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옛 친구들이 주왕으로 온다기에 내가 마중 나간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주왕은 경북의 산이니 내가 주인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고, 무엇보다도 서울의 친구들은 산을 아는 친구들이니 코스가 애매한 주왕은 내가 안내하는 것이 맞을 것같아서 였다. 더군다나 산에서 자주 만나는 전종성은 그렇다 할지라도, 좀처럼 보기 힘든 박종수와 박승배까지 내려온다니.........단미는 매우 아쉬워한다. 원중이 봐 줄 사람이 없어서 산을 탈 수가 없어서......단미는 나의 어떤 친구들보다도 서울 무학동 친구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산을 탈 수가 없어도 원중이를 데리고 산으로 간다. 우리는 산을 타고 단미와 원중이는 우리가 내려오는 코스로 들어와서 만나는 걸로 계획을 잡았다.
우리 지방의 산, 주왕산(720.6m)은 예전으로 치면 한반도 등뼈에 해당하는 태백산맥의 줄기이다. 요즘에 와서 산줄기에 대한 개념이 우리 전통적인 산줄기 개념인 산경표 개념으로 바뀌는 바람에, '주왕은 백두대간 태백산에서 갈라져 내려온 가장 큰 정맥인 낙동정맥의 산줄기 중심에 선 산이다'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말이다. 주왕은 수많은 암봉과 깊고 수려한 계곡이 빚어내는 절경으로 이루어진 설악, 월출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암산 중의 하나이다. 주왕은 일찌기 1976년에 한국의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주왕산 국립공원은 총 면적이 105.582㎢로 행정구역상으로 청송군과 영덕군의 2개군 5개 면에 걸쳐있고 기나긴 낙동정맥 산줄기 중에도 영남알프스와 함께 백미를 이루는 산줄기이다. 주왕에는 태행산, 두수람, 가메봉 등의 봉우리 외에도 주방계곡, 절골계곡, 월외계곡 등이 산재되어 있다. 자! 좀 덥지만 오늘은 주왕이다.
2009.5.9일, 오전 10시경 주왕산 산행을 시작하기 앞서 기념촬영한다. 서울 친구들의 주왕산 방문은 그야말로 그들에게는 오기 힘든 지역이라 의미가 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세도 특이하여 그들도 이질적인 산 경험을 하고 돌아갈 것이다. 부디 주왕이 먼거리를 새벽같이 달려온 친구들에게 실망을 안기지는 말아야 할텐데.............좌로부터 나의 친구 박승배, 박종수, 나, 전종성.........이다.
주왕산 매표소에 들어서면 바로 대전사가 나온다.
대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영천 은해사의 말사이다. 672년(신라 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세웠다는 설과 919년(고려 태조 12)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는데, 주왕산과 대전사의 이름은 주왕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주왕내기(周王內記)>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고 신라로 건너와 이 주왕산에 숨었다고 한다. 이에 당나라가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의 무리를 죽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하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했다는 것이다. 절 이름은 나옹화상 혜근(惠勤)이 붙였다고 한다. 또한 신라의 주원왕(周元王)이 수도했던 산이라서 주왕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대전사는 창건 이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에 불에 탄 것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과 주왕암(周王庵)이 있다.
대전사의 주요 건물로는 보광전(普光殿)과 명부전, 요사채, 산령각 등이, 유물로는 보광전 앞 삼층석탑과 사적비, 부도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보광전은 정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李如松)이 유정에게 보냈다는 친필 서신을 목판으로 음각한 것이 보관되어 있다. 보광전 앞의 석탑은 근처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짜맞춘 것이다.
주왕산은 신라말부터 주왕이 은거하였던 산이라 하여 주왕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주왕은 이 곳에서 토벌하러 온 신라 마장군 형제들과 전투를 벌였다는데,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저 뒤의 멋진 바위가 주왕산의 간판인 기암이다.
우리 산행의 들머리는 기암의 왼편으로 내를 건너 들어가 백련암을 지나 장군봉으로 치고 올라갈 것이다. 앞에 보이는 것이 장군봉이다. 주왕산은 주왕산 정상으로 불리우는 코스가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이 장군봉-금은광이 코스가 주왕을 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코스이다. 그래서 먼 곳에서 온 친구들에게 이 코스를 안내한다.
우리가 지금 지나치는 백련암은 주왕암과 더불어 대전사에 딸린 부속암자이다. 백련암이라는 이름은 주왕의 딸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하니, 주왕의 딸 이름이 백련이었던 모양이다. 옛날에 이 암자에는 큰 종이 걸려 있어 아침저녁으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하나 지금은 걸려있지 않고 대신 자그마한 종이 걸려있을 뿐이다. 단지 개울을 경계로 하고 있을 뿐 대전사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위엄있고 나즈막한 독경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는 대전사와는 달리, 백련암에는 비구니의 청아한 독경소리가 아침마다 퍼지니... 또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백련암 지나 월미기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오르면 바로 이렇게 가파른 된비알이 시작된다. 오늘은 처음부터 땀을 좀 빼야 할 것이다.
그래도 요새는 장군봉 오르는 길에 다리까지 설치해 놓아서 매우 편하다. 예전에는 이 코스를 오를 때면 무척 애를 먹었었는데.......
조금 오르다보면 기암과 비슷한 높이로 오른다. 높이는 금방 높아진다. 조금 품을 팔았다 싶은데 바로 고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바로 저 밑으로 대전사가 내려다 보인다. 불과 30분 전에 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벌써 이만큼 고도가 높아졌다.
장군봉으로 오르면서 주변에 보이는 암벽들. 주왕산의 기암괴석은 그 암석질이 회류응회암이라고 하여, 화산의 분화구에서 폭발한 뜨거운 화산재가 지면을 따라 흘러내리다가 쌓여 굳어진 암석이라고 했다. "회류 응회암(Ash-flow tuff)"이라 나로서도 처음 듣는 암석이름이다. 안 그래도 이건 분명히 화산재로 인해 생긴 암벽같은데 현무암도 아니고 화강암도 아니고 궁금했는데...........그래서 친구들에게는 퇴적암의 일종인 변성암이 갑자기 이 지역만 융기한 것이 아니겠냐고 얘기했는데 조사해 보니 아니었다.
친구 박종수가 장군봉을 오르고 있다. 날씨가 더워 매우 힘이 드는 데도 열심히 오르고 있다. 알고 보니 이 세친구는 어릴 적부터 죽마고우들이었단다. 매우 푸근한 인격의 소유자인 박종수는 친구들에게도 그 신뢰가 큰데........어떻게 주왕산까지 오게 되었는 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두친구한테 설득 당했을 것이다.
장군봉에 가까워져 오니 기암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기암 저 뒤로 보이는 산줄기 중의 높은 곳이 지도상에 주왕산으로 표기된 곳이다. 실제로는 등반으로서의 가치는 낮다.
주왕산에는 나름의 전설이 있다. 중국 당나라 덕종 12년에 진의 회복을 꿈꾸던 주도(周鍍)가 군사 1만명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실패해 신라 땅에 들어와 숨어지내게 되는데 지금의 경북 청송 일대가 그 곳이다. 이들이 식량을 약탈하고 도적질을 일삼자 신라의 왕은 마일성 장군과 그 형제들에게 이를 토벌토록 명하였고 주왕산 일대에 숨어 지내던 주도는 마씨 형제가 쏜 화살에 목숨을 거두고 만다.
주왕산 일대의 동굴과 협곡은 국가적 난이 일어나면 인근의 주민들이 대피하였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을 만큼 접근이 어렵고 깊은 골짜기로 유명한 곳이다. 자칭 후주천왕(後周天王)으로 불렀던 주도의 아들(대전)과 딸(백련)의 이름에서 유래된 대전사(大典寺)와 백련암(白蓮庵)이 주왕산이 간직한 설화의 일부분으로 남아 있다. 바위산이라 신라시대에는 석병산으로 불렸으며 말기에 이르러 주왕산으로 개명, 공식 지명이 된 것은 1937년 청송군지에 실리면서부터다.
기암을 측면에서 당겨서 촬영해 보았다. 햇빛이 강해서 사진이 전체적으로 희미하다.
주왕은 수백미터 돌덩이가 병풍처럼 솟아있어 신라 때는 석병산(지금은 백두대간 상에 따로 석병산이라는 산이 있지만............)이라 부르다가 통일신라 말엽부터 주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주왕산은 4군데의 폭포 외에 동굴, 대전사 및 부속 암자들이 있어 천혜의 관광자원이 많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명소로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한 고찰 대전사를 비롯해 주왕의 딸 백련공주의 이름을 딴 백련암, 청학과 백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학소대, 앞으로 넘어질 듯 솟아오른 급수대, 주왕과 마장군이 격전을 치렀다는 기암, 주왕의 아들과 딸이 달 구경을 했다는 망월대, 동해가 바라다 보이는 왕거암, 주왕이 숨어 살다가 죽었다는 주왕굴 등이 꼽힌다.
그밖에 자하성(일명 주방산성), 무장굴, 연화굴 등의 명소가 있다. 소나무 군락을 비롯해 망개나무, 복장나무, 자작나무, 난티나무 등 희귀식물의 군락도 볼 만하다.
더운 날씨지만 부지런히 따라오고 있는 친구들. 푸른 옷을 입은 친구는 박승배로 나의 국민학교 친구지만 졸업하고는 처음 만난다. 그는 연세대 건축과 출신으로 지금은 삼양건설이라는 큰 회사의 사장을 역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크게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는지 우리 국민학교 동기회인 삼무회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드디어 장군봉에 다다른다. 첨예한 봉우리는 아니고 두리뭉실한 정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계속 능선을 따르지 않고 월미기 안부로 떨어졌다가 다시 주왕의 주능선에 붙을 것이다. 그리고는 금은광이 3거리까지 전진했다가 제3폭포로 떨어질 예정이다. 거기에서 단미와 원중이가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속도가 좀 늦는 것 같아 부리나케 혼자 달려 월미기 안부로 내려왔다. 백련암에서 장군봉으로 오르지 않고 계곡으로 계속 오르면 이 월미기에 도달하게 되는 안부 지점이다.
월미기에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다시 오르막을 올라 주능선에 도달한다. 중간에 쉬고 기다리고 하는 장소나 여유가 없었다. 너무나 가물어 약간의 미동에도 흙먼지가 날아올라 알러지가 심한 내 코를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능선에서 한참을 기다리니 친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올라왔다. 그리고는 바로 도시락을 깠다. 그들은 원하지 않았지만 도시락은 내가 경주에서 싸 가지고 왔다. 밥은 찹쌀을 섞어 내가 직접 지었고 반찬은 부족하지만 핫꽁치 조림, 오징어혼합젓갈, 꾓잎에다 김치를 단미가 담아줬다. 아무리 부족해도 김밥보다야 낫겠지. ㅋㅋ 그래도 모두들 맛있다고 한다. 하긴 남이 싸 가지고 온 것을 맛 없다고 하는 멍충이는 없겠지?
이제 주능선을 타고 금은광이 방면으로 나아간다. 거리는 약 2km지만 평지 수준이라 금방 나아간다. 이른바 여기는 주왕의 깊은 산속이다.
산행 중간에 흉칙한 광경을 목격한다. 가만 보니 주왕산 전체의 소나무들이 이 지경이 되어 있었다. 알아보니 이 흉칙한 소나무의 상처는 1960년대 중반, 당시 어려운 경제 상황 때문에 개발하다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어려운 때는 정말로 심했는 모양이다. 이 깊은 산중의 소나무 송진까지 채취했으니 말이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상처의 흔적은 계속되고 있다. 자연 손상은 그 복구가 어려운 법이다.
막바지 금은광이 3거리까지 부지런히 올라오는 왕십리 세친구. 근래 과로와 신경 쓰임으로 몸이 많이 축 나 지난 주 월출에서 다소 고전했지만 오늘 주왕에서는 조금 회복된 느낌이다. 하지만 아직 많이 멀었다. 수영으로 단련된 몸의 기능은 산행 시의 기능과는 별개인 모양이다.
드디어 도착한 금은광이 3거리. 여기서 저 밖으로 넘어가면 약 5km 지나 유명한 달기폭포가 나온다. 우리는 그 반대쪽인 제3폭포 쪽으로 내려갈 것이다. 바로 직진하면 금은광이인데 최근에는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산림 보호 차원인 것 같다.
저 길로 내려가면 약 2km지나 제3폭포가 나온다.
드디어 다 내려왔다. 그리고는 주방천 상류를 만난다.
누가 예전에 주왕을 말하길................ 松松栢柏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라!
‘소나무, 잣나무, 바위마다 돌아가고, 물과 물, 산과 산이 처처에 기이하도다!’.....................라는 뜻이겠지.
원래 주왕은 주방천을 따라 들어와 1, 2, 3폭포를 차례로 지나 이 곳에 닿았다가 조금 더 들어가면 내원동마을에 도달했다. 그 산중마을에서 아름다운 하루밤을 보낸 뒤, 산을 더 들어가 저 멀리 보이는 사실상 주왕산의 정상인 왕거암에 올랐다가 그 뒤를 넘어가면 주왕 최고의 비경지대 절골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절골 마지막 부분에 주산지가 있다.
절골은 주왕산 남동부 내주왕 계곡에 있는 조용한 장소로, 맑고 깨끗한 물이 사철 흐르고 있을 뿐 아니라 죽순처럼 우뚝 솟은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별천지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비경지대이다. 약 8km에 달하는 계곡의 아름다움은 1, 2, 3폭포로 일컬어지는 화려한 외주왕산에 비길만 하다.
이제 제3폭포를 만난다. 그동안 무척이나 가물어 폭포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산이 깊어 물은 있다.
외주왕은 주방천계곡에 차례로 선 1, 2, 3폭포로 유명한데, 주왕산의 학소대 위쪽에 있는 제1폭포는 사면이 바위로 둘러싸인 속에 옥같이 맑은 물이 쏟아지고, 바로 위에 선녀탕과 구룡소가 있으며, 그 1km 위에는 아담하고 주위경치가 빼어난 제2폭포가 있다. 왼편으로 500m 되는 곳에서는 웅장하고 거대한 2단의 제3폭포를 볼 수 있다. 이 폭포들이 주왕산 국립공원의 핵심이라 하겠다. 물론 그 중의 압권은 제1폭포 주변이다.
우리가 지나온 주능선과 금은광이 부근은 급경사의 지형으로서 외주왕 계곡은 기암이 용립해서 절경을 이루어 이곳 경관의 특색처럼 되어 있다. 이곳에는 뛰어난 자연경관 요소가 많은데 이 곳이 주왕의 경치 중에서 백미에 속한다.
제3폭포 하단폭. 수량이 많은 시기에는 절경을 이루지만 지금은 아니다.
제3폭포의 상단폭과 하단폭을 한꺼번에 잡아 보았다.
잠시 들어가야 하는 제2폭포를 생략하고 바로 1폭포로 왔다. 말이 폭포이지 폭포보다 주변의 지형이나 바위군들의 형세들이 절경이다. 이른바 산세와 웅장한 바위군들과 그 사이를 흐르는 물들이 3위일체가 되어 절경을 이루어내는 곳이다.
제1폭포 부근의 광경
가물어도 여전히 맑은 물
제1폭포를 지나가는 길에 포즈를 취한 박종수와 전종성. 우리도 이제는 제법 늙었는가? 어렴풋 노티들이 난다.
제1폭포 하단폭이다.
전설에 따르면 주왕이 후주천왕(後周天王)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주왕굴에서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둘 때 흘린 피가
주방천을 붉게 물들이며 흘렀는데,
그 이듬해에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꽃이
주방천 물가에서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그 후 해마다 수달래(산철쭉)는 늦은 봄부터 초여름에 이를 때까지
주방천에서 아름다운 빛깔의 꽃을 피웠던 바,
사람들은 그 꽃이 주왕의 넋이라 전하고 있다.
지금도 수달래는 해마다 주방천 계곡을 따라 주왕의
전설을 담은 꽃망울을 터뜨린다고 한다.
흔히들 주왕산하면 수달래 축제로 유명한데
수달래가 뭘까?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수달래는 산철쭉으로 꽃 빛깔은 진달래와 비슷하나
수달래가 더 진한 편이라고 한다.
특이한 것은 꽃잎 하나하나에 반드시 20여개의 검붉은 반점이 있단다.
이제는 진달래와 수달래 구별이 가능해졌다.
물론 5,6월에 피는 연달래(철쭉)는 그들보다 더 연한 색깔이다.
주방천 협곡 지대를 지나는 전종성과 박종수, 그리고 맨 뒤에 박승배
학소대 부근의 시루봉.
시루봉의 또 다른 모습
시루봉 바로 앞에 버티고 선 학소대(鶴巢臺). 사진은 이렇게 밖에 못 보이지만 실제는 거대한 오버행의 암벽이다. 마치 하늘을 찌를듯이 솟은 절벽 위에는 청학과 백학 한 쌍이 둥지를 짓고 살았다하여 학소대로 불린단다. 어느 옛날 백학이 사냥꾼에게 잡혀 짝을 읽은 청학은 날마다 슬피 울면서 바위 주변을 배회하다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슬픈 사연이 전해오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학소대 다리를 지나는 친구들. 전종성과 박승배는 부지런히 촬영을 하고 박종수는 그 광경을 쳐다본다.
부지런히 걸어 출발지였던 대전사에 도착한다. 단미와 원중이는 제3폭포에서 기다리다 지쳐 이곳까지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전사 뜰에 핀 수국의 모습이 수수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단미는 전화를 받고 있고 원중이는 그것이 시끄럽다고 야단이다. 저놈 이 조용한 절에서 시끄럽다니 앞으로 어디서 살아가겠는가? 한심한 놈이다.
하나둘씩 우리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단미와 원중이가 오고 있고 박종수가 대전사 보광전을 쳐다보고 있다.
떠나기 전에 아쉬워 다시 한번 기암을 쳐다본다. 주왕산 입구에 큰 비석처럼 웅장하게 솟아있는 이 기암은, 옛날 이곳에 은거하던 주왕이 적장이었던 신라 마장군과 싸울때 볏집을 둘러 군량미를 쌓아 둔 것처럼 위장하여 마장군이 이끄는 신라 병사의 눈을 현혹케 했다는 설이 있고, 그 후 마장군이 이곳을 점령했을 때 대장기가 세웠다고 하여 기암이라고 불리운다고 했다.
주왕산 상가지역을 지난다.
송이동동주를 퍼 놓고 도토리묵을 쳐 내어 한잔 마셔대다가 기념 촬영. 너무나 밝은 날이라 역방향의 조명이 부족하다.
주왕을 떠나기 전에 잠시 들러본 유명한 주산지. 경북 청송군 부동면에 위치해 있다. 조선 숙종 때인 1720년에 쌍기 시작하여 경종 때인 1721년에 완공되었다는데, 길이 100m, 너비 50m, 수심 7.8m이다. 한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어서 저수지 아래의 이전리 마을에서는 해마다 호수 주변을 정리하고, 동제를 지낸단다. 물에 잠겨 자생하고 있는 왕버들이 유명한데 오늘은 너무 가물어 왕버들들이 모두 몸체를 드러내고 있다. 주산지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은 김기덕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가 되고나서 부터이다.
그나마 몇 그루는 물속에 잠겨 있다. 저 나무가 물속에서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원래 새벽에 보는 주산지의 모습은 이렇다. 새벽의 쿨한 공기와 함께 이런 광경이 펼쳐지면 장관이다. 나는 봤냐고? 물론 나는 새벽에 이 광경을 봤다.
주산지를 내려오다가 우연히 발견한 바위 밑의 석청. 대형 꿀벌들이 떼지어 만든 저 석청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곳에 위치해 매우 구하기 힘든 진귀한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도 그저 구경만 할 뿐이다.
세 친구와 주산지에서 헤어지고 단미, 원중이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 청송 얼음골 어느 길에서 발견한 이상한 폭포. 조금 더 지나가니 팔각산이 위치한 절경지 옥계계곡이 나타났다. 친구들이 이 것도 보았다면 더욱 감탄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