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물벗님의 모친상을 접하며, 문득 울 친정 엄마 생각에 많이 울엇슴다.
43세에 막둥이 나를 낳앗지요. 그 모진 가난 속에 울 5 남매 머리가 다 빠지도록 반티 이고 다니며 고생 하여 등이 히어 질데로 굽어 꼬부랑 할머니가 돼었는데 , 철없던 난 그모슴이 부끄러워, 학교에도 못오게 하곤 햇는데, ......제일 가슴 아픈 사연이 잇슴다. 울 엄마 는 언제나 비가 조금이라도 올라치면 , 우산과 장화, 그리고 비옷을 들고 학교로 오곤 햇는데, 고 1학년 어느날 집에 갈 즈음 비가 와서 오늘도 엄마가 오겠지 기다리고 있는데 해가 기울어도 울 엄마는 오지 않고,친구들은 다 가고 없는데 혼자 " 와이리 안오노" 화가 나서 기다리는데 , 저 멀리 비에 다 젓은 엄마 모슴이 보였슴다. "아이고 우리 막내딸 마이 기다렷제 엄마가 버스에 니 장화를 두고 내려서 그 장화 찾아 오느라 늦은기라 미안하데이" 그소리 들은 불효 막심한딸 왈 " 그러니까 학교 오지 말라 햇잔아 다음부턴 오지 마라 " 엄마의 가슴에 못을 박는 소리를 했지요.그러나 울 엄마 그다음에도 여전히 비오는 날이면 우산 장화 비옷 들고 나타나 울 귀여운 딸 비 한 방울도 맞으면 안되지 감기 걸리면 큰일난데이 하며 날 끔찍히 사랑해 주신 울 엄마, .. .. 그후 결혼후에도 그사랑 변함이 없었는데 20 년전 잠시 나의 직장 생활로 울 집에 한 3 년 함께 계시며 울 딸들을 돌봐 주셨는데 그떄에도 겨울철 내가 출근 할때면 나의 구두는 엄마에 가슴에서 나오곤 했지요. 발 차가울 까바 가슴에품어 따뜻히 데워 내 준것이지요. 그리고 출 퇴근시엔 항상 대문 앞에 무릎이 턱에 닿이게 쪼그리고 앉아내 모슴이 사라 질떄 까지 쳐다 보다 들어가시고 퇴근떄도 추운 겨울 대문 앞에서 날 반겨 주시며 : 고생 햇제 얼른 들어가자 하시며." 들어가 보면 점심상엔 언제나 반찬이 그대로 잇어 " 엄마 ! 점심 머하고 먹었노" 하면 내야 김치 만 잇으면 된다. 반찬 내가 다 먹으면 니가 저녁에 피곤 한데 다시 만들어야 안되나. 해서 이따끔 엄마와 싸우기도 햇지요. 내가 엄마 인생의 전부였는데 . 살아 생전 못 깨닫고 늘 엄마 가슴에 못질만 하는 불효 막심한 막내딸 어찌하면 좋을까요? 울 아버지 엄마는 항상 내 곁에 잇을 줄 알앗으니 착각 도 그런 착각은 없는데, 이제 후회 해 본들 무슨 소용 잇을 건가요. 해서 살아 생전 부모 효도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는 꺠달음이 왔슴다. 지금 부모가 살아계신 울님들 넘 부럽슴니다. 저 처럼 어리석은 자 되지 마시고 안부 전화라도 드리세요. 부모는 절대로 기다려 주지 않더이다.
내일 부터 잘 해드려야지 햇는데 내일은 항상 잇다는 사실을 . 해서 내일은 이미 늦다는 사실 을 지금 당장 효도 해야 됨을 하늘 나라 보내고서야 깨닫게 되니 항상 후회 하며 사는게 인생인가 봄니다. 엄마, 하늘나라에서는 엄마의 인생을 마음껏 누리세요...ㅠㅠㅠ
첫댓글 글 쓰면서 우셨겠지만 글 읽는 저도 눈물이 쏟아지네요. 우리 엄마도 1960년대에 무거운 적쇠 "반팅이"(서울 함지박 아닌 소쿠리)를 이고 다니며 행상을 하셨고, 고생하여 허리가 휘어져 지냈으며, 내가 제대후 1970년대 후반 내당동에서 공무원학원 강사 겸 고시생들 고시원(OO법률원)을 운영할 때도 손자들 거두시면서 수십명 고시생 관리를 하는 며느리를 도와 뒷바라지 했고, 1980년대 시골 등기소장 다닐 때도 낯선 울진군 관사에 와 식사, 빨래 챙기시면서 "소장 엄마하기도 힘드네" 하시던 말이 지금도 가슴에 찔립니다(아이들 학교, 고시원 운영 때문에 와이프는 대구 머물러야 했음). 목 놓아 크게 "낳으실 때 ~" 를 불러봅니다.
어제 아버님 기일 이라 포항에 다녀왔습니다. 아직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건강하게 계셔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멀리 있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 뵙지 못했는데...... 선배님 글을 읽곤 가슴이 메어집니다. 살아 계실때 잘 해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