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익(洪成益 1883.12.6.~1920.1.30.) 외세 침략이 거세지고 국내 정치세력 또한 이합집산이 극심했던 1883년 평안북도 정주군 관산면에서 태어났다. 숭실 초기 입학생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했고, 기독교에 입교하며 근대문명을 받아들이고 약관의 나이 전후에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며 근대민족의식을 싹틔워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배움과 신앙은 시대 정신과 결합하여 민족위기 극복을 위한 애국활동으로 승화되어 갔다. 1902년 9월 숭실중학에 입학한 홍성익은 1년간 예비반인 무등반을 거쳐 4년의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1907년 8월 제4회로 졸업했다. 이어 곧바로 숭실대학에 진학했으나 암울한 민족 상황은 그에게 졸업의 영광을 안겨주지 못했다. 1907년 안창호의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벌였고, 그 실천방략으로 당시 대다수 청년개화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교육구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평북 철산의 오룡천중학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09년 이후에는 기독교계 민족학교로 알려진 선천의 신성중학 교사로 재직하며 학교 및 교회 내 청년들의 새로운 민족 사상 고취에 전력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결국 일제가 조작한 1911년 테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감옥에서 18개월간 복역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선천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신성중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던 홍성익은 기도회에서 학생들에게 “학생들아, 우리는 죽으면 다 죽고 살면 다 살자. 오늘이 독립을 선언하는 날이니 금일이 실로 우리의 사는 날이다.”라고 하고 오른손 무명지를 깨물어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 여섯 자를 혈서하며 학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3일 동안 만세시위 행진을 지도했다(「독립신문」1920.02.17.). 이 때문에 일본 경찰이 그 주도자로 홍성익을 체포하려 하자 피신해 있다가 주변의 권유에 따라 3월 하순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홍성익은 상해 임시정부의 평북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을 시작했지만 오래지 않아 사직하고 중국 안동의 교통사무국장으로 교통 및 통신사무에 종사했다. 안동에서 오동진, 최지화 등과 같이 조국독립을 촉진하는 비밀결사로 ̒안동임시의사회(安東臨時議事會)’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1920년 9월 임시정부 교통부 안동지부 사무국장으로 피선되어 평안도와 황해도의 교통 및 통신 사무에 진력했다. 그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발간을 위해 한글 활자 7천 3백자를 인수하여 신문 발행에도 기여했다. 불철주야 임시정부의 교통사무 업무에 진력하던 홍성익은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져 치료차 영국인이 경영하는안동의 태성당병원(泰誠堂病院)에 입원해 있던 중 일경과 내통한 김극전의 밀고로 체포되어 신의주감옥에 투옥되었다. 젊은 10여 년 동안 실로 대한의 국민된 의무를 다했던 홍성익은 1920년 1월 30일 옥중에서 3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1963년 그의 독립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그의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소파 방정환, 1959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살해된 조봉암, 숭실 출신으로3∙1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박희도 목사 등과 함께 안장되어 있었는데, 독립유공자 예우에 따라 1973년 10월 31일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옮겨졌다. 비문 뒤에는 그의 어록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순국자의 길>짐승에게는 이성이 없다. 미물은 원초적으로 이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항일투사의 길은천국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을 때 나는 철인(哲人)이 될 것이고 세상 만인이 나를 따를 때나는 순국인이 될 것이다. 항일인(抗日人)에게는 값싼 눈물은 있을 수 없다. 철두철미 인간적일 뿐이다. 초인(超人)은 표정이 없다. 오직 밝고 푸른 허공이 있을 뿐이다. 대한독립 만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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