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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의 성 안셀모(Anselmus)
♣ 4월 21일 '안셀모' 축일 축하 합니다 ♣
신형철 (안셀모)-테너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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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Aosta)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안셀무스(Anselmus, 또는 안셀모)는
15살 되던 해에 수도원에 입회하려 하였으나 부친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1056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Bourgogne)로 공부하러 집을 떠났고,
1059년에는 노르망디(Normandie)의 베크(Bec)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수도원 원장은 란프랑쿠스(Lanfrancus)로 안셀무스는 그의 제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1060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정식으로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1067년에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된 성 안셀무스는 제자인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서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고, 윤리 교육과 종교 교육에 힘씀으로써 베크 수도원 학교를 명문 학교로 발전시켰다.
1078년에 수도원 원장이 된 그는 박학다식과 성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수많은 청년들이 베크 수도원으로 몰려들자
그들을 한곳에서 교육할 수 없어 프랑스와 영국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 영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성 안셀무스는
란프랑쿠스가 사망한 뒤 영국 왕 윌리엄 2세(William II Rufus)에 의해
1093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의 저서 중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De fide Trinitatis), “동정녀 잉태론”(De Conceptu Virginali), “
진리론”(De Veritate) 그리고 400여 통의 편지와 기도 및 묵상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다.
그는 1109년 4월 21일 캔터베리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492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시성되었고,
1720년에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단테는 신곡의 천국 편에서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안셀무스를 언급할 정도였다.
성 안셀무스 의 상징은 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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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마 갈가니(Gemma Galga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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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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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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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환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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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19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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겜마 |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카밀리아노(Camigliano)에서 태어난
성녀 젬마 갈가니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다.
그녀는 19세 때에 루카(Lucca)의 어느 집안 가정부로 들어갔으나,
예수 고난회 수녀가 되기를 늘 희망하였다.
그러나 뇌척수막염으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후일 그녀는 성 가브리엘 포센티(Gabriel Possenti, 2월 27일)의 전구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성녀 젬마 갈가니는 수많은 영적 체험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1899년부터 그리스도의 환시, 악마의 습격, 오상 등 그녀의 짧은 생애에
무수한 초자연적 현상들이 일어났다.
이 모든 사실은 그녀의 고해신부이던 게르마누스에 의하여 자세하게 조사되었다.
특히 그녀의 오상 성흔은 손과 발에서 뚜렷하게 보였다.
또 그녀는 자주 탈혼과 환시를 보았다.
이러한 탈혼과 환시에서 나눈 대화들이 기록되어 있다.
1903년 4월 11일 그녀가 운명하자, 그녀를 공경하는 운동이 대중화되었다.
그녀는 1933년 복자품에 올랐고, 1940년 5월 2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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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녀 사진 자료 없음 -
♣ 4월 30일, '소피아' 축일 축하 합니다 ♣
고경희 (소피아)- 소프라노파트
성인명
소피아(Sophia)
축일
4월 3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페르모(Fermo)
활동연도
+250년경
같은이름
쏘피아
성녀 소피아는 이탈리아 중부 페르모의 처녀로 데키우스 황제 때 순교하였다.
그녀는 머리 유해는 화려한 성해함에 담겨져
페르모의 주교좌성당에 모셔져 있고,
그곳에서 오늘날까지도 큰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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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코(Marcus) 복음사가
♣ 4월 25일 '마르꼬' 축일 축하 합니다 ♣ 조용환 (마르꼬) - 테너 파트 김성윤 (마르꼬) - 테너 솔로
성인명
마르코(Mark)
축일
4월 2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복음사가
활동지역
활동연도
+74년경
같은이름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인 성 마르코(Marcus)는 “마르코라고도 불리는 요한”(사도 12,12-25)과 동일 인물이며,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회합 장소로 사용한 집주인 마리아가 그의 어머니인 듯하다.
또 그는 성 바르나바(Barnabas)의 조카이며(골로 4,10), 키프로스(Cyprus) 태생의 레위 사람이다.
그는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 몸에 고운 삼베만을 두른 젊은이가 예수를 따라가다가 붙들리게 되자,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인물로 여겨지나(마르 14,51-52) 확실하지는 않다.
그는 바오로(Paulus)와 바르나바를 수행하여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갔고(사도 12,25),
그 다음에는 키프로스로 바르나바와 함께 갔으며, 바르나바와 함께 바오로의 1차 전교여행을 수행하였다(사도 13,5).
그러나 밤필리아에서 바오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사도 13,13).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바오로와의 의견 대립 때문에
바오로의 제 1차 전교여행에는 동행하지 않았다(사도 15,36-40).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로 갔으며(사도 15,39), 바오로가 투옥되었을 때에는
로마(Roma)에 함께 있었다(골로 4,10).
그는 분명히 베드로(Petrus)의 제자였는데
베드로는 그를 애정 깊게 “내가 아들로 여기는 마르코”라고 언급한다(1베드 5,13).
불확실한 전승이지만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주교였으며,
신약에서 여러 번 언급된 바와 같이 요한 마르코임이 분명하다(사도 12,25).
동방에서는 이 요한 마르코를 또 다른 사람으로 여기는데,
그는 비블로스(Byblos)의 주교라고 하며 9월 27일에 축일을 지낸다.
어쨌든 마르코는 60-70년 사이에 복음서를 기술했는데 주로 베드로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였다.
소아시아의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는 그가 베드로의 통역자였다고 하며,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로마에서 복음을 기술했다고 전한다.
마르코는 베네치아(Venezia)의 수호자이며
그의 유해는 그곳의 산마르코(San Marco)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의 문장은 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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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베닌카사(Catharina Benincasa, 또는 가타리나)는 시에나의 한 염색업자의 2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생기발랄하고 상냥한 아가씨였으므로, 아버지가 항상 점잖게 굴라고 하는 말을 싫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과 6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생애를 미리 보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그녀는 부모가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모든 노력에 반항하고, 오로지 기도와 단식에만 전념하였다.
그녀는 16세 되던 해에 도미니코 3회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에 대한 환시는 더욱 잦아졌고,
동시에 악마적인 환시도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나병환자와 같은 절망적인 병을 앓는 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을 즐겨하였다.
그녀가 받은 초자연적인 선물들로 인하여 열렬한 지지자들이 지나치게 열광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혹시 협잡꾼이 아닌가 하여 고발됨에 따라 도미니코회의 총회 석상에까지 출두한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카푸아(Capua)의 레이몬드 성인이 그녀의 고해신부로 임명되었으나,
곧 그녀의 제자가 되었고, 후일에는 그녀의 전기 작가가 되었다.
시에나로 돌아온 그녀는 페스트로 황량해진 그 도시와 주민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고,
선고받은 죄수들을 찾았으며, 평화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분쟁을 해결하였다.
그녀는 터키인을 대항하려는 십자군을 모집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를 적극 지원하였고,
1375년에 피사를 방문하는 도중에 오상 성흔 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오상이 생전에는 볼 수 없었는데,
임종할 즈음에는 확연히 드러났다고 한다.
그녀는 플로렌스와 그레고리우스 교황간의 불화를 중재하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아비뇽(Avignon)의 교황좌가 1376년에 로마(Roma)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후로는 자신의 신비적인 체험들을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여
성녀 카타리나의 대화 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37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서거에 즈음하여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가
교황으로 선출됨으로써, 이를 반대하는 일단의 추기경들이
스위스 제네바(Geneva)의 로베르투스(Robertus)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하는 사건으로
큰 분열이 발단되어 여간 혼란스럽지 않을 때, 그녀는 단호히
우르바누스 교황을 지지하여 분열을 종식시켰다.
그녀는 중풍 증세로 고생하다가 며칠 후에 로마에서 운명하였다.
카타리나는 그리스도인 신비가 중에서도 대가에 속한다.
그녀는 “대화” 외에도 400여 통의 서한들을 남겼다.
1461년에 시성되었고,
1939년에는 이탈리아의 수호성인 으로 선포되었으며,
1970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교회 박사 로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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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달 올리고 있는 게시물 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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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축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