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의 낮잠
손가락 끝에도 길이 있을까
손톱이 길어졌다
기억나지 않던 기억이 살아났다
새벽이 오기 전에 깨어나는 새의 심장처럼
손금이 요동친다
제때 깍지 못한 손톱
어제 자라 난 길이보다 오늘 자라는 길이가
더 긴 사연을 찾아
내일을 자극한다
내 속에서 걸어 나온 손톱이
내 것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떠 있는
낮달
물컹했던 통증의 내부
그때마다 만나는 눈물의 염도
길보다 더 길게 자라나 하늘을 단단하게 포장하는 시간
손가락 끝에서 심장이 뛴다
천천히 당신이 보인다.
분실물 보관함
억새꽃은 눈은 있지만 입술이 없다. 주인을 찾아주세요. 안내데스크에 맡기며 시락국밥집 앞에서 주웠다고 한다.
단축키 일 번을 꾸욱 눌렀다. 저장된 연락처가 없습니다.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순간이 가을 강처럼 깊어 간다. 접혀있는 시간을 열어본다. 시들어 버린 빈 하늘과 마른 햇볕에 닳아버린 애기동백 한 송이가 들어 있다.
소리가 들린다. 단풍나무 속에서 허리가 푹 꺾인 할머니가 걸어 나온다. 꽃 진 살구나무처럼 서있다.
누런 이를 보이며, 스러진 청춘이 숫자처럼 박혀있는 폰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온다. 사라진 기억보다 돌아온 기억 쪽으로 가까워 지려는 모습이다.
어진이
그러니까 그는 어진이가 태어나는 줄도 몰랐다 그날 금줄에는 숯과 솔가지가 달려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어질어라 어질어라 어진이라 불렀다 태어날 때부터 울음보를 가지고 태어난 어진이는 항상 옆구리가 시렸다 업히기를 좋아했고 기우뚱 기울어져 어딘가에 기대어 있었다 누군가 한 사람은 허약한 곁을 쓰다듬고 지켜 주어야 했다
첫울음을 안아주지 못한 그는 호인댁 집 앞에는 금줄에 고추까지 달렸더라며 되려 성난 목소리로 마당을 쩌렁쩌렁 채우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혼자서 아이를 낳느라 하늘이 노래지는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는 자식이 태어나는 줄도 모르고 동네 개울에 빠진 처녀를 건져내고 있었다 사람들로 빙 둘러싸인 채 싸늘해진 시신을 수습하느라 땀을 줄줄 흘리며 산고 아닌 산고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딸 생일이 다가오면 추월골 용지방에는 처녀의 혼을 구하는 굿판이 출렁거렸다
늦은 그 날, 아버지는 검게 그을린 얼굴에 어진이의 발 도장을 둥글게 찍고 또 찍고 늙은 주름 사이로 뜨거움은 흐르고 흐르고
결빙의 습관
길을 잃었다
천장을 뚫고 흘러나왔다
열선은 싸늘해지고
통과하지 못한 예감은 멍이 들었다
바람의 나부낌도 무게로 다가와
눈물의 흔적을 씻어 내려야 하는
폭포가 생겼다
흥건한 바닥에 물고기는 아직 오지않았다
일단 잠그기로 하자
틈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젖은 가슴을 닦는다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서로를 관통하지 못하고 얼어버린
검은 공터가 넓어져 간다
오로지 너를 통해서만 읽혔던 세상일들이
깊이와 길이를 잴 수 없는
흐르지 않는 물의 길
조용히 다문 결빙은 습관으로 변질되었다
동파된 가슴을 동여맨다고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잃어버렸던 표정을 하나씩 찾아 나서기로 하자
너의 혈관 안에
나의 맥박이 숨 쉴 수 있도록
얼음장 물꼬를 튼다
그의 공구 통에서 겨울이 부서진다
건반 속으로
해안도로를 끼고 그녀를 향해 달린다
법성포에서 따라온 파도가 팔십 여덟 번의
숨을 고르는 동안
모래미 횟집에서 나온
벌거숭이 갯벌이 길가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
시폰원피스 살랑거릴 때 웃음소리 맞춰
건반을 두드리면
바닐라바람은 사구를 따라 흘러가고
모래는 소금을 굽는다
섬을 떠나온 사람을 실은 작은 배가 점점 작아지고
절벽이 벽을 보여주기 시작하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전의 마음으로
단정해지기 시작하는 구름의 화음
붉어지려고 하는 피아노 소리에
가만히 눈길을 기대면
노을을 두 손에 옮겨 담은 그가
나를 켜기 시작한다
먼데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오기 시작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