을 마련했고 대웅전 건축설계 승인(2018)까지 받았다.
그런데 예견치 못한 역경이 밀려왔다.
연운사 인근 부대가 관측 제한 이유를 들어 ‘대웅전을 지하로만 지어야 한다’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주변에 전원주택들이 들어차고
연운사보다 더 높은 곳에서도 건축 행위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백방으로 알아보며 대책을 강구했지만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양측의 협상은 타결됐고 반지하를 포함한 2층의 대웅전이 2021년 10월 준공됐다.
조계사 부주지 소임을 놓은 원명 스님은 지난 9월6일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에 임명됐다.
초창기 10년 동안 ‘불교문화 체험’과 ‘전통문화 관광’에 초점을 맞췄다면
그 이후 10년 동안은 ‘치유와 힐링’, ‘사회 공익’에 비중을 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제 새로운 20년을 위한 청사진을 그려야 할 때다.
실무진과의 협의를 통해 차근차근 준비해 가겠지만
신임 단장으로서 실현해 보고 싶은 구상도 있을 것이다.
템플스테이는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포교 목적이 아니더라도 불교적 사유의 기회를 좀 더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템플스테이는 가능한 문화가치는 높이고
종교 색채는 엷게 해야 하는 양면성이 있기에 세심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일례로 모든 산사에는 멋진 풍경과 숲의 깊음을 만끽할 수 있는 산길이 있는 만큼
그 길을 걷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풀벌레와 새소리의 주인공을 맞춰 보게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야생화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는 겁니다.
도시의 소음과 인위적 색채 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은
자연의 소리와 색감에서 청량함을 느낄 겁니다.
그 길에서 얻은 즐거움과 뇌리에 새겨진 기억이 언젠가 숲길을 홀로 걸을 때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불교중흥을 발원하며 시작된 상월결사 순례에
지객으로 동참하며 느꼈던 체험과 감동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다.
스님은 또 작은 의자 하나도 마음을 편히 할 수 있는 공간에 놓고,
그 주위의 나뭇가지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처님 말씀을 적어놓은 작은 글판도 달아 보자고 한다.
“법구경만 펼쳐도 가슴에 담을 만한 말씀이 참으로 많습니다.
‘꽃향기는 짙어도 바람을 거슬러 퍼질 수 없지만,
순수한 마음에서 풍기는 덕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이 세상 끝까지 간다.’
‘쓸모없는 천 마디의 말보다 그대 영혼에 기쁨을 주는 단 한마디의 말이 낫다.’
불자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삶의 지양분이 될 말씀입니다.”
원명 스님이 글판에 직접 써넣고 싶은 부처님 말씀을 청했다.
“열반경의 ‘사자후 보살품’의 일언을 쓰고 싶습니다.
‘소욕(少欲)이란 크게 구하거나 취하지 않는 것이며,
지족(知足)이란 조금 얻었다고 해도 원통해 않는 것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데서 비롯됩니다.
절제란 욕망을 무조건 누르는 게 아닙니다. 생각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적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코로나19가 가라앉으면 연운사가 펼칠 불사 하나를 전했다.
“김포에 외국인 노동자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 정착하면서 적지 않은 고충을 겪고 있는데 도움을 요청할 곳이 많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웃종교의 도움을 많이 받으니
불교 국가에서 온 불자들의 상당수가 개종한다고 합니다.
평생 간직해 온 불심을 지켜주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다문화 가정의 출생아 수는 대체로 줄고 있지만 비율은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그들도 대한민국의 아들과 딸이자 미래의 부처님입니다.”
연운사는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는 ‘발심발원법회’를 봉행한다.
창립 초기에 세웠던 원력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다져가는 법회다.
그 법당에 울려 퍼지는 ‘발심발원문’만 보아도 연운사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초발심의 간절함으로 발원합니다.
변하지 않고 진실하며, 선하고 깨끗한 본성‧자성으로 슬기로운 하루,
감사하는 하루, 기쁨의 하루를 살며 모두를 용서하는 자신이 되겠나이다.
저희는 어떠한 것에도 두려워하거나 힘겨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충분히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황벽 희운(黃檗 希運)의 선시
‘매서운 추위가 뼛속 깊이 사무치지 않았던들(不是一番寒徹骨)/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爭得梅花撲鼻香)’를
가슴에 새긴다는 원명 스님과 함께하는 ‘연운사 전법’은 더욱더 활기차게 펼쳐질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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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명 스님은
1990‧1993 사미‧비구계 수지. 동국대‧동국대 교육대학원‧남부대 졸업.
금강정사 주지, 조계사 부주지, 조계종 포교원 연구실 사무국장,
자정쇄신결사본부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 노인복지센터 운영위원장, 경찰청 본청 경승위원이며,
연운사 주지이자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이다.
2022년 10월 19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