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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그리고 간도 기행 이야기 1
이은봉
첫째날(8월 5일):
약속된 시간에 제대로 맞추려면 아침 7시에는 인천공항 행 리무진 버스를 타야 했다. 나와 송윤옥 초록교육연대 사무처장은 새벽부터 출발을 서둘렀다. 하지만 지나치게 서두르면 실수를 하기 마련! 공항버스가 길음동 정류장에 도착해 짐을 실으려다가 보니 배낭이 없었다. 아내인 송윤옥 사무처장의 승용차에 배낭을 두고 내린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승용차 안의 배낭을 다시 가지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로 호들갑을 떨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허겁지겁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최두열 팀장이 우리 부부에게 딱 알맞은 시간에 도착했다고 격려를 해주었다.
비행기는 우리 일행을 싣고 이내 대련으로 날아갔다. 입국 소속을 밞고 대련공황을 빠져나오는데, 거무틱틱한 얼굴의 사내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우리 일행을 반겼다. 사내는 ‘최두열’이라고 크게 쓴 A4용지 하나를 들고 있었다. 우리 일행, 즉 이번 백두산-간도 여행 팀을 싣고 다닐 중형 버스의 기사였다. 버스의 기사는 자기 자신을 장따거라고 소개했다. 버스에 짐을 실으며 나는 나 혼자 이번 백두산-간도 여행을 함께 할 우리 일행의 이름을 백간 팀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백간 팀은 모두 16명이었다.
백간 팀은 장따거를 앞세워 점심식사부터 해결해야 했다. 여러 군데 퇴짜를 당한 후 도착한 식당의 이름은 ‘메아리’였다. 일괄해 비빔밥을 시켜 점심밥을 먹었는데, 밑반찬으로 김치찌개, 도라지무침, 건두부 무침 등이 나왔다. 첫날의 첫 식사는 그런대로 좋았다. 내가 워낙 비빔밥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버스는 서둘러 단동을 향해 달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자꾸 눈이 갔다. 고속전철의 전깃줄에 지은 까치집이 우선 눈에 띄었다. 저처럼 위험한 곳에 집을 짓다니! 달리는 버스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자 초록교육연대 김광철 상임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 11박 12일이라는 긴 여정을 함께 하는 백간 팀의 단합을 위해서는 몇 가지 의식이 필요했다. 그는 백간 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10분 이상씩 마음껏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다.
크게 파이팅을 외친 김 대표는 우선 먼저 백간 팀의 팀장인 최두열 선생부터 앞으로 불러냈다. 고성과 통영에서 활동을 해온 최두열 팀장은 스스로를 여행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교련교사출신으로 전교조와 환생교(환경을생각하는교사모임) 등에서 활동을 해온 그는 이번 여행의 가이드 겸 지휘자였다. 다음으로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김덕성 선생! 그는 경남 지방에서 겨울을 나는 독수리 보호운동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어 벌레엄마라고 불리는 애벌레 생태학교의 김도경 선생이 마이크를 잡았다. 짚풀공예 전문가로 작년에 명퇴한 유금자 선생, 욕지도 중학교 교사인 박창명 선생과 건강보험공단에 근무하는 김인숙 부부, 올해에 명퇴한 김현숙 선생, 현직 초등학교 교사(망원초)인 문수정 선생, 3년 전에 명퇴한 기타리스트 정기훈 선생, 단국대학교 법대의 이동희 교수와 현직 초등학교 교사(염경초)인 권향순 부부, 현직 초등학교 교사(세곡초)인 김익승 선생, 작년에 명퇴한 식물전문가 이희천 선생 등도 차례로 마이크를 잡고 자기소개를 했다. 당연히 광주대학교 문창과 교수인 나와 올해 한성여중에서 명퇴한 초록교육 연대 사무처장인 아내 송윤옥도 온갖 우스개를 섞어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이렇게 웃고 떠들며 백간 팀이 압록강 가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장따거는 자신의 버스를 압록강의 하류에서 상류로 서서히 몰고 올라갔다. 아, 압록강! 백간 팀은 모두 탄성을 내뱉었다. 하류의 압록강은 호수처럼 드넓었다. 버스는 하류의 압록강을 가슴에 품고 단동의 중심가를 향해 성큼성큼 달려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비단섬이 보였고, 황금평이 보였다.
이번 여행의 첫 날 밤을 자는 호텔은 단동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압록강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곳이었다. 백간 팀은 호텔에 짐을 부리자마자 우르르 압록강 가로 몰려 나갔다. 압록강 가는 산책하는 사람들로, 여행객들로, 무언가 물건을 파는 장사치들로 벅적거렸다. 명동거리를 방불할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압록강 단교를 향해 서둘러 걸었는데, 벌써 어둠이 내려 그곳에 오를 수는 없었다. 내일 아침 부지런한 사람들이나 각자 다녀와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압록강 유람선은 밤에도 탈 수 있었다.
최두열 팀장의 지휘에 따라 백간 팀 일행은 느린 걸음으로 압록강 유람선 위에 올랐다. 미끄러지듯 배는 압록강의 하류와 상류를 오고갔다. 뱃전에서는 줄곧 중국의 흥겨운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단동은 상해처럼 불빛이 밝고 환했지만 강 건너 편 신의주의는 어둡고 캄캄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초록교육연대의 탈핵운동이 떠올랐다. 핵발전소가 없었으면 단동도 신의주처럼 어둡고 캄캄하겠지. 생각해보면 핵발전소가 없는 북한이 어둡고 캄캄한 것은 당연했다.
뱃놀이를 마다하는 사람은 예부터 없었다. 그만큼 재밌고 즐거운 것이 뱃놀이였다. 하지만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하는 수 없이 백간 팀 일행은 유람선에서 내려야 했다. 유람선을 탄 시간이 30분 정도나 될까.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손짓발짓을 하며 식당에 자리를 얻어 저녁밥을 먹었다. 이번 여행의 가이드 겸 팀장인 최두열 선생이 좀 애를 먹었다.
둘째날(8월 6일):
오늘은 환인의 졸본산성(오녀산성)을 거쳐 집안까지 가는 일정이었다.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친 백간 팀은 서둘러 장따거가 운전하는 전용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일단 오른쪽으로 압록강을 끼고 달렸다. 우리 일행은 잠시 차를 세워 철조망이 세워져 있는 압록강 저쪽 북한 땅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버스를 타고 달리다 보니 압록강은 섬들이 어머니였다. 곳곳에 삼각주를 만들며 흐르는 것이 압록강이었다. 물버들, 아카시, 미루나무 들 사이로 북한 측 초소가 보였다. 더러는 무궁화 가로수들이 이어져 백간 팀을 들뜨게 했다. 몇 그루 자귀나무가 이어지더니 복숭아과수원이 계속 펼쳐졌다. 일일이 봉지에 싸여 있는 봉숭아들……. 샛강으로 이어지는 압록강 가에는 오리농장도 보였다.
차창 밖으로 호산장성이 보였다. 호산장성은 만리장성의 출발지라고 했다. 하지만 최두열 팀장은 이곳 역시 실제로는 고구려 산성일 것이라고 말했다. 고구려의 강역이 확실하고 보면 호산장성 역시 고구려의 산성일 것은 분명했다.
고속도로보다는 풍경이 좋은 국도를 따라 장따거는 버스를 몰았다. 고속도로를 통해서는 졸본산성을 찾아가는 길을 모르는 듯도 했다. 몇 번씩 길을 묻더니 장따거는 급기야 고속도로 안으로 들어와 차를 몰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위에서도 장따거의 버스는 느리고 게으르게 달렸다. 그는 거듭 안전제일이라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터널이 많은 고속도로 위를 한참 달리자 졸본산성이 멀지 않은 곳에서 갈래 길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주유소도 있었는데, 주유소 옆의 식당에 급하게 점심밥을 먹었다. 잉어로 보이는 커다란 생선요리가 특이했다. 아마도 비류수를 막아 만든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인 듯싶었다. 졸본산성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려면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백간 팀은 서둘러 심사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졸본산성 정류장을 향해 떠났다. 버스가 10여 분쯤 달렸을까. 김광철 대표가 식당에 휴대폰을 두고 왔다며 다소 호들갑을 떨었다. 차를 돌려 식당을 향해 3분쯤 달렸을까. 그가 휴대폰이 여기 있다고 소리쳤다. 모두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너무 서둘다 보니 생긴 실수였다.
졸본산성 입구의 주차장은 휑덩그레하게 컸다. 화장실에 들려 정신없이 볼일을 보고는 꽤 비싼 입장권을 최두열 대표로부터 받아 챙겼다.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졸본산성 입구의 박물관으로 막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입장권이 어디로 숨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소란을 피운 다음에서야 가방 속에 곱게 모셔놓은 입장권을 찾을 수 있었다. 얼마 전 김광철 대표의 실수를 두고 크게 웃은 것을 후회했다.
졸본산성에 오르는 길은 999개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졸본산성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었다. 따라서 졸본산성에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직접 걸어올라 갔다. 폐의 일부가 석회화되어 있어 이런 계단 길에서는 늘 숨을 헐떡거려야 했다. 김도경 원장은 약식 가마를 타고 귀부인처럼 그윽하게 졸본산성에 올랐다. 거기에는 약식 가마를 메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작은 마음이 들어 있었다.
산성의 문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너무 덥고 목이 백간 팀 모두 그것부터 하나씩 깨물었다. 시간에 좇기는 백간 팀은 성 안에서 보아 왼쪽으로 길을 잡았다. 이처럼 높은 절벽 위에 이처럼 넓은 평지가 있다니! 한참을 걷다 보니 환히 터진 평야가 내려 보이는 전망대가 눈에 띄었다. 모두들 사진을 찍으며 감탄사를 연발해댔다. 조금 더 걸으니 여기저기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산 흔적들이 보였다. 이윽고 비류수를 막아 가득 물을 모은 저수지가 보였다. 가슴이 턱 터질 정도로 전망이 시원했다. 그곳에는 작은 가게가 있었는데, 옥수수와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나도 몇 푼 털어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었다.
졸본산성은 북부여에서 도망친 주몽이 고구려를 개국한 첫 수도로 알려진 곳이었다.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초기의 고구려를 일으켜 세운 곳이 이곳 졸본산성이었다. 학자 중에는 졸본산성을 이곳으로 추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오녀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청나라의 신화가 담겨 있는 영산일 따름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졸본산성은 훨씬 이곳보다 훨씬 동쪽 아래로 요하에서 가까운 영주 언저리라고 했다.
졸본산성을 내려오는 길은 훨씬 힘이 덜 들었다. 하지만 땡볕의 더위는 여전했다. 버스는 5시가 되어서야 겨우 졸본성의 주차장을 출발했다. 버스가 집안으로 향하자 정기훈 선생이 마이크를 잡았다. 기타를 치며 합창을 하던 중에도 대학시절의 재미있던 얘기를 소개해 백간 팀을 즐겁게 했다. 참 재주가 많은 사람 정기훈 선생님!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던 중인데 경찰이 쫓아와 버스를 세웠다. 졸본산성 근처에서 경찰이 장따거의 버스를 세웠는데 모르고 지나왔다는 얘기였다. 한참을 주춤대다가 출발한 버스는 다음의 검문소 앞에 섰다. 장따거는 그곳 검문소에 들려 한 동안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집안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 도착해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백간 팀은 이내 호텔에 들어가 쉬었다. 내일의 일정을 위해 오늘은 좀 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집안과 백두산 서파 일대는 지난 2010년 여름 광주대학교 동료교수들과 일차 둘러 본 곳이기는 했다. 그래서 그런지 긴장감과 흥분이 조금 덜했다.
셋째날(8월 7일):
집안의 호텔을 나선 백간 팀 일행은 서둘러 5호분의 관람에 나섰다. 5호분은 백호와 주작 등 사신도가 있는 고분이었다. 5호분은 백간 팀을 우르르 빨아들였다. 고분의 벽화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덧칠한 흔적이 역력했다. 현실 벽면에는 여기저기 물기가 보이기까지 했다. 5호분 주변에는 여러 고분들이 보였다. 이들 고분은 발굴은 했지만 공개는 하지 않는 듯했다.
우리 일행은 곧바로 버스로 이동해 고구려의 역사와 호태왕의 치적이 새겨져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찾았다. 광개토대왕비는 사진에서 누차 보았던 것처럼 누각으로 보호되어 있었다.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최두열 팀장의 자세한 설명을 듣자 고구려의 역사가 더욱 확연해졌다.
광개토대왕릉도 그곳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광개토대왕비는 일종의 신도비(神道碑)인 셈이었다. 광개토왕릉은 강돌을 쌓아올린 뒤 그 위에 현실(玄室)을 배치하고 네 면을 피라미드로 쌓아올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광개토왕릉은 이미 다 도굴된 뒤 오래였다. 네 면에 쌓아올린 피라미드도 번쯤은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지석이 발견되어 이곳이 광개토왕릉이;라는 것은 의심이 없다고 했다.
장수왕릉은 광개토왕릉에 비해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물론 대리석으로 만든 피라미드 안에는 쌓아올린 강돌이 보였다. 그리고 여기저기 잡풀들이 자라기는 했다. 견고하고 웅장한 장수왕릉의 위용은 백간 팀 일행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장수왕릉의 뒤에는 역시 석재로 만든 작은 규모의 무덤이 있어 주의를 끌었다. 왕비의 무덤일까. 비장의 무덤일까. 지석이 나온 광개토왕릉과는 달리 장수왕릉은 장수왕릉일 것이라고 아직 추정 중이기는 했다. 나로서는 이들 무덤이 공히 피라미드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피라미드 형식의 무덤은 이집트만이 아니라 이곳 중국 내륙 깊숙한 곳에까지 널리 펼쳐져 있었다.
장수왕릉을 둘러본 백간 팀 일행은 서둘러 환도성으로 향했다. 환도성은 국내성과 묶어 생각해야 고구려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좋았다. 환도성은 산성이었고 국내성은 평지성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환도성을 환도산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평상시에는 평지성인 국내성에서 살다가 외침을 받으면 산성인 환도성에 들어가 싸우는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동북공정이 이후 환도성은 상당히 복원이 되어 있었다. 그런대로 산성의 꼴을 갖추고 있었다. 버스 등 차들이 설 수 있는 주차장도 정비되어 있었고, 산성의 입구도 관람지역도 그런대로 정비되어 있었다. 성곽의 돌들도 일실되지 않도록 철조망으로 잘 싸여 있었다. 산성의 작은 전망대에 올라 국내성 지역을 둘러보니 풍경이 장관이었다. 고구려의 장수나 된 것처럼 어깨를 활짝 펴고 마음껏 호연지기를 키워보기도 했다.
환도성 입구 오른쪽에는 작은 피라미드 형식의 옛 고분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이들 고분군은 이번에도 둘러보지 못했다. ‘공사중’이라는 팻말을 붙여놓고 철조망을 쳐놓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실제로도 공사를 하고 있는 듯싶었다. 여기저기 파헤쳐놓은 흔적과 함께 몇몇 중장비도 눈에 띄었다. 아마도 고구려 귀족들의 공동묘지인 듯싶었다.
환도성을 빠져나온 백간 팀은 이곳의 한식당 ‘아사달’로 향했다. 아사달은 한국식 불고기 식당이었는데, 중국인들로 벅적벅적했다. 아사달은 집안 일대의 잘 알려진 맛집이라고 했다. 모처럼 포식을 했지만 몇몇 사람들은 벌써부터 배앓이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뱃속이 좋지 않아 포식을 하면서도 좀 먹기를 삼갔다. 식당을 나오니 모처럼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집안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집안역사박물관을 둘러보는 일이었다. 이곳에는 석기시대의 유물부터 광개토대왕 시대의 유물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고 있었다. 특히 광개토대왕비와 관련한 전시관이 주목되었다. 집안역사박물관을 둘러본 백간 팀은 국내성을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국내성은 성곽의 흔적만을 겨우 일별할 수 있을 뿐이었다. 허물어진 성 안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복원하기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백간 팀은 이내 북한의 만포가 보이는 압록강가로 나왔다. 갑자기 비가 내려 장따거한테 10엔씩을 주고 비옷을 사서 입었다. 원래는 이곳 압록 가에서 유람선을 타기로 했으나 비도 내리고 시간도 없어 그것은 생략을 했다. 비를 맞자 백간 팀 모두 마음이 좀 들뜨는 듯했다. 작은 일에도 까르르 웃고는 했다. 사진을 못 찍게 하는 데도 몇몇은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압록강 건너 만포 땅의 군인들의 모습을 슬쩍슬쩍 찍어 보기도 했다.
이제 백간 팀이 도착해야 할 곳은 백산시였다. 장따거가 운전하는 버스는 시속 50km의 느린 속도로 백산시를 행해 달렸다. 달리면서 살펴보니 동북 3성은 지금 한창 건설 중이었다. 이어지는 거점도시마다 아파트 등 대형공사로 교통이 뒤엉킬 정도였다. 백간 팀을 태운 버스는 통화시를 거쳐 백산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백산시는 압록강 상류 쪽에 있는 대도시였다. 백산시 부근의 새로 지은 아파트에는 태양렬 집열판도 눈에 보였다. 백산시에서의 밤을 묶을 호텔의 이름은 ‘함월루주점’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밤마실을 나갔지만 우리 부부는 너무 지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넷째날(8월 8일):
백산시의 아침은 볕이 밝고 따가웠다. 오늘은 아침부터 서둘러야 했다. 일정이 너무 길고 멀었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조식을 마친 백간 팀은 아침 8시에 장따거의 버스에 몸을 실었다. 뜻밖에도 백산시는 넓고 컸다.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지만 크기가 대전이나 광주쯤은 되지 않나 싶었다. 차창 멀리 원자력발전소가 보였다. 많이 퇴락한 모습이 지금은 가동하지 않는 원자력발전소처럼 보였다.
장따거는 백산시를 빠져나와 임강시에 이르는 출구를 잘 찾지 못했다. 여러 사람에게 물으면서도 버스는 이쪽으로 갔다가 돌아 나오고, 저쪽으로 갔다가 돌아 나오고 하는 일을 반복했다. 급기야는 어느 친절한 택시운전수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백산시를 탈출할 수 있었다. 버스가 임강시로 향하는 도로 위에 이르자 먼저 길다랗게 수증기를 내뿜는 새로 지은 원자력발전소가 보였다. 버스 안의 여기저기에서 이와 관련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둘러보니 중국의 산에도 이제는 제법 우거져 있었다. 1994년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중국의 산은 북한의 산과 다름없이 헐벗은 곳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2014년에 태항산 일대를 돌아보았을 때도 이미 산림녹화가 어느 정도는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연료정책도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조림사업도 많이 이루어져 있는 듯했다.
장따거가 운전하는 버스는 여전히 시속 60km를 크게 넘지 않았다. 도로의 표지판에도 60km나 70km를 유지하라고 쓰여 있었다. 최근에 뚫은 듯한 길고 짧은 터널이 계속 이어졌는데, 터널 안에서는 시속 40km를 유지하라고 쓰여 있었다. 임강시까지 가는 길은 좀 멀고 지루했다. 무엇보다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게 참으며 임강가의 공원에 도착했는데, 이곳의 공측(公廁) 역시 쪼그려 앉아 볼일을 봐야 했다. 변기는 사기였지만 앞부분이 잘 막혀 있지 않아 여기저기 오줌을 지리기 일쑤였다. 동북3성의 공측(公廁) 중에 아직 좌변기를 사용하는 곳은 없었다. 그래도 1994년 처음 중국에 왔을 때보다는 공측(公廁)의 형편이 훨씬 나았다. 그때는 칸막이만 덩그렇게 있었는데, 곳곳마다 꼬박꼬박 1~2전 정도 돈을 받고는 했다.
볼일을 본 나는 아내와 함께 거기 압록강로 달려 나갔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압록강과 북한을 보기 위해서였다. 압록강 가에는 빨래하는 사람, 쫄대로 고기를 잡는 사람, 목욕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나는 일단 압록강 물부터 만져 보았다. 압록 강물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김광철 대표 등과 함께 그렇게 주춤거리고 있는데, 최두열 팀장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 서둘러 장백을 향해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강 시부터는 600리길을 압록강을 따라 달려야 했다. 이른바 압록강 600리 길이 시작된ㄴ 곳이 이곳 강에 임해 있다는 임강시였다. 강가에는 미루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틈틈이 건너다보이는 북한 땅에는 우선 초소들이 눈에 띄었다. 백간 팀은 이미 한껏 들떠 있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강노래, 산노래를 이어나갔다. 더러는 아리랑 가락도 흘러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달리는 버스 오른쪽의 압록강 위로 흘러내리는 뗏목이 보였다. 아, 뗏목! 뗏목은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뗏목이 군집을 이루며 압록강을 환하게 빛내고 있었다. 뗏목 위에는 서너 사람이 타고 앞에서 뒤로 오갔다. 백간 팀 모두 바쁘게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내 고향 금강도 한 때는 이처럼 맑은 물이 흘렀지. 미루나무와 여울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지.
한참을 달려가자 북한 쪽 산의 뙈기밭이 눈에 들어왔다. 뙈기밭이 이어지는 곳에는 영락없이 마을이 있었다. 마을 앞 강가에는 빨래하는 아낙네들, 미역 감는 아이들, 풀을 뜯는 소들……. 이 모든 것이 참으로 한가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느라고 다들 잠시 분주했다. 상류라고 하지만 아직 압록강은 넓고 시원했다.
압록강 600리 길은 쉬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압록강의 풍경을 보는 것도 지쳤는지 백간 팀의 몇몇은 그만 잠에 빠져들었다. 버스의 뒷자리에 몰려 앉은 김덕성, 김광철, 이희천 선생 등은 무료를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지난 번 휴게소에서 술을 사 버스에 오른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정기훈 선생이 기타를 잡고 분위기를 흥겹게 이끌어갔다. 처음에는 강노래, 바다노래를 부르더니 이윽고 「심장에 남은 사람」 「휘파람」 등 북한 노래도 불러댔다.
여름노래가 이어지는 중에 장따거의 버스는 백두산 자락의 계곡 망천아(望天鵝)의 입구로 들어섰다. 백간 팀은 장따거의 인척이 운영한다는 망천아 입구 근처의 식당에 들러 점심밥부터 먹었다. 역시 기름기 많은 중국음식이었다. 따뜻한 물을 주지 않았는데, 몇 번씩이나 부탁해 겨우 얻어 마셨다. 버스는 조금쯤 더 달려 백간 팀 일행을 망천아(望天鵝)의 주차장 앞에 데려다 주었다.
점심밥을 먹었으니 이제부터는 망천아(望天鵝) 계곡을 걸을 차례였다. 망천아(望天鵝) 계곡은 곳곳에 주상절리의 바위토막들이 널브러져 있는 절경이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백두산 자락의 깊은 계곡 망천아는 백간 팀 일행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3시간 정도가 자유롭게 주어졌는데, 아내와 나는 자꾸 해찰을 하며 걸었다. 계곡 양 옆으로는 나무로 만든 데크 길이 군데군데 연결되어 있어 산림욕을 하기에 좋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주상절리들, 여기저기 쏟아져 내리는 폭포들……. 이것들이 자꾸만 독특한 풍경을 만들었다. 망천아의 계곡이 만드는 이들 풍광은 계속 발길을 잡아당겼다. 용암이 갑자기 굳으면서 만들어진다는 주상절리들! 시원하고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망천아 계곡은 걷고 걸어도 끝이 없었다.
두어 시간 가까이 걸어가자 드디어 되돌아가라는 차단막이 나왔다. 이곳으로는 백두산에 오르지 말라는 뜻이었다. 4시까지는 돌아가야 하는데, 너무 멀리 와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울 듯했다. 가장 뒤에 쳐져 있던 나와 아내는 마음이 자꾸 급했다. 다리가 너무 아파 절룩이며 걷고 있는데, 때마침 차량을 길게 매단 유람차가 지나갔다. 손을 들어 세우자 태워주었다. 그러다 보니 나와 아내는 가장 앞장을 서 걷던 최두열 팀장보다도 빨리 장따거의 버스가 있는 중간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간 팀 일행을 태운 장따거의 버스는 망천아를 돌아 나와 다시 장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장따거의 버스가 조선족 자치현인 장백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해가 지기 전이었다. 우선은 발해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영광탑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장따거의 버스는 영광탑을 찾아 꼬불꼬불 산길을 돌아 올라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산길을 돌아 올라가다 보니 장백시의 뒤쪽 산언덕 위였다. 이처럼 높은 산언덕에 이처럼 넓은 평지가 있다니! 영광탑은 이 산 언덕 위 평지 위에 우뚝 있었다. 왼쪽으로 적당히 제 몸을 기울인 채 영광탑은 산 아래 압록강 건너 북한 땅 혜산시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발해시대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영광탑! 영광탑 아래쪽에는 엉성한 가게가 하나 있었다. 가게의 주인은 망원경으로 혜산시를 조망할 수 있는 시설을 해놓고 10엔씩 받았다. 나와 아내는 기꺼이 10엔씩을 내고 북한의 혜산 땅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물건을 사고파는 인민들, 군용트럭을 세워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군인들이 보였다.
버스를 타고 있었지만 영광탑에서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던 길보다 훨씬 수월했다. 내려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보니 일단은 여기저기 ‘단고기집’이라는 간판부터 눈에 띄었다. 다른 상점들의 간판들도 다 한글과 한자를 병용해 쓰고 있었다. 장백시가 조선족 자치현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백간 팀 일행이 오늘 밤 묶을 곳은 장백호텔이었다. 일단은 호텔 체크인부터 했다. 그런 뒤 우르르 몰려나가 저녁식사를 했다. 음식은 중국식 샤브샤브였는데, 내 입맛에는 잘 맡지 않았다.
내일은 아침 일찍 장백을 떠나 백두산을 향해 달려야 했다. 점심도 백두산에 올라 먹어야 할 판이었다. 따라서 각자 백두산에 올라가 먹을 음식을 장만해야 했다. 밤의 장백시를 오가며 백간 팀 일행은 과일도 사고 기타 음식도 장만했다. 나와 아내는 따로 미수가루 등을 가지고 와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부족하다 싶으면 장백호텔에서 빵과 계란을 좀 장만하면 되었다. 그래도 나와 아내는 포도와 복숭아 등 몇 가지 입맛에 맡는 과일을 좀 샀다.
다섯째날(8월 9일):
호텔에서 조식을 나누며 전날 밤 생각했던 대로 빵과 계란을 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런 뒤 7시 30분 장따거의 버스는 혜산시가 잘 보이는 압록강가로 백간 팀을 일행을 데려다 주었다. 강가를 한참 동안 걸으며 혜산시를 바라보았지만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길가로 몰려가는 오리 떼가 보여 몇몇 분은 연거푸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웃통을 벗어젖힌 한 중국인이 망원경을 갖고 북한 땅을 보라고 권했지만 나는 굳이 보지 않았다, 이제 북한 땅을 더 바라보아 무엇 할 것인가. 옛날에는 징검다리를 놓고 마을을 가듯이 건너다녔을 곳이 장백과 혜산이었을 터였다.
장따거의 버스는 한참을 더 달리다가 백간 팀 일행을 내려놓고 다시 북한 당을 조망하라고 했다. 철길도 보이고, 오가는 사람들도, 차들도 보였다. 카메라의 셔터를 좀 누르다가 백간 팀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랐다. 오래지 않아 버스는 백두산의 정기가 느껴지는 삼림 속으로 들어섰다. 양쪽으로 숲만 보이는 어느 지점에 검문소가 있어 버스가 섰다가 떠났다. 검문소를 지나자 잠시 포장도로, 곧이어 도로는 공사 중이었다.
잠시 조는 사이에 버스는 백두산의 중턱을 달리고 있었다. 자작나무숲이 이어졌는데, 문득 마을이 나타나자 장따거의 버스는 주유소를 찾아 주유를 했다. 버스는 다시 떠났지만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있어 장따거는 더욱 조심을 했다. 어느덧 버스는 백두산 밀림지역을 달리고 있었다. 해발 1200m 쯤은 오른 듯했다.
버스는 백두산 서파 쪽 주차장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서파 쪽 주차장 근처에 이르자 문득 아주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6년 전 쯤 광주대학의 이영석, 김종선, 강대경 교수 등과 함께 와 본 곳이었다. 장백산이라는 간판이 크고 높은 서파의 입구에 모여 최두열 팀장은 매표를 했다. 일인당 입장료가 5만 원 가량이나 한다고 했다. 입구를 통과해 좀 걸어 나가자 셔틀버스가 백간 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간 팀 일행을 태운 셔틀버스는 거칠 것 없이 백두산 서파 정류장을 행해 달렸다.
백두산 서파의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내렸는데, 관광객들이 시장바닥처럼 넘쳐났다. 날씨도 더웠지만 그 많은 사람들 때문에 가슴이 탁 막혔다. 겨우 화장실을 찾아 볼일을 본 나와 아내는 더듬거리며 천 개가 넘는 계단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폐가 좀 석회화되어 있는 나는 계단을 오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겨우겨우 올라가며 둘러보는 백두산은 들꽃들의 천궁이었다. 온갖 꽃들이 피어 백간 팀 일행을 반겼다. 김광철 대표와 이희천 선생에게 꽃이름을 듣고 배우며 올라가다 보니 나만 힘든 것이 아닌 듯했다. 김도경 선생과 김현숙 선생이 과일을 깎아 먹으며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아내도 과일을 꺼내 먹으며 잠시 쉬었다가 기운을 차려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힘을 모아 기어 올라갔지만 여전히 나와 아내는 백간 팀의 맨 뒤에 쳐져 있었다.
안간힘을 쏟으며 기엄기엄 걷고 있는데, 갑자기 파란 물결이 내 눈두덩을 때렸다. 천지였다. 백번 오면 두 번 본다는 백두산 천지가 맑고 투명한 모습으로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탄성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 등정 때에도 천지를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산은 맑고 투명한 모습은 아니었다. 마음이 급해져 나는 정신없이 사진부터 찍었다. 정신이 없기는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얼마쯤 들뜬 시간을 보낸 나와 아내는 배낭을 뒤져 늦은 점심을 먹었다. 백간 팀의 다른 일행도 각자 간략하게 점심을 해결했다. 백두산 천지 서파의 절반은 중국 땅이 아니라 북한 땅이었다. 그곳은 중국이 임대해 관광객을 받는다고 했다. 백간 팀 일행은 우르르 북한 당을 밟아보기 위해 저리를 옮겼다. 중간에 북한 땅임을 표시하는 작은 탑이 있어 그곳에서도 나와 아내는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최두열 팀장이 벌써 하산을 독촉했기 때문이었다. 하산을 하면서도 나와 아내는 김광철 대표와 이희천 선생으로부터 금방 듣고 금방 잃어버리는 백두산의 들꽃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산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셔틀버스를 갈아타고 내려오다가 내려 이번에도 여전히 금강대협곡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백두산의 화산폭발로 인해 용암이 흐르면서 만든 길이 15km나 되는 넓고 긴 대협곡이었다. 군데군데 뾰쪽뾰쪽 보이는 바위산이 장관이었다. 금강대협곡을 둘러보다 보니 시간이 부족해 예정에 있는 고산화원이나 쌍제자하는 감히 둘러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짱따거의 버스로 옮겨 탄 백간 팀 일행은 잠시 이후의 행선지 때문에 옥신각신을 했다. 상황이 좋지 않아 결국 원지 두만강 코스는 생략하기로 했다.
곧바로 내일의 일정에 대해서도 얘기를 주고받았다. 최두열 팀장은 좀 쉬고 느긋하게 내일의 일정을 소화하자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 회원들은 내일도 일찍부터 북파를 통해 백두산에 오르자고 했다. 내일도 아침부터 서둘러 일정을 소화하자는 결정이 회원들 상호간에 큰 갈등을 만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버스로 일단 이도백하까지 내려온 백간 팀 일행은 식당을 찾아 저녁식사부터 했다. 모처럼 입맛에 맞는 저녁밥을 먹었다. 그런 뒤 백간 팀 일행은 우르르 몰려가 마사지부터 받았다. 이동희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은 여성에게, 여상은 남성에게 제 몸을 맡겼다. 나는 조금 값이 싼 엉터리 마사지를 받았는데, 나를 마사지 한 사람은 아주 뚱뚱한 45세의 중년 여자였다. 마사지 솜씨가 너무 형편없어 별로 시원하지가 않았다.
늦은 밤 장따거의 버스는 백간 팀을 백두산 기슭의 어느 펜션으로 데리고 갔다. 체크인 한 펜션은 밤에 보기에도 낡고 엉성했다. 이동희 권향순 부부와 같은 집의 옆방을 써야 했는데, 마음에 드는 숙소는 아니었다. 최두열 팀장이 오늘의 호텔에는 좀 멋을 부리려고 하다가 스타일을 구기고 만 듯했다. 백간 팀들 중 몇몇은 다소 불편한 캠핑카에서 잠을 자야 했다. 백간 팀 모두 내일 하루를 더 묶기로 한 것이 이곳 펜션이었다. 낡고 엉성한 숙소였지만 너무 피곤했던지 나와 아내는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여섯째 날(8월 10일):
오늘은 아침 일찍 서둘러 북파를 통해 백두산의 천지에 오르기로 했다. 모두들 아침 일찍 깨어 7시 30분 장따거의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종종걸음으로 북파를 통해 천지에 오르는 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백간 팀이 천지에 오르는 정류장을 거쳐 북파의 매표소에 이르렀을 때는 8시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아직은 이른 아침인 데도 매표소 주변에는 사람들이 마구 북적댔다.
백간 팀은 늦어도 오후 2시까지는 천지에서 이곳 정류장으로 내려오기로 서로 약속을 했다. 좀 쉬어야겠다는 최두열 팀장은 오후 2시에 장따거의 버스를 이곳에 대기시키기로 했다. 혹시라도 도착이 늦는 사람들을 위해 최두열 팀장은 오후 3시에 다시 한 번 이곳에서 버스를 대기하기로 했다.
매표소 주변은 사람들의 진흙탕이었다. 대부분 중국인이었는데,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줄을 서서 입장을 하고 셔틀버스를 타는 데까지만 해도 두어 시간이나 걸렸다. 이미 그때 간 팀은 엄청나게 지쳐 있었다. 나도 신경질이 나고 짜증이 나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들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북파로 오르는 천지 등정에는 최두열 팀장이 참여하지 않아 백간 팀은 더욱 갈팡질팡했다. 뿐만 아니라 아내인 송윤옥 초록교육연대 사무처장은 배탈이 나 걸핏하면 온몸을 비틀어댔다. 정로환을 네 알씩 두 번, 여덟 알이나 먹었는데도 설사가 멎지 않는 듯했다. 나도 그제 어제 이후 뱃속이 좋지 않아 여러 차례 정로환을 먹으며 달래던 터였다.
북파로 천지에 오르려면 셔틀버스를 타고 가다가 환승장에서 내려 입장료를 한 번 더 내고 찦차로 갈아야 했다. 그러나 백간 팀 중에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백간 팀 모두 셔틀버스를 타면 자연히 북파로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환승장 입구에서 내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최두열 팀장이 안내하지 않으니 다들 갈피를 잃고 만 것이었다.
아무튼 셔틀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북파로 백두산에 오르는 환승장이 아니었다. 잠시 둘러보니 장백폭포로 걸어올라가는 정류장이었다. 모두들 여기까지 왔다가 북파로 천지에 오르는 환승장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백간 팀은 장백폭포부터 둘러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몇몇은 화장실에 가는 것이 급했다. 나이가 들으니 나도 자주자주 대지 위에 물기둥을 세우고 싶었다. 누군가는 큰 것도 보고 싶은 듯했다. 볼일을 본 뒤 화장실 앞에서 기다렸지만 정기훈 김익승 이희천 등은 아예 그곳에 살림을 차린 듯했다. 나와 아내는 그들을 거기에 두고 장백폭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폐의 일부가 고장이 난 나는 이번에도 헉헉대며 고생을 했다. 언덕길을 오를 때마다 겪는 일이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꾸 배앓이를 하는 아내에게 짐이 되지는 않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 부부는 좀 늦게 장백폭포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오를 수 있었다. 장백폭포를 더 잘 보기 위해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쯤에서 바라보는 장백폭포도 예상했던 것처럼 장엄하면서도 멋졌다. 숭고하면서도 화려한 장백폭포 앞에 서니 가슴이 쿵쿵쿵 뛰었다.
우리 부부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몇몇은 벌써 사진을 다 찍고는 하산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이곳가지 왔는데, 사진 찍기까지 포기할 수 없었다. 너무 지쳐 얼굴이 잘 펴지지는 않았지만 나와 아내는 서로 사진을 찍고 찍어주는 일을 거듭했다. 조금은 멀리 떨어져 내리는 장백폭포의 장엄한 알몸도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오는 길과 얼마간 달랐다. 내려가는 길은 그곳 나름의 또 다른 풍경을 간직한 채 사람들을 기다렸다. 풍경을 미처 즐길 사이도 없이 나와 아내는 뒤쳐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걸음을 재촉했다. 정류장에 내려와 보니 아직도 뒤에 쳐져 있는 일행은 정기훈 김익승 이희천 뿐이었다. 김현숙 선생이 일행들을 기다리며 계속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다. 장백폭포에서 백두산 북파 행 환승장으로 내려가는 정류장 역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줄을 서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일 그 자체가 지옥의 불길 속에 내던져지는 일이었다.
백간 팀의 얼굴에서는 각기 짜증과 신경질이 덕지덕지 밀려나오는 듯했다. 너무 힘이 드는지 문수정 선생이 밀리고 쓸리는 줄 속에서 북파로 천지에 오르는 것을 재고하자는 제안을 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으니 천지에 오르는 것 대신 소천지, 녹원담, 지하산림을 둘러보는 것이 낫겠다는 제안이었다. 일부는 그에 동조했지만 나와 아내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는 소란 속에서도 다들 잘 참고 셔틀버스를 타고 북파로 오르는 천지 행 환승장으로 내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그곳 역시 사람들이 부글부글 줄을 서고 있었다. 다들 심각한 절망감에 빠져 있는 듯했다.
이미 시간은 훨씬 정오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너무 지쳐 이쪽 그늘 밑에 그냥 쭈그려 앉아 있었다. 저쪽 땡볕 위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이 모여 뭐라고 쑥덕거렸다. 쑥덕거리는 내용의 핵심은 북파로 천지에 갔다가 오면 도저히 3시 안에 매표소 주차장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몇 사람이 최두열 팀장과 연락을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김도경 원장의 핸드폰 데이타가 열려 있어 4시까지는 돌아오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지만 확인했다는 문자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옥신각신하다가 김덕성 선생과 몇몇은 최두열 팀장이 기다린다며 여기서 곧바로 매표소 주차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김광철, 이희천, 김도경, 유금자, 박창명 김인숙 부부 등이 김덕성 선생과 행보를 함께 하기로 했다. 나머지 몇몇은 북파로 오르는 백두산 천지 행은 포기하더라도 소천지, 녹원담, 지하살림 행은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나는 북파로 오르는 백두산 천지 행은 포기하더라도 소천지, 녹원담, 지하산림 등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배앓이로 쩔쩔 매는 아내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잠시 망설이다가 김광철 대표를 따라 매표소 주자창 행을 택했다. 어차피 북파로 오르는 백두산 천지 행을 포기하기로 했으니 최두열 팀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산을 하자는 것이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나는 배가 아파 쩔쩔매는 아내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위의 몇몇은 또 한참 줄을 서서 매표소 주자창으로 향하는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뒷자리에 앉아 백두산 자락의 풍경에 취해 있는 참이었다. 갑자기 김광철 대표가 소리를 쳤다. 여기서 내려요, 내려! 그의 거친 소리에 놀란 나와 아내는 급하게 배낭을 둘러맸다. 중국 사람들로 가득찬 셔틀버스 안에서 모처럼 듣는 한국말이었다. 나와 아내는 스톱스톱 소리를 지르며 김광철 대표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셔틀버스에서 내렸다. 내리고 보니 ‘지하산림’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김광철 대표의 얘기를 들어보니 최두열 대표와 연락이 되어 4시까지 내려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연락이 되었으니 ‘지하산림’ 일대라도 들러보자는 것이 김광철 대표의 생각이었다.
지하산림 정류장에 내린 일행 중 이희천 선생은 셔틀버스에 소형 카메라를 두고 내려 아주 암담해 했다. 암담해 하는 것은 이곳에서 내리자고 제안한 김광철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김광철 대표로서는 너무 미안하고 어색한 일이었다.
‘지하산림’ 휴게소에 자리를 잡자 몇몇 사람들은 급하게 화장실부터 다녀왔다. 역시 배앓이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지하산림’ 일대라도 둘러보려면 점심밥부터 먹을 필요가 있었다. 일부는 라면으로, 일부는 준비해온 빵과 과일로 각각 점심을 때웠다. 나와 아내는 복숭아를 좀 산 뒤 미리 마련해온 미수가루로 쉐이크로 만들어 점심밥을 대신했다.
‘지하산림’은 금강대협곡처럼 송화강 상류의 백두산의 숲속에 나무데크를 깔아 만든 산책길이었다. 마땅히 삼림욕을 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숲 향기에 취해 걷다가 보니 발밑으로 송화강 상류의 계곡물이 흘렀다. 숲길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가다 보니 낭떠러지가 보였다.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지하산림’ 셔틀버스 정류장까지는 한참을 굽어 돌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서 마주하는 숲 또한 장관이었다. 군데군데 흰곰, 검은곰, 멧돼지, 청설모, 송서, 우는 토끼, 붉은 여우 등이 출몰한다는 푯말이 보였다. ‘지하살림’ 숲길은 일행 모두를 깊이 자연에 취하게 했다.
온갖 해찰하며 ‘지하산림’ 셔틀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오후 3시가 넘고 있었다. 하지만 셔틀버스를 타고 매표소 정류장에 4시까지 도착하기에 힘들지는 않았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매표소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3시 45분쯤이었다. 최두열 팀장과 장따거는 4시 15분쯤이 되어서야 매표소 주차장으로 왔다. 백간 팀 몇몇은 30분 정도를 기다려 최두열 팀장과 장따거를 만날 수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소천지, 녹원담 쪽으로 간 사람들이 5시에나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잠시 논의 끝에 이들 모두를 기다렸다가 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
바로 그때였다. 최두열 팀장이 갑자기 제안을 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이 몇 곳이나 둘러보고 오는가를 맞춰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약속한 대로 두 곳만 둘러보고 내려오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덕성 선생은 이들이 3곳 이상을 둘러보고 내려오리라고 말했다. 물론 개중에는 송윤옥 처장처럼 한 군데만 둘러보고 이내 내려오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이어졌다. 최두열 팀장과 김광철 대표가 가까운 식당에 들러 맥주라도 한 잔하자고 말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가 맥주 한 캔을 야금야금 잘라 마셨다.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떠들다가 5시가 다 되어야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은 장따거의 버스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합류했다. 그런데 5시가 훨씬 지나도 소천지, 녹원담 쪽으로 간 사람들이 이곳으로 내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백간 팀 몇몇은 급기야 두런두런 이들을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저녁볕이 엷게 백두산 자락을 덮기 시작했다. 이들 모두가 매표소 정류장으로 내려온 것은 5시 40분쯤이나 되어서였다. 먼저 이곳에 내려왔던 사람들은 이들을 발견하자 가벼운 안도감과 함께 와락 짜증을 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김광철 대표가 먼저 참지 못하고 정기훈 선생한테 뭐라고 내질렀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호기심이 많은 내가 문수정 선생한테 어디어디를 둘러보았냐고 물었다. 무수정 선생이 말했다. 백두산 천지까지 갔다가 왔어요. 소천지, 녹원담을 거쳐 북파로 천지에 오르는 환승장에 도착했는데요. 그런데요. 천지 행 찦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백두산 천지까지 갔다 왔지요. 나와 김광철 대표는 잠시 멍청해졌고, 김덕성 대표는 자기 말이 맞았다고 박수를 치며 웃었다.
저녁밥은 이도백하로 나가 예약한 식당에서 먹었다. 저녁밥을 먹으며 김현숙 선생에게 내가 살살 물어 보았다, 누가 먼저 천지에 가보자고 했냐고! 북파로 오르는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한 것이 약도 올랐지만 누가 먼저 그 제안을 했는지 궁금했다. 왠지 나는 이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을 결정하고 실천하는지 알고 싶었다.
장따거의 버스를 타고 이도백하의 식당으로 오며 먼저 정기훈 선생한테 이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천지에 가자고 제안한 사람이 김현숙이야, 문수정이야 하고. 정기훈 선생이 말했다. 뭐가 긍금해? 문수정 선생이 먼저 천지까지 먼저 갔다가 오자고 말했어. 이제 됐어. 그런데 김현숙 선생은 저녁밥을 먹는 자리에서 정기훈 선생의 이 말을 강하게 부인했다. 자기가 먼저 제안을 했다며 김현숙 선생은 자꾸 눈물을 훔쳤다. 나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 거듭거듭 킬킬거리며 웃었다.
저녁밥을 먹고 백두산 자락의 펜션으로 돌아오자 최두열 팀장, 감광철 대표 등이 중간 평가를 하자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김덕성 선생과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한 페이지 덮고 가자고 해도 말했다. 하지만 김광철 대표는 막무가내였다. 그로서는 오늘 최두열 팀장이 일정에서 빠진 것도 백간 팀의 일부가 행보를 달리 한 것도 문제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술도 많이 마시게 되고 말도 많아져 더러는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최두열 팀장은 자기에게도 화살이 날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얘기가 시작되자마자 자리를 떠버렸다.
김광철 대표로서는 문수정 선생이 그 자리에 오지 않은 것도 큰 불만이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북파로 오르는 천지 행을 포기하자고 말했기 때문일까. 호기심이 많은 나는 이동희 교수에게도 누가 먼저 북파로 백두산 천지에 오르자고 제안했냐고 물었다. 그가 말했다. 당연히 내가 북파로 백두산 천지까지 인솔해 갔죠. 다른 사람들이 그런 용기를 냈겠습니까. 어쨌거나 북파로 백두산 천지에 간 사람들은 가지 못한 사람들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듯했다. 술이 좀 취하자 이동희 교수는 내게도 한 방 먹였다. 문수정 선생이 지금 크게 상처를 받고 누워 있습니다. 이은봉 교수도 킥킥거리며 웃지만 말고 사과를 좀 하세요. 나는 자리를 옮겨 이동희 교수가 보지 않는 곳에서 더욱 크게 킥킥거리며 웃었다.
오늘은 이번 백두산 간도 여행 중에서는 최고의 위기였다. 여기서 더 갈등이 심화되면 짐을 싸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김광철 대표에게 거듭술잔을 권하며 나는 서둘러 갈등을 덮었다, 김광철 대표가 술에 취해 그만 잠이 들게 할 참이었다. 하지만 몇 번 고함이 오고가더니 이내 기분을 좋게 바꾸어 다들 좋아라 웃으며 떠들어댔다. 기분이 조금 풀어지는 것을 보고 아내와 나는 펜션의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눈을 감자마자 이내 깊은 잠에 떨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