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상제(皇天上帝)1-통권138
라혼은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공식적인 하루 일과를 마치고 금림으로 돌아와 식사 준비를 했다. 한때 상경으로 용호왕부의 모든 장군들이 모여 회의를 하자며 라혼에게 진언했지만 라혼은 장군들에게 제대로 안 하면 묻어버리겠다는 협박만 늘어놓았다. 실제로 남상동도대장 타가선이 약 사흘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색에 빠져 있다 묻히는 일도 있었다. 타가선이 사흘간 땅속에 묻혀 나무 흉내(?)를 내고 있을 때 타가선의 부하들은 잔폭광마에게 맡겨져 전원이 한번쯤 목숨이 위태로운 경험을 할 정도로 엄청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른바 수전 대비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헤엄치는 것을 배웠는데 물이 귀한 흑막 출신의 군사들은 사흘을 꼬박 물속에서 지내며 평생 마신 물보다 더 많은 물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겨우 사흘간 수영을 배웠다고 수영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불똥은 타가선과 같은 흑막 출신 군사들이 대부분인 남상위병대장 대주원의 군사들에게 튀었다. 그리고 그들도 죽을 둥 살 둥 하며 차가운 천호의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귀중한 물을 원 없이 마셔야 했다. 그리고 용호왕부의 장군들은 없는 일이라도 만들어서 군사들을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사실 지금은 군사를 움직여야 할 때가 아니라 고학 같은 책사가 움직여야 하는 시기였다.
“주인님, 모 장군의 아들이 찾아와 뵙기를 청하는데 어찌할까요?”
“모초가? 네가 가서 이리로 데려오도록 해.”
식사 준비가 끝나고 상이 차려지자 지심이 모초를 데려왔다.
“어서 오너라. 앉아라. 같이 먹자꾸나.”
“초아, 어서 와! 근데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무슨 일은. 보나마나 소매 때문이겠지. 껄껄껄.”
“아니… 오늘은 그것이 아니라….”
모초는 금림 안의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횡설수설 변명하기 시작했다. 라혼은 모초에게 하늘과 같은 주군이고, 젖 동무인 설화는 주모인 동시에 천녀(天女)였다. 그런데 금림 안의 분위기는 마치 설로촌에서 지내던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었다. 설화가 당황해하는 모초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해! 나도 그렇고, 서방님도 널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 그렇습니까?”
한편 응소매는 약간 어리벙벙한 모초의 태도가 불만인지 노골적으로 새치름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던졌다.
“사내대장부가 그게 뭐예요? 좀 당당하게 굴라고요.”
“소매야, 초는 당당한 대장부다. 초의 부친은 모석이다. 하지만 초는 이제 막 부장의 지위에 있을 뿐이다.”
천하의 패권을 눈앞에 둔 용호왕이 자랑하는 백호영의 최고 수장이 바로 모석이었다. 용호왕부에 숱한 기라성 같은 장수들이 있지만 모석은 특별했다. 라혼과 가장 오래 있었고, 모석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백호나한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실력과 덕, 인망 등 고학과 더불어 용호왕부의 최고 실세 중 한 명이었다. 모초는 그런 모석의 아들이었다. 모석과는 별개로 천상천화와 인연 또한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모초 정도의 배경과 가진바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장군의 반열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모초는 이제 겨우(?) 부장 직급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런 모초를 부리는 입장이 되는 상관으로서는 모초를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초는 자기 스스로 군율을 엄정히 하려 노력했고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런 모초에게 주군인 라혼은 하늘과 다름없었다.
“그보다 밥이나 먹자꾸나. 초야, 집 안에 의자를 가져와 자리에 앉아라!”
“예, 백부님.”
모초는 어색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설로촌에서와 같이 자신을 대하고 있는 라혼을 백부라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가 의자를 가져와 의식적으로 응소매와 떨어진 곳인 지심과 잔폭광마 가운데에 놓았다.
“왜 여기다 의자를 놓는 거야?”
“예?”
“여기서 너랑 저기 저 날새 계집애랑 눈 맞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여기서 눈치를 보고 그러냐?”
“….”
잔폭광마의 노골적인 타박에 모초는 물론 응소매마저 볼에 홍조를 띠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설화는 입을 가리며 웃었고, 평소에 표정이 없는 초초마저 미소를 지었다. 결국 모초는 응소매 옆에 의자를 놓아야 했다.
여자는 남자보다 타인의 시선에 익숙한 것일까? 놀리는 분위기에 모초는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는데 역시 부끄러워하던 응소매는 식사가 시작되자 모초의 밥그릇 위에 맛난 반찬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심조심하다가 모초가 널름널름 받아먹자 그것에 재미 들린 응소매는 노골적으로 모초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거 먹어봐요. 깔끔한 게 맛있어요.”
“….”
“이건 제가 직접 시장에서 사온 생선인데 아주 싱싱한 거예요.”
라혼의 식사 시간엔 대화가 별로 없었다.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식사를 하는데, 비록 속삭이는 목소리라고 하지만 그 뜻은 명확하게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귀에 들어왔다.
“지심아. 이거 내가 팬 장작으로 밥을 했다. 밥맛 참 좋지 않냐?”
“….”
“서방님, 오늘 멧돼지 고기로 맥적을 만들었는데 어때요?”
“….”
응소매의 그런 행태에 잔폭광마가 운을 떼자 도끼눈을 부릅뜨고 뭐라 쏘아붙일 말을 찾던 응소매는 설화가 그걸 묘하게 받자 샐쭉해졌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가운데 식사가 끝나고 상을 치운 후 차를 마시며 라혼이 먼저 운을 떼었다.
“초야, 네가 밥이나 얻어먹으려고 날 찾진 않았을 터. 무슨 일이지?”
“예, 다름이 아니라….”
모초는 지금 서제가 남원주의 태수들을 무차별적으로 포섭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거기에 대한 대응을 물었다. 라혼은 모초가 그 성격에 맞지 않게 월권적인 질문을 하자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모초의 소신을 가지고 앞으로 어찌할 것이냐는 물음은 모초 스스로 했다기보다 모석을 비롯한 장수들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란 사실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모초!”
“옛!”
“출병이다!”
“…!”
라혼은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출병을 명했다.
“대수영에 연락하여 사변에 대비케 하고, 군사들은 내일 해뜨기 전까지 출병 준비를 완료시켜라!”
라혼의 갑작스런 출병 명령에 상경 황진성은 발칵 뒤집혔다. 해가 떨어져 한산해진 거리에 말을 탄 군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퇴청한 관리들과 집으로 귀가한 군사들을 부르기 위해 성문을 닫아야 하는 시간임에도 화톳불이 환하게 밝혀지며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에 위로는 장군들부터 밑으로는 일반 군졸까지 영문을 모른 채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뭔 일이래?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무슨 일이야 폴시 났제. 갑주의 서제랑 싸운다고 않카요?”
“하지만 서제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문은 없는데?”
“참말로 뭔 일이 이래…?”
영문을 모르는 것은 일반 백성도 다르지 않았다. 군문에 적을 두고 있는 군사들이 앞으로의 일에 대해 자기들끼리 혹은 아는 친인과 논의하였는데 대부분 봄께 출병할 것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모두들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만추를 지나 겨울의 입구에 다다른 시기였다. 군사를 움직이는 데 결코 이로운 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영문을 모르고 움직였으니 행동은 둔했고, 군사들을 지휘해야 하는 무관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은 해뜰 무렵이 아니라 정오가 지나 저녁을 바라볼 때였다.
“이것이 뭔가?”
“….”
“본좌는 분명 아침에 출병할 것이라 했다. 지금이 아침인가?”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었던지라….”
“시간? 그럼 그동안 일은 하지 않고 놀고 있었단 말인가?”
라혼의 진노한 호통 소리가 장내를 진동하고, 제장들은 그 기세에 눌려 고개를 숙였다.
“좋아! 시간을 지체한 만큼 준비를 철저했으리라 본다. 그 준비가 얼마나 잘되어 있는지 한번 보겠다.”
그리고 라혼은 장수들을 이끌고 연무장에 모여 있는 군사들의 상태를 일일이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군사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중경에 사는 바, 방평산입니다.”
“지금 출병하면 날이 쌀쌀할 터인데 추위를 막을 옷은 준비했나?”
“예? 그, 그것이 미처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라혼은 그 군사의 말을 듣고 고학에게 물었다.
“군사들에게 지급할 방한복은 어찌 되었나?”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출병하면 싸우기도 전에 모두 얼어 죽겠군. 그렇지 않은가?”
“그, 그렇습니다.”
“결국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거로군. 그렇지 않은가?”
“….”
라혼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혹한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북지성을 공략한 전력이 있는 라혼이었다. 그런 라혼에게 겨울 출병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담량을 지닌 자는 없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의 예상을 깨고 일시에 대군을 정신없이 몰아치는 전략은 누구나 칭송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그런 졸속(拙速)한, 졸렬하지만 빠른 전략을 선호하는 라혼에게 지금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나 똑같은 상황이었다. 이는 완벽하게 주군의 명을 따르지 않은 상황이 되고 만 것이었다.
“열흘을 주겠다. 지금 즉시 각자 1만을 이끌고, 각지의 군량을 최대한 끌어와라!”
“….”
“이것은 군령이다.”
“존명!”
그렇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의 명령에 18명의 장수들은 각자 1만 대군을 이끌고 상경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남원주 정역을 휘젓다가도 전환을 통해 날아든 집결 명령에 집결하고 다시 해산하고, 또다시 집결하는 징계성 짙은 명령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