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4일에 '고대 발해는 산동성 서쪽에 있던 거대 호수'에 대한 유튜브 글이 올라와서 2019년에 올렸던 글을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 발해(渤海)는 원래 어디인가?
우리는 '발해(渤海)가 현 중국의 내해(內海)로 서해(황해) 북쪽을 가리키는 발해만(渤海灣)이라고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동만주(東滿洲)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표명한 대조영의 나라 대진국(大震國, 발해)의 근거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사료들은 그렇지 않다고, 우리가 아는 것이 틀렸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서해 북쪽을 발해만(渤海灣)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28년 이후 입니다. 그럼 고대 발해는 어디를 지칭하는 말이었을까요?
발해는 대야택(大野澤), 거야택(巨野澤) 그리고 동해(東海)라고 불렀다고 중국 사료에 적혀있습니다.
▲ 하남성(河南省)과 산동성(山東省) 사이에 있던 발해(渤海)는 현 중국의 내해(內海)와 동만주(東滿洲)로 이동 되었다. ⓒ 고구려역사저널
- 발해는 원래 어디인가?
발해(渤海)를 검색하면 대야택(大野澤) 또는 거야택(巨野澤)이 나타나는데 같은 지명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두 지명을 검색 해보면 다음과 같다.
(번역) 대야택(大野澤) : 거야 또는 거야택(巨野澤)이라 부르며 고대의 저명한 호수이다. 거야택은 현 산동성 거야현 북쪽에 있고, 고대에는 제수와 사수가 서로 연결되어 접해 있었다. 당나라 때의 거야택은 수면이 남북 삼백리 동서 약 백리이며 대야택이라고도 불렸다. 송나라 때 거야택의 남부는 마르고 땅이 굳어져 평지가 되었고, 북부는 양산박의 일부가 되었다. 그 가운데 수초가 많이 살고, 물고기와 벌레가 아주 많다.
(원문) (大野澤) : “钜野”又称钜野泽,是古代著名的水泊,《尚书》、《周礼》等古籍中均有记载。野泽的故址在今山东省钜野县北,在古代是与济水、泗水相连接的。唐代的钜野泽,水面南北长三百里,东西宽百余里,号称大野泽。宋代时,钜野泽的南部干涸为平地,北部成为梁山泊的一部分,其中水草丛生,鱼虫很多。
(번역) 거야 : 원래는 거야로 거야택(巨野澤)으로 인해 이름을 얻었다하며 일명 대야택(大野澤)이라 하며 오대시대 이후 호수가 말라 평지가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거야, 가상, 운성, 양산의 지면이다. (참고로 천자문의 ‘택유거야(澤有鉅野)’란 4자성어가 바로 대야택이다.)
(원문) 巨野,原为鉅野,因鉅野泽而得名。鉅野泽,又名大野泽,是古代有名的湖泊沼泽地。古时候童子启蒙读物《千字文》(天地玄黄,宇宙洪荒),其中有一句“泽有鉅野”,就是指大野泽。大野泽在现在山东巨野的北面,到唐朝时,湖面南北长三百余里,东西宽百余里。五代以后,湖面自南向北逐渐干涸,中南部成为平地,也就是现在巨野、嘉祥、郓城、梁山的地面,其北部就成为梁山泊。
▲ 고대 거야택(巨野澤)은 하남성(河南省)과 산동성(山東省) 사이에 있었던 내륙호수로 지금의 거야, 가상, 운성, 양산, 하택 일대이고, 동평호 부터 미산호까지의 호수가 그 흔적이다. ⓒ 고구려역사저널
- 그렇다면 위 대야택과 거야택은 발해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대야택(거야택)과 발해가 같다는 자료는 <해경신탐(海經新探)>으로 산해경(山海經)을 탐구하여 설명한 자료이다.
(번역) 발해는 거야택의 옛 이름으로 이 이름은 한나라 초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전국책 조나라책>에 설명된 “제(齊)가 발해를 건너다”의 발해는 바로 거야택이다.
<한서 무제기>의 원광 3년 봄 하수(황하)가 범람해 언덕에서 꺾여 동남류해서 발해로 들어간다는 발해는 거야택이다. 그리고 거야는 동해(東海)라고 불렀다.
<사기 항우본기>에서 “항우가 이미 서쪽에서 와 동해(東海)로 정했다.”는 동해는 거야를 가르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진서.지도기>를 인용한 <수경주>에서 전하기를 “름구란 자는 춘추시대의 제(齊)나라 도읍인 동해(東海) 사람임이 밝혀졌다. 땅은 현재 범현(范縣) 경내에 있다. 멀리 한나라와 위나라의 동해군이고 발해군 도읍은 동아에 비해 아주 멀다. 위.진 시대의 거야택은 사람들에 의해 동해로 불렸다. 거야가 바다 '해(海)'라는 이름으로 불린 건 2천년이 지속된다.
(원문) 勃海是钜野泽的古名。这个古名一直袭用到汉初。《战国策·赵策》中苏秦说:“秦攻赵则韩军宜阳,楚军武关,魏军河外,齐涉勃海,燕出锐师以佐之。”这个勃海就是钜野泽。
《史记·河渠书》云:“今天子元光之中而河决于瓠子,东南注钜野,通于淮泗。”
《汉书·武帝记》说是“元光三年春,河水徙从顿丘,东南流,入勃海。”两文对照,可知这个勃海还是钜野。又,钜野因此也称东海。
《史记·项羽本纪》称,汉之四年,因为彭越攻东阿,杀楚将,项羽回师破走彭越,接着说:“项王已定东海,来西,与汉俱临广武而军。”东阿距勃海很远,这个东海无疑义是指钜野。
《水经注》引《晋书·地道记》云:“廪丘者,春秋之齐邑,实表东海者也。”地在今范县境内,距汉、魏的东海郡、渤海郡都比东阿更远,说明魏晋时的钜野还被人称为东海。钜野的海名持续了两千来年。
위 설명에 따르면 발해는 대야택(거야택)의 고대 명칭을 말하는 것으로 동해(東海)로 불리기도 했으며, 바다(海)라는 호칭으로 2천년 동안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물증으로는 청나라가 망하고 민국이 성립된 1922년 영국에서 발행된 중국 지도에 현재 중국의 내해는 1922년에 발해(渤海)라 불리지 않고 북직예해(北直隸海)로 불렸다.
참고로 하북성의 역사연혁을 보면, 현재의 하북성은 명나라 때는 북직례(北直隷)로 불렸고, 1645년 직예(直隸)로 개칭되며, 1669년 직예성(直隸省)으로 불리게 된다. 1928년 6월 20일 국민정부의 결정을 거쳐 직예를 하북성(河北省)으로 바꾸고, 북경을 북평으로 바꾼다. 그래서 1922년 지도에 중국의 내해가 발해가 아닌 북직예해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 1928년 지명이 변경되었다는 현재 하북성(河北省)의 연혁. 이 때 발해(渤海)라는 지명이 지금의 중국 내해(內海)로 옮겨졌다. ⓒ 고구려역사저널
▲ 1922년 영국에서 발행된 지도에는 현 중국의 내해(內海)가 발해만(渤海灣)이 아니라 북직례만(北直隷灣)으로 되어 있다. ⓒ 고구려역사저널
- 대조영의 나라는 발해(渤海)가 아닌 대진(大震)
668년 고구리가 망하자 장수 대중상이 바로 후고구리(後高句麗)를 세웠고, 아들 대조영이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 후 국가체제를 정비하고는 국호를 대진(大震)으로 바꾸었다. 즉 우리가 우리를 부르던 국호는 대진국이었다. 즉 고구리라는 나라는 망하지 않고 국호와 태왕의 성씨만 바뀌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발해(渤海)는 당나라가 일방적으로 불렀던 국호로, 713년 당나라 측천무후가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면서부터 우리의 대진국은 당나라로부터 일방적으로 발해로 불리게 된다.
참고로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일방적으로 책봉(?)한 것은 대조영의 주 활동무대가 바로 발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발해는 현 중국의 내해(內海) 또는 동만주(東滿洲)가 아니라 당시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었던 100리 X 300리 크기의 내륙호수인 대야택(大野澤)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조영이 세운 나라 대진국은 동만주 일대가 아니라 대야택 부근 북부 하남성 일대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물론 유적이 발견된 동만주도 대진국에 속해 9,000리 강역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
출처: 고구려역사저널
첫댓글 대야택, 거야택을 발해(勃解)로 비정하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짝퉁 고조선)을 정벌려고 누선장군 양복의 제나라 병사가 건넜다는 발해의 위치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발해(勃解)는 한나라 시대에 덕주시 부근에 있었던 발해군이나 덕주시 부근의 하수이거나 덕주시에 있었던 고대 호수로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