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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세계 스크랩 [성철스님] 선문정로 / 4. 두 가지 번뇌망상
모봉형진 추천 0 조회 10 13.01.13 16: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선문정로(禪門正路)


두 가지 번뇌망상
6추의 마지막인 지상(智相)은 7지(七也)에서 이미 혹이 다 없어지고, 3세의 마지막인 업상(業相)은 10지(十地)의 마지막인 금강유정(金圍輸定)에서 영원히 없어진다.
화두가 꿈속에서도 한결같은 몽중일여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제7지로서 아직 육추이고 영역이고, 숙면일여인 자재 위에서 비로소 제8아뢰야인 3세의 영역이므로 8지(八也)에는 6추가 없고 부처지위에는 3세가 없다.
선문(輝門)에서 제8아뢰아의 장식(藏識)을 제8마계라 하여 적극 배척함은 미세한 장식(藏識)을 타화하지 않으면 견성(見性)할 수 없으므로 오직 정법을 위한 노파심의 발로에서이다.
이제 자성(自性)을 가리고 있는 번뇌망상에 미세(微細)한 것과 추중(睡重)한 것의 두 가지가 있음을 알았다. 추중(健重)한 것은 분별이 있으므로 쉽게 알 수 있지만 미세한 것은 분별이 없이 참으로 깊고 깊어 알기 어려워서 수도하는데 큰 애로가 된다.
동정일여와 몽중일여가 되어도 숙면일여가 되지 않으면 이것은 6추의 영역이요, 숙면일여가 되어야만 비로소 거짓무심인 삼세(三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미세를 다 끊어 없애지 않으면 견성(見性)이 아니어서 바른 눈을 갖는 종사따眼宗聊가 될 수 없으므로 이것을 끝까지 밝혀서 반드시 벗어나야만 부처님과 조사의 지혜 생명를 계승할 수 있다.
추중한 망상을 영원히 떠난 아뢰야에서의 무심〔賴耶無心〕도 견성(見性)이 아니거늘 거칠고 무거운 객진번뇌 속에서 견성(見性)했다고 스스로 말하게 되면 자신과 남을 그르는 큰 비극이 연출되니 부디 조심하여야 한다.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無上正覺〕

곧 부처성품을 바로 보아서 아녹다라삼막삼보리를 중득한다.

반드시 아욕다라삼약삼보리를 중득하여야만 부처성품을 볼 수 있다.

아녹따라삼약삼보리는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無上正劃, 또는 위 없이 바르고 넓은 지혜등으로 번역된다.
바른 깨달음의 내용이 바르고 넓은 지혜이므로 같은 의미이다. 이 무상정각인 정변지를 얻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 목표이다. 부처성품을 보면 바른 깨달음을 얻고, 바른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성품을 본다 함은 부처성품을 봄이 곧 바른 깨달음이요, 바른 깨달음이 곧 부처성품을 보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見性)이 곧 무상정각이며 성불(成佛)이다.

나의 본성, 즉 부처성품은 삼세 여래의 궁극의 비밀스런 보배 창고이니, 만약 무상정각을 얻으면 나의 본성을 원만히 깨쳐서 밝게 알게 된다.
바른 깨달음의 성취, 즉 성불하지 않으면 본성을 바로 볼 수 없으니 성불이 곧 견성이다. 견성이 곧 성불이며 성불이 곧 견성임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며 영산회상에서 정통으로 전한 것이다. 이는 견성이란 원만한 깨침(顧登)이며 완전한 깨침(願證)인 종오, 즉 구경의 깨침임을 나타내는 것이니, 구경의 깨침임을 나타내는 것이니 깨침이 나닌 부분적 깨침이나 이해적 깨침을 견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의 잘못된 견해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중생들이 한없는 번뇌망상에 덮여 있어 자기 마음 속의 부처성품을 알지 못한다. 만약 번뇌가 다 없어진 때에는 부처성품을 중득하여 분명하고 완전하게 아니, 마치 저 힘센 장사가 거울 속에서 이마 위의 보배 구슬을 밝게 보는 것과 같다.

세 가지 극히 미세한 망상까지 모두 남김 없이 없어지면 자연히 구경무심에 도달하니, 이것이 견성이며 성불이다.

모든 여래는 일체중생에게 좋은 의사와 같다. 온갖 가지로 다른 번뇌의 바탕과 모양을 알아서 끊어 없애고, 여래의 비밀 보배창고에 있는 청정하고 무구한 부처성품이 영겹토록 상주하여 절대로 변함이 없음을 열어 보인다.

여래의 신비한 처방과 법약(法藥)이 아니면 중생들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참 보배인 자기 마음의 부처, 즉 부처성품을 어찌 볼 수 있으리요. 그 자비의 큰 은혜는 분골쇄신하여도 다 갚지 못한다.

부처성품은 중생이 본래 가진 것이요 만든 것이 아니다. 다만 번뇌인 바깥 티끌에 덮여 있을 뿐이니, 만약에 그 번뇌를 끊어 없애면 즉시 부처성품 을 밝게 보아 위 없이 큰 도를 성취한다.

무상정각(無上正覺)은 중생의 한없는 번뇌망상을 끊어 없애고 본래 가지고 있는 청정한 자성(自性)을 철저히 보는 데 있으니 이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만세불변의 대원칙이다.

어느 한 중생도 여래의 지혜인 부처성품을 갖추고 있지 않은 이가 없지만, 망상으로 생긴 뒤집힘에 집착하여 이를 증득하지 못한다. 만약 망상을 여의면 자기 성품에 갖추어져 있는 일체의 본래 있는 지혜와 걸림 없는 지혜가 곧 나타난다.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여래의 지혜는 곧 진여(眞如)이고 불성(佛性)이다. 일체 망념이 다 없어지면 이것이 견성이며 무상정각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신기하고 신기하다. 일체중생이 일체지(一切智)인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으나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 내가 마땅히 성인의 도로써 가르쳐서 그를 가리고 있는 망상과 집착을 영원히 여의게 하여 중생이 자기 몸 가운데에서 광대무변한 일체 지견(智見)을 깨쳐 얻어서 비교활 수 없이 홀로 높은 부처님과 차이가 없게 하리라.

「열반경(涅盤經)」과 「화엄경(華嚴經)」의 양대 경전에서 일체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本具佛)힘을 말한 것은 인간이 본래 갖는 참다운 가치, 즉 절대성을 밝혀준 유사이래의 일대 선언이다.
이로써 인간은 본래 갖추고 있는 절대성을 계발하여 위 없는 도를 성취하는 영원한 살 길을 얻게 되었다. 만일 부처님께서 걸림 없는 큰 지혜로써 중생이 부처성품을 갖추었음을 분명히 보고서 이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중생들은 영영 중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팔만대장경에 기록된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은 그 목적이 부처성품을 계발하는 데 있으므로, 단지 언어와 문자를 익히는 것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다.

모든 아라한은 부처성품을 보지 못하였으니 부처성품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무상정각,즉 아녹보리를 얻지 못하였다.

소승의 가장 높은 과위인 무학지(無學地)에 도달한 아라한(阿羅薰)은 유여열반이어서 불성을 본 것이 아니므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아라한 뿐 아니라 범부나 성인을 막론하고 불성을 보지 못하면 바로 깨달은이, 즉 부처가 된 것이 아니다.

보살이 마지막 지위인 제10지에 도달하여도 오히려 부처성품을 분명하게 알아 보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성문과 연각이 바로 볼 수 있겠는가.

“10지의 대성(大聖)이 설법을 구름일듯 비오듯 하여도 불성을 봄은 비단으로 가로막은 것과 같다”고 하여 종문의 정안(正眼)들은 10지 대성도 견성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고 꾸중하였다. 또한 “삼현(三賢)이 오히려 선문의 종지를 다 밝히지 못하는데 10지 성인이 어찌 조사의 선종(輝宗)에 도달하리오”라 하였다. 견성을 근본으로 하는 선종의 깊고 현묘한 종지는 삼현(三賢)은 말할 것도 없고 십지(十也)의 성인도 문외한이라고 큰 소리로 꾸짖었으니, 십지의 성인도 견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과 10주보살은 두 눈으로 부처성품을 보고, 9지에 이르기까지는 전하여 들음으로 부처성품을 본다.
9지 이하는 귀로 들음으로써 부처성품을 보고 10지는 두 눈으로 보지만 분명하지 못하고, 여래가 가진 부처 눈〔佛眼〕이라야 남음 없이 분명하고 밝으니라.

10주(十住)는 삼현(三賢)의 첫 단계요 9지(九地)는 10지 성인의 뒷 단계이다. 그런데 십주는 눈으로 보는 것이고 구지는 귀로 듣는 것이라고 하니 앞뒤가 뒤바뀐 듯하지만, 여기 「열반경」에서 말하는 십주는 삼현의 십주가 아니고 십지의 다른 명칭이다.
다른 경론(經倫)에서도 십지(十地)를 십주(十柱)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천태종의 2조언 관정(灌頂)도 “주(住)와 지(地)가 다르지 않다” 즉 십주와 십지가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 주(住)라 하며 또 지(地)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기에서 주(住)와 지(地)는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0지 보살이 비록 부처성품을 보기는 하나, 완전 히 밝지는 못하다.
10주보살은 부처성품이 있음은 알지만 어두운 밤에 보는 것과 같고 모든 부처님은 보고 또한 안다.
10주보살이 부처성품을 보는 것은 어두운 밤에 색채를 보는 것과 같고, 여래가 보는 것은 대낮에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1O주 보살은 지혜의 힘이 많고 삼매의 힘이 적으므로 부처성품을 밝게 보지 못한다.
10주 보살은 부처성품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열반이랴 부르고 대열반이라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십주(十柱)는 십지(十地)를 말한다. ‘십지에서 불성을 보는 것은 어두운 밤에 물건을 보는 것과 같아서’ 캄캄한 밤중에 물건을 보니 바로 보지 못한다. 여래처럼 ‘대냥에 물건을 보아야’ 바르게 볼 수 있으므로 십지보살도 불성을 보았다고 할 수 없고, 여래(如來)의 부처지위에서 비로소 불성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다.
또 위에서 말한 열반(涅樂)은 유여이요 대열반(大涅盤)이란 무여 열반(無餘)이다.

모든 선남자가 갖고 있는 부처성품은 이처럼 지극히 보고 현묘하여 바로 알고 밝게 보기가 무척 어려우니, 오직 바로 깨달은 부처님만이 이를 알 수 있다.
이처럼 부처성품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

부처성품은 곧 여래이어서 부처님 경계이니, 부처님 이외에는 모두 바로 알고 바로 보지 못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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