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만 형이라고 하고 친구같이 지내자.
서로 부담 없이 말하기로 하고,
그리고 네가 할일은 내 조수니까 장부와 수량 맞추어 보는 거,
재료코드 넘버 외우는 것부터 배우기로 하자,
당장 시작하는 거야, 먼저 작업복부터 갈아입어라.”
‘녀석이 느물스러운 것이 나와 동갑인 줄 알면 아주 혀를 빼 물고 덤벼들 놈이야,
너는 그래서 풀어주면 절대 안 돼.’
‘누나 결혼식 날자가 다가오는데, 나는 무얼 누나에게 주지?
누나 얼굴을 아무렇지도않게 마주 볼 수 있을까?
그래도 가야 돼, 축하 해 줘야지.
그리고 깨끗하게 잊어주겠어.
우리의 관계를 누나의 언니 밖에 모른다고 했으니
다른 어떤 불상사한 일이 벌어지거나 하진 않을 테지.’
궁리하던 정길이 문득 교회에서 맡은 연극의 배역이 생각났다.
주인공의 배역이 자신이라는 것을,
정길이 이왕 맡은 성극이니 잘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전도사가 정길이 대신할 역할의 주인공을,
성경에서 찾아서 읽어보라고 권했던 것을 생각하고,
성경에서 호세아서를 찾아본다,
정길이 갖고 있는 성경은 신약성경만 있는 것이라 찾지를 못하고,
그 자매에게 빌려서 볼까하고 그 녀의 얼굴을 떠 올려 본다.
‘호세아서를 1장부터 2장까지 세 번 정도 읽어보라고 했는데,
이 성경에는 없네,
구약이라고 하는 성경에 있는 건가?
대본이나 보자, 에이! 무슨 대사가 이렇게 많아.
외우기 힘들게.
다 외우려면 강의록 공부하는 만큼 힘 빼게 됐군.
주인공끼리 얼굴 맞대고 하면 빨리 외울 텐데.
전도사님에게 말해봐?
혼자서 하려니까 진짜 되게 재미없네.
인상은 무표정으로 약간 심각하게.
고 멜,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도~다음이 뭐지?
으음! 후우 어렵네, 어려워.’
걱정들이 많았으나 공사가 순조로이 풀려가자 진혁의 얼굴 표정에서 주름살이 펴진다.
인부들 역시 마찬가지로 신이 났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을 더 할 수 있고
돈도 더 버는 까닭에 평소에 눈치 보며,
슬슬 일하던 것이 점심시간을 단축해 가면서까지 일을 한다.
“사장님,
미국 감독관이 복합전선 배선을 수거해 바로 설치작업 하는걸 보고,
처음에는 못 마땅해 하더니,
지금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잘 한다고 하는 군요,
예상보다 까탈 부리지 않고, 다행스럽게 넘어 가주는 것 같네요.”
“우리에게 정말 다행입니다.
공기가 오히려 더 앞당기어 졌으니,
본사에서도 한시름 놓았을 겁니다,
좋은 결과를 얻었기에 곧 바로 추가 공사를 발주 받을 거 같습니다.
항시 사고 조심해야하고, 긴장하세요,
더 이상 어떤 실수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의 성극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정길과 은숙의 눈인사가 서로 쳐다보며 안부를 묻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은숙도 정길이 느낀 어떤 야릇한 감정을 느낀 것인지
가끔씩 정길을 흘끔거리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리고는 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엽고 아름답다.
“자! 전원 첫 리허설을 성황리에 잘 마쳤습니다.
이번 극은 제가 새롭게 준비 해 본 것인데,
예상보다 더 은혜로운 성극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앞으로 전원 모임이 세 번입니다.
대화 대상자끼리 소규모 모임과,
전원 리허설에 관해 하실 말씀 있으시면 손을 들어 주세요,
좋은 말씀 주시기 바랍니다.”
“전도사님, 제 대사가 너무 많아서인지 혼자서는 연습이 잘 안돼서요,
그래서 건의 합니다.
별도의 시간을 조정 해 정해주시면,
조 은숙 자매와 따로 시간을 정해 만나서 연습했으면 어떨까 합니다.”
“우 우 우 하하, 호호 누구는 좋겠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 주세요. 우우우 워워.”
“우리도 별도로 만날 시간 좀 줘요, 우 우.”
“전도사님 우리도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어요.”
“자 자! 조용히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먼저 상대역인 은숙 자매 생각은 어떤지요?”
“저도 찬성입니다,
저도 대사가 많아서 혼자서 해 보려니 잘 안 되더군요,
장소를 서로의 교통이 편하고
방해 받지 않고 연습할 수 있는 곳을 전도사님이 알아보시고,
연습할 시간까지 정해 주세요.”
“그러면 희숙 자매도 함께하는 대사가 많은 편이니,
두 분과 정길 형제에게 제가 알아보는 대로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평일 저녁 7시 이후에는 세 분 모두 시간들이 있으시지요?”
막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 온 정길에게 교회의 전도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 성극 연습 때문이로구나, 하고 반갑게 전화를 받는다.
“예 전도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연습 장소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희숙 자매의 집이 두 분의 집 중간 정도에 있으니,
희숙 자매 집에서 월, 화, 목요일에 저녁 7시 30분에 만나
9시 30분까지 연습하는 것으로 하지요.
네 감사합니다. 주소를 불러 드릴 게요.
내일은 첫 날이니 저도 가 보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승리하세요.”
‘누나를 내 마음속에서 아직 지우지도 않은 상태에서
은숙 자매를 집적거리는 것이 내게 옳은 일인가?
그런데 내 가슴에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그녀의 형상이 예전부터 새겨져 있던 것 같은 느낌은 대체 무엇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사람을 본 것 같은 친밀감의 정체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지.
누나를 잊으려고 하는 내 의지가 그 녀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는 것인가?
그런 것인가?
그래, 누나를 잊자.
누나를 정말 나에게서 완전하게 떠나보내야 해,
내 마음이나 누나의 마음속에 조금의 앙금이 없도록,
그래야 나중에 만나더라도 서로 상처가 안 남아 있어야 편안해.’
“정래야 나다.
지연누나 결혼하는데 선물이나 살까하고 전화했다,
너나 나나 전화있는 집 옆에 사니까, 우리 서로 바로 받아서 좋다.
혼자가기 싫어서 그러는데 같이 시내 나가자.
영화도 같이 보고 저녁도 먹자,
돈? 그래 내가 다 낼게,
돈 염려 말고 버스정거장에서 만나자, 이 턱에 털도 안 날 자린고비야.”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이 목각 원앙새 한 쌍을 선물할까?
아니! 내가 사 줘서 볼 때마다 내 생각하면 안 돼.
선물은 안되고 그냥 돈으로 줄까?
누나가 나에게 쓴 돈이 엄청 많은데, 갚는 의미에서 돈으로 주자.
가장 나을 것 같아. 얼마를 하지?
후후후 돈이야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역시 서부 영화는 누가 뭐래도 존 웨인이 최고야.
너도 그렇지? 제인 키스 미,
하하하하 정길아 우리 순대하고 소주한잔 하고 가자.”
“임 마! 이제 교회도 다니니까 술 좀 줄여라.
누가 노가다 아니라고 할까봐 그렇게 마시냐?
그리고 수철이 형님 하고, 누나는 잘 되가는 거지?
정숙이 누나가 더좋아 하는 거 같던데?”
“야야, 수철이 형 술 끊은 거 보면 모르냐?
뱃놈 자식이 술 끊을 정도로 우리 누나가 좋다는 거야.
우리 누나가 나 술 마시는 거 아주 안 좋아 하거든,
그래서 수철 형도 금주할 수밖에 없을 거다, 나도 이제 좀 줄여서 마셔야지.”
“자! 순대하고 오뎅이나 먹자,
너도 이참에 술을 끊지?
네 부인 될 사람이 누구일지 아직은 모르지만
그 여자도 좋아하지는 않을 거다.
남편 술고래 인거 좋아하는 부인은 없을 거다.”
“야! 너 때문에 교회에 가는 거야.
혼자 가기 싫어 사정하면서, 아주 이제는 내 형 노릇까지 하려고 하냐?
아줌마 소주 한 병 주세요. 컵도! 아니! 큰 컵으로요,
얘는 요즘 안 마셔요.”
“임 마, 그래도 조금만 줘. 너 혼자 마시면 무슨 재미가 있냐?
그래도 둘 정도는 같이 잔을 부딪치며 마셔야 좋지.’
마음이 어수선해지자 어머니 생각이 더 나는 거 같아.
정길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편지 쓸 차비를 한다.
지연이 없으면 죽고 못 살 거 같았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보니.
요즘 은숙에게 느끼는 감정도 나중에 헤어지게 되면 역시 그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처음 본 사람에게 지연누나보다 더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것이,
자신이 여자를 밝혀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조상들이 그러했다니 그것도 유전인가?
싶은 생각에 은숙에게 향하려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 잡어 본다.
정길이 동생들과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면서 편지를 쓴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동생들도 잘 있지요?
정옥이는 미용학원 마치고 미용실에서 시간일 한다고 했는데,
학교는 안 빠지고 다니면서 하는 거지요?
요전 정옥이 편지에는 학교 다닌다는 말이 없어서요.
정옥이하고 정필이에게 편지 자주하라고 전해 주세요.
어머니 이제는 엄마라고 하면 어쩐지 도로 아이가 되가는 것 같아서
그냥도 어머니 하고 말이 나오네요.
나도 이제 어른이 된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해도 그렇거든요.
이곳에서는 내 나이를 스물 둘로 세 살이나 위로 보고 있어요.
아버지가 두 사람과 동업으로 세운 천진기업사라고 하는 우리 작은 회사는
아직 회사 건물은 없지만 일을 알찬 것만 맡아서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사는 거 보면 가족이 저녁이면 모여 함께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면서 재미있는데,
우리 가족은 그렇지 못해 마음이 안 좋습니다,
이번 구정에는 가지 못하겠어요.
공사 완공을 급하게 끝내야 해서 그렇습니다.
내년 구정에는 꼭 갈게요.
첫댓글 즐독 했습니다 ~~~ 감사합니다 !!
저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