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사람 아담은 그 몸이 흙으로 자연으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의 숨결로, 하나님의 영으로, 생명으로 그 깊은 속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a living soul이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신인(神人, Devine-Human)이었다. 그는 그가 받은 그 위대한 능력으로 자연을 관리하면서 행복하게 부유하게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사탄의 그럴듯한 거짓말에 현혹되어 창조주를 배반함으로써 저주를 받아, 불행에 빠지고, 가난에 빠지고 만다. 이 가난과 불행의 원인은 그가 주(Lord)를 잘못 택한데 기인한다.
원래의 창조주를 주로 모시고 그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는 그의 성품은 온전했던 것이다. 성품이 온전하니 복이 따르고 넉넉하게 기쁘게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창조주가 의로우시니 그도 그 주 안에서 의롭고 평화롭고 기쁘게 능력 있게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그는 생명의 주 바깥에 살기를 원한 것이다(原罪). 그런데 사탄이라는 주는 참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전하는 불의한 자이니 온전한 자라 할 수가 없다. 성품이 온전하지 않으니 그가 함께 가져오는 것은 일견 화려하고 탐스러운 것이지만 마침내 모두 불행이요 혼돈이요 어두움이요 우울이요 답답함이요 병이요 가난이다(mass of destruction).
아담이 다시 의로워지고 온전하고 행복해지고 부유해지려면 그를 오도한 불의한 주를 떠나야 한다. 그 잘못 살았음을 크게 뉘우치고 참 창조주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이 때 Human이 되어버린 그는 다시 Human-Devine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담의 실수는 그가 창조주와의 관계를 끊고 Human으로서만 살겠다고 결심한데 있었다. 오늘의 아담의 후예들도 똑같은 마음자리에 서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성서에는, 사람은 영(spirit)과 혼(soul)과 육(flesh)으로 되어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soul은 flesh를 외벽으로 삼고 속 깊은데 영을 흡입하여 살고 있는 사람(person)이다. 그 사람됨(personality)은 그의 사상에, 그의 정서에, 그의 의지에 잘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은 그 사상에 있어서 의로웠고 그 정서에 있어서 온유와 사랑이 넘쳤고 그 의지가 바르고 굳어 마침내 훌륭한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었다. 그 열매는 인류를 살려주는, 행복하고 평화롭게 해주는, 건강하고 유복하게 해주는 열매, 즉 덕성이었다.
몸은 이 덕성을 나타내는 기관일 뿐이다. 기관이 좋아서 이 덕성이 함양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점차 몸을 영보다도, 인격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인격을 형성하는 지성이나 감성이나 의지 등은 어디로부터 훈육이 되고 도야를 받는가? 무엇에 그 생명력이 연결되어 있을까? Humanism은, Human은 스스로의 힘으로 높은 지성을 키울 수가 있고 바르게 판단할 수가 있다고 믿는다. 또 사람의 감성은 온당하며 믿을 만하며 항상 정상적으로 기능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삶의 의지는 바르고 곧아 지성을 배반하지도 않고 잘못된 감성을 따르는 법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밝히 말해주는 것은 어떤가. ‘말은 성자처럼 하나 행동은 개와 같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 평화를 위하여’를 연발하면서 뒤로는 전쟁 준비에 광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났던가를 회상해 보라. 행동을 일으키는 의지의 뒤에는 우리의 무의식이 있고 그것이 행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지금은 의지를 이해하고 의식적으로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 사고력을 키우는 것 이상으로 중요시 되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역사상에 나타난 그 많은 영웅호걸들, 구세주를 자칭하면서 자기 꾀로, 자기 지식으로, 자기 힘으로 의롭고 평화롭고 기쁨이 넘치는 세계를 만들겠다고 때를 맞추어 나타나 호언장담하면서 동료들을 끌어 모아 뭇 사람들을 죽이고 온 세계를 혼돈과 어둠과 우울 속으로 몰아 넣어간 자들이 그 얼마였던가. 나는 최근 역사에 부침(浮沈)한 유명한 영웅호걸들에 대하여 쓴 기록들을 읽는 가운데 이들이 스스로의 힘, 그들의 Human으로서의 힘만으로 이와 같은 큰일을 저지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참으로 깜짝깜짝 놀라고 있다. 이들과 연관되어 있는 세력들에는 돈으로 관련된 자도 있고 권력으로 관련된 자도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심지어 종교의 세력까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고, 이럴 수가 하고 한탄하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기록을 읽으면서 저 첫 사람 아담을 생각한다. 사탄의 꾀에 속아 하나님 말씀 같으나 사실은 삐뚤어진 사이비 말씀을 따라가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 하다가 그만 저주에 빠진 사람 그 아담은 그를 속인 마귀와 함께 지금도 그 후예 속에 얼마든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사탄이 아담의 혼, 또는 육에 작용했다. 아담의 영은 하나님 성령의 처소이다. 악령이 아담의 영 안에 거할 수는 없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일 뿐이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의 혼, 또는 육체 속에 거하여 해롭게 할 수가 있다.*
아담이 자기만의 판단으로 살려고 했으나 사실은 사탄의 유혹으로 헛된 비전을 가지고 큰 실수를 한 것처럼, 오늘의 아담들도 자기들의 힘으로 과학문명을 만들어가면서 이제 제 3파의 시대에 접어들어 세계는 세계화로, 인간은 더 고차의 인간으로 진화되어 간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인류는 어떤 영의 꾀임 속에 그 인격을 맡기고 있는 것인지 한 번 반성해 볼 필요는 없을까?
나는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보면서, 또 그 불똥이 미국무역회관으로까지 번져가는 것을 보면서, 과연 어떤 이해관계가, 어떤 권세관계가, 나아가서 어떤 영의 세력이 작용하여 이런 일이 전개되어 가는 것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세계가 놀라고 불안해지고 혼돈해지고 우울해지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악한 영이 그 열매를 맺어가는 중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그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killing spirit들의 등장, 프랑스 필립 4세의 악행, 5만을 죽인 프랑스혁명, 1억 가까이를 죽인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히틀러의 수백만 유태인 학살, 이 사건들의 배후 영은 과연 누구일까. 이 사건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된 사건들의 배후 조종 세력과 또 그 배후에서 사주한 영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제 역사는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사건 배후의 세력 또 그 배후의 영을 밝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life killing spirit들이 이렇게 활보하는데 인류의 창조주, the loving Spirit, the saving Spirit, the life giving Spirit, the creating Spirit은 어떻게 하고 계실까. 얼마나 답답해하고 계실까. 저 바벨탑을 건설하는 인류를 보고 탄식하신 하나님은 지금의 인류를 보고 탄식하고 계시지 않을까.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영역 주권을 주신 것 같다. 자유 의지, 자유 선택권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닮아 아담을 만드셨던 것이다. 그것은 자동인형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이요 혼이요 몸이다. 그것은 Devine-Human이었던 것이다.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자기에 관하여 절대 자유권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탄의 말을 따랐어도 그냥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탄을 따른 자유를 막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금의 인류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똑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시니 말이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그 타락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안타까운 아버지의 심령으로 기다리고 계시지 않으실까. 그 생래의 상속권을 다 챙겨 음녀에게 갖다 바친 그 탕자 말이다. 그 탕자를 못살게 만든 음녀가 누구인가. 그것이 바로 사람을 못살게 구는 악한 영들이 아닌가.
이제 탕자가 잃어버린 권능을 회복하는 길은 딱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자기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길이다. 창조주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이제로부터는 다시 아버지 품에서 사는 것이다. 종으로서가 아니고 아들로서 명예회복을 얻어 권세 있게 사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누구인가. 모든 권세와 주권과 정사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지배자가 아닌가.
그 아버지 권세의 오른편에 장자가 앉아있고 그 아버지 권세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그 장자를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 분은 그런 힘이 있는 사실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역사 속에 나타나서 이미 다 나타내어 보였다. 이미 그 권세가 있음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는 사탄을 이길 힘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힘이 있으므로 사탄에게 포로 된 자들, 즉 병자를 고치시고 또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또 죄인을 의인되게 하기 위하여 대속물이 되어 피를 흘리시고 생래의 상속권을 다 사탄에게 빼앗긴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말씀을 전하여 그 말씀을 따르게 하므로 다시 상속권 있는 부유한 아들 되게 해 주셨다.
잃은 상속권을 다시 찾고 사탄을 이길 능력을 갖는 길은 이제 한 가지, 이 승리한 하나님의 장자를 믿고 그 품격 안에 그 권능 안에 사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는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인 것이다. 그는 원래 죄 없으신 분이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랑의 화신이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버릴 수도 있고 다시 회복할 수도 있는 권세가요 지금도 살아있는 영원한 생명임을 이미 보여주셨다. 그것이 저 부활의 사건이다. 그러니 그의 안에 살고(in Christ), 그로 말미암아 살고(by Christ), 그를 위하여 살기만 하면(for Christ), 그것이 곧 영원히 아버지 품안에 사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는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능력을 타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내 힘만으로는 머리 좋고 능력 많은 사탄의 수단을 간파할 힘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Human의 힘만으로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떠드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유토피안의 유혹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벨탑의 되풀이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 옛날 아담을 속인 사탄은 지금도 계속 창조주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창조주의 보호를 떠나서 자기 말을 따르도록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속삭이고 있다. 그 사탄이 얼마나 담대한지 하나님의 장자마저 시험하여 오도하려 꾀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사탄보다 지혜가 높으시기에 사탄이 왜곡되이 이용하는 하나님이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의 가장 정확한 말씀으로 대항하여 사탄을 꼼짝 못하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그의 안에 있지 않고 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사탄을 자력으로 이기려 한다면 이보다 더 무모한 생각은 없다 할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과학이건, 자력 구원의 종교이건 또는 어떤 이상주의건 유토피아이건 절대로 믿지 않는다. 지금까지 인류를 속여 온 것만 해도 충분하다고 본다.
지금은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고 말해진다. 그것은 사람들이 싸우는 평화롭지 못한 시대라는 뜻을 넘어서 사람들의 배후에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영들의 전쟁시대의 끝이라는 뜻에서 그렇다. 이제 사탄도 그 영향력을 행사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필사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뜻에서 말세인 것이다.
유리 겔라라는 자가 나타나서 TV를 통해 기적을 나타내 보였다. 그것은 기가 막히는 묘술이었고 그 영향은 컸다. 그건데 그는 스스로 그 힘이 외계로부터 온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과연 어떤 영의 힘을 업고 하는 것일까.
저 UFO에 매료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저 UFO와 관련 있는 사람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장래 금성의 세 성자(聖子)가 와서 이 지구를 지배할 것이라고 한다나. 금성의 성자들, 어떤 영들일까. 금성은 satan Lucifer가 아닌가?
Doreen Irvine은 한 때 마녀의 왕이었다. 그녀는 갓 죽은 시체를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제사를 지내고, 술에 어린이의 피를 섞어 마신 마녀그룹의 왕이었다. 그녀는 3m 가량 몸을 뜨게 할 수 있었다. 새장의 새를 날게 하고는 죽이는 묘술도 알고 있었다. 시뻘건 불 속을 맨발로 걸어갈 수도 있었다. 숲 속에서 마녀들의 음탕한 나체놀이를 보러온 목사 일행을 피하기 위하여 연녹색 안개를 피워 몸을 숨기는 묘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소위 압박 장애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참 자유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회개하고 돌아왔다. 그 신비술도 그녀를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한 청년이 히말라야의 밀교에 매료되었다. 그는 라마승 요기에게 사사하기 삼년, 드디어 영체이탈(靈體離脫)에 성공했다. 우주를 마음대로 떠돌아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상쾌했겠는가. 그는 그런 상태에서 같은 영체이탈자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점점 불안해졌고 드디어 육체라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런데 거기에서 나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제 제 힘으로 그곳에 돌아가기는 쉽지가 않았다. 불안은 날로 더해지고 마침내 우울해졌다. 때마침 어떤 힘의 도움으로 드디어 그리던 자기 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봇짐을 싸서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어떤 종교집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자기를 도와 몸으로 돌아오게 한 사랑의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발견했다. 마침내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깨달아 그리스도에게 귀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과 무관한 경험이요 사탄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역사임을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살후 2:9~10).
오늘 이 지구 위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고 많은 정부가 있다. 그러나 이 지구를 그 배후에서 참으로 움직이는 또 하나의 정부가 있다고들 말한다. 그것을 누상(樓上) 정부라고도 하고 또 그림자 정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체로 그런 것은 모두 비밀결사로 되어있고 그 안에 이름이 기록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위대한 힘에 의해서 통합 지휘되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세계사에 이름을 떨치는 과거, 현재의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세계를 구한다는 구주(救主)의 이름도, 성격도 알 수 없으면서 그 결사 속에 이름이 포함되다니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알고 보면 그와 같은 구주를 내가 선택했고 내가 도장 찍어 그 명령을 따르게 된다고 약속한 것이 아닌가. 후일에 그 선택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을 때 그 고통이 어떠하겠는가? 아담의 책임 전가가 무슨 소용이 있었단 말인가. 인생은 그가 선택한 영성(spirituality)으로 만사가 결정되는 것이거늘.
그래서 그리스도는 일찍이 ‘너희는 함부로 서약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던 것일까. 이제 우리는 다 노인이 되었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남은 세월을 이제 몸과 혼에 대해서 보다 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너무 늦기 전에 온전한 생명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생명과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고백록(吿白錄)」 서두에 ‘당신께서 우리를 당신을 향하여 만드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 안식을 얻기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생은 피조물이다. 어떻게 살도록 창조되었는가. 창조주를 향하여 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창조주의 이름을 높이고 그 은덕을 감사하며 찬양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영어로 읽어보자.
“Thou awakest us to delight in Thy praise: for Thou madest us for Thyself, and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repose in Thee.”
인생을 ‘나’를 향하여 살 때에는 고달프고 쉼이 없다. 그러나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를 향하여 그의 기쁜 뜻을 위하여 내 중심이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하며 살 때에 그때 비로소 쉼이 오고 평안이 온다. 그런 뜻이겠다.
적당한 예는 아닐지 모르지만 지구가 태양 중심으로 해서 태양을 바라보면서 살지 않고 제 멋대로 돌아다니면 어떻게 될까. 지구가 자기를 향하여 산다. 자기를 위하여 산다. 자기 멋대로 산다. 이것이 될 얘기인가.
로마서 14:7~9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위하여’라고 번역된 곳을 영어성경 King James Version에서는 무어라고 번역했는지 주목해 보자.
“For none of us liveth to himself, and no man dieth to himself. For whether we live, we live unto the Lord; and whether we did, we die unto the Lord: whether we live therefore, or die, we are the Lords, For to this end Christ both died and rose, and revived, that he might be Lord both of the dead and living.”
영어성경에서는 ‘위하여’를 ‘to’ 또는 ‘unto’로 번역했다. 이는 ‘으로 향하여, 에게로’란 뜻이다. 즉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할 때 사람 뜻 중심으로 사람이 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창조주가 인생을 창조한 것은 인생이 창조주를 향하여 살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때 쉼이 오고 평안이 온다는 것이다.
제멋대로 사는 것, 피조물 인생이 마치 전지전능인 양 제멋대로 사는 것,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 자기를 향하여 사는 것, 인간 조상 아담이 지은 죄가 바로 이 죄가 아닌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산 것이다. 사실은 자기 뜻이 아니고 사탄의 사주에 속아 그 사탄 중심으로, 사탄을 향하여 산 것이다. 지금 아담의 자손인 우리들도 그가 한 짓과 똑같은 짓을 하는 점에서 많이 닮았다. 돈을 향하여 살고 권세를 향하여 살고 명예를 향하여 산다. 이런 것은 사탄을 향하여 살기만 하면 다 얻어질 수 있다고 사탄이 보증하고 있지 않는가(눅 4: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너희 중심으로 사는 것을 그쳐라. 스트레스만 쌓이고 못산다. 이제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라고 말씀하신다. 죄 없으시고 능력 많으시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면 그가 우리 무거운 짐까지 다 져 주심으로 우리는 퍽 쉽게 살 수 있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것이 복된 말씀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가 이 약속을 믿고 마음 문만 열면 그가 우리 안에 들어와 같이 사신다는 것이다. 소아(小我) 속에 대아(大我)가 들어와 산다는 것이다. 육체 속에 성령이 들어와 산다는 것이다. 이제 인생은 단독 인생이 아니다. 두 사람이 동행하는 삶이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듯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열매 못 맺는 가지처럼 버림당하고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리라’고 하신 것도 같은 뜻이 아닌가. ‘참 나’와 ‘육신의 나’가 같이 사는 것이다. 육신이 이제 참 나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다. 육신이 참 나를 향하여 산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산다’(사 11:6)는 말의 바른 뜻이다. 이라가 누구인가. 이 육신의 사람이 아닌가. 어린양이 누구인가.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는 이미 역사가 증명한 바와 같다. 어린양이 이리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아니라 이리가 어린양의 지도를 받는 나라가 평화의 나라인 것이다.
진리 안에서 자유함(요 8:32)이란 도(道)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우리 안에 계시고 함께 하심으로 참 자유를 맛보고 산다는 뜻이다. ‘freedom from myself and freedom to Christ’의 뜻이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도와 생명과 진리가 누구인가가 이미 역사적으로 인격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누구를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가. 모범이 누구인가. 그가 우리를 쉬게 할 만한 능력이 있는가. 말하자면 시험이 끝난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동양의 도(道)를 생각한다. 불교의 진리를 생각한다. 예수는 스스로 자기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라고 증언했다. 동양의 도학도 불교의 진리도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비추어 그 진리성이 더욱 확실해지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그분이 다시 와서 이 혼돈된 세상을 정리할 시기가 임박한 것 같다.
골로새서에서는 이 진아(眞我)의 삶을 live in Christ, by Christ, for Christ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인생을 사는 자리(in)와 인생을 사는 방법(by)과 인생을 사는 목표(for)가 다 진아(眞我)라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는 in Christ, by Christ, for Christ로 되었다고 한다. 피조물은 개별로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다 하나의 중심을 향하여 창조되어 있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조화법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Creation in Christ의 뜻이다. 그리고 창조는 그리스도를 개재(介在)하지 않고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피조된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by)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바로 창조주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역사상의 성자와는 달랐다. 그는 죽은 자를 살리고 작은 음식으로 수천 명을 먹이고 절뚝발이를 일으키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바람도 바다도 명하여 잔잔하게 한 창조주였던 것이다. 만물은 그래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고, 위하여 살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만약 자연의 질서가 잘못 되었다면 그것은 개개의 피조물이 위의 법칙을 어겼을 때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그 존재양식을 달리하는 일이 매우 드물 것이다. 인간이 가장 문제가 많다. 인간은 그 조상 때부터 반역하였고 타락하였고 그 결과로 저만 쉼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고 관리권을 위임받은 모든 피조자연 위에도 혼란을 일으키고 쉼을 얻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하나를 향한 조화를 깨고 무질서 속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죄로 타락한 인간, 그 인간으로 말미암아 조화가 깨져가는 피조세계, 이와 같은 것의 결과로 오는 무질서를 고치는 치료법은 바로 창조의 법인 in Christ, by Christ, for Christ의 삶으로 돌이키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본다.
불교에서도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가를 말할 때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니 제법무아(諸法無我)니 하는 말을 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freedom from’은 이처럼 잘 표현되어 있으나 구체적으로 ‘freedom to’에 관하여는 부처님이란 깨달은 자, 즉 진아를 뜻하기는 해도 부처님의 이름이 너무 많은 것이 오히려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즉 구주가 누구인지 구체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나는 최근에 정신과 의학자 David Hawkins 박사가 쓴 「Power vs Force」란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의식혁명, 이종수 역, 1997, 한문화 멀티미디어 간). 그는 George Goodhezrt 박사의 운동역학(kinesiology)등을 활용하여 그 지식을 정신치료에 활용해서 크게 성공했으며 마침내 더 야심찬 진리탐구를 위하여 수년간 은둔생활을 한 의사이다.
운동역학의 기본원리는 극히 단순하다. 사람의 근육의 힘은 모든 것에 반응한다. 예컨대 몸에 좋은 천연적인 성분의 영양물질에 의한 자극에는 근육의 힘이 증가하는 반면, 인체에 해로운 물질 예컨대 인공감미료 따위의 자극에는 근육의 반응이 현저히 약해진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Diamond 박사는 근육은 물질적인 자극뿐만 아니라 감정적이고 지적인 자극에도 강화 또는 약화로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소는 근육을 강화시키고, ‘나는 너를 미워한다’는 말은 근육을 약화시킨다고 한다. Diamond 박사의 1979년 발간 「Your Body Doesn't Lie」에 실린 H. O. Kendall의 「Muscles: Testing and Function」의 근육 시험기법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이 필요하다. 한 사람은 피험자로서, 한 팔을 바닥과 수평으로 유지하며 옆으로 올린다. 실험자는 두 손가락으로 올려진 팔의 손목을 누르며 ‘저항하라’고 말한다. 피험자는 팔이 아래로 내려가는 압력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한다. 이것이 실험의 전부이다. 피험자가 시험자의 질문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피험자의 팔의 힘이 시험자의 누르는 힘에 의해 측정된다. 만일 언급된 사실이 부정적이거나 허위이거나 200 이하의 수치를 보이는 경우 피험자의 힘은 ‘약해진다’. 만일 대답이 긍정적이거나 수치가 200 이상인 경우 피험자는 ‘강해진다’.
Hawkins 박사는 이 Diamond 박사의 연구방법에 한 가지 다른 기법을 붙였는데 그것은 피험자들의 다양한 태도, 생각, 느낌, 상황, 인간관계 등의 상대적인 강도를 대수의 수치(logarithmic scale)로 측정했다는 점이다. 이 실험의 반응은 피험자의 신체적인 힘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근육이 잘 발달한 운동선수들 역시 바람직스럽지 못한 자극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약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실험자가 50kg도 안 되는 나약한 여자이고 피험자가 100kg 이상의 프로축구선수라 해도 그의 힘센 팔은 가냘픈 여자의 두 손가락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아래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아래의 표는 Hawkins 박사의 실험 결과로 만들어진 의식의 지도다.
(표를 편집하여 넣지 못하였습니다)
이 표에 의하면 ‘슬픔’에 차 있는 사람(에너지레벨 75)은 ‘분노’의 수준(150)에 올라감으로써 훨씬 진전된 상태에 도달한다. 사람이나 사회를 질식시킬 수 있는 ‘무기력’ 상태보다는 분노가 더 활기찬 에너지라 할 수 있다. 용기(200)의 수준은 개인이나 집단적인 상태의 개선을 비로소 생각하게 되는 분기점이 된다. 200 이하로 근육 반응이 나타났다면 근육 반응을 약화시킨 원인이 된 끌개(attractors)가 무엇이든 우리가 부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반면에 200을 넘어서는 수치는 어떤 끌개를 대하든지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감정의 산물이라는 해석이 되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야만 의식의 향상을 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항상 가르침을 펼쳐왔다. 이 사다리를 오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드는가를 가르쳐주었다. 스승 없이는 영적 성숙을 기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가르쳐주었다. 이제 이 지도가 우리 스스로의 노력(self-help)으로 또 어떤 힘(power)의 도움으로 어떻게 하면, 어떻게 사물에 반응하면 건강해지고 행복해지고 자아실현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지, 진화해 갈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데 일조가 될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Hawkins 박사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사실은 ‘결과물’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자신이 인식한 결과물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됨으로써 그 사람은 비로소 피해자의 입장을 초월하여 ‘나를 지배하는 외부의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지, 배움이 기회로 작용할 것인지 우리를 억압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나의 바깥에 있는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태도인 것이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에 저항하거나 도피하고자 함으로써 스스로를 그물에 가두는데서 생겨나는 것일 뿐,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자체에 어떤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혈압을 올리는 시끄러운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혼도 원하지 않을 때에는 큰 아픔이 되지만 원하는 사람에게는 해방을 뜻한다.”
“의식의 지도로 인해 역사의 진행과정에 대해서도 새로운 조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가장 괄목할만한 점은 눈에 보이는 힘(force)과 인간에게 내재된 진실한 힘(power)을 구분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인도를 식민통치하던 대영제국의 말기와 같은 역사의 한 시대를 이러한 연구방법으로 탐구해 볼 수도 있다. 그 당시 영국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타국을 착취하는 나라로써, 의식의 수치가 200 이하였다. 반면에 마하트마 간디의 행동 동기는 보통 사람의 의식 범주에서는 거의 정상(頂上)에 가까운 700의 수치를 보였다. 이 투쟁에서 간디가 이긴 것은 그가 가진 진실한 힘이 월등히 크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의 힘은 진실한 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억지의 힘(175)이었고, 이 억지의 힘은 진실한 힘을 만나면 결국 패배하고 만다.”
“인간은 지금껏 법률행위나 전쟁, 조작, 법률과 규제 등 억지의 힘으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치료’하려고 애써왔다. 역사는 그 자취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렇듯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발버둥 쳤건만 문제는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억지의 힘으로 문제를 치료하려는 정부나 개인은 근시안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예민한 관찰자들은 선연하게 알고 있다. 사회의 갈등이란 근본적인 병인을 드러내고 ‘치유’하기 전에는 절대로 사리지지 않는다는 것을.”
“치료(treatment)와 치유(healing)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치유하려는 사람은 문제의 앞뒤 관계를 파악하려 노력하며, 문제로부터 야기되는 증상을 다루기보다는 문제의 핵심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다. 고혈압 환자에게 약을 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다. 그러나 환자로 하여금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게 하여 분노하고 억압하는 마음을 없애도록 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의식의 지도를 보면… 기쁨으로 가는 열쇠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 조건 없이 친절을 베풀고 자비심을 갖는 데에 있다. 이러한 자비심이 없다면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자비심 없이는 어떠한 환자도 진실로 또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없다는 바로 이점에서, 개인의 치유는 나아가서 곧 사회의 건강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치유 받는 사람’이 곧 ‘치유하는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Hawkins 박사의 글을 읽으면서 종교의 진리와 과학의 진리가 어떻게 만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같이 느꼈다. 특히 그가 force와 power를 구별하여 쓰는 멋에 나는 감동을 받기도 했다. 물리적인 힘을 그는 force라 했고 영적인 힘, 의식의 힘을 power라고 했다. 그리고 그 power는 인간에 외재(外在)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인간에 내재(內在)한다고 갈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 Adam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살던 때의 power는 어떤 power이며 하나님 말씀을 거역할 때의 power는 어떤 power였던 것일까. Hawkins 박사의 입장이라면 그 어느 쪽의 power도 Adam의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써, 순종의 power는 1,000으로 향하는 높은 수치로 나타난 긍정적 반응이고 배반의 power는 0으로 향하는 200 이하의 부정적인 반응의 power라고 답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답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과학적인 접근으로는 그렇게 밖에 답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종교는 뭐라 표현하는가. 다 같은 power이나 위로 향하는 긍정적인 power는 life saving spiritual power라 하고, 밑으로 향하는 부정적인 power는 life killing spiritual power라고 말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할 때의 인간의 마음의 반응은 육신에 붙은 마음자리에서 역사하는 반응인가, 아니면 어떤 영에 붙은 마음자리에서 역사하는 반응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행동에 나타나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마음의 반응은 의식적인 반응인가, 오히려 잠재된 무의식적 반응인가.
우리가 얼마나 수행해야 우리의 반응수준을 바꿀 수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반응은 무의식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걸려서 생긴 우리의 무의식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무의식이 반응한다는 점에 있어서 종교에서 말하는 영적 power, 그리스도와 사탄으로 표시되는 power와 우리 마음속의 power, 긍정적인 power와 부정적인 power는 표현이 다를 뿐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큰 잘못은 아니리라 사료된다.
Abraham Kuyper는 우리의 의식이 부정적인가 긍정적인가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무의식화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우리가 궁핍과 무시 속에 자랐는가, 여유 있고 사랑 받으면서 자랐는가 하는 자라온 사회 배경의 작용으로 법제나 사회의 규제를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나 할까.
둘째, 우리의 이해 관심의 차, 즉 사회적 목표가 서로 다른데서 진실을 고의로 왜곡되게 보기도 하고 편견의 포로가 되기 쉽다. 사회는 이래서 이해 관심이 각축장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이 무의식적 이해 관심은 때때로 의식화되고 양심의 파괴에까지 이르기도 하나 대체로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
셋째,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에 따라 이해는 밝게도 되고 어둡게도 된다. 무엇이든지 미워하는 감정으로 보면 판단의 왜곡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상 세 가지는 모두 우리의 육신적인 소아가 환경의 자극에 대해서 대응할 때 나타나는 무의식적 반응이다. 이와 같은 겉 사람의 움직임이 사탄의 유혹인 셈이다. 이 자기 기만성을 알아차리고 폭로하고 떨쳐버리고 해탈하지 못하는 한 마침내 진실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자기 기만 이것이 바로 망상인 것이다. 바깥에 무슨 유혹자가 있다 해도 나의 판단과 행동의 최후 책임자는 바로 ‘나’ 자신인 것이지 외부자는 아닌 것이다. 참으로 의식의 혁명 없이 자아실현 할 길은 없는 것이다. 물론 사회 개량의 길도 없는 것이다.
*Watchman Nee는 왜 의식개혁이 안되는가, 모처럼 답답한 일이 생겨 자기반성의 기회가 와도 이것을 자기반성 또는 의식 고양의 기회로 보지 않고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깨기를 싫어한다면, 그렇게 무지하다면, 불교용어로 무명(無明)하다면, 이런 미련한 사람은 그 곤란의 책임을 환경이나 세상의 책임으로 돌리고 원망의 칼을 갈 뿐, 또 자기 꾀로 어떻게 고난을 모면해 보려고 몸부림 칠 뿐, 마침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목소리만 들릴 뿐, 지혜자의 음성, 성자의 음성은 끝내 놓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의 전반부에서 얘기한 내용이 여기 후반부에서 인용한 Hawkins 박사의 과학적 연구의 결론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 내용을 첨가해서 독자의 이해에 일조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사람은 신자(信者)나 불신자(不信者)나 다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아간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도와달라고 하는데 불신자(不信者)는 그런 무력한 신(神, powerless God)을 떠나지만 신자(信者)는 그의 곁에 서서 그를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