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십자가는 어떤 것이었을까?
죄목을 쓰는 현판에는 히브리어와 라틴어 그리고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졌다.
당시 사용했던 십자가는 가운데 있는 T자형 십자가(Tau cross)와 오른쪽 하단에 있는 라틴 십자가가 등이 있었다.
십자가 처형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페르시아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Herodotus 1:128.2; 3:125.3; 3:132.2; 3:159.1). 그리고 알렉산더 대제가 이집트와 카르타고에서 사용하였고 이전에 십자가 처형은 로마인들에게서 성행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로부터 이 처형방법을 도입했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고통스런 고문이었으며 동시에 수치의 형벌이었다. 그것은 아주 서서히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게 하는 가장 무자비하고 잔인한 형벌의 극치로서 대개는 반란 노예나 모반죄를 지은 자들 그리고 아주 중대한 죄를 지은 자들과 탈영한 군인들에게 가해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처형법은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고로서의 역할도 했다. 로마 시민에게는 십자가 처형은 물론 채찍질도 가할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십가가 처형을 "노예들이 받는 형벌"(servile supplicium; see Valerius Maximus 2:7.12)이라고 생각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성경에도 언급된 다리우스(Darius)왕은 BC 519년에 3000명이나 되는 바벨로니아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한다(4:43.2,7; 6:30.1; 7:194.1). 그 기록에는 또한 후에 알렉산더 대제가 정복지에서 십자가 처형법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의 책 "알렉산더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 기록된 루푸스(Curtius Rufus)의 말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두로(Tyre)를 정복한 후 2000명을 이 방법으로 처형했다고 한다(4:4.17).
로마가 헬라제국을 점령해 가면서 카르타고의 처형 관습도 자연히 도입되었는데 인도, 앗시리아, 시디아 그리고 켈트족 등의 이방인들에게 이 형벌을 사용했다. 헹겔(Martin Hengel)에 의하면 이 방법은 후에 게르만족과 영국인들도 사용했다고 한다.<Martin Hengel, Crucifixion, trans. John Bowde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22-23).>
고대인에게 있어서 십자가 처형은 가장 수치스런 것이며 가장 고통스런 것이며 가장 혐오스런 처형법이었다. 로마의 키케로(Cicero)는 이 처형을 보고 "가장 잔인하며 험오스런 형벌"(Verrem 2:5.165)이며 "최고의 형벌"(Verrem 2:5.168) 이라고 한 바 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또한 이 처형을 직접 보고 "가장 지독한 죽음"이라고 하였다. 로마의 법학자 파울루스(Julius Paulus)는 이 당시의 처형법 몇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십자가 처형이 화형이나 목을 베는 것이나 짐승들에게 던져지는 것보다 도시에서 시행되는 처형 중 가장 최악의 것이라고 하였고 세네카는 이 처형이 가장 특별한 방법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아피온에 의하면 스파르타쿠스(Spartacus)에서 노예들의 폭동이 일어났을 때 로마의 장군 크라수스(Crassus)는 6000명의 노예들을 로마도 들어오는 길목인 아피온 거리에서 십자가로 처형함으로서 경고로 삼았다(Bella Civilia 1:120).
요세푸스는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Titus)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때에 하루에 500명이상이 같은 방법으로 처형되었다고 기록하면서 "예루살렘에는 십자가를 세울 곳이 더 이상 없고 사용할 십자가가 부족했다"(Wars of the Jews 5:11.1)고 기록하고 있다.
세네카는 십자가 처형의 여러 유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그곳에서 여러 종류의 십자가를 보았다. 어떤 이는 거꾸로 매달렸고 어떤 이는 국부에 못이 박혔으며 어떤 이는 두 팔이 묶여 매달려 있었다"(Dialogue 6:20.3).
초기에 페르시아에서 대개 처형대상자의 발은 땅에서 1피트 정도 들어올려져 나무에 묶이거나 기둥에 못박혔다. 그 이후에는 십자가 형태가 사용되었는데 기둥을 세워 놓고 수평으로 된 나무에 묶이거나 못이 박혀 들어 올려져 기둥에 고정되었다. 그리스도 시대에 로마는 이 방법을 도입하여 팔레스틴 지역에서 타우 크로스가 주로 사용되었고 라틴 크로스의 형태 혹은 X자 형태의 십자가 처형도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타우 크로스일 가능성이 많다. 처형 대상자는 채찍질이 끝난 후 성벽 밖에 기둥이 세워진 처형장으로 백부장이 이끄는 병사들에 둘러싸여 자기가 못 박힐 수평 통나무를 지고 가야만 했다. 세워진 기둥은 약 300 파운드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것이었다. 죄수가 지고 가는 통나무는 75-125파운드 정도의 무게였다고 한다. 이것을 채찍질로 다 헤어진 어깨에 지고 가는 죽음의 길은 고통의 길 그 자체였을 것이다. 죄목을 쓰는 현판(titulus)은 때때로 병사들이나 주위에 있는 다른 죄수에 의해 운반되었고 기둥 꼭대기에 게시되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Annals 2:32.2; 15:60.1)의 기록에 의하면 처형장은 예루살렘 성벽 밖의 골고다처럼 로마의 Campus Esqulinus라는 곳에도 있었다고 한다. 처형 장소 근처에는 주검을 던져놓는 곳이 있었는데 그런 까닭에 "골고다"를 "해골의 곳"이라고 했던 것같다.
죄수는 발가벗겨진 채 두 팔을 수평막대기에 묶이거나 혹 못이 박힌 후 수직 기둥으로 들어올려진다. 발이 닿을 만한 부분에는 돌출 부분이 있어 몸무게를 유지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손을 묶는 것은 하중이 아래로 쏠려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못은 발에 박히는데 혹 양 손목에도 박히게 된다. 복음서는 주님의 양 손에도 못이 박혔다고 증언하는데 아마 손바닥보다는 손목이었을 것이다. 1968년 예루살렘 북쪽의 고대 무덤에서 한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골은 예수님 당시 즉 1세기경의 것으로 하콜의 아들 요하난(Jehohanan ben Hagqol)이란 사람의 것이었다. 그 유골을 보면 발과 손목에 약 7인치 정도 크기의 쇠못이 박혀있었고 나무의 재질은 올리브 나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성서에는 예수님의 손에 못이 박혔다고 했는데 이는 고대인들이 손목까지를 손으로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채찍에 맞았다. 이 당시 유대인의 법률로는 죄인에게 39대의 채찍질이 가해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신명기 25:3까지에 기록되어 있는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찌니"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유대인 관원들과 로마 병사들은 예수의 벗은 몸에 왕의 색깔인 자색 옷을 입히고 손에는 황금 홀 대신 갈대를 쥐어주었다.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우고 가시관을 막대기로 내리치고 예수님의 뒤를 맴돌며 조롱하였다.
채찍질은 보통 두명의 병사에 의해 가해졌다. 가차없는 채찍질은 출혈과 극심한 고통을 주기 위해 온몸을 벗기고 기둥에 뒤로 돌려세워진 후 다리와 엉덩이를 묶은 후에 가사상태에 빠질 정도까지 이어졌다. 가죽으로 된 서로 다른 길이의 두 가닥 채찍 끝에는 쇠붙이나 양의 뼈로 만든 작은 갈쿠리를 매달아 한 대의 채찍에도 살점이 뜯겨 나가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살점이 뜯기고 갈라진 피부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채찍질에 예수께서는 점차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음식과 물은 제공되지 않고 심지어 잠조차 재우지 않았다. 채찍질은 십자가 처형 이전에 더욱 고통을 주고 동시에 구경꾼들의 본보기로서 가장 좋은 끔찍한 형벌이었다. 실제로 십자가 처형 이전에 이미 이 채찍질로 인해 죽는 자들이 속출했고 비록 죽지 않아도 육체와 정신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이런 채찍질은 보통 십자가에 달린 자가 하루 혹은 건장한 자는 일주일 정도를 매달려 있던 반면에 예수께서 6시간 만에 운명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죄수가 십자가에서 거의 가사상태에 이르면 약 20인치 길이의 갈대를 사용해 마취성분이 있는 몰약이나 쓸개즙 혹은 신 포도주나 유럽산 박하의 일종인 우슬초를 주기도 하는데 이것은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과 그가 아직 생존해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방법이기도 했다. 당시 십자가의 크기는 총 길이가 7피트를 넘지 않는 비교적 작은 것과 높이가 그보다는 훨씬 높은 것이 있었는데 예수께 이것이 제공되었다는 것을 보아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의 크기는 지상에서 1피트 정도 들어 올려진 약 7피트 높이의 작은 십자가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받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한 죽음의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으시려는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십자가 처형에서는 보통 다리의 관절을 꺾는데 이것은 죄수가 죽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관절을 꺾어버림으로 몸의 하중을 받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 예수님에게 이것은 예외가 되었는데 그것은 이미 예수님의 죽음이 확실하여 하중을 받치려는 모습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보통 며칠 동안의 지속적인 고통이다. 피비린내는 온갖 곤충들을 불러모으고 신음하는 입속으로, 눈으로 피가 흐르는 환부로, 노출된 모든 부분으로 몰려들어 고통을 준다.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은 우선은 신체가 못에 박힌 것에서 오지만, 그것 이외의 더 큰 고통이 있었다. 의학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호흡은 손을 가지런히 내린 편한 자세에서 가장 쉽다고 하는데 양 팔을 벌리고 발이 못에 고정된 채 시간이 지나면 출혈로 인한 탈진과 함께 숨을 내쉬기가 어려워진다고 한다. 또한 중력에 의해 몸이 아래로 쏠리면서 못박힌 부위의 통증이 더해가고 몸을 들어올리려 하기 때문에 발에 힘을 주고 관절을 비틀게 되어 통증이 더해간다는 것이다. 자연히 몸은 거친 기둥의 단면을 부벼댐으로 채찍질로 헤어진 몸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이런 고통은 죄수를 죽음으로 이끌어 간다.
이런 극도의 고통 속에서 주님은 일곱마디의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하실 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그 고통 중에도 오히려 자신을 못박은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고 육신의 어머니를 걱정하였으며 함께 못박힌 강도에게 낙원의 소망을 주셨고 인간이 당해야할 고통을 홀로 그리고 조금이라도 덜기를 거부하신 채 모두 당하시어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나의 구원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얼마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큰 사랑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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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성결교회 주님의교회 목사 박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