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전 10시 30분 버스를 오랜만에 탔다. 어머니와 함께. 법원 앞 버스에서 내렸다. 어머니는 병원에 가신다고 그대로 타고 가셨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왔다. 잠시 일기를 타이프하고 불기도서관 인문학 강의를 받기위해 길을 나섰다. 택시가 오지 않아 기다리던 차, 대림아파트 앞 버스정류소에 있는 버스를 탔다. 어머니가 주신 버스 교통카드. 어떤 모양과 색깔인지 아직까지 나는 확인조차 안 했다. 작은 지갑 안에 있는데 운전석 옆에 기계에 갖다 대면 된다고 가르쳐 주신대로 했다.
92번 버스가 제주일중 지나 제주대학 방면으로 방향을 틀자 나는 중앙여고 앞에서 내렸다. 사실 그 버스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걷는것보다 가는 방향에서 시간을 단축 시켜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탔다. 생각보다 빨리 내려야 했다. 중앙여고 앞에서 불기도서관까지 약 40분 가까이 걸었다. 1시 55분쯤에서 2시 33분까지. 길을 걸으며 평소에 보지 못한 풍경들을 많이 보았다. 윤용택 교수님 생각이 났다. 걸으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는.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편안했다.
건물 건축 현장 철근들이 올라가는 바닥, 여자 두 명이 철근 고정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의 구분이 점점 남녀 따로 없다는 것을 알았다. 건축물들이 마구 모양새 없이 쇳덩어리와 시멘트로 우후죽순 아무렇게나. 백지에 그림을 그린다면 어떻게 그리는것이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전체 구도를 생각해 보았다. 답답했다. 조금 더 걸어가던 중에 건물이 올라가는 구석에 대학생 쯤 보이는 꼭 한이만큼 해 보였다. 시멘트를 나르고 있었다. 건물만 죄다 올라가고 거기에도 교육비를 벌기 위해 아픈 노동을 하는 그들이 참 가여웠다. 복지타운. 밭에는 알림판이 있었다. 복지타운 짓지 말고 복지정책이나 잘 쓰면 어떨까. 가슴아픈 땅들이 신음한다. 마치 내 가슴이 아파오는 것 같았다.
강유원 철학박사의 강의는 2시 35분 지나며 6시 30여분까지 딱 한 번 쉬는 시간 10여분 계속 진행되었다.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시고 열정적으로 시민들의 자각을 도우려 애쓰시는지. 더 많은 시민들이 모여 공부해도 좋으련만.
공부를 마치고 전영웅 선생에게 부탁하여 오등동까지 차를 타고 귀가 했다. 신문을 읽다가 책을 읽다가 어머니와 대화를 하다가 그럭저럭. 일하러 갔다는 한이와 통화가 되지 않았고 남편과 잠시 말다툼을 했다. 깊은 잠을 잤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지어준 약 한 알도 먹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마음 편히 잠을 잘 잘 수 있다. 나의 괴롭힘은 현실과의 전쟁일 뿐, 나는 몸과 마음이 사실 이상이 없다. 가지 않겠다는 병원으로 데려간 남편이 야속할 뿐이다.
오늘 아침은 7시 30분 버스를 타고 법원 앞에서 내려 집에까지 걸어왔다. 일요일 이른 아침 풍경, 아무도 다니지 않은 도로는 마치 내가 이방인인 것 같았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 <청소년을 위한 제주역사>, <녹색평론 134> 가방 안에서 나에게 말을 건다. 속도에 대해서. 존재에 대해서. 가치에 대해서. 가족에 대해서. 나는 왜 지금 여기서 걷고 있는가. 쓸쓸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나의 몸의 무게가 지구 위 한 지점을 지나고 있다.
도착해보니 현관문이 잠겼다. 두들기자 남편이 문을 열었다. 대뜸 이른 아침부터 심사 뒤틀리게 왜 나타났냐고 말 걸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왔다. 컴퓨터를 켜는데 끄고 말하자고 했다. 금방 언쟁이 시작되었고 열 흘간의 말미를 달라 했다. 옥신각신 시어머니가 올라와 남편에게 내려가자고 말렸다. 협상은 없었다. 그는 그대로 바쁘게 무언가를 응접실에서 했으며 나는 씻고 9시 미사 참례를 했다. 철이가 늦잠을 자서 미사는 보지 못하더라도 교리에 참석하도록 깨워 씻는 것을 확인하고 다녀왔다.
안성탕면 두 개를 끓여 식탁에 있는 김치에 배를 채웠다. 아침에 남편이 시비로 왜 어제 내가 벗은 옷을 빨지 않았냐했던 말, 세탁기에 세탁물이 없어 다른 것들과 함께 빨려 한 것 뿐이라고 했다. 설거지를 하고 내가 벗은 옷가지 어제와 오늘 것들을 세탁기로 돌렸고 팬티를 손빨래 했다. 시어머니 식모살이 시킨다고 남편이 따진 말들이 가슴에 박혀왔었다. 시어머니가 나의 속옷을 빨 때의 마음이 어땠을지 나는 모른다. 내가 식모살이 할 때 그 느낌일지도 모른다. 내가 편하면 그 편함이 상대의 불편으로 보상되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열흘만 집에 나타나지 말아달라니 참 어이없는 일이다. 이것조차 수긍해야 하는가. 나는 책을 찾아 읽고 그 때 그 때 보아야 하는데 잠은 친정에서 자고 잠시 잠시 왔다가겠다는데 그것조차 막으려는 남편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 건지 따져야 하는 건지 침묵이 에너지를 덜 소모하는 것이리라.
그 후 오후 4시 가까운 시간까지 글을 썼다. 타이핑을 한 것이다. 예전에는 손 글씨가 아니면 글이 잘 안 써지더니 이제 점점 자판에 익숙해지고 시간이 절약된다. 지우개가 필요없고. 그런데 전기가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전기. 무서운 것이다. 화석연료의 시작 석유. 그 전기. 전기의 편리가 세상 문명에 전부인 것이다. 나는 이 문명의 편리에 포섭되었다. 달아나야 할 것이다. 치아의 문제(나는 지금 엉망이다. 시리고 아리다. 오른쪽 위어금니 쪽에는 잇몸에 깊은 구멍이 나 있다. 언제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어 나를 먼저 돌보아 온 일이 있었던가.)아니 모든 우리 인간의 몸의 기능의 상실은 이 전기와 과학 문명의 발달로 수 많은 도구와 음식들로 인해 다 부서지고 망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기가 나간다면 이 기록들 무엇으로 재생 복원할 것인가. 내가 전에 연북로를 처음 달리기 할 때 혼자 자정 가까운 시각에 달릴 때, 공포가 엄습해 왔던 일은 딱 한 가지였다. 밝은 가로등들이 정전으로 해서 멈춰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빨리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달릴 수 있을까 아니면 오금이 절여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그냥 숨죽여 멈춰 꼼짝도 못할 것인가. 다행히 아무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4시 30분 매일 운동하던 공원에서 5시 30분까지 달리기를 했다. 걷듯 뛰었다. 폐가 시커멓게 됐을 것 같다. 처음 담배를 배우고 난 후 한이와 철이 임신했을 때 잠시 금연을 했다. 두 아이 출산하며 가장 두려웠던 일, 기형아가 탄생하면 그 벌을 어떻게 받을까 나는 많이 두려웠었다. 하느님의 도움이었다. 모두들 건강했으니. 마산 친구의 연락을 받고 다시 깊은 흡연이 시작되었다. 그는 내게 병과 약을 함께 주었다. 3년 간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금연 방법으로 달리기를 권했으며 그 때 마침 가마동을 만났고 금연에 성공했다. 물론 보건소의 아름다운 도움도 받았다.
좋은 평화의 시간들. 천국 같은 시간들. 작년 1월 고민 끝에 환경연합 대표를 맡게 될 즈음 남편은 자기를 호구로 아냐며 술을 마시고 와서 안방에서 위협했다. 내가 시장을 보고 왔는지, 간식거리를 사고 들어왔는지 그랬었다. 2층 도서관에는 강정친구들 회의가 있는 아마 수요일 어느날로 기억하고 있다. 재떨이가 벽을 스치고 날아갔고 안방 책상 유리가 완전히 박살났다. 부엌으로 와서 씽크대를 열어 술병을 병째 마시며 인사불성.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고 나는 눈물로 그를 안정시키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담배를 깊게 피웠다. 어지러웠다. 새벽 3시를 넘길 때. 결국 그 파탄난 전쟁과도 같은 시간. 안방은 유리조각으로 다 박혀있다. 그것을 치우는 것 역시 어김없는 나의 몫이었다. 생살 가슴에 그 유리 파편들이 내게로 마구 꽂혀오는 아픔들이 따라 들어왔다.
어디 이런 일이 이번 만이었겠는가. 신혼 초 동거생활 할 때 소주병이 그것도 남이 집살이로 어느 할머니 집 안방 하나를 빌려 살았는데 완전히 박살나 방안이 온통 술병 조각들. 20여년 살아오면서 눈물의 세월이었다. 아이들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남자의 완력 엄포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단 한마디 비명조차 허락지 않았다. 그의 힘이 나의 모든 걸 끌고 이리저리. 내 삶은 온갖 것들이 슬픔 그 자체였다.
이제 씻고 친정어머니께 갈 시간이다. 이곳 도서관은 나의 천국이다. 천사 미사곡을 CD플레이어를 통해 내가 원하는 양만큼 들을 수 있다. 안치환을 만날 수있고, 조영남, 장사익, 김정식, 나나무스꾸리, 존 바에즈, 싸이먼 앤 카펑클, 인디언 로드2, 이루마의 피아노 연주, 그리고 김광석. 애절한 슬픔이 나를 정화시킨다. 나는 책도 연극도 노래도 슬프고 서러운 것들이 마음에 든다. 요절 시인들을 참 좋아한다. 왜 그들이 그렇게 했는지 아니 왜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한 것이다. 도저한 그 무엇이 그들에게 그렇도록 이끌었을까.
나를 문학에 눈 뜨게 한 것은 <달과 6펜스>서머싯 모옴이었다. 물론 에밀졸라도 있었다. 아니 어떻게 그 수많은 문학가들과 위인들 사상가들을 다 열거할 수 있을까. 도서관의 책 제목들만으로도 1년 365일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유미니 탐미니, 무엇이 아름다움인지 더 계속 탐구해야만 한다. 달을 찾아 떠난 스트릭랜드 나는 그 결행을 시도하겠다는 생각을 마치 작가 이외수가 젊은 시절 호주머니에 칼을 넣고 만지작거리던 방법과도 흡사하게 언젠가 마지막 남은 나의 카드를 쓰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살아왔다.
어머니, 땅, 그 모든 것. 언젠가 그 땅으로 돌아가 다시 땅이 될 인간. 나는 인간의 진정한 길을 계속 찾는다.
또 말이 길었다. 비경제적이다. 차츰 나아지리라.
오늘 운동은 트랙 1시간 370m 약 12바퀴쯤 걷듯 뛰고 4바퀴 걸었으며, 운동장 옆 소나무 밭 몇바퀴 돌면서 성가를 불렀다. 정화되는 나는 눈물로 마무리하지만 그것은 다시 기쁨으로 승화된다.
살아 있어서 기쁘다.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어머니께 또한.
첫댓글 모니카...
더 큰 아픔도 뜀박질로 이겨내자.
모니카의 글을 읽고 사고하는 것이 두렵다.
심연같은 깊은 사고력의 소유자인 모니카를 하느님께서 시련을 주고 계신가.
성 아우구스티노를 회심시킨 어머니 성녀 모니카를 닮은 순백의 영혼 모니카를 어떻게 위로해야할지...
늘 일상에 쫓기듯 자기주변밖에 모르는 가마동 아집의 형제들은 주님께 위로를 청할 수 밖에 없네요.
주님은 주님께서 직접 저희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서도
먼저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서 이해받기 보다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단어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용서의 시작입니다
어제 빈첸시오 교구이사회에 참석해다가 고인숙 안젤라 회장으로부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해보셨습니까? 라는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기 보다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눈물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회개보다 용서가 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회개는 자기 일방의 행위이지만
용서는 상대방이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지요. 용서를 할 때에도 용서함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에 굳이
집착하지 않아도 됩니다. 용서는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은사를 얻고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모니카에게 안좋은 부정적 이미지 감정을 치유한다면 금방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이 보이네요
책을 좋아하시니까 힐링코드책을 강추합니다.
제가 예전에 술을 한창 마실 때는 술마시는 이유가 분명 했습니다.
주위 사람인 아내. 장인어르신. 그외 가족과 성당 교우들이 그렇고 그렇게 나를 대하기에 나는 술 마실 수 밖에 없다는 생각 이었습니다.
술을 끊은 후 에는 즉 내가 변화 된 이후에는 내가 그때 그런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함들어 했을까를 생각하며 용서를 청하고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의 삶을 살게 되었답니다.
내가 변화될 때 모든 상황은 긍정의 상태로 반전되어 가더군요.
모니카반장을 위하여 기도 합니다.
꼭 평화와 행복의 삶을 찾으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살아야 합니다 기본은 자신의 건강해야 하고
자녀와 배우자 가족을 위하여 본인의 할것은 해야합니다
모니카자매님은 이겨 낼거라 믿습니다
어려운 시련이 다 이겨내신 분이니까요
우선 자신을 위하여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사시다 보면
잘 될것 같습니다 힘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