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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재임시대한민국은 김영삼 정부 말년에 발생한 IMF 외환위기로 인해 사상초유의 국가 부도에 직면해 있었다. 국민의 정부는 출범 초기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했으며 신자유주의 기조의 경제 정책을 세워 경제 재건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 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대북 포용정책인 이른바 햇볕정책도 정부 출범 직후부터 추진되었다. 1998년 6월 북한과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에 합의했고 단독 사업자로 선정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 회의를 벌였다. 11월엔 첫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가 출항하게 되었고 1999년엔 대북 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설립, 평양에 체육관을 건설하는 등 대북 협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러한 김대중의 노력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1999년 5월엔 홍콩의 시사주간 아시아위크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올랐다. 햇볕정책은 2000년 6월 15일에 있었던 남북 정상 회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이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골자로 하는 통일 방향에 합의한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개성공단 설립에 합의한다. 그리고 같은 해 말,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간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독재 정권 시절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과 정책 추진 도중 잡음도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2월 8일 일본 TBS 지쿠시 데쓰야 NEWS23 특별 회견에서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라는 발언을 해서 한동안 야당인 한나라당에게 색깔론 공세를 받게된다. 여기에 대북 불법 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햇볕정책은 본격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전인 2000년 6월 12일 5억 달러를 현대그룹을 통해 북한에 송금한 이 사건은, 2003년 특검으로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건설 등이 5억 달러의 비밀 자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특검 도중인 2003년 8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여기에 김대중의 측근인 박지원은 SK등 대기업 자금 1억원 수수 및 대북 불법 송금 혐의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으며 특검은 종결되었다. 한편, 김대중은 퇴임 이후 첫 외신과의 인터뷰였던 2004년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북한에 1억 달러를 지원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라고 대북 불법 송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렇듯 햇볕정책이라는 명분 하에 2000년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고 불법을 무릅쓰며 현금까지 지원했지만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북한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북한은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등 두차례 도발을 감행했으며 2003년엔 미국과의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시 핵실험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불법 도청을 한 사실이 공개되서 파문이 일었다. 신군부 정권에서부터 있었던 안기부의 불법도청은 국정원으로 개명된 국민의 정부시절에서도 계속 이뤄져오고 있었던 것이다. 국정원은 야권인사 및 반정부인사들을 상대로 휴대전화 상시도청을 했으며, 일부 여권인사도 포함되었다. 여기에 검찰 수사 결과 도청 대상에 김대중의 숨겨진 딸이라고 주장하는 인물과 그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실은 2002년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국정원 도청문건을 제시하며 문제를 제기하였고 정부는 부인하였으나 끝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내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2006년 불법 도청을 지시한 당시 국정원장 임동원, 신건 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측근 비리도 있었다. 김대중의 아들인 김홍업은 1998년 한국전력 석탄 납품과 관련해 최재승 의원의 주선 하에 석탄 수입업자 구씨의 청탁 요구를 받고 3억원의 금품을 수수했다 돌려준 혐의로 2004년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3남 김홍걸은 2000년, 최규선과 체육복표사업자 선정 및 각종 이권에 개입해 금품을 수수한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되 파문이 일었다. 2002년 최규선의 운전기사가 이 일을 폭로하면서 수사가 진행되었고 결국 같은해 11월 김홍걸은 징역 1년 6월의 판결을 받게 된다. 최규선 게이트로 인해 김대중은 대국민 사과 성명까지 발표하게 되었다. 2003년 2월 24일,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퇴임 이후참여 정부 시절대통령직 퇴임 직후인 2003년에는 동교동 사저 옆에 김대중 도서관을 개관하였다. 김대중 도서관에는 김대중의 생전 유품과 저서 등을 비롯한 많은 관련 자료들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2004년 1월 29일, 재심을 청구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3월에는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당하자 ‘심각한 사태’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위기국면 극복을 위한 노력을 주문하였다. 반면 김영삼은 사필귀정이라며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5월 10일 유럽 3개국(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에서 순방과 함께 OECD와 노벨 위원회, WHO에서 연설을 했다. 8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에게 박정희 시절의 정치탄압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에 대해 한 방송과 인터뷰에서 박 대표의 사과에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11월 14일, 그는 8박 9일 동안의 유럽 순방 일정을 마치고 낮 인천 공항을 통해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귀국했다. 유럽 방문 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11월 18일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열리는 클린턴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순방 일정에 따른 피로 누적으로 미국 방문계획을 취소하고 조기 귀국했다. 6일 스웨덴 스톡홀름을 방문한 데 이어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고, 로마에 본부를 둔 세계식량계획(WFP)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로마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서 “북핵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하고 핵문제에 있어서 이중잣대는 안된다는 점 등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모두 반영된 최종 선언문이 채택됐다”고 말했다. 자신이 지도자로 있었던 새천년민주당이 2004년을 기점으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하였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민주당은 김대중의 지지를 기대하였지만 오히려 그는 열린우리당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인정하였으며 그를 지지하던 많은 세력은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으로 둥지를 옮긴다.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뀐 뒤에는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지하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2008년 10월,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100억 원대 CD를 비자금으로써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해 박지원 의원이 의혹이 있으면 즉각 수사하라며 반박했다. 검찰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자금 추적 결과 김 전 대통령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2009년 6월 11일 저녁 7시,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 특별강연자로 참석해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시작된 한반도 위기와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민주주의의 위기 등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독재자’에 비유하며 이명박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북핵 위기와 관련해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을 동시에 비판했다. 2009년 8월 12일, 김대중의 비서관인 최경환은 DJ의 비자금 조성과 재산 해외 도피 의혹을 제기한 중앙일보의 《문창극 칼럼》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예와 인격을 훼손했다”면서 “중앙일보와 문창극 대기자에게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중앙일보는 이날 37면에 김대중 측이 최경환 비서관 이름으로 낸 반론보도문을 실었다. 이 반론문에서 최 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전, 대통령 재임 시, 대통령 퇴임 후를 막론하고, 어느 시기 어느 경우에도 불법 비자금을 가진 적도 만들어 본 적도 없다”며 “문 대기자의 주장은 어떠한 근거도 없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명예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최 비서관은 “문 대기자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기 위한 근거로 삼은 월간조선의 기사나 일부 인사들의 발언 등은 이미 언론들 스스로의 사과와 확인을 통해, 법원의 판결과 검찰의 공식발표를 통해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그 ‘허위보도 확인 사례’를 조목조목 밝혔다. 2009년 8월 18일,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은 KRB 한국라디오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핵 문제로 얼어붙은 북미관계를 풀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고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 방문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2009년 초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난항을 겪고 있는 북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조언하는 편지를 써 달라고 김 전 대통령에게 요청했고, 이에 따라 지난 5월 북한을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편지가 전달됐다는 것이다. 김대중 사후 이희호 여사와 클린턴 전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에 의하면 김대중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하기 전 “미국의 (대북) 정책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김 전 대통령께서 늘 하셨던 일을 발판 삼아 했을 뿐이고, 제가 할 수 있었다는 건 큰 영광이었다”며 최근 방북으로 억류됐던 여기자 2명을 데려온 것이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했다. 이어 클린턴 전 대통령은 “그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나를 지원해준 친구였다”고 애도를 표하고는 “김 전 대통령을 평생의 친구로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 9월 23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2009년 12월 19일, 뉴스위크 인터넷판이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잊혀지지 않을 저명인사’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해 전 세계 36명의 명사를 선정해 소개했다. 뉴스위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삶을 시작할 수 없다”는 미국의 성직자 헨리 반 다이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정.재계, 연예계, 학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저명인사 36인은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들의 뇌리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뉴스위크는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군부 독재에 항거하고 망명과 투옥, 납치, 암살 위협 등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야권 지도자”였다고 소개했다. 또 “김 전 대통령은 재임시 남북 화해를 증진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2011년 8월, 김대중이 서거 전까지 네 가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그 내용으로는 '6ㆍ15와 9ㆍ19로 돌아가라', '민주당과 야당, 시민세력은 단결하고 연합하라', '이명박 정부는 불행한 길을 걷지 말라',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 등이었다. 한·미·일 지식인 110명의 평화선언2009년 8월 2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미국·일본의 지식인들이 남북화해와 동북아의 평화를 촉구하는 3개국 지식인 110명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평화선언을 제안한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 교수는 “성명서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후퇴는 있을 수 없다는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당시 북한의 로켓 발사와 유엔 제재 등 악순환이 이어지자 3국의 지식인들에게 공동선언을 제안했다. 지식인들이 호응했고 곧바로 문안 작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문안 합의를 위한 지식인들의 토론이 길어지면서 문구 수정 작업에 반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와다 교수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구명운동을 벌인 후 꾸준히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대표적인 지한파다. 사망2009년 7월 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명박 대통령,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과 박근혜, 박희태 새누리당 전·현직 대표,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민주당 정세균 대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 반기문 UN 사무총장, 마틴 유든 주한 영국 대사,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 청융화 중국 대사, 여성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등 각계의 인사들이 문병을 왔으며, ‘쾌유기원’ 촛불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초기엔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점차 악화되어 결국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1달여에 걸친 투병 끝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하였다. 각계의 애도종교계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영혼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맡기시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평화와 힘을 주시도록 하느님의 축복을 진심으로 간구한다”고 밝혔다. 미국 정계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애도 성명을 통해 “용기있는 민주화와 인권 투사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슬픔에 빠졌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역동적인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운동을 일으키고 이끌어 오는데 목숨을 바쳤다”면서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자유를 위한 개인적인 희생은 고무적이며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국무부도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애도의 뜻을 표명했다. 이언 켈리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한국 국민들과 함께 애도한다”면서 “유가족과 한국 국민에게 조의를 전한다”고 밝혔다. 켈리 대변인은 이어 “김 전 대통령은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 열망에 영감을 일으킨 지도자이자 상징이었다”면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여로 2000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부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애도를 표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빌 클린턴재단 홈페이지에 올린 성명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용감하고 강력한 이상을 가진 지도자였다”며 “한국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넘어서게 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길을 닦고 국제적으로 인권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다”고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렸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후 나는 남북한의 화해를 위해 그와 함께 일하는 영광을 누렸다”며 “햇볕정책이 한국 전쟁 이후 어느 때보다도 영속적인 평화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부인 힐러리와 나는 우리의 좋은 친구였던 김 전 대통령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미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워싱턴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대표 에드윈 퓰너는 “김대중은 진정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오늘 한국은 거인을 잃었고, 나는 절친했던 벗을 잃었다”며 애도를 표했다.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 소장은 “김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한국 민주주의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라며 “비단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사실 뿐아니라 한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통찰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의 비범한 삶 전체가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프러처드 소장은 또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보여준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역사적인 평양방문은 그가 남긴 현란한 유산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전 주한 미국대사인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은 “그의 서거 소식에 큰 슬픔을 느낀다”면서 “50여 년간 아시아와 관련된 일을 해오면서 내가 만난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 3명이 바로 김 전 대통령과 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포르의 리콴유였다”고 말했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한국에 강력한 민주주의를 가져왔고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의 화해를 향한 중대한 진전을 이뤄냈다”고 평가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와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대사는 “평생을 민주화와 한국의 발전 그리고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헌신해온 분”이라며 “노벨 평화상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삶 자체가 민주주의와 인권향상을 위해 헌신한 삶이었으며, 특히 수십 년간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며 투옥도 당하는 등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고, 영웅이었다”고 평가하면서 “매우 슬픈 일”이라고 추모했다. 영국 정계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조문에서 “김 전 대통령의 1998년 런던 방문과 그다음 해 이뤄진 저의 공식 방한 당시의 행복한 기억이 떠오른다”며 “김 전 대통령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분이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정말 기뻤다”고 밝혔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마틴 유든 주한 영국대사는 이날 이희호 여사에게도 개인적인 위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며 “김 전 대통령은 격동의 시기에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아시아 금융위기 시에는 한국의 빠른 경제 회복을 위해 국내외적으로 평생을 헌신하신 분”이라고 애석해했다. 브라운 총리는 또 “김 전 대통령은 2000년도에 한반도 평화 조성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최근에도 김대중 평화센터를 통해 세계 인권수호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며 “영국 정부를 대신해 이명박 대통령과 한국 국민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일본 정계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김 전 대통령의 업적에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고 말했다. 아소 총리는 이어 “김 전 대통령과 일본 정계 지도자들이 합심해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를 포함해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협력관계 구축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하며 김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했다. 가와무라 다케오 관방장관은 “한일 관계를 비약적으로 진전시킨 대통령”이라고 애도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하고 문화교류를 진전시켰다”고 회고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애도사를 통해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일본 국민을 대표해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이를 계기로 노벨 평화상을 받는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한일 양국의 외교관계 개선에도 큰 기여를 했다”며 거듭 애도를 표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는 성명을 내고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며, 한국 근대화에도 큰 공헌을 하신 분”이라며 “김 전 대통령의 비보를 듣고 놀라움과 슬픔을 가눌 수 없다”고 애도했다.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은 담화를 통해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자 친구였다”면서 “서거 소식을 들으니 매우 유감이다”라고 애도했다. 중국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친강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을 “중국 국민의 가까운 친구”라면서 “중국 정부와 국민은 그가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해 쏟았던 노력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은 조전을 보내 “김대중 선생님은 나의 오랜 벗으로 중한관계 발전을 위한 그분의 공헌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애석해했다. 유럽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조전을 통해 애도를 표시하며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인이자 민주주의자였다”면서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은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어 “독일과의 오랜 인연으로 독일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독일연방공화국은 좋은 친구를 잃었다”면서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양국관계의 심화와 교류강화를 통해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김 전 대통령의 40년 지기인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쓰라린 아픔’을 느낀다고 밝혔다. 폰 바이체커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연합뉴스에 “나의 오랜 친구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쓰라린 아픔으로 작별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 전 대통령은 불굴의 용기,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한민족 전체의 평화를 위한 탁월한 기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됐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정부는 베르나르 쿠슈네르 외교부 장관 명의의 성명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쿠슈네르 장관은 성명에서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평생을 바쳐 지칠줄 모르고 투쟁한 용기있는 정치인이었다”면서 “또한 인권과 평화를 위해서도 헌신한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고 애도했다. 인권 운동가 출신의 쿠슈네르 장관은 “김 전 대통령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중요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밝혔다. 199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서한으로 “저명한 정치인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전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들어 매우 애통하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친필로 서명한 이 서한에서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형성, 한반도의 평화조성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평화,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랬기에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오래전부터 김 전 대통령을 알아왔고 그의 용기와 선견지명을 매우 높게 사 왔다”며 “그는 대통령 임기 말 건강에 문제를 겪으면서도 한반도를 재결합시키면서 남북문제 해결책을 계속해서 찾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김 전 대통령은 우리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포럼 공동 업무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며 “김 전 대통령의 유족과 지인들, 모든 한국 국민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덧붙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대외 창구인 만델라 재단은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우리는 그가 인권을 위해 싸우고 북한과의 화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기억한다”면서 “유족과 한국 국민에 위로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 만델라 재단은 성명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데 대해 애도한다”면서 이 같이 말하고, “만델라 전 대통령은 지난 2001년 3월 김 전 대통령과 만난 적이 있으며, 당시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를 평화공원으로 전환하자는 만델라의 아이디어에 공감을 표시했다”고 소개했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지난 1997년 5월 대선을 앞둔 김 전 대통령에게 자신의 셋째 딸 진드지 여사 부부를 보내 자신이 27년 동안 옥중에서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선물하며 승리를 기원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다. 이에 당시 김 전 대통령도 유신 체제와 망명 시절을 거치며 20년 동안 간직해온 낡은 가방을 답례품으로 전달했다.[61] 기타국장 기간 중 각국 지도자들과 42개국이 조전을 보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기남 조선노동당 비서를 단장으로 한 특사 조의조문단을 비롯 미국, 중국, 일본 등 11개국이 영결식에 고위급 조문단을 파견하였다. 세계 언론들도 서거 및 국장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에 대해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문정인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제적 비중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라며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가 큰 지도자를 잃었다”고 말했다. 삼성, LG,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주요 대기업들은 김대중이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춘 자율적인 구조조정 시스템을 도입, 기업의 체질개선 등에 큰 역할을 했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경제 단체들도 외환위기 극복에 공헌했던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일제히 깊은 애도를 표했다. 한편 생전에 김대중을 강하게 비난했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가 DJ 사후 잇달아 온건한 추모의 변을 내놓았다. 김 전 교수는 2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김대중 선배님 전상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저승길을 떠날 때 별로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가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다섯 가지 복중에 하나라고 들었습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DJ 서거에 대한 느낌을 적어나갔다. 김 전 교수는 “덕스러운 삶이었기에 한나라의 대통령자리에도 올랐고, 만인이 부러워하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도 되셨을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의 전직 현직 대통령들이 모두 병문안 가서 쾌유를 빌었다는 것도 사람 사는 세상에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며 김대중의 삶을 기렸다. “서거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미국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영국 수상, 독일수상이 앞을 다투는 듯 먼저 애도의 뜻을 표하였고, 이웃나라 일본의 국영 방송 NHK는 다른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선배님의 서거 소식을 국민에게 알렸다고 들었습니다”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DJ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표현했다. 개인적인 인연을 강도하면서 애도를 나타내기도 했다. 김 전 교수는 “군사정권하에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민주화의 투쟁을 하던 때에는 (DJ가)불러서 점심 또는 저녁을 사주신 적도 있고 저도 후배로써의 도리를 다하노라고 최선을 다 한 것도 사실”이라며 “그 때(죽은 이후)에는 다시 만나게 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아무렴 깊은 인연을 가졌거늘, 영영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마지막으로 “언젠가는 다시 만나서 흉금을 터놓고 따져야 할 일도 있습니다마는 오늘은 그런 마음이 되지가 않습니다. 선배님은 통일된 조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싶으셨을 텐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해 유감이시겠습니다”라며 글을 끝맺었다. 그는 이어 22일에는 ‘김대중 형님께’라는 더욱 살가운 제목의 글을 올렸다. 김 전 교수는 “한 시대의 풍운아 김대중 형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부지기수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그렇게 불러보고 싶은 것뿐이니 너그럽게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앞서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인 1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 모두에게 착잡한 심정과 인생의 무상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이제 평화롭게 그 생이 막을 내렸으니 당장에 할 말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2009년 11월 13일, 김 전 대통령의 추모행사가 일본 도쿄 아사히 신문사에서 열렸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운동 시절과 대통령 재임시 인연을 맺은 일본 정계, 학계, 종교계 인사와 교포 등 200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는 모임’이 주관했다. 한·일 양국의 정·관계, 학계, 종교계 인사 40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김 전 대통령 추모영상 상영과 추도사, 성경 낭독과 기도, 헌화 순으로 3시간 동안 진행됐다. 일본 측에서는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과 센고쿠 요시토 행정쇄신상이 인사말을 하고,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교수와 이토 나리히코 주오 대학 교수가 추모사를 했다. 장례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정해졌으며, 영결식은 23일 여의도 국회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장례를 주관하는 장의위원장은 한승수 국무총리가 단독으로 맡았다. 이상은 사망 이튿날인 2009년 8월 19일 오후 8시에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결정되었으며 유족측과 이명박 정부는 서로 합의하여 국장으로 치루되 경제위기를 고려해 6일장으로 결정하였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되었다. 당초 국립대전현충원, 국립 5∙18민주묘지, 고향인 신안군 하의도, 용인의 가족묘 등이 거론되었는데, 유족들의 뜻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된 것이다. 2009년 10월 5일에는 그의 비석이 세워졌는데 충남 보령의 오석(烏石)으로 제작된 묘비에는 전면과 측, 뒷면에 각각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묘’란 문구와 고인의 주요 공적, 경력, 가족 사항 등이 기록돼 있다. 상세 사망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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