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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롭스크 지역과 한국독립운동
하바롭스크는 재정러시아 상인으로 아무르강을 탐험한 하바로프(Erofei Khabarov)의 이름을 따서 1858년 하바로브카(Khabarovka)로 명명된 이래, 0893년에 하바호브스크(Khabrovsk)로 개칭되었다.
하바로브스크는 1884년 이래 연흑룡주 총독부가 위치해 있던 원동 러시아의 정치적, 행정적 중심지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전시기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비하여 한국독립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었지만, 특히 10월혁명 이후에는 원동지역의 볼셰비키정권인 원동인민위원회가 위치하고 있었던 관계로 볼셰비키세력으로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또한 아무르강과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통하여 위로는 블라고베시켄스트, 스바보드늬, 치타, 이르쿠츠크로 통하고, 아래로는 비킨, 이만, 스파스코예, 우수리스크, 라즈돌리노예, 블라디보스토크 등으로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1922년 이른바 원동해방전쟁에서 하바로브스크 탈환은 연해주해방의 관건이라고 할 정도로 원동러시아를 장학함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매주 중요한 지역이었다.
하바로브스크 주변에는 농평, 하농평, 인동 등 한인농춘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어서 민족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인동마을에는 이미 1909년에 문덕중학교가 설립되어 한인자제들을 교육시켰으며, 10월혁명 이후 고려족 중앙총회가 맞서 발기되었던 한족중앙총회의 지방대표원회의가 개최된 곳이기도 하다. 하바로브스크시는 최초의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이 창당된 곳으로 원동지역 한인사회 볼셰비키화의 근거지가 되었다.
1. 한인사회당 창당장소 (하바로브스크 한인민회 회관)
현주소 : 하바로브스크 칼리니나 거리 15번지
당시의 건물은 남아있지 않고 번지수에 해당하는 위치만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같은 번지는 빵공장 부지로 되어 있고, 옆에 위치한 21번지 건물은 아동음악학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최초의 한인볼셰비키당원 김알렉슨드라의 지도하에 이동휘, 김립, 유동열, 박애, 이인섭, 심백원, 김용환, 오성묵, 이한영, 오와실리, 오하묵, 유스테판, 안흥근 등이 발기하여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이들 발기인들은 1918년 5월 11일, 하바로브스크 조선인민회 회관건물 2층에서 한인사회당의 정식창립을 위한 한인사회당중앙위원회 확대총회를 개최하고 중앙간부를 선출하였다. 대회는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연대와 반일(反日), 반제(反帝)의 사회주의 강령을 채택하고 중앙위원들을 선출하였으며 조직, 선전, 군사 등 주요 부서를 설치하였다. 중앙간부위원장에는 이동휘, 부위원장에는 김알렉산드라의 남편인 오와실리(오영준, 러시아문 서기 겸임) 청년부의장에는 오성묵, 한글서기 겸 기관지 『자유종』의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한인사회당은 장교 훈련을 위한 군사학교(교장 유동열)을 설립하였으며, 김알렉산드라를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주둔 일본군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反帝), 반전(反戰)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한인사회당이 조직한 적위대 100명이 이만전선에서 배위파와의 전투에 참가하여 다수가 사망하였다.
2. 한인사회당 당간부회관터
현주소 : 칼리니나 거리 18번지
1918년 5월 11일에 창당된 한인사회당의 간부들이 활동하던 건물이 있던 자리다. 이 건물에서 한인사회의 친불셰비키화와 볼셰비기 혁명세력과의 항일연대투쟁을 지도하던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6월 28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체코군 봉기를 계기로 8월초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열강들이 러시아혁명에 무력개입하게 되면서 백위파가 득세하게 되자 후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아무르주(흑룡주), 북만주 등으로 도피하였다. 한인사회당 위원장 이동휘는 북만주로 도피하였고, 이인섭은 한인사회당 당간부회관에 보관중인 당원명부 등 당비밀분서들을 소각하였다. 김알렉산드라, 김립, 유동열, 이인섭 등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바론 코르프’호를 타고 아무르강을 거슬러 도피하였으나, 체포되어 백위파로 위장하여 석방되었으나 김알렉산드라는 백위파에게 처형되고 말았다. 최근까지 이 건물터에는 철도국 건물이 있었으나 3년동안 공터로 방치되어 있다가 현재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18번지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3. 보문사 소재지
현주소 : 칼리니나 거리 27번지
1917년 6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전로한족대표회는 종래 한인학교에서 사용하던 러시아교과서를 폐지하고 한글교과서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한글로 된 교과서를 출판, 배포할 목적으로 한인유지들로부터 1만루블의 주식을 모아 1917년 9월 하바로브스크에서 김립, 이한영의 발기로 한국 역사서, 한국지리 등 교과서를 출한하기 위한 민족 출판사 보문사를 창립하게 되었다.
보문사의 주요 간부로는 사장 김립, 필자 이진오 외에 전(前) 나자구무관학교생 1명 사원으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하바로브스크 주둔 러시아 군대의 석판을 대여하여 사용하였으나, 그 후 원동인민위원회 위원장 크라스노쇼코프(Aleksandr Mikhailovich Krasnoshekov)가 석판기계 1대, 인쇄비용 5천루블, 1천루블 이상의 가격에 해당하는 종이를 제공하였다. 이후 한인사회당의 기관지인 『자유종』을 비롯한 선전물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간부를 보강하여 유동열, 김립이 한글 번역을, 김진보, 오와실 리가 러시아어 번역을 담당하였다. 1918년 8월 일본군이 하바로브스크를 점령하게 되어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각지로 분산, 도피하게 되자 석판, 종이, 금전 등을 하바로브스크 한인거류민회장인 장호문에게 보관시켰다.
이렇게 보문사는 폐쇄되고 말았다. 보문사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현재 27번지, 27-A번지, 27-B번지 등 3개 번지로 나누어져 있다. 27번지와 27-A번지건물은 칼리니나 거리 연변에 위치하고 있으나 뒤쪽에 들어가 있는 27-B번지에는 붉은 3층 건물이 있다. 27번지 건물은 하바로브스크 초급직업교육훈련소 사무실로 27-B번지는 개인회사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이 27-B번지 건물은 개인회사가 하바로브스크시로부터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하바로브스크시와의 임대조건에 건물을 변형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이 건물이 27번지 건물보다 오래된 것으로 보아 보문사가 있었던 건물일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단정할 수는 없다.
4. 한인사회당 창건자 김알렉산드라가 활동하던 사무실 건물
현주소 : 무리비예프-아무르스카야 거리 22번지
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의 조직자이자 볼셰비키당 하바로브스크시 지부의 간부였던 김알렉산드라가 근무했던 사무실이 있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옥상 3층과 반지하 1층 벽돌건물로서 건물 모퉁이 벽에는 김알렉산드라의 얼굴을 새긴 부조가 걸려 있고 옆에 ‘김스탄케비치 알력산드라가 1917년에서 1918년까지 일한 건물’이라고 쓰여 있고, 볼셰비키 하바로브스크시위원회 뷰로의 위원이자 시소비에트 외무위원이라는 직함, 그리고 1918년에 희생된 사실이 새겨져 있는 동판이 부착되어 있었다.
이 건물은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러시아지역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기념물로서 역사적으로나 향후 한러관계에 있어서 국제친선과 상호연대의 상징적 인물로서 기억되기 위해서도 그 보존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속화되는 러시아의 자본주의화와 더불어 이 건물의 보존책이 불투명하다. 2005년 8월초에 이 건물을 찾았을 때 건물에 부착되어 있던 김알렉산드라의 동판이 떼어져 있었다 건물수리 후에 다시 부착한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이 건물은 무라비예프-아무르스카야 거리와 칼리니나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인사회당의 간부회관건물, 보문사건물 등이 멀지 않은 칼리니나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한인사회당 간부들과 함께 활동하기에 편리한 위치에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5. 김알렉산드라 등 시베리아내전시기에 희생된 빨치산희생자 추모기념탑
1918년~1920년 시베리아내전 당시 보시에트권력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 백위파와 외국간섭군에 의하여 처형되었던 곳으로 러시아사람들은 ‘죽음의 계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비문에는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항상 기억하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추모기념탑에는 김알렉산드라를 비롯한 인명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김알렉산드라는 사회주의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애족적인 항일운동가로서의 역사적 위상과 역할이 새삼 강조될 필요가 있다.
6. 하바로브스크 시립 공동묘지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하여 처형된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공동묘지 입구 왼편에 기도소가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그둘레에 세워진 검은 책모양의 기념석에는 하바로브크스시에서 처형되어 묻힌 4,302명의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들 가운데 조명희, 김하석, 황석태 등 낯익은 한국인 지도자들의 이름도 들어 있다.
이 기념석은 2003년 10월에 하바호브스크 시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이 기념석이 세워지기 전에는 기도소 뒤에 스탈린시대에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둥근 석판명패들이 부착되어 있었고, 박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허득만, 이시주, 강고간 등 한인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명패들도 있었다. 또한 벽판옆에는 조명희(1894~1938)의 묘비석이 세워져 있고 “뛰어난 조선작가 조명희”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러나 어디로 옮겨 졌는지 조명희의 이 묘비석은 현재 볼 수 없다.
1928년 조선에서 러시아로 방명했던 카프문학작가 조명희는 추풍의 육성촌(뿌칠로프카마을)을 거쳐 하바로브스크로 이주하였다. 조명희와 그의 가족들은 하바로브스크에서 조명희가 스탈린정권에 의하여 체포되는 1937년지 살았다.
조명희는 1937년 9월 18일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 사형을 언도받은 후 5월 11일 하바로브스크에서 총살되었다. 조명희는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대회 이후 1956년 7월 20일 복권되었다.
7. 아무르 선착장, 우쪼스 언덕
현주소 : 하바로브스크시 문화유식중앙공원 뒤편의 아무르강변
하바로브스크 시민들의 유람선 선착장으로 여름에는 수영, 피서지로 활용되고 있다. 1918년 8월, 일본군이 출병하고 9월초에 하바로브스크를 점령하자,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각자 흩어져 도피하게 되는데, 김알렉산드라, 유동열, 이인섭, 김립 등 10여명이 바른 코르프호를 타고 아무르강을 거슬러 흑룡주(아무르주)로 도피하던 중 백위파에게 체포되어 하바로브스크로 압송되었다. 유동열, 김립, 이인섭 등은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무사히 석방되었으나 김알렉산드라는 카르마코프의 백위파군에 의하여 심한 고문을 받고 9월 16일 ‘죽음의 골짜기’에서 처형되었다. 선착장에서 공원쪽을 바라보면 강쪽으로 나온 언덕이 있는데 이것이 우쪼스언덕이다. 이 언덕에서 헝가리인, 오스트리아인 등 포로출신으로 볼셰비키에 우호적이었던 예술가 16명이 배위파를 찬양하는 음악 연주를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자 처형되어 강으로 던져졌다. 이런 배경으로 우쪼스언덕은 김알렉산드라를 비롯한 러시아혁명가들이 백위파들에 의하여 처형된 장소라는 주장도 있다.
8. 하바로브스크의 기타 독립운동 사적지
하바롭스크에는 이밖에도 한인들을 후원했던 마지막 연흑룡주 총독 곤닷찌의 관저. 카프문학작가 조명희 거주지 등이 있고, 하바로브스크 주변지역에는 시베리아내전 시기 한인 빨치산들이 러시아혁명군의 편에서 백위파들과 싸운 볼로차예프카전투 희생자추모 기념물, 인정거장 전투지, 김일성부대 야영지가 있던 야츠코 등이 있다.
<하바롭스크의 주요 관광지>
* 아무르 강
하바는 아무르강 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된 곳으로 러시아에서 규모가 8번째에 이른다. 강의 길이는 하바로브스크 지역 안쪽 1,000Km를 포함하여 4,440Km이다. 아무르강 언덕에서 강의 전경을 바라보면 하바로브스크를 가로질러 흐르는 아무르강(흑룡강-중국)의 용틀임과 현대식 공단의 조화는 한편의 파노라마식 사진을 보는 것 같은 감상을 준다.
1891년 니콜라이 2세의 하바로브스크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리비에프-아무르스키 기념비와 오호츠크해에서 아무르강에 도달한 해군장교 네벨스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비도 볼 수 있다.
* Khekhtsir 국립공원
Khekhtsir 국립공원은 하바로브스크 남쪽 48Km 거리에 있으며, 전체면적은 448㎢에 이른다. 시호데-아린산맥은 2,500~3,300Km의 높이에 968Km 정도 뻗어 있다. 이 지역은 침엽수림지역이나 만주 호두나무는 마치 아열대지역으로 이곳을 오해하게끔 한다. 35종의 포유류와 191종의 조류가 이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아무르 호랑이는 1947년 이후 주법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이외에도 곰, 늑대, 여우, 멧돼지, 검은담비 등이 서식하고 있다.
* 야수 보호센터
야수보호센터는 하바로브스크로부터 북쪽 150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병들고 다친 동물들이 치료되고 보호되는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두 마리의 아무르 호랑이와 야생 곰, 사슴, 이리 등이 보호구역내에서 보호되고 있어, 아무르 호랑이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이곳으로부터 2시간가량 차량으로 오래된 러시아 전통마을과 강, 호수 등 아름다운 하바로브스크의 주변경관을 관광할 수 있다. 전통마을을 돌아보면서 러시아 극동지역의 전통을 따른 사슬릭(양고기 꼬치구이)과 러시아 파이, 차를 즐기며 러시아식 사우나를 할 수도 있다.
* 미술 박물관
하바로브스크의 아름다운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건물로 1931년 문을 열었다. 1만여 점의 전시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I Aivazovsky, I. Kramskoy. V. Shrikov. M. Nesterov 등 러시아를 대표하는 미술가들의 작품을 주로 소장하고 있다. 고대 야콘화와 18~19세기 서유럽 예술가들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으며 때로는 판매도 한다.
* 그로데코브 박물관
자연, 민족학, 역사, 고고학에 관련된 박물관으로 1894년 개장한 후 보수되어 1995년에 재개장되었으며, 14만 4,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도시 각 분야의 뛰어난 학자들이 모인 극동 러시아 지리학회가 주관하여 개관하였다. 특히 1910~1918년과 1925~1926년까지는 극동지역 학자인 아르센예프가 관장을 역임하였다. 박물관은 지역의 광물과 자연사에 관련된 전시물을 다수 보유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모피계 동물들과 극동지역에서 서식하는 동물들의 박제본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20세기 원주민들의 공예품(낚시도구, 의복, 자작나무 보트 등)을 복원해 놓아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 중앙광장
하바로브스크 시내 중심으로부터 차량으로 2시간 정도 시내투어를 할 수 있다. 레닌동상이 서 있는 중앙광장으로부터 시작해 주청사, 의학대학을 경유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리비에프-아무르스키 대로를 따라 가다보면 드라마 극장과 청년극장을 방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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