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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가만히 좋아하는』(창비)
- 이 시집도 제가 뭐하고 산지 모르는 2006년에 나왔네요. 만약 그때 읽었더라면 그 이후의 미련퉁이 같은 글쓰기도 때려치웠을지 모릅니다. 시「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를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를 읽으며 딱 지금 그런 심정입니다. 시집 읽기를 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제 목을 조른 시입니다. 그래도 제 어리석음은 완성해야 하겠기에 씁니다. 가만 보니 형이라고 부르면서도 술 한번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아주 아주 오래전 마포 창비 앞 어느 중국집에선가, 이번 시집의 중후한 해설을 쓰신 임우기 형과 시인이 한잔 하는 자리에 잠시 있었던 게 고작입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자리에서 마신 고량주가 무슨 농약병 같은데 들어있던 이과두주였습니다. 봄볕이 중국집만의 문양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고 벌건 얼굴로 앉아 별말 없이 마셨습니다. 시집을 읽으니 시에 대해 떠벌이고 산 제 세월이 꽤 재밌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저도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에 눈을 씻고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늙어가겠지요”(「때늦은 사랑」에서)라고 말해야겠습니다.
-오철수
풍경의 깊이
-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풍경이면 풍경인 것이지 왜 풍경의 “깊이”를 말하는 것입니까?
- 풍경이 감각적 대상 이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감각적 대상이 그 이상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 내가 가지고 있는 공통성의 기억이 감각적 대상과 겹쳐져 시공간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각에도 깊이가 생겨납니다.
그럼 이 시는 어떤 기억의 공통성을 느끼는 것입니까?
-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추억 같은 그런 종류의 기억은 아닙니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는 것으로 보아 존재의 근원적 공통성을 느끼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바람 불고-아무도 눈여겨봐주지 않아도-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 것은 풀에게만 해당하는 경우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적 시간이 흘러가는 내내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렇게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눈이 ‘지금-여기’에 있음으로의 “떨림”에 머뭅니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사건이 시간을 피워낸다’고 생각하면, 그 파르르한 떨림이라는 사건이 비로소 우주의 시간을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떨림을 클로즈업하며 공명합니다.
우선 그 떨림에 대한 클로즈업이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떨림은 아무리 그 폭이 작아도 이쪽과 저쪽의 사이가 있어야 하고 그 사이를 순간이 이어져가야 합니다. 그래서 순간에는 늘 과거와 미래가 상감되어 있습니다. 순간을 기점으로 뒤로는 무한한 과거라는 길이 있고 앞으로도 역시 무한한 미래라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 둘이 부딪혀 순간이라는 생성적 존재의 빛, “떨림”을 만듭니다. 이것을 궁극지사(窮極之辭)의 형상,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생성적 존재 모두는 순간으로 존재합니다.
다음으로는 그에 공명하는 마음이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이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생성적 존재가 순간으로 존재한다면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는 공통의 장(場)입니다. 그 공통의 장을 시인은 “고요”(늙은 옛날의 고요, 어린 고요)라고 합니다. 시인은 풀들의 파르르한 떨림 속에서도 모든 존재에게 공통의 장인 그 고요를 느낀 것입니다. 물론 그 고요 속에는 시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백년이니 이백년이니 석달 열흘이니 하는 시간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환(幻)의 개념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고요는 “무한”입니다. 그 무한 속에서는 존재의 형식도 무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언어 개념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시인은 지금 공명하는 마음이기에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키 낮은 풀잎의 떨림에 공명하는 깊이가 생깁니다.
그때 느껴지는 것이 모든 존재의 공통적 기억으로서의 고요이고, 그 고요 속에 무한의 형식으로 있는 존재들이고, 그 안에서 하나됨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풍경의 깊이를 보고 느낀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들여다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한평생 존재의 소유적 욕망에 얽매여 살아온 날들이 이 시를 읽으며 ‘맑은 무상’과 더불어 “그대의 눈빛”이 머물고 간 나의 어떤 모습을 생각게 합니다. 나 또한 “그 작은 목숨들의” 하나였음으로!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를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를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처럼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 이 시는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 가운데 한 구절에서 운을 빌려왔다
아, 이런 게 이 세상을 살고 가는 인간인가 싶어 눈물 납니다. 그래서 인간의 문명은 이렇게 되지 않으려는 쪽으로 문화를 만들고 쌓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와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살아가지 않겠나 싶어 눈물 납니다. 그렇게 거룩한 존재의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 눈물 납니다. 탕진해버리고 갈뿐만 아니라 그 거룩한 존재,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로 만들고 떠나는가 싶어 정말 혼자 술 마시며 웁니다. 이 시를 읽는 날 날씨가 너무 변덕스럽게 우박과 용오름현상이 나타나고 바람이 몰아쳤는데, 그 역시 그 거룩한 존재를 내가 거칠게 만들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 무섭고 서러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한 시절이라는 게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게 정도 차이로서의 이 “속절없는 사랑”이라는 사실이 새삼 ‘이 뭐꼬?’ 하며 제 꼬락서니 모두를 내동댕이쳐 시원하고 섭섭하고 서러워 웁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그 모든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살지 않았으면 밥한 술 제 입에 제대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모든 “발그라니 언 손”의 그 존재가 나를 가여워하고 자신을 가여워하여 “오갈 데 없는” 분이 되어주고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주시어 목숨붙이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꼴에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니 어쩌니 씨부렁거리는 나를 그 거룩한 존재는 서러움 없이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의 몸으로 품어주어 이렇게 한세상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돈 벌어다주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서방구실 했다고 떠벌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나를 품어준 그 몸 없으면 애당초 없을 역할이었으니 오십보백보입니다.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갔던 것과 진배없습니다. 물론 먼저 깨어 말끔하게 행장을 갖췄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리고 입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매달고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오십보백보이고, 번듯한 직장이나 명성을 가지는 일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주막 골방 노름판”과 오십보백보였을 겁니다. 다 그 거룩한 존재를 뜯어먹으며 잘난 척하며 한세월이었던 것입니다. 그 존재에게 하도 미안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감각으로 축약시켜 “그 처자”라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 처자”를 우주로, 가이아 여신으로, 이 세상으로, 어머니로, 처자로 하여 우리 한 시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욕망이니 어쩌고 지식이니 어쩌니 하며 허풍은 하늘을 찔러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마치 자기 없으면 세상이 굴러가지 않을 것처럼 떠벌이며 말입니다. 제 말 들어주는 그 모두가 실은 “허공”이었는데도 자기에게 속는 것이야말로 선(善)이고 존재 이유나 되는 듯 그렇게 살았지요. 유한존재의 최대 난제인 영원성을 얻는 방법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을 붙여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도 놓았지요. 그러나 여기까지만 해도 내가 그 처자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아는 것이 그 처자일까요? 소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 앎이라는 것이 그 처자에 대해 도대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잘난 척을 아무리해도 우리가 아는 것은 비유컨대 망막한 바다에서 한 끼니 분의 물고기를 잡아 올린 것 밖에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무치는 무능력을 놔두고 아무리 능력을 포장한데도 그것은 한 끼니뿐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도리를 말하며 우리 얼마나 잘난 척하고 살았습니까. 하여 어쩌면 그런 것들이 그 거룩한 존재를 잊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남들이야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여 그 한이 없는 존재,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는 것처럼 나를 떠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내내도 그 존재의 보살핌이 없다면 내 무능력은 존재할 길조차 없었습니다. 이제는 병들어 자리 보존하다가 떠나는 일 남은 기간, 나를 돌이켜 보면 “그 처자”와 함께 한 내 생은 내 어리석음을 가당치않게 완성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나를 살아주시고 죽은 후까지 살아주시는 “그 처자”라면 나 참 복 받은 한 세월인 것이지요. 그렇게 복 받은 한세월임을 아니 “속절없는 사랑”이고자 함으로 그 복에 더는 누를 끼치고 싶지 않음이 유일한 감사의 표시일지도 모르지요.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여름날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앞의 두 시에 정신이 홀렸다가 깨어나니 정신이 몽롱하여 이번 시는 제가 별로 실수를 하지 않는 -실수로 읽는 맛이 제 맛이긴 한데- 시 쓰기 방법론적 관심으로 읽겠습니다.)
자, 보십시오. 여름날의 어떤 상황 풍경만 나옵니다.
그럼 시인이 여름날의 풍경을 그린 것이기만 합니까?
- 아닙니다. 자기가 본 여름의 구체적인 상황 풍경으로부터 어떤 의미의 여름을 생각하고 그 감정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그에 적당한 형상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상들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 시인이 체험한 여름날의 구체적인 상황 장면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럼 시인은 무엇을 인상적인 것으로 보고 느낀 것입니까?
- 두루 어우러져 산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일색화 되지 않고 먼 핏줄도 한통속으로 함께 피어나고 제 몫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 단적인 인상적 이미지가 되었나요?
- “시드렁거드렁”한 관용적 무심으로 “함께 핍니다”.
그럼 그 이미지를 통해 여름의 어떤 의미를 해석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까?
- 장면1: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여름날 풀들이 자랍니다. 서로 자라겠다고 아우성이지만 한없이 조용합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인간들이라면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도 듭니다. 어쩌면 저 풀들은 자기와 가까운 순으로 친족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묘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시드렁거드렁”이라고 말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상태’나 ‘관심을 표현하는 것도 아닌 것 아닌 상태’나 ‘잘난 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상태’, 그래서 저대로 함께 하는 이미지로 느껴집니다. 또 저대로 함께 하면서도 무탈하니 함께 하는 순서로 친족이라 불러도 무방합니다. 그렇게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저마다 최선을 다해 저대로 피어나는데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정녕 그럴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피는 것을 당연으로 생각하고 “시드렁거드렁” 함께 하면 우리도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엄청난 평화의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그걸 지켜보는 움직이는 것들도 그 평화에 동참합니다.
장면2: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이 닭은 평화유지군이라기보다 평화를 배우는 시찰단 같아 보입니다. 여름, 모든 초록이 아우성으로 피고 자라도 조용하고 한가한 평화의 까닭을 합습하는 견학입니다. 그러니 의젓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한여름의 공능(功能)을 배우기 위해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시드렁거드렁”의 관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게 맞는 듯합니다. 그게 올바른 관계적 삶의 핵심인 듯합니다. 그래서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라고 구체적인 감정을 진술하며 여름날 풀들의 삶의 자세를 커다랗게 긍정합니다. 그 풀들의 세계야말로 평화의 법, “시드렁거드렁”을 구현하는 눈부신 세계인 것입니다. 풀을 통해 보여주는 한여름의 사상이 바로 이런 사상이라는 감정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감정세계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 자신이 본 풀들의 세계가 “시드렁거드렁”의 관용적 무관심으로 피어나고 있음에 해당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글/오철수
첫댓글 풍경의 깊이에서 탁해진 내 눈을 지그시 하며 우주의 떨림을 느끼볼까 하는데 부뚜막을 읽으며 저 대책없는 남자를 어쩔꼬 속으로 욕이 튀어 나올뻔했어요.그 여자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가버리면 어쩌자는겨 혼자 궁시렁되다가 다시 읽으니 싸한것 같기도 하고 저 속절없는 사랑으로 그렇게 다들 살다 가는것은 아닌가 싶네요.
몇 안 되는 '기인 아닌 기인'이며 사유의 고수들이 있어요.
김사인 시인도 그 중 한 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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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천승세선생님 말이다.
사인이과 왔더라.
그런데 차를 끌고 온 거야.
갈 때 따라가서 봤다.
사인이가 키를 꽂고 돌리는데
부릉부릉 시동이 걸리더라.
막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키를 돌려도 시동이 걸리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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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 제목을 <김사인>으로 달면 시가 될까요 안 될까요?
@오철수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