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 된다
course길상사 → 만해 한용운 심우장 → 덕수교회 → 이태준 옛집(수연산방)
how to get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삼선교) 6번 출구 방향에서 30m 직진 동원마트 앞에서 길상사로 가는 셔틀버스 운행(시간표 문의 www.kilsangsa.or.kr).
with 백석 <사슴>, 김자야 <내 사랑 백석>,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한용운 <산거>, 이태준 <달밤>
김영한 여사는 ‘김자야’라는 이름으로 1995년 <내 사랑 백석>이라는 평전을 내었는데, 이들의 러브스토리가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1936년 청년 시인 백석과 사랑에 빠진 기생 자야. 기생 신분 탓에 정식 결혼을 할 수 없었던 백석은 자야를 데리고 만주로 떠나려 했으나, 백석의 출세를 염려한 자야는 혼자 몰래 서울로 돌아온다. 백석은 서울에 숨어 있던 자야를 찾아내 아무것도 탓하지 않고 포근히 안아주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몇 해를 같이 살면서도 자야는 달아나고 백석은 찾아내는 일이 계속되었다. 1939년 백석이 만주 신찡으로 가면서 이 둘은 헤어졌고, 백석이 해방 후 월북하여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자야는 서울에 남아 대원각을 거느린 큰손이 되었지만, 만주로 함께 떠나지 않았던 후회 때문에 아흔 가까운 평생 동안 백석만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았다고 한다.
후드득후드득 낙엽이 비처럼 떨어지는 길상사 앞뜰에 앉아 이들의 이야길 곱씹다보니, 이전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던 백석의 시 ‘여승’의 한 구절,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가 마음속으로 쑥 들어와 내 안을 휘휘 저었다. 백석과 자야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에서 이름을 따온 ‘비둘기길’을 걸어 만해 한용운이 거처하던 심우장까지 내려왔다. 각국 대사관과 공관, 으리으리한 저택이 높디높은 담을 쌓아둔 비둘기길과는 달리 심우장으로 올라가는 길은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달동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좁고 낡아 있었다. 어깨 정도밖에 올라오지 않는 낮은 담장 안쪽에선 설거지하는 물소리가, 낮은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이런 살림의 흔적 사이에 한용운이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해서 유명해진 심우장이 있다. 길이 들어 반질반질해진 마루, 온기가 남아 있을 것 같은 아궁이를 사진에 담고 성북동 산책의 마지막 코스인 이태준의 수연산방으로 내려왔다. 1946년 월북해 1988년에 이르러서야 작품이 해금되어, 우리 세대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 상허 이태준. 이효석, 정지용 등과 ‘9인회’를 조직하고 <문장>지 편집을 맡았던 그는 탁월한 미문가였는데 월북 후 ‘퇴폐주의 부르주아 문학가’로 오해받아 1953년 이른 나이에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가 살았던 수연산방은 지금 조카손녀가 운영하는 전통찻집이 되었다. 밟으면 삐그덕 소리를 내는 오래된 툇마루와 비와 바람이 흔적을 남긴 창틀과 현판. 성북동은 어딘지 맞물리지 못한 것, 어긋나버린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1983년 발표된 윤후명의 <돈황의 사랑>이 묘사한 ‘가을 잎사귀들이 무리져 날리는 비현실의 세계’, 부암동과 세검정의 가을은 그로부터 26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 독특함을 잃지 않았다. 4소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북소문은 지금도 자하문이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린다.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라는 늠름한 뜻을 지닌 이 자하문에서부터 부암동 산책을 시작했다. 자하문에서 부암동사무소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 ‘커피집’이라 부른, 부암동의 터줏대감 ‘클럽 에스프레소’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 환기미술관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면 본격적인 골목 탐험을 시작할 수 있다. 시골에서나 보았던 낡은 방앗간, 슈퍼 주인이 비뚤비뚤 손 글씨로 써서 붙인 ‘호빵, 개 사료’ 따위의 알림판, 손때가 묻은 꼬질꼬질한 문패, 날긋날긋한 담장의 느낌… 하나같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게 만드는 정겨운 풍경이다. 그리고 그 골목 끝에서 보일락말락 숨어 있는 모퉁이 카페를 발견하면 서너 시간 죽치고 앉아 이런저런 글을 끼적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런 카페에 앉아 실제 부암동에서 살았던 현진건의 단편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줄 것이다.
학창 시절 국사책에서 보았던, 유니폼의 일장기가 지워진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사진은 알고 보니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현진건이 주도한 사건. 그 사건으로 일 년간 옥살이를 한 현진건은 출소 후 부암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 생계를 잇기 위해 양계업을 병행했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현재는 그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비석만이 서 있다. 부암동사무소에서 홍지동 방면으로 내려가 상명대학교로 이어지는 큰길로 나서면, 방금 전까지 쏘다니던 골목과는 전혀 다른 2009년의 서울이 다시 소란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익숙한 풍경 안에도 문학작품의 흔적은 숨어 있었다. 대원군의 별장이던 ‘석파정’과 춘원 이광수의 생가가 그곳. 소설가 이태준이 ‘집 이야기’라는 수필에서 언급하기도 한 석파정은 현재 석파랑이라는 한식집 안쪽 뜰에 있는데, 구경 삼아 들어가 볼 수 있다. <무정>이라는 기념비적 작품을 남겼지만 친일 행위를 한 불명예의 기록도 함께 가지고 있는 소설가 이광수는 홍지동 산장에서 은거하며 중요한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명교 옆 표지판을 따라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집 앞까지 가보았지만, 지금은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오르막을 오르느라 가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니 상명대학교 앞과 세검정 일대의 모습이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이광수의 소설 <육장기>의 한 구절 ‘세검정 빨래란 자고로 유명하다고 하오. (중략) 코 흘리는 아이를 데리고 자하문으로 주렁주렁 넘어오는 것이 봄부터 가을에 걸쳐서 이 고장의 한 풍경이오’를 읽으니, 언덕 위 산장에서 아래 빨래터를 내려다보는 이광수의 시선이 아련한 흑백사진처럼 느껴진다. 소설 속에서 ‘시선’이라는 안경을 빌려와 코끝에 걸치고 서울을 보니, 셀로판지로 만든 색안경을 쓴 것처럼 익숙하던 풍경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