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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의 미련도 없이 달려 온 내 삶의 여정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나는 고생을 했다. 나를 갖은 어머니께서는 만삭의 몸이 될 때까지 중병을 앓고 계셨기에 어머니와 함께 병마와 싸워야 했었다. 1940년 8월 초 2일(음력) 아주 외소한 몸으로 부산 범일동 어느 셋방에서 이 세상의 빛을 보았다.
어머니 등에 업혀 청일전쟁 군수물품을 사고파는 모습을 기웃거리며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다. 부모님께서는 어렵던 부산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어머니 친정 쪽인 경북 상주군 낙동면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곳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이 되었을 때 그토록 참혹했던 6.25전쟁을 당했다.
1950년 7월, 북쪽지방에서부터 물밀 듯 밀려오는 우리나라 피난민을 따라 우리도 피난길을 떠났다. 소 등에 가재 품과 양식(쌀)을 조금씩 싣고 집을 떠나 피난을 가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형과 나는 부모님을 따라 마치 소풍을 가는 것처럼 마냥 즐겁게 했다.
낙동강 백사장에 닿은 수십만의 피난민 인파는 배가 없어 강을 건너가지 못했다. 어린 자식을 잃고, 혹은 늙은 부모를 버리고, 울부짖는 아우성 소리는 글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소꼬리를 잡고 헤엄쳐 강을 건너는 사람, 금방이라도 갈아 앉을 듯 나룻배에 올라앉아 강을 건너는 사람, 그 틈에 끼어 나도 배를 탔다.
강을 건너고 보니 부모형제는 아무도 강을 건너지 못했다. 철없는 나는 피난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청도까지 가게 되었고,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메뚜기, 개구리 등을 잡아먹으면서 야속한 피난민 인심 속에 밥을 조금씩 얻어 먹으면서 45일간 연명하다가 북진하는 군인을 따라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을 찾아 왔다.
어린 나이에 수많은 시체도 보았고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대나무 밭으로 숨어들기도 했다. 밤하늘 공중에서 비행기가 적기의 꼬리를 따라가며 쏘아대는 유성같은 불빛도 보았다. 시냇가 모래밭에 쫒겨 달아나는 적군이 죽은 전우를 너무 급하게 묻어 주며 달아나느라고 시체의 두 발이 모래밭 밖으로 나와 있는 모습도 보았다.
어디 그뿐이랴! 피난민 가운데 어느 처녀의 시체 옆에서 죽은 줄도 모르고 “누나! 누나”하고 부르던 어린 남동생의 한 아이가 누나의 검정 치맛자락을 옆으로 깔고 잠드는 모습도 보았다. 말(馬)이 옆구리에 비행기가 쏜 기관총을 맞고 마치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달아나다가 쓸어져 죽는 모습도 보았다. 어렸던 내 눈에도 참으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토록 처참한 참화를 겪으며 살아와 어둠살이 내린 사립문을 열고 모기 같은 작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부엌에서 저녁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시던 어머님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돌아왔음을 보고 반가움에 놀라 밥상을 내던지는 바람에 온 식구들이 놀라 밖으로 나와 마당에서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다.
꺼져가는 생명을 건지기 위해 아랫목에 나를 뉘어 놓고 행여나 굶주린 배를 다칠까 염려하여 깨죽을 끓여 조금씩 입에 넣어 주었다. 일주일쯤 지나자 기운을 차렸는데 공산군 패잔병 소탕 작전으로 다시 공습경보가 내리고 우리는 반공호로 숨어들어야 했었다.
당시 삼촌과 함께 살았는데 삼촌은 의용군에 끌려가고 아버지는 국군 보국대로 징집을 당했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무렵 삼촌은 의용군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오고 아버지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 오셨다.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 소작농을 하며 살았다.
폭격을 맞아 학교는 불에 타서 없어지고 유엔국의 도움을 받아 간이 학교를 짓는 동안 민가의 창고, 우막(소를 기르는 곳)등지를 찾아 바닥에 가마니를 깔아 교실을 만들고 그곳에서추운 겨울이면 솔방울을 주워 와 난로를 피우며 공부를 했다. 초등학교 졸업생 183명중 중학교 입학시험인 국가고시를 거쳐 8명이 진학 했다. 나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의 영광을 맛보게 되었는데 시골에서는 자식을 공부시킬 수 없다는 부모님의 판단으로 가족 모두가 상주읍내로 이사를 하여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형은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공부 하는 동안 나는 중, 고등학교를 읍내에서 마쳤다. 우리는 너무나 기막힌 가난 속에 공부를 하였다. 아버지는 행상을 가시고 어머니는 오늘 팔아야 할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시장을 보러 가시면 아침 가게를 내가 맡아 보다가 학교에 지각을 많이 하게 되어 친구들로부터 지각대장이란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어느 날, 시험 기간이었다. 그날도 지각을 했다. 어머님이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했는데 그날 그날 팔 물건을 도매상에서 구입하기위해 가신 동안 필자가 가게를 보아야 했기에 종종 지각을 했다. 헐레벌떡 교실에 들어서니 벌써 1교시 시험이 끝나고 2교시 시험이 시작되었다.
나는 1교시 시험지를 받아 교단에 나와서 쭈그리고 앉아 시험을 보고 곧바로 2교시 시험을 보았다. 한 시간에 두 가지 시험을 볼 때 당황했던 기억, 다른 학생들이 매점에서 5원짜리 바나나 빵을 맛있게 사 먹는 모습을 피해 수돗가에 가서 물을 마시던 어렵던 소년시절이 뇌리를 스친다.
그 후 부모님은 작은 판자 집에서 찐빵과 국수를 팔아 생활하며 자식들을 공부시켰기에 힘이 들었다. 그나마 형은 향학열이 높아 외지(대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그를 돕는 일도 어려운데 동생들에게는 신경을 쓸 여지가 없었다. 나는 극빈자 대열에 끼여 학비를 반 면제 받으며 농업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학교를 졸업한 몇년 뒤, 군에 입대하여 서울 효자동 방첩부대에서 2년 6개월간의 군무를 마치고 야간대학 공부라도 해보려고 다시 상경하여 일자리를 찾아보았으나 만만치 않았다. 가지고 올라 온 돈 마저 바닥이 나고 끼니를 굶어 가며 하숙방을 전전긍긍 하며 때로는 피를 팔아 끼니를 할 결 하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2원 50전짜리 마지막 전차표로 한강에 나와 투신자살을 기도 했으나 당시 자살자가 많아 한강 둑에 ‘잠깐만 참으세요.’라는 팻말을 세워 놓았는데 그것을 보고 쓴 미소를 지으면서 돌아 선 때도 있었다.
그날 밤, 서울 남산에 올라 긴 벤취에 누워 하루 밤을 새우며 서울 시내에 무수히 명멸하는 저 불빛 아래 내 몸 하나 건사 할 곳이 없을까 하고 밤새 흐느껴 울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 시내로 내려가 종로2가에 있는 육문학술회라는 작은 단체에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 몇 년 동안 생활하다가 성북구 종암동에서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모아 지도하는 사설 강습소를 운영하기 시작 했고 그곳에서 초등학교 준교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결혼도 하였다.
고향 쪽인 경상북도 교육청 관내 초등학교에 발령을 의뢰하고 기다리는 수개월 동안에 서울에서 여러 가지 행상을 해 보며 극에 처한 생활도 경험하였고 길거리에 앉아 군밤을 파는 어려움도 경험해 보았다. 시골에서 시집 온 아내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마침 고향인 상주 내서면 내서초등학교 교사로 첫 발령이 되어 초임으로 부임하였고 상주군, 달성군, 예천군, 구미시 등지로 40여 년의 교직 생활을 마감하고 2005년 2월 28일 밤 12시에 따뜻한 직원들의 환송과 배별사를 읽어가며 흐느끼는 여교사의 정든 눈물을 뒤로하고 교문을 떠나 정년퇴직을 하였다. 어느날 사랑스런 제자(여학생)에게 전화 한통을 받고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운 목소리
쌩긋 미소 지으면 / 양 볼에 고운 보조개 / 아름답게 예쁜 꽃피우던 소녀 / 달빛 창가 드리운 그날 /
못 다한 공부 더 하겠다며 / 교실 창가에 앉아 열성 부리던 그녀//
아련한 추억 흐르는 밤 / 손 전화 크기보다 몇 백배 / 그리운 목소리 수십 년 지나 듣는다.
“선생님, 얼마나 불러 보고 싶던 / 단어인지 몰라요.“
울음 담은 그녀 한마디 가슴 저미고 / 그가 울고 / 내 눈시울 젖게 한 반가운 눈물 / 사제(師弟)의 정은 그렇게 깊어 있었다.
“불혹의 나이에 소식 듣고 / 솜덩이만큼 커져 오는 어린 시절 / 선생님 사랑 그리워 잠 못 이루었어요.“
목이 매여 한동안 말 못하고 / 훌쩍이며 흐느끼는 소리에 가슴 퍽 차 / 가늘게 속삭였다. 선생님도 너 보고 싶어.
기약 없는 만남 다지며 / 힘없이 닫는 손 전화 / 미련 거두고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재직 중에 현장 교육연구와 청소년지도 등으로 대통령 표창 등 여러 수상의 기쁨도 누려 보았으며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을 졸업하고 초등교육학 학사 학위도 받았다. 해외연수의 혜택을 받아 중국일대, 일본, 금강산 등지를 국비로 다녀왔다. 퇴직 기념으로 자식들이 태국과 우리나라 제주도 등으로 효도관광을 보내주어 즐거움도 가져 보았다.
재직경력 25년을 연금으로 돌리고 나머지는 일시불로 찾아서 경북 경산에 300여 평의 복숭아 과수원을 구입하여 ‘초가삼간 집을 지어 흙에 살리라’라는 생각으로 ‘구름도 머물다 간 아름다운 전원’꾸미기에 열중하며 월 250 만원의 연금생활을 하고 있다.
전원생활을 하면서 글을 쓰다 보니 시로 등단을 했고 지금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월간문학지를 비롯하여 여러 문학지에 올려 진 글을 모아 단독 시집을 출판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시랑 하는 제자들의 응원을 받으며 온갖 정성을 기우리고 있다.
2010년 6월 28일, 영광스럽게 제8기 실버넷뉴스 기자로 임명을 받아 마지막 석양빛에 물들고 있는 생의 끝자락에서서 사진기와 기자 수첩을 들고 동분서주 하며 활동하여 일반 기자를 거쳐 건강생활부 차장, 미래경제부 부장, 편지부 부국장을 역임하였고 지금은 편집위원으로 임무를 맡은 소임을 완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480여건의 단독 기사와 150여건의 공동기사를 취재하며 이달의 기자 상도 받았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밤을 지새우며 고민도하였고 부족한 실력으로 당황도 하였으며 기사 반송을 받고 짜증스러움과 원망으로 마음을 상하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 모두가 나의 좁은 생각이었고 부족함이었다.
세상에는 모두가 나의 스승이요. 선배임을 뒤늦게 실감하도록 실버넷뉴스라는 매체의 활동이 가르쳐주고 있다. 보수 없는 활동에 무의미함을 느낀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 함께 늙어가는 실버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음에 큰 보람을 갖는다.
오늘도 간밤의 꿈에서 깨어나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부비며 일어나 혼미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 오늘도 이렇게 살아 있구나! 하고 느끼곤 한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저런 생각 없이 아침이 되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칠순을 넘기고 신체에 이상이 오기 시작한 다음부터 늘 아침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 그런 생각이 날까? 나 자신에게 물어 보면 그저 살아 있다는 고마움에서 일까, 죽음의 두려움 때문일까 아무튼 아침마다 느끼는 생각이다. 밤새 내 몸을 따뜻하게 해준 고마운 이불을 재치고 일어난다. 긴 호흡을 하며 앉았던 몸을 일으킨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손을 깍지 끼어 머리 위로 힘껏 뻗으며 기지개를 켜 본다.
오늘도 이렇게 살아 있구나! 또 하루를 시작하자. 벌써 밤새 텅 빈 머리는 생각들로 분주하다. 지난 2009년 2월 25일 관상 동맥이 막혀 우회 수술을 한 심장과 그로 인해 약해진 신장 기능, 2011년 7월 6일부터 급성으로 발병한 당뇨병이 걱정이다. 매일 아침마다 좌우 팔의 혈압과 혈당을 측정하여 기록하고 인슐린 주사를 7단위로 맞고 있다. 측정한 혈압과 혈당을 보고 음식과 적당한 운동을 하여 몸의 상태를 조절하고 있다. 신장 기능도 차츰 쇠약해 진다는 진단을 받은 필자를 지켜 보는 아내가 몹시걱정을 한다.
이와 같이 삶을 위해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 하루 이틀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약을 복용하고 측정하고 주사를 맞아야 하는 어려움을 이겨야 하기에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살아 있음을 확인 하는 것 같다.
이제 삶의 마지막 일로 글쓰기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연중 4~5 백만 원의 복숭아 재배 수입으로 작은 비닐하우스 한 동을 마련하여 야생화 가꾸기를 해 보고 싶다. 산으로 들로 다니며 자연을 사랑하고 풍류를 즐기면서 야생화를 모아 생명의 귀중함을 느끼고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법칙에 순응하며 살고 싶다. 언제까지 살아 있을지 모르지만......
4년 전, 심장 대수술을 하고 사방이 하얀 수술실에서 흰 까운을 입고 내 옆에 앉아 마취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다가 15 시간이 지난 뒤, 눈을 뜬 나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우며 바라보던 소녀 간호사의 맑은 눈동자가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나의 첫 만남이었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워진다.
그동안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형은 중.고등학교에서 42년의 교직생활을 마감하고 정년퇴임하여 운동(탁구)을 즐기며 생활하고 나는 1남 3녀를 모두 출가시켜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가 서울, 청주, 대구등지에서 자리 잡아 살고 있다. 매년 7, 8월이면 휴양림을 빌려 2박 3일 동안 모두 모여 휴가를 즐긴다.
누가 인간의 삶을 ‘새옹지마’라 했던가. 우리는 오늘도 한 치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내외 둘이서 살아가고 있다. 오직 오늘을 중히 여기며 값진 삶을 살기 위해 내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노력하려고 한다. 정말 한 치의 미련도, 여한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 온 내 삶의 여정을 ‘실버기자들이 만드는 세상’실버넷뉴스에서 돌아보게 하여 새삼 의미가 깊고, 지금까지 모든 가족이 한사람도 사고 없이 살아준데 대하여 고마움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나는 구름 나그네가 되어 "시인(詩人)이 되겠다고/ 허화(虛華)서른 글 휘저으며/ 흰 구름 속 헤매는 나그네 글 걸인(乞人)/ 참 시인(詩人) 눈 어지럽히고/ 귀 산란(散亂)케 할 뿐이었으니/운무에 마음 씻고/ 폭포수 머리 위 쏟아 정신력 가다듬어/옷깃 여미고 붓 잡도록/신령(神靈)님이시여!/도움 주소서/나의 붓 끝에 총혜(聰慧)를 드리우소서." 하고 기도를 한다.
실버넷뉴스 류기환 기자 rkh1019@silver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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