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둥산에 많은 눈이 와서 그 설경이 별천지였단는 어느 기사를 지난 주 화요일 읽었다. 가슴이 뛰어 나도 주말에 당장 찾아가리라 마음먹었지만 현실의 고단한 삶은 그것조차도 자유롭게 행해지도록 허락하지 않아서 나는 주말을 집에서 보내야 할 처지였다. 할 수 없이 주변의 다른 선수에게 민둥산행을 권하기만 하면서 가슴만 태우고 있었는데…
토요일 오후 5시 반.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되었다. 무얼 해야 하나 하는 고민도 할 필요 없이 바로 인터넷에 접속하여 강릉가는 기차표를 확인한다. 10시 출발은 아직 좌석이 열 세장이 있고, 막차인 11시발은 입석뿐이다. 아쉽다. 어차피 야간산행할 것이 아니라면 최대한 늦게 출발하는 것이 좋은데… 하지만 어쩌랴, 급작스레 준비하는 무모한 선수에게 입석뿐이라도 감지덕지한 것을…
눈길 산행이고 또 혼자가는 산행이라 장소를 변경한다. 아무래도 경험이 있는 산이 좋을 듯 하여 태백산으로 결정한다. 어차피 이번 산행의 목적이 민둥산을 구경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 쌓인 겨울산을 구경함에 있음일지니… 급한 준비. 여분 양말 한 켤레, 아이젠, 스패츠, 덧바지 준비하고 보온통에 끓는 보리차 채워 넣는다. 카메라 밧데리 확인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후레쉬와 뱃터리를 챙긴다. 마지막으로 커피믹스 네 개 넣고서 준비 끝. 아내에겐 마음에도 없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집을 나선다. 담배 한 개비를 빼물으니 청춘시절의 순수함이 다시 한번 내 맘속에서 꿈틀거리는 듯 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찾은 청량리역이 참으로 낮설기까지 하다. 예전의 역사건물이 요란한 상점들로 바뀌어 버린 그 익숙치 않은 풍경이 내 마음의 설렘을 어찌하지는 못하고, 나는 개선장군처럼 역사에 들어갔다. 그렇지 오늘이 토요일이구나…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토요일과 일요일은 내개 있어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날이다. 언제부턴가 특별한 방송이 아닌 한 TV를 멀리하게 되었는데, 토.일 양일의 저녁만은 기를 쓰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내 정해진 스케쥴처럼 되어 있었다. 내가 빼놓지 않고 즐겨보는 프로가 ‘불멸의 이순신’ ‘용의 눈물’시절부터 그 시간에 방영되었던 전 사극을 빼어 놓지 않고 보아 왔으니 이 정도면 KBS에서 감사장을 받아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정도이다. 열차시간에는 20분정도 여유가 있다. 대합실의 여러 TV 중 ‘불멸의 이수신’을 틀어 놓은 화면 앞이 가장 붐빈다. 역시 나는 대세를 따르는가…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아저씨들이었음도 부인할 수가 없기는 하다. 개찰을 하고 플랫폼에서 담배 한 개비를 문다. 젊다 못해서 어려보이기까지 한 친구가 내 옆에서 담배를 피운다. 이제는 아주 익숙한 경험이다.
혼자 가는 여행이라 가졌던 옆자리의 주인공에 대한 묘한 기대감은 이내 나타난 초로의노인에 의하여 깨어지는데, 급기야 이 노인장은 내게 짐을 지우려 든다.
“젊은이, 어디까지 가시나?”
“태백 갑니다.”
“잘 되었네. 그럼 사북에서 날 좀 깨워주게.”
“사북이 어디입니까?”
“태백 가지 두 정거장 전이야.”
“그렇군요. 저도 잠들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깨어 있는다면 어르신을 사북에서 깨우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예전에 어떤 놈은 말이야 깨워달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면서 지만 혼자 내려버려서 내가 도계까지 갔어요. 허허허…”
영감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핸드폰의 알람을 2시에 맞춘다. 태백 도착예정이 2시 37분이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리… 역시 ‘바른생활 사나이’의 전형인가… 하지만 정작 영감님은 객차안이 덥다며 새앙쥐 광 들락거리듯 왔다갔다 하면서 한숨도 잠을 자지 않으면서 나까지 잠을 못자게 한다.
뒷자리엔 젊은 연인들. 옷차림을 보니 나처럼 산행가는 것은 아닌 듯 하고 아마도 정동진이나 강릉에 가는 인사들이라 추측한다. 이 두 선수는 히히덕거림과 무궁화호의 좁은 좌석에서의 꿈틀거림으로 잠 좀 들어보려고 몸부림치는 내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아주 못된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뒷자리가 조용해졌을 즈음 태백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따라 짐을 챙기고 일어서니 세상이 바뀌었음을 시위라도 하듯이 back to front 의 형상으로 자고 있는 뒷자리의 남녀가 내게는 참으로 어색하기만 하다.
이제부터 고민이다. 지금 2시 40분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태백은 전에도 적지 않은 경험이 있지만, 지금은 나 혼자이고, 또 겨울인데다가 한밤중이 아닌가… 혼자가는 겨울야간산행을 거리낌없이 할 정도로 내 내공에 대한 자신감은 없고, 그렇다고 여관에 가서 잠을 자는 것은 하고 싶지가 않고, 하여 드는 생각이 찜질방이었는데,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찜질방이어서 경험도 해 볼 겸 갈 맘이 있었는데… 이게 왠 일인가. 태백역 주변에 찜질방이 보이질 않는다. 옆의 가게에서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이 곳에는 없고 당골가면 있을 지 모르겠단다. 당골이야 어차리 산에 오르려면 거쳐야 하는 곳이니 켕길 것이 없는데 ‘있다’가 아닌 ‘있을지 모르겠다’란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 곳까지 가려면 택시를 타고 가야 하는데 가서 만약에 없으면 그것이야 말로 내게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 결국 나는 PC방으로 향한다. 청승맞음의 극치이다.
PC방에서 나온 시간은 5시 30분. 버스 터미널이 문을 열었다. 근처 기사식당에서 된장국으로 아침을 먹고 터미널에 들어갔는데, 이런 황당함이란… 당골가는 버스는 7시 35분에 첫차가 있단다. 6시 25분에 유일사 가는 버스가 있기는 하지만 그 코스는 이번에 가기로 맘먹은 코스랑은 다르고, 무엇보다도 능선길을 내려와야 한다는 점이 내키지 않아 기각하기로 한다. 고민… 고민… 또 고민… 택시를 탄다.
택시타고 당골 가는 도중의 엽기적 사실 하나. 가는 도중 우연히 요금을 봤는데, 이게 왠 걸 끝자리가 ‘0’이 아니다. 자세히 보니 요금이 131원씩 가산되고 있었다. 이런 요상한 경우가 있나 해서 택시기사에게 물어보니… ‘당골은 31%의 할증이 적용되는 구간’이란다. 참 우습다. 30%면 30%지 31%는 또 뭔가. 이렇게 정한 인사의 머리 속을 한번 들여다 보고 싶다.
산행 준비를 하는데 아이젠이 말썽이다. 예감이 좋질 않지만 가까스로 아이젠을 착용하고 산에 오른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라 오르는 길에서 만나는 등산객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야 지금 나처럼 오르고 있을 터 설마 내려오고 있지는 않을 이른 시간이기 때문이리라. 혼자서 부담없이 가는 산행이라 최대한 속도를 내 보기로 한다. 사진도 가능하면 능선에서부터 찍기로 하고 부지런히 산을 오른다.
한참을 가다 보니 중년의 남녀 3인이 열심히 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을 추월하면서 흘끗 보는데, 아이젠이 없다. 경악한다. ‘십 수년전 내가 겨울 지리산을 오를 때 저런 모습이었지.’ 그 때 나를 보던 아주머니 한 분의 이야기가 새롭다. ‘저 청년 참으로 대단하네…’ 하지만 지금 내가 갖는 느낌은 대단하다기보다는 무모하다는 것은 또 왠 일인가… 그들 일행을 지나서 속보로 오르다 보니 이젠 남녀 한쌍의 모습이다. 여자가 앞서 가고 남자가 뒤따르는데 남자의 등에 매달린 배낭이 남자의 넓은 등에 붙어 있는 매미처럼 작게 느껴진다.
그들도 한참을 쉬지 않고 간다. 도무지 길을 양보해줄 마음은 없는 듯하다. 그들의 걸음에 맞추느라 나도 속도를 늦추면서 가빠진 호흡을 고르는 시간을 가지면서도 호시탐탐 추월할 기회를 노린다. 드디어 그나마 조금 넓은 길이 나옴을 노려 추월하는데, 나도 남자인지라 여자의 얼굴이 궁금하다. 아… 볼 수가 없다. 안면가리개로 눈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가려버렸다. 아쉽다.
고민을 했다. 소문수봉을 들러야 하나… 아니면 문수봉으로 그냥 가야 하나… 그냥 가기로 한다. 어차피 눈은 이미 지천으로 쌓여 있고, 무엇보다도 문수봉의 그 바람을 한시라도 빨리 맞이하고 싶은,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은 그런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다. 앞서 젊은 남녀를 지나친 후부터는 그래도 완만한 길이라 속도를 내기가 더욱 좋아졌다. 내가 소문수봉을 들렀으면 만나게 되었을 고갯길에서 나를 기다리는 선수들은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아저씨 두 분(이 분들에 의해서 내 하산길 초반은 심하게 망가지고 급하게 된다.). 한 부는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고, 다른 분은 서있다. 고개마루라 보통 때 같으면 쉬면서 한 숨 돌릴 만도 한데, 오늘은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최대한 속도를 내기로 했으니까… 마지막 경사진 길을 허이허이 오르니 문수봉. 내 첫번째 목적지이다.
태백산 문수봉.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내가 갈 때마다 세찬 바람을 쏟아준다. 내가 가을과 겨울에만 가보았기에 여름의 그 곳에 대하여 겪어보지 않았지만 경험에 비추어볼 때 여름에는 엄청나게 시원하여 오르는 길의 피로와 더위를 싹 씻어줄 정도의 그런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예전에 어떤 이가 자기수양의 한 방편으로 돌을 옮겨 쌓기 시작하였다는 문수봉 정상의 돌탑. 지금은 어느새 태백의 한 모습이 되어 많은 이들의 기념사진 배경이 되고 있지만 그것도 초기에는 분명 자연을 해치는 흉물에 다름이 아니었으리라.
문수봉의 아름다움과 당당함. 그리고 멀리 바라다보이는 태백 주능선의 웅장함과 건너편으로 보이는 함백의 자태에 감탄하여 넋을 잃는다. 사진을 몇 장 찍으면서 눈의 피로를 씻고 있는 중에 두 아저씨가 이내 올라온다. 준비해간 보리차를 마시려니 두 사람의 힘들어하는 얼굴이 눈에 밟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내가 마시기 전에 그들에게 한 잔씩 뜨거운 보리차를 건네준다. 조금 있으니 내가 아까 지나쳤던 남녀가 도착하였으나 그들은 조금의 휴식도 없이 그냥 지나간다. 아쉽다. 보리차를 건네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아무리 감추려 해도 마스크를 쓰고 보리차를 마실 수는 없지 않겠는가… 두 아저씨는 태평세월이다. 보아하니 선후배같은데 이야기하는 폼새가 여유롭기 그지없다.
먼저 길을 떠난다. 그들과는 천제단에서 만나기로 약조를 하였지만 꼭 지켜질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오늘은 속도를 내서 걷기로 했기 때문이다. 문수봉으로부터 천제단에 이르는 길의 초입은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이른 아침이라 눈도 많이 쌓여 있어서 걷기가 좀 불편하다. 도중에 처음에 까탈스럽게 굴었던 아이젠이 벗겨지는 불상사가 발생. 이를 재착용하는 수고로움을 겪기도 하였다.
분명 문수봉이 얼마라도 천제단보다는 낮은 봉우리임이 분명한데 출발부터 내리막길이니 분명 이 내리막보다는 더 험한 오르막길을 거쳐야 천제단에 이른다는 이야기일진데, 이를 생각하면 매번 산을 오를 때마다 나를 힘빠지게 하는 그런 일이다.
바람이 거세다. 얼굴이 시리다는 느낌보다는 따갑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윈드재킷에 달려있는 후드를 펼처서 머리위로 덮는다. 빵모자를 쓰고 그 위에 후드를 덮은 형상이니 그리 아름다울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 코가 석자이고, 딱히 보는 이도 없으며 또한 가끔씩 만나는 이들도 매양 나와 같은 몰골이니 꺼릴 이유가 없다.
문수봉을 떠난 후부터는 고물 디지털 사진기를 꺼내 한장씩 사진을 찍는다. 내가 지금까지 찍은 태백의 사진 중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 주목사진이다. 태백산을 규정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으며 주목군락지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주목사진은 군락지를 이룬 주목단지에 있는 많은 주목중의 하나가 아니라 문수봉에서 천제단 가는 능선길에 외롭게 서있는 바로 그 놈이다. 작년에는 가지들이 제법 땅보다는 위를 향해 있었는데 지금은 세월의 무게만큼 무거워 보이는 눈의 무게에 기를 펴지 못하고 모두 땅을 향해 있다. 그래도 부서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르노삼성에서 자랑하는 SM5보다도 훨씬 내구성이 뛰어난 모양이다.
규모를 자랑하는 여느 산처럼 태백도 능선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난히도 하얗게 빛을 내고 있는 비행기 폭격훈련장이 신경쓰인다. 그 자태에 걸맞지 않게 생태적으로는 죽은 산이나 다름없다는 태백산. 이 민족의 영산을 망쳐놓은 주범이 바로 그 폭격장과 주변에 있는 미군의 공군기지이다. 정상에서 눈으로 덮혀 있는 활주로를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도 로키산맥이나 엘로우스톤 국립공원에 폭격장이나 하다 못해 예비군 사격훈련장이라도 지을까?’
오르막길에서 앞서가던 남녀를 추월하였다. 사진을 위해서 잠시씩 멈춘 것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쉬지 않은 걸음이니만큼 그들보다 빠르기는 빠른 모양이다.
하단에 이르니 예전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무덤이 눈을 맞고 유난히 하얀 자태를 보이면서 내 눈을 끈다. 판서를 지낸 통정대부 모씨의 무덤이라고 묘석이 말하고 있지만 사실을 확인할 길이 내게는 없을 뿐더러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높은 곳에까지 올라와서 무덤을 쓸 사연이 있을 터이니 그의 벼슬에 어울리지 않게 사후가 행복하지만은 않은 인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이 곳에 이르는 길이 분명 험하였을 테니 아무리 효심이 두터운 후손일지라도 자주 참배하고 풀이라도 뽑아주기가 녹록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게다가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른 후손이 있어서 이 곳을 찾았을 수야 있겠지만 필경 그도 오래가지는 못하였을 게다. 예전 태백에는 호랑이가 출몰하여 많은 이를 물어죽였다는 이야기가 있질 않는가. 내려오는 길에 호식총(虎食塚)을 보고 나니 더욱더 그 생각이 그럴싸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하단을 지나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니 드디어 천제단이다. 얼마 전에 이강욱프로와 조한승 프로가 대국을 가졌던 바로 그 곳이다. 듣기로는 한반도에 음기가 강한 산이 세 곳이 있는데 계룡산, 마니산, 그리고 바로 이 곳 태백산이라 하였다. 내가 풍수나 역학에 문외한인 관계로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미아리의 점보는 이들 대부분이 계룡산동창회 회원이라 하고 강화에 위치한 마니산에는 참성단이, 또 이곳 태백산에는 천제단이 있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닐 성 싶다.
천제단의 바람이 거세다. 하지만 문수봉에서 느꼈던 바람보다는 덜한 것 같다. 아마도 능선을 오는 동안 많이 적응이 되었나 보다. 이 곳에 오니 활주로와 사격훈련장의 흔적이 보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같이 이야기할 사람도 없어 혼자서 속으로 욕만 할 뿐이다. 신성한 장소에서 욕을 하는 것은 분명 불경스러운 일일 터이지만 사안이 사안인만큼 한배검께서도 다 이해해주시리라.
사진을 몇 장 찍고, 천제단 밖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고 나니 두 아저씨가 올라온다. 생각보다는 빠른 걸음이다. 천제단에서 한배검께 절하고 나더니 소주를 꺼내 조금 뿌린다. 나도 절하고 소원을 좀 빌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평생 안하다가 이제 와서 소원을 비는 것이 너무 속보이는 것 같아서 포기하기로 하였다. 처음 생각에 바람을 조금이라도 막아 주는 천제단 안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불경한 것 같아서 밖에서 바람을 맞으며 커피도 마시고 그랬는데 이들은 단 안에서 태연하게 소주와 육포를 꺼내더니 마시기 시작한다. 그래도 아는 처지라고 술을 한 잔 권하기에 잔을 내밀었더니, 왠걸… 반이 넘는 양이다. 내가 좋다 하여 받은 잔이니 버릴 수도 없고 그냥 단숨에 마셨다. 기분이 좋다. 나중에 보니 그들은 둘이서 오면서 소주를 두 병이나 가지고 온 것이었다. 후배로 보이는 아저씨는 조금만 받아 마시는 시늉만 하고 한 병 이상을 혼자서 다 마신다. 대단한 술꾼인 모양이다. 안주도 변변치 않은데… 준비해온 커피를 한 잔씩 권한다. 대단한 걸 준비해왔다고 공치사들이다. 하긴 그 정도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라고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은 아닐 성 싶다. 미국사람들도 이야기하지 않는가… ‘Tough situation calls for tough measures.’
태백산 정상에는 온도계가 있다. 산정의 전체적인 모양과는 어울리지 않은 구조물인데 모 산악회에서 설치한 것이라고 씌여 있다. 이 곳을 찾은 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의문이지만 내게는 흉물에 가깝다. 그래도 기왕 있는 놈이니 온도나 알아볼까 하니 영하 17도란다. 조금 실망이다. 바람의 매서움이나 커피가 식는 정도를 생각하면 한 30도 내지는 50도는 되어야 하는데…
하산길을 나서기로 했다. 단군성전을 들를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주목이 낫겠다 싶어서 우회하는 길을 택하기로 한다. 장군단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 하고 있다.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무슨 제를 올리는 중이었으리라… 땅에 낮게 깔려 있는 잔 나무들에는 하안 무엇인가가 쌓여 있는데 바람이 심한데도 그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눈은 아닐 성 싶고 필경 상고대라 생각된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의 몸상태가 심상치 않다. 심장박동이 내가 느껴질 정도로 급해지고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원인을 찾아냈다. 천제단에서 마신 소주다. 내가 소지하고 있는 컵으로 반을 넘게 따른 것을 다 마셔 버렸으니 소주잔으로 따지만 넉 잔은 족히 될 터인데, 가뜩이나 술 잘 마시지 못하는 인사가 그 추위 속에서 소주 반병을 마시고 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탈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유일사 가는 길을 왼쪽으로 하고 오른쪽으로 돌아서니 사람이 자주 다니질 않아서 그런지 희미한 자국만 보일 뿐이다. 이제는 러셀이다. 눈을 헤치면서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내가 가는 눈 위의 첫 발자국이 뒷 사람이 따르는 길에 안내판 노릇이라도 하여야 할 텐데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바람이 워낙 심하기 때문에 금방 덮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 길지 않은 망경사까지의 길이었건만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가슴은 벌렁벌렁 뛰고 길은 좋지가 않다. 폴을 줄여잡는다. 왼 쪽으로 내리막진 길이니 당연히 폴을 길게 하여 왼 손으로 잡아야 하지만, 익숙치 않은 자세라 오른손을 유지하고 대신에 폴을 짧게 줄여서 잡기로 한다. 쌓인 눈은 그 깊이를 가늠치 못하게 하여 잘못 딛으면 무릅까지 빠지는 것은 예사이다. 덧바지를 입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망경사에서 화장실에 간다. 그 추운 날씨에도 고유의 냄새가 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한다. 전통양식으로 지은 절집의 해우소는 원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사실 근심을 해소하러 가는 곳이라 하여 해우소(解憂所)라 이름붙여 놓고는 오히려 악취 때문에 새로운 근심을 사게 된다면 이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는 전라남도 순천의 조계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사의 해우소를 본받을 일이다. 우리나라 태고종의 본산인 선암사는 그 경치 그윽함으로도 가 볼만한 가치가 있는 사찰이지만 전통양식의 해우소를 보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사찰이라는 점이 내게는 더 끌리는 일이다. 게다가 반대편의 송광사와는 달리 인위적인 돈 냄새가 덜 나는 사찰이기도 하니 이래저래 내 입맛에는 쏙 맞는 사찰이라 하겠다.
내려오는 길이 태백시에서 자랑하는 오궁썰매를 탈 수 있는 코스이다. 썰매를 착용하면 마치 오리궁둥이처럼 된다 하여 오궁이라고 이름붙였다고 하는데 이는 태백시의 수익원개발 노력의 하나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부터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수익사업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뻔한 이야기지만 그 두 가지 방향은 물론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이다. 되먹지도 않은 걸 내세워서 문화재네 관관상품입네 하여 입장료 받고 거의 삥뜯는 수준으로 돈을 벌려는 짓거리들이 있으며 나름대로 독특하고 어필할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하여 타지의 사람들을 유치하여 수익을 올리려는 노력들이 있다. 태백산의 오궁썰매는 분명 후자의 것으로 태백시에서 나름대로 등산로를 손질하고 또 실정에 맞는 썰매를 개발함은 물론, 상해보험에까지 가입하여 본 썰매에 의하여 본 구간에서 당한 사고에 대하여 보험금까지 지급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주고 있다. 이번에는 그 기간이 지난 관계로 오궁썰매를 타는 사람들을 보지는 못하였다. 이 것이 다행인 것은 금번 산행에서 썰매타기는 내 관심 밖의 일이었으니 만약에 하산길에 썰매타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는 오히려 번거로운 일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참을 내려오니 갈림길이다. 왼쪽은 백단사로 가는 길로 연전에 묶었던 산장이 위치한 곳으로 가는 길이요, 오른쪽은 단군성전을 거쳐서 당골광장으로 가는 길이다. 그 곳의 나무 의자를 보고서 나는 눈이 얼마나 온 지를 짐직할 수가 있었다. 땅으로부터 상당한 높이로 올라와서 편하게 앉을 수 있었던 의자로 기억되고 있던 그 놈들이 거의 땅바닥에 붙어서 앉은 모습이 마치 앉은뱅이처럼 불편할 정도가 되었으니 그 차이는 전부 눈으로 다져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곳은 또한 커피와 오뎅을 파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 곳의 아저씨는 새벽 세 시에 올라온다고 한다. 오뎅 한 덩어리에 천원이라는 충분히 예상가능한 답을 듣고서 먹는 것을 포기해버린 나이기는 하지만 먹고 사는 일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숙연하기까지 하다.
당골광장방향으로 길을 잡고 조금 내려오니 두 가지가 눈을 사로잡는다. 그 첫번째는 옹달샘인데 그 추운 산중에서도 얼지 않고 조금씩 나오는 것을 보니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자연의 오묘함이 느껴진다. 옹달샘을 지나자마자 내 눈을 잡는 안내판이 호식총(虎食塚)이다. 불쌍한 효자님들…
이제 길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오잉! 내 눈을 사로잡는 인사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우리나이로 세 살밖에 되지 않은 꼬마였다. 내 경황이 없어 그 부모께 양해를 구하고 사진마늘 한 장 찍었을 뿐, 그 이름이나 사는 곳을 물어보지 못하였으나 이는 분명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꼭대기까지는 못가고 녀석이 갈 수 있는 정도까지만 가려고 한다는 아빠의 이야기가 있었으나 이 녀석이 자라면 모르긴 해도 허영호나 박영석 정도의 파이오니어가 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하겠다.
단군성전까지는 조금은 지루한 느낌이 들 정도의 무난한 길이다. 이제 술도 거의 깬 듯하여 몸도 가볍다. 예전에 들른 적도 있고 하여 단군성전은 지나치기로 한다. 아니다. 다시 들르기로 한다. 단군성전을 지나쳐서 광장에 거의 갔다가 발길을 다시 되돌렸다. 성전 밖의 ‘국조단군상’이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없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여기서도 소원을 빌라는 안내가 있으나 역시 빌지 않기로 한다. 오히려 단군할아버지의 역성이나 살까봐 두려운 모야이다.
당골광장의 눈조각이 볼품이 없어졌다. 눈 조각을 세운 후 따뜻한 날이 며칠이 있어서 그 동안 녹아내려서란다. 작년에 봤던 눈조각과 잘 비교된다
태백시로 나오는 시내버스를 타니 졸음이 밀려온다. 산행의 피곤함도 있겠지만 전날 잠을 자지 못함에 기인함이 더 크리라. 태백시에 나와서 시계를 보니 12시 반이다. 애초에 4시 35분에 태백에서 출발하는 기차표를 예매해 두었지만 시간이 너무 이르다. 잠시 철암을 다녀올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택시로 10분거리라는데… 하지만 피곤이 나를 막는다. 태백역 앞에 있는 맛있다고 소문난 소고기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1인분에 13,000원인데 특이한 것은 300그램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집의 문을 열어보고 이내 맘을 바꾼다. 손님이 한 명도 없는 것이다. 결국 옆에 있는 싸구려 식당에 들어가서 제육볶음을 시켜 먹는다. 무뚝뚝하게 생긴 주인아주머니가 청국장국을 공짜로 준다. 감격해서 옆 테이블을 봤더니 이병 계급장을 단 젊은 친구에게도 청국장은 제공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집의 기본메뉴인가보다.
식사를 하고 예매해두었던 기차표를 취소하였다. 수수료가 붙는다. 물경 10%나 된다. 나쁜 놈들. 어차피 그 자리에는 누군가 앉을 텐데…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한다. 기차표를 취소하기 전에 이미 좌석이 충분함을 확인하였기에 좌석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다. 그런데 매표소 창구의 아주머니가 나를 당황시킨다. 카드는 안된단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버스표 팔면서 카드를 안 받는단 말인가. 국세청에 찔러버릴가 하는 생각이 순간 들기도 한다. 게다가 요금도 기차보다 3,000원이나 비싸면서 말이다. 그래도 기차시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또 우등이라 좌석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락하며 동서울터미널이 도착지점이라 집에 가기도 편하고 해서 그걸로 위안을 삼기로 한다.
요새 고속버스 참 좋아졌다. 스카이티브이가 설치되어 있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외국인이 최우수상을 타는 것을 보았다. 기사가 체널을 돌렸는데 OCN이다. 영화제목은 툼레이더(Tomb Raider)란다. 아마도 Angelina Jolie가 주연인 황당무계의 첨단을 달리는 그런 영화다. Angelina Jolie. 그녀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섹시한 여성으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여인이다. 비록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2004년도에는 Britney Spears에 이어 2등인가 3등인가 했었다. 그녀와 순위를 다투었던 여인이 Halle Berry였던 걸로 기억된다. 2003년도에는 Halle Berry가 1등이었던 것 같은데…
모처럼 가졌던 혼자만의 산행은 돌아오는 차안에서 간 밤의 부족한 잠을 채우면서 그렇게 끝을 보고 있었다.
첫댓글 졸리보단 베리가 낫긴 하죠. 눈에 선하네 태백...
석기시대선배님 항상 너무 많이 긴 문장을 쓰시네요...읽기가 힘들었어요.ㅜㅜ.
우리 혜심후배님 한글 교재로 써요... 죽은 문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문장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