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삶과 꿈을 가꾸는 언어의 집이다.
우리는
시로써 저마다의 가슴을 노래로 채워
막힘에는 열림을,
어둠에는 빛을,
끊어짐에는 이어짐을
있게 하는 슬기를 얻는다.
우리 겨례가
밝고 깨끗한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그러한 시심을
끊임없이 일구어 왔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이에 시의 무한한 뜻과
그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하여
신시 80년을 맞는 해,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소년'지에 처음 발표되었던 날인
십일월 초하루를 '시의 날'로 정한다.
한국시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시의 날 제정'모임
(2001. 10. . 강준형<樂村 댕기시인> 자료 제공)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쿠르릉 꽝.…" 이 잡지에 권두시로 발표된 이 '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념하여 1987년에 11월 1일이 시의 날로 정해졌고 일본 유학생들이 <친목회회보>가 발행한지 100년이 되던 1996년에는 잡지협회가 <소년>을 창간했던 삼각동 광화문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
(시)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최남선
1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2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3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通寄)하고 나서 보아라.
가지에 가시가 있으나 재배종은 가시가 없다. 잎은 어긋나고 털이 있으며 바소꼴의 긴 타원 모양이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꽃은 새순 끝에 1개씩 달리고 흰색 또는 엷은 붉은 색을 띠며 지름이 3∼4cm이다. 암술대는 5개이고, 수술은 많으며, 씨방은 5실이다. 열매는 거의 둥글고 지름이 3∼5cm이며 10∼11월에 익는다. 서양산사류(Crataegus)와 속간 잡종을 만들어 재배한다. 열매는 식용한다. 유럽 중남부에서 카프카스에 걸쳐서 분포한다. (두산백과)
[꽃 말] : 유일唯一한 사랑
[탄생화] : 귀하는 겉치레에 신경을 쓰시는 편입니다. 겉치레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노력하십시오.
시는 삶과 꿈을 가꾸는 언어의 집이다.
우리는
시로써 저마다의 가슴을 노래로 채워
막힘에는 열림을,
어둠에는 빛을,
끊어짐에는 이어짐을
있게 하는 슬기를 얻는다.
우리 겨례가
밝고 깨끗한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그러한 시심을
끊임없이 일구어 왔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이에 시의 무한한 뜻과
그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하여
신시 80년을 맞는 해,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소년'지에 처음 발표되었던 날인
십일월 초하루를 '시의 날'로 정한다.
한국시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시의 날 제정'모임
(2001. 10. . 강준형<樂村 댕기시인> 께서 본란 필자에게 제공)
*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쿠르릉 꽝.…" 이 잡지에 권두시로 발표된 이 '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념하여 1987년에 11월 1일이 시의 날로 정해졌고 일본 유학생들이 <친목회회보>가 발행한지 100년이 되던 1996년에는 잡지협회가 <소년>을 창간했던 삼각동 광화문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잡지의 날>
1965년 10월 20일 사단법인 한국잡지발행인협회(현 한국잡지협회)가 1908년 11월 1일 최남선(崔南善)이 《소년(少年)》지를 창간한 날을 기념하여 정한 날. 11월 1일. '국민 계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선인들의 행적을 새롭게 기억하고, 앞으로 더 나은 잡지를 만들어서 건전한 언론의 구실을 다할 것'을 다짐하여 제정하였다. 이날은 해마다 한국잡지협회와 한국잡지기자협회의 공동 주관으로 기념식을 거행하고, 잡지문화 발전에 기여한 유공자에게 잡지문화상을 준다. (두산백과)
<11월1일 할로윈(Halloween)>
할로윈 데이는 성자의 날(11월 1일) 바로 전날(10월의 마지막날)이다.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의 여느 명절(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 데이)처럼 익숙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영국이나 특히 미국에서는 귀신 복장을 하거나 할로윈의 상징인 호박등을 달고 다니는 풍습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 다른 명절처럼 이 재미있는 날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는 다들 잘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영화나 기타 경로를 통해서 알려질만큼 알려진 할로윈 데이를 한번 짚어보자.
*[죽음의 신을 달래는 의식]
호박 속을 파서 만든 호박등이나 횃불을 들고 마녀와 귀신 분장을 한 의상행렬, 가장무도회가 벌어지는 할로윈 데이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 1세기 중반, 당시 영국에 살고 있던 켈트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승려 드루이드 (Druid)에 의해 전파되었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설명이다. 켈트족들은 마법에 걸린 사후의 인간 영혼은 드루이드가 섬기는 신(神)인 삼하인(Samhain)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삼하인은 인간의 죽음과 사 후 세계를 관장하는 죽음의 신. 당연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켈트족들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 동물을, 때로는 사람까지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베풀었는데, 이 날이 바로 '할로윈 데이'의 기원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10월 31일에 겨울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날 열리는 삼하인 축제날에는 죽은 자들이 긴 겨울밤에 활동하기 위해 되살아난다고 생각했다. 즉, 유령이나 마귀, 마녀, 해적, 요정들이 인간을 대신해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가능한 바깥 출입을 삼가고 귀신들에게 자신들의 집을 볼품없게 보이게 위해 일부로 벽난로의 불을 꺼뜨리기도 했다. 한편 켈트족을 포함한 유럽인들은 11월1일을 '모든 성인(聖人)들의 날(All Hallow Day)'로 지켜왔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그 전날의 삼하인 축제를 '모든 성인들의 날 이브(All Hallows’Eve)'라는 명칭으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말이 훗날 '할로윈(Halloween)'으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할로윈의 상징 '잭-오-랜턴']
영국인들은 이 마법의 풍습을 미국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이 풍습은 곧 이교도들의 축제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할로윈 데이에는 죽은 자들의 영혼, 유령, 마녀, 도깨비 등이 정처 없이 배회할 것으로 여겨 결혼·행운·건강·죽음에 관계되는 점치기에 가장 좋은 시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할로윈 데이의 상징은 '잭-오-랜턴(Jack-o’Lantern)' 즉, 망령의 갈 길을 밝혀주기 위한 등(燈)이란 이름에서 유래된 호박등이다. 큰 호박의 속을 도려낸 뒤 도깨비의 얼굴을 새기고, 양초를 넣어 도깨비 눈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잭-오-랜턴'. 전설에 의하면 술 잘 먹고 교활한 잭이라는 사람이 마귀를 속여 골탕먹인 뒤 죽었다. 이후 앙심을 품은 마귀에 의해 그는 천국도 지옥도 가지 못하고, 추운 아일랜드의 날씨 속에서 암흑 속을 방황하게 되었다. 결국, 추위에 지친 잭이 마귀에게 사정하여 숯을 얻었는데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호박 속을 파고 이 숯을 넣어 랜턴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할로윈을 상징하는 '잭-오-랜턴'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할로윈데이]
오늘날 할로윈 데이에 어린이들이 즐겨 입는 의상은 보통 마귀, 마녀, 유령, 해적, 요정, 야수 또는 잘 알려진 만화 캐릭터. 심지어는 미국 대통령의 얼굴을 본따 만든 가면까지 등장했다. 할로윈 데이가 오면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집 문간 앞에 불을 환하게 밝혀둔다.
이는 어린이들에게 대접을 해준다는 뜻이다. 이윽고 다양하게 분장한 꼬마 귀신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트릭 오어 트릿(Trick or Treat : 과자를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칠테야!)'하고 외치면서 자루를 내민다. 그러면 어김없이 어른들은 그 자루에다 한줌의 풍선껌이나, 과자, 사과, 오렌지 혹은 케익 등을 넣어주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할로윈 의 풍습이다.
"작열하던 백열의 여름을 아쉬워하면서 만추의 노랗고 따사로운 그 빛을 맛보게 해주오." ( 보들레르가 1859.11.30에 발표한 <가을의 노래>중 일부)
▶1755 포르투갈 리스본에 강진, 주민 약 6만여명 사망
▶1757 이탈리아 신고전주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Canova, Antonio, 1757.11.1 ∼ 1822.10.13]출생, *신고전주의의 대표자이다. 일찍부터 석공 밑에서 일하다가 재능이 인정되어 베네치아의 조각가 토레티의 공방에 입문하였으며, 이때 고대조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779년 22세에 로마로 갔는데, 당시에는 바로크와 로코코에 대한 반발로 고전주의적 풍조가 일기 시작, 폼페이와 엘코라노의 고대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빙켈만과 레싱의 저술을 참작하여 박차를 가하고 있던 때여서, 로마는 신고전주의운동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 환경에서 그는 고대조각을 열심히 연구하고 모방하였다. 우선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를 제작하였고, 《교황 클레멘스 14세의 묘비》(1787, 산티아포스토리성당). 《클레멘스 13세의 묘비》(1792, 산피에트로대성당) 등이 있으며, 루브르에 있는 《아모르와 프시케》의 군상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바티칸미술관에 있는 《페르세우스》 《두 명의 권투자(拳鬪者)》 등을 제작한 후, 1802년에는 나폴레옹의 초청을 받아 파리로 갔으나, 그 해 로마로 돌아와서 명사 ·귀족의 묘비와 초상을 비롯하여 나폴레옹의 거대한 나상(裸像:1810, 밀라노 브레라미술관)과 나폴레옹의 여동생 폴린이 긴 의자에 기댄 반나상(로마 보르게세미술관)을 고대양식으로 제작하였다. 그 후 파리와 런던을 여행하였으며, 만년에도 쉬지 않고 일을 계속하여, 과로로 휴양하려고 베네치아로 귀향, 그 곳에서 죽었다. (두산백과)
▶1800 미국 대통령 관저 백악관 개관
▶1845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1845-1894),사망
▶1871 미국 시인 소설가 스티븐 크레인(Stephen Crane 1871.11.1.-1900)출생, *뉴우저어지주(州)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자연주의(自然主義)와 인상주의(印象主義)적인 수법을 도입한 작가로 문학사(文學史)적 의의를 인정받음. 소재(素材)를 냉철하고 솔직하게 다루었으며, 아이러니를 가끔 사용함. <거리의 소녀(少女) 매기>(1893), <붉은 무용훈장(武勇勳章)>(1895) 등이있다. *미국의 자연주의 소설가 스티븐 크레인 Stephen Crane (1871-1900)은 폐결핵으로 인한 그의 때 아닌 죽음은 틀림없이 미국의 주요한 자연주의 작가가 되었을 작가의 짧은 경력을 종결지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묘사와 우주 안에서 인간의 잔인하고 하찮은 역할에 대한 신랄한 통찰은 점잖은 전통의 소심함과는 놀랄만큼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중편[피의 무공훈장] The Red Badge of Courage (1895)과 단편 [구명보트] (1898) [푸른호텔] The Blue Hotel (1898)을 포함한 그의 최고의 작품들은 아직도 미국소설사에서 가장 좋은 작품들에 속하며, 헤밍웨이나 포트너와 같은 현대작가들의 작품과 비교된다.(http://kowon.dongseo.ac.kr/~oskang/naturalism.htm) *[푸른 호텔] -포오트 롬퍼에 있는 푸른색으로 칠해진 <팰리스>호텔에 스웨덴 사람, 카우보이, 동부에서 온 사람이 투숙한다. 이들 세사람은 호텔주인 '패트리크 스컬리'의 아들 '조니'와 트럼프 게임을 하게 되는 데, 스웨덴인이 '조니'가 속임수를 썼다고 말하면서 둘은 싸우게 된다. 싸움에서 이긴 스웨덴인은 의기양양해져 <푸른 호텔>을 떠나 마을 술집으로 간다. 술집에서 위스키를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스웨덴인은 손님 중의 한 명인 마을의 도박사에게 강압적으로 술을 권하며 시비를 걸다가 도박사의 칼에 찔려 죽는다. 몇 달 후 조그만 농장에서 카우보이가 동부에서 온 남자에게 스웨덴인이 바보같이 '조니'가 속임수를 썼다고 말하고 싸워서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말하자 동부사나이는 '조니'가 속임수를 쓰는 것을 자신도 봤으나 용기가 없어 나서지 못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스웨덴인을 죽인 주범은 용기없는 자신, '조니', 아무 것도 모르면서 '조니'를 두둔한 카우보이와 '스컬리'영감이며, 운수 사나운 도박사는 곁들이에 지나지 않으면서 클라이막스에 등장해 모든 벌을 혼자 뒤집어 쓴 것이라고 말한다-(.이 작품은 아이러니한 결말이 중요하다. 동부사나이의 고백을 통해 사건의 책임은 직접 살인한 사람과 살인이 일어나도록 만든 원인자들에게 있고, 그 중에서도 원인자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말한다. 한번 즈음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 과연 어디까지를 원인 제공자로 볼 것인가가 문제이다).(http://myhome.shinbiro.com/~timeful/classic2.html)
▶1885 미국 시인. 비평가 에즈라 파운드[Pound, Ezra Loomis, 1885.10.30 ~ 1972.11.1]사망, *아이다호주(州) 출생.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1909년 영국으로 건너가, 언제나 이미지즘과 그 밖의 신문학 운동의 중심이 되어 T.S.엘리엇과 J.조이스를 세상에 소개하였다. 상징파(象徵派)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싫어하여, 언어를 조각과 같이 구상적(具象的)으로 구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시집에는 《가면(假面) Personae》(1909) 《휴 셀윈 모벌리 Hugh Selwyn Mauberley》(1920) 《캔토스 The Cantos》(1925∼1959) 등이 있다. 특히 《캔토스》는 엘리엇의 《황무지(荒蕪地) The Waste Land》(1922)와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동시에 구사한 신화적 방법으로 장편시(長篇詩)를 시도한 것이다. 그 연작(連作)의 하나인 《피산 캔토스 Pisan Cantos》(1948)에 의해서 보링겐상을 받았다. 또 번역가로서는 이탈리아의 카바르칸티, 로마의 시인 프로페르티우스 이외에도 E.F.페놀로사의 번역을 토대로 한 이백(李白)의 영역(英譯) 《The Ta Hio》(1928) 등 다방면에 걸쳐 우수한 번역을 남겼다. 동서 문학에 관한 깊은 조예는 《문학안내》(1931) 《문화로의 길잡이》(1938)에 응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미활동의 혐의로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연금되었으나, 시인들의 운동으로 1960년 석방되어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두산백과) *[캔토스The Cantos] -단테를 모방하여 현대의 《신곡(神曲)》을 쓰기로 결심하고 《16편의 초고(草稿)》(1925)부터 착수하였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에 견주어 지옥편력으로부터 시작하여 고대 그리스, 르네상스 때의 이탈리아, 건국시기의 미국, 그리고 현대의 파시스트 정권하의 이탈리아 등, 각시대의 문화를 찾아 방랑하는 정신의 일대 서사시이다. 공자(孔子)의 중용정신(中庸精神)을 모범으로 삼고, 이자제도(利子制度)에 반대하는 등 지상의 이상정치를 추구하였으나 무솔리니의 실각으로 작품 《피산 캔토스》(1948)에서 그의 꿈은 좌절되었다. 그 후에도 단테의 천국편에 비견되는 《옥좌편(玉座篇)》(1959), 《초고와 단편(斷片)》(1970)을 썼으나 미완성으로 끝났다. 이미지와 에피소드를 중첩시켜 나가는 몽타주적인 작법은 현대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여 T.S.엘리엇이나 W.C.윌리엄스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두산백과)
▶1894 러시아 민족주의를 지지한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3세 사망
▶1905 한국, 도량형 신제도 채택
▶1908 육당 최남선, 한국최초의 월간종합지 <소년少年> 창간 *1908년 11월 최남선(崔南善)이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로, 1911년 5월 통권 23호로 종간되었다. 국판, 60면 내외이다. 편집 겸 발행인은 최창선이었고, 신문관에서 발행하였다. 최남선이 일본 유학중이던 1906년 학생모의국회의 토의안건이 문제가 되어 조선인 학생 70여 명이 동맹퇴학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최남선이 남은 학비로 인쇄기구를 구입하여 귀국한 뒤 이 잡지를 간행하였다. 창간호에서 `우리 대한으로 하여금 소년의 나라로 하라. 그리하랴 하면 능히 이 책임을 감당하도록 그를 교도하여라`라는 창간 취지를 내세웠으며,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계몽, 강건한 청년정신의 함양에 힘썼다. 초기에는 최남선 혼자 집필과 편집, 발행까지 도맡다시피 하였는데, 3권 2호부터는 이광수·홍명희 등이 글로 가담하여 개인 잡지의 성격에서 벗어났다. 1909년 3월에 발행된 제2권 제3호에 실린 '이런 말삼을 들어 보게'가 국권회복에 관한 기사로 압수되는 등 여러 차례 압수와 발행금지 처분을 반복하다가, 1911년 5월에 발행된 제4권 제2호에 실린 박은식의 《왕양명선생실기》로 인해 압수, 일제에 의해 결국 발행 정지를 당하였다. 이 잡지는 근대적 형식을 갖춘 잡지로는 한국 최초이며, 창간호에 실린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신체시의 효시로서 문학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두산백과) *근대적 종합잡지의 효시인 <소년>이 창간되었다. 통권 23호까지 발행.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쿠르릉 꽝.…" 이 잡지에 권두시로 발표된 이 '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념하여 1987년에 11월 1일이 시의 날로 정해졌고 일본 유학생들이 <친목회회보>가 발행한지 100년이 되던 1996년에는 잡지협회가 <소년>을 창간했던 삼각동 광화문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현재 우리 나라에 등록된 잡지의 수는 5천 종이 넘는다고 한다.
▶1908 최남선,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최초의 잡지 <소년>에 발표, *1908년 《소년》지 창간호 권두에 실린 작품으로 당시의 사람들은 '신체시(新體詩)' 또는 '신시(新詩)'라고 불렀다. 4·4조나 7·5조, 또는 6·5조 등의 창가 형식을 깨뜨리고 완전한 자유시의 형태로 등장했다는 데에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한국 근대시의 최초의 모습으로 평가되는 시이다.
(시)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 최남선
1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2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3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通寄)하고 나서 보아라.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5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 따위 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6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少年輩)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 맞춰 주마.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구작삼편(舊作三編) - 최남선)
▶1909 창경궁의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일반에게 공개
▶1909 사법청의 개청으로 법부 폐지
▶1911 총독부, 교과서편찬 개시
▶1911 압록강철교 준공으로 조선철도와 남만철도가 직통 운행
▶1913 가곡 '명태' 작사한 시인 양명문 [紫門 楊明文, 1913.11.1-1985.11.21]출생, *호 자문(紫門). 평양 출생. 1942년 일본 도쿄센슈[東京專修]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39년 27편의 시를 수록한 처녀시집 《화수원(華愁園)》을 발간하여 시단에 등단하였으며, 1 ·4후퇴 때 월남하여 종군작가로 활약하였다. 1956∼1960년 자유문학자협회 중앙위원,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1957∼1974년 펜클럽한국본부 중앙위원, 1957∼1960년 시인협회 이사를 역임하였고, 1957년 국제 펜클럽대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60∼1965년 이화여자대학 교수, 1965∼1979년 국제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81∼1985년 세종대학 초청교수를 지냈다. 그의 시는 언어의 섬세하고 연약한 기교미를 배척하고 솟구쳐 오르는 느낌과 생각을 그대로 직정적(直情的)으로 토로하는 특징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에는 시집 《송가(頌歌)》 《푸른 전설》 《화성인》 《지구촌》, 시선집으로 《이목구비》 《묵시록》, 장편 서사시 《원효》 등 다수가 있다. (두산백과)
▶1922 오토만-터키 제국 멸망하고 터키공화국 출범, *1922년 11월 1일, 무스타파 케말이 주도하는 ‘투르크 대(大)국민의회’가 술탄(황제)제를 폐지함으로써 623년 역사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299년 창건돼 전성기때는 서아시아·북아프리카·발칸반도·흑해 북부까지 아우르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를 함락해 유럽인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던 대(大)제국이었다. 그러나 술탄의 무능, 지배계급 내부의 알력, 산업 침체 등이 거듭되면서 16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19세기 발칸반도 국가들의 독립 러시는 제국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었고, 1차대전의 패전은 오스만 제국을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때 제국의 보존을 위해 영국이나 미국의 보호령으로 두자는 의견이 제국 내에서 제기됐지만 케말은 단호히 이를 거부하고 투르크 민족 중심의 독립국가 건설을 꾀했다. 케말이 민·군의 지지에 힘입어 오스만 의회로부터 자신의 독립안 지지를 이끌어내자 영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의회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케말은 새로운 ‘투르크 대(大)국민의회’를 구성하며 이에 맞섰다. 그의 관심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광활했던 영토가 아니라 투르크 민족 만의 독립된 영토였다. 따라서 투르크 영토 안에 있는 타국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던 케말은 해결책을 독립전쟁에서 찾았다. 결국 그들을 모두 내쫓고 1923년 10월29일 터키공화국을 수립했다. 무스타파 케말이 초대 대통령이었음은 물론이다. (조선일보DB)
▶1925 중국, 무한정부 수립
▶1925 조선말 민족주의 사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황성신문 주필, 상해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朴殷植(1859. 9. 30 ∼1925. 11. 1) 사망, *주자학자로서 출발해 개화자강론자·애국계몽사상가·학자·언론인·독립투사로, 민족이 처한 조건의 변동에 따라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발전시키면서 전생애를 민족의 해방과 독립에 바쳤다. *[초년] -본관은 밀양.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백암(白岩·白巖·白菴)·태백광노(太白狂奴)·무치생(無恥生). 아버지는 서당훈장 용호(用浩)이며, 어머니는 노씨(盧氏)이다. 할아버지인 종록(宗錄)의 대에 이르러 역농(力農)으로 치산(治産)했다. 1868년(고종 5) 아버지의 서당에 입학해 1875년까지 정통 주자하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 주자의 영정(影幀)을 방에 모셔놓고 매일 아침 절을 드릴 만큼 주자를 존졍하고 숭배했다. 아버지가 시부(詩賦) 등 과거 공부를 시켰으나, 17세 때 과거공부 이외에 어찌 경세지학(經世之學)이 없겠는가 하고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기 또래의 청년들을 사귀었다. 1877년 아버지 상을 당한 뒤 1879년 연안이씨(延安李氏)와 혼인하고 평안남도 삼등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1880년 경기도 광주로 가서 정약용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에게 고문(古文)의 학(學)을 배우고, 정약용의 정치·경제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을 섭렵했는데 이것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82년 7월 서울에서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시무책(時務策)을 지어 바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평안남도 영변 산중에서 질박한 생활을 하면서 오직 학문 연구에만 힘썼다. 1884년 태천의 박문일(朴文一)·박문오(朴文五) 형제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박문일은 17세기초 관서지방의 명유(名儒)였던 선우협(鮮于浹)의 학풍을 이은 학자로, 박문일 형제와의 사제관계는 일생을 통해 돈독히 지속되었다. 1885년 향시에서 특선(特選)으로 뽑히고, 1888년 민영준(閔泳駿)의 추천으로 숭인전참본(崇仁殿參奉)이 되었다. 1892년 민병석(閔丙奭)의 추천으로 동명왕릉참봉(東明王陵參奉)으로 자리를 옮겨 황해도 중화군에 거주했다. 이 시기에 주자학을 깊이 연구해 유학자로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농민전쟁은 동비(東匪)들의 반란이고, 갑오개혁은 사설(邪說)이라는 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아 벼슬을 그만두고 강원도 원주군 주천으로 옮겨 은거했다. *[개화자강론자로의 전환]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 내각이 붕괴된 1896년 2월 이후 상경한 뒤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에 충격을 받고 동서 각국의 신서적을 우연히 읽어본 다음 세계의 대세와 시국(時局)의 정형(情形)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변통경신(變通更新)해야 나라와 백성을 보전할 수 있다고 깨달아 위정척사파 유학자로부터 개화자강파 사상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무렵 노·장·양·묵·신·한(老莊楊墨申韓)의 학설과 불교·기독교의 교리를 섭럽하게 되었다. 1898년 독립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11월 17일 진신(晉紳)들이 참가하는 만민공동회에서 문교부문의 일을 하는 한편 민족사 연구와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898년 9월 장지연(張志淵)·남궁억(南宮檍)·유근(柳瑾) 등이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한 뒤 〈황성신문〉으로 개제(改題)해 간행하자 장지연과 함께 주필이 되었다.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된 후 1900년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經學院)의 강사가 되어 경학을 강의하고, 관립한성사범학교(官立漢城師範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이무렵 갸화자강사상으로 전환하던 시기의 글을 모은 〈겸곡문고 謙谷文稿〉와 교육 및 종교 문제를 논한 〈학규신론 學規新論〉을 저술·간행했다. 당시 그의 사상은 동도서기론적(東道西器論的) 요소가 짙어 신학문 중에서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은 배워야 하지만 공자·맹자의 서(書)는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유교교육을 전국적으로 더 보급할 것을 주장했다. *[애국계몽운동]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황성신문〉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국민들에게 자주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하다가 한때 일본헌병대에 구금되었다. 1904년 7월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주필이 되어 대한제국정부의 취약성과 일제의 잔혹함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일제가 무력위협으로 체결한 조약의 진상을 폭로하고 규탄했다. 을사조약 규탄으로 정간되었던 〈황성신문〉이 1906년 2월 복간되었으나 장지연이 물러나자 〈황성신문〉이 주필로 자리를 옮겨 1910년 8월 폐간될 때까지 주필로서 활동했다. 을사조약 이후 그는 급속히 동도서기론적 요소를 떨쳐버리고 변법적 개화자강사상가로 전환했다. 이제부터라도 전민족이 분발해서 급속히 근대적 실력을 배양해 국권회복의 장기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보고 국권회복 역량을 기르기 위한 각 부분의 대대적 개혁을 주창하고, 전 민족에게 "회개적(悔改的) 사상과 분발적(奮發的) 기상"을 가지고 국권회복을 위해 "고심혈성(苦心血誠)으로 배양실력"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부터는 자기 학문의 뿌리였던 구학문을 공공연히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위정척사사상과 유림(儒林)을 공격하고 신학문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서양의 사회진화론·계몽사상·과학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정약용과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들을 높이 평가했으며, 중국의 경우는 량치차오[梁啓超]의 주장이 중국을 구하는 방책이라고 이를 소개했다. 유교에 대해서도 제왕(帝王)의 편에만 서고 민중을 등한시한 지리한만(支離汗漫)한 주자학이 아니라 간이직절(簡易直截)한 양명학(陽明學)으로 개혁해 새로운 시대의 신학문에 적용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상 전환을 겪으면서 1906년 이후 광범위한 부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 3월 장지연·윤효정·윤치호 등이 대한자강회를 창립하자 가입해 활동하면서 〈대한자강회월보〉에 많은 애국계몽 논설들을 발표했다. 10월에는 신석하(申錫廈)·김달하(金達河)·김병도(金秉燾) 등과 함께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해 평의원(評議員)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서우 西友〉의 주필을 맡아 국민을 계몽했다. 이당시 계몽사상의 교육을 위해 학교설립과 함께 사범(師範) 양성이 긴급함을 절감하고 1907년 1월 서우학회 산하에 사범속성과(師範速成科) 야학교(夜學校)를 설립해 25~40세의 청년들을 모집하고 애국적 교사들을 양성했다. 1907년 2월 지석영 등이 국문연구회를 조직하자 주시경·양기탁·유일선(柳一宣)·이종일(李鍾一) 등과 함께 연구원으로 참가해, 전국민교육·의무교육 실시와 이를 위한 한글전용 교육을 주장했다. 1907년 4월 양기탁·안창호·이동휘 등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창단하자 여기에 가입해 주로 교육·출판 부문에서 활동했다. 1908년 1월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우학회가 이준·이동휘 등이 조직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되어 서북학회(西北學會)로 창립되자 기관지인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직접 잡지를 편집하고 다수의 애국계몽 논설을 게재했다. 또한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와 오성학교를 설립해 교장이 되었다. 일제가 친일유교단체인 대동학회(大東學會)를 내세워 유림계 전체를 친일화하려 하자 1909년 9월 이범규(李範圭)·장지연 등과 함께 대동사상과 양명학에 입각해 유교를 개혁함으로써 유림계와 유교문화를 국권회복운동에 동원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교(大東敎)를 창시했다. 1909년 제왕 중심의 지배자 철학인 유교를 공자의 대동주의와 맹자의 민본주의로 환원시켜 민중 중심의 유교로 개신해야 하며, 유교도 불교·기독교처럼 전도 특히 민중의 교화에 힘을 써, 주자학이 아니라 양명학으로 후진을 가르쳐야 한다는 〈유교구신론 儒敎求新論〉을 지었으며, 1910년에는 양명학으로 유교를 개혁하기 위해 〈왕양명실기 王陽明實記〉를 저술했다. 또한 민족 고전을 간행하고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 유근·최남선 등과 함께 광문회(光文會)를 조직했다. 한편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하면서도 의병전쟁을 비판하지 않고 '연무제진'(聯武齊進)이라 해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연계(聯繫)해 나란히 전진시킬 것을 주장했다. 당시의 의병운동을 최고의 애국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과 백성들을 한국의 인물로 소개해 간접적으로 의병운동을 지지하고 고취했다. *[망명 및 독립운동] -그는 한일합병과 동시에 여러 언론기관이 문을 닫고 모든 국사 서적이 압수되자 "국체(國體)는 수망(雖亡)이나 국혼(國魂)이 불멸(不滅)하면 부활(復活)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국사책(國史冊)마저 분멸(焚滅)하니 통탄불이(痛嘆不已)라", "일언일자(一言一字)의 자유가 없으니 오로지 해외로 나가서 사천년 문헌을 모아 편찬하는 것이 오족(吾族)의 국혼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하며 망명을 계획했다. 1911년 3월 부인 연안이씨가 병으로 죽은 뒤, 4월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 환인현(桓仁縣) 흥도천(興道川)으로 가서 대종교(大倧敎) 신도로서 후에 제3대 교주를 지낸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머물렀다. 이때 대종교 신도가 되고 직접 만주 고토(故土)의 고대사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한국고대사와 관련된 〈동명성왕실기〉·〈발해태조건국지〉·〈몽견금태조 夢見金太祖〉·〈명림답부전〉·〈천개소문전〉·〈대동고대사론〉 등을 저술했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1912년 3월부터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가들과 중국인 지사를 만나 독립운동의 방법을 협의했다. 이해 7월 상하이에서 신규식(申圭植)·홍명희(洪命熹) 등과 함꼐 교민의 상조단체인 동제사(同齊社)를 조직해 총재로 추대되고, 교민자제의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했다. 1914년 5월 중국인 친우들의 요청으로 홍콩의 잡지 〈향강 香江〉의 주간을 맡았으나, 4호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독재를 비판하다가 폐간되었다. 다시 상하이로 가서 캉유웨이[康有爲]의 부탁으로 〈국시일보 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으나, 이 신문도 곧 폐간되고 말았다. 이때 대원군 집정에서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도입해 저술한 〈한국통사 韓國痛史〉를 완성했다. 〈한국통사〉는 해외의 한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 독립운동을 고취했으며 국내에도 비밀리에 보급되었다. 1915년 3월 상하이에서 이상설(李相卨)·신규식(申圭植)·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독립전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단체로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고, 취지서(趣旨書)와 규칙을 만들었으며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후 다시 상하이에서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1918년 러시아령 교민들의 요청으로 송왕령(宋王嶺)으로 가서 쌍성자(雙城子)에 머물며 〈한족공보 韓族公報〉의 주간이 되었으나, 곧 폐간되자 러시아령에 머물면서 〈발해사〉와 〈금사 金史〉를 한글로 역술하고, 〈이준전 李儁傳〉을 썼다.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자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해 그 지도자가 되었다. 노인동맹단은 조직된 지 불과 수개월 만에 단원이 수천 명이 되었고, 대표 5인을 서울에 파견해 강우규(姜宇奎)의 일제총독 사이토[齋藤實] 폭탄투하사건, 이발(李發)의 자결사건 등을 일으켰다. 1919년 8월 상하이로 돌아온 뒤에는 원로로서 뒤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지원하면서,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전투까지의 한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집필을 시작해 1920년 12월 간행했다. 〈한국통사〉가 한국인들에게 '지통심'(知痛心)을 자각케 해 구국의 정신을 결정(結晶)해 내어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지통심을 혈투로 전환시켜 실전(實戰)과 행동을 직접적으로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뒤에도 임정을 적극 후원하면서,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뒤에서 신한청년단의 기관지인 〈신한청년보〉의 주간과 〈사민보 四民報〉·〈구국일보 救國日報〉의 주필로 활동하는 한편 상하이 거류민단의 활동을 지도했다. *[임시정부활동] -상해 임시정부 내에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사실 등을 비롯해사상·운동노선·지방색 등의 여러 문제들로 내부 분열이 격화되기 시작하자, 1921년 2월 독림운동노선의 통일과 임시정부의 개조에 의한 강화를 목적으로 원세훈(元世勳) 등 13명과 함께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내고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요구했다. 이 제의는 베이징[北京]의 박용만·신숙·신채호 등의 북경군사통일회와 만주 및 러시아령의 독립운동가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어,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임시정부에 대한 창조파·개조파·중립파·임정고수파 등으로 분열되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하자, 〈독립신문〉을 지속하기 위해 1924년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1924년 6월 임시정부 의정원이 이승만대통령유고안을 통과시킨 다음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하자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이를 수락했다. 1925년 3월 21일 임시정부 분쟁의 원인이었던 위임통치청원과 구미위원부 자금의 자의적 사용, 한인사회 파쟁 선동 등의 책임을 물어 임시대통령이승만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3월 23일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고, 24일 의정원에서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3월 30일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신설해 국무령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책임제로 바꾼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했고, 개정된 신헌법 하에서 7월 이상룡(李相龍)을 국무령으로 추천해 선출하게 한다음,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병석을 지키고 있던 안공근(安恭根)에게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운동으로 해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고,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疏)의 별이 없어야 된다"는 동포에게 드리는 유촉(遺囑)을 남겼다. 1925년 11월 1일 67세를 일기로 죽자, 11월 4일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이 치러졌으며, 유해는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공동묘지 600번지에 안치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혼사관(魂史觀)]-그의 대표적 저작인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역사적 사실의 발달과정을 인과관계의 면에서 분석·비판·종합해가는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통해 일제의 침략과정을 폭로한 것으로 국민들이 이 책을 읽고 민족정신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서술한 것이었다. 그는 국가가 유지되는 데 있어서는 국교·국학·국어·국문·국사 등 내면적·정신적인 혼(魂)과 전곡(錢穀)·졸승(卒乘)·성지(城池)·선함(船艦)·기계(機械) 등 외형적·물질적인 백(魄)이 필요한데, 혼이 따르지 아니하면 백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민족이나 국가의 혼은 특히 그 나라의 역사에 담기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가 존재하는 것에는 국혼이 존재하고 국사가 존속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고유의 종교·역사·언문·풍속 등 국혼이 멸하지 않으면 비록 한때 열강에 병합되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 민족은 인재의 배출, 문물의 제작에서 다른 민족보다 훨씬 뛰어나며, 한국 문화는 일본보다 선진의 위치에 있으며, 한국의 국혼은 강해 결코 일본에게 동화될 수 없다고 했다. 독립투쟁, 특히 거족적인 3·1운동을 통해 이러한 확신은 더욱 확고해졌으며 당시 일제는 대륙침략 정책으로 중국민족과 러시아 국민, 세계 민의(民意)의 적(敵)이 되어 있으므로 일제의 패망과 함께 우리 민족의 광복이 반드시 있을 것으로 예견했다. 요컨대 박은식은 민족사를 통해서 민족혼을 진작하고, 이 민족혼의 유지 속에 민족의 독립을 전취하려 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박은식)] - 박은식전서 : 박은식,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75 / 이야기 인물한국사 1 : 이이화, 한길사, 1993 / 백암 박은식의 교육사상과 민족주의 : 김효선, 대왕사, 1989 / 박은식의 사회사상연구 : 신용하, 문화연구소, 1982 / 박은식 : 이만열, 한길사, 1980
나라사랑 8-백암 박은식선생 특집호 : 외솔회, 1972 / 백암 박은식의 역사의식-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중심으로 〈한국사학논총 하-박영석 화갑〉 : 윤병희,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2 / 박은식의 생애와 학문-그의 유교개혁운동을 중심으로 〈산운사학〉 2 : 유준기, 산운학술문화재단, 1988 / 백암 박은식의 사상적 변천과정-대동사상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114 : 김기승, 역사학회, 1987 / 박은식의 신민론-'몽배김태조'를 중심으로 〈경희사학〉 9·10 : 김흥수, 경희대학교 사학회, 1982 / 백암 박은식의 생애와 사상 〈한국근대역사학의 발달〉 : 이만열, 문학과지성사, 1981 / 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의 성립 〈한국현대사 6〉 : 김용섭, 신구문화사, 1970 (출처: http://cyberspacei.com/jesusi/inlight/religion/korean/daejong/parkeunsik.htm)
▶1931 동아일보사, 월간지 <신동아新東亞> 창간, *1931년 11월 1일 창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간 당시의 사장은 송진우(宋鎭禹), 편집 겸 발행인은 양원모(梁源模), 주간은 주요섭(朱耀燮), 발행사는 동아일보사였다. 창간 당시에는 4·6배판, 120면으로 발행되었으나 1936년 5월호부터 국판, 350면 내외로 증면 발행되었다. 창간호에서 `조선민족의 전도(前途)의 대경륜을 제시하는 전람회요, 토의장이요, 온양소`라고 하였고,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민족주의 표방,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 제창 등을 3대 근본취지로 내세웠다. 이 잡지의 창간을 계기로 조선일보사의 《조광》 《여성》, 조선중앙일보사의 《중앙》 등의 잡지가 창간되어 이른바 '신문잡지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정치·경제·사회·학술·문예·과학·운동·연예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특히 국내외 정세를 해설·비판하여 일제와 간접적인 투쟁을 벌였다. 1936년 8월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압수되면서 통권 59호로 폐간되었다가 1964년 9월 복간되었다. 복간 당시의 발행인은 김상만(金相万), 편집인은 고재욱(高在旭), 주간은 천관우(千寬宇)였다. 복간 초기에 유주현의 대하소설 《조선총독부》를 연재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논픽션 현상모집은 한국문학에서 논픽션이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밖에 연초부록으로 《한국의 명저 100권》 등을 내놓았다. 독일의 《슈피겔》, 프랑스의 《렉스프레스》 등의 종합 주간지와 독점계약을 맺고 있다. 1936년 폐간당한 이후 약 28년간 공백기가 있었지만, 창간 이후 70년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 잡지사상 가장 오래된 종합 잡지이다. 2001년 5월호로 지령 500호를 맞고 있다. (두산백과)
▶1931 개성박물관 개관
▶1934 부산-장춘간 직통열차운행개시
▶1935 나진항 개항
▶1935 남아프리카공화국 골프선수 게리 플레이어(1935- ) 출생
▶1939 외국인 입국체재 및 퇴거령 공포
▶1945 북한 <노동신문>의 전신 <정로正路)> 창간
▶1948 중국 상선, 남만주해에서 폭발, 침몰로 6천여명 사망
▶1948 여순반란사건 반도 89명 사형집행
▶1949 서울-부산간 민간항공취항(운임 1만100원)
▶1949 방송청취료 300원으로 인상
▶1950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즈> 창간
▶1952 미국, 태평양 마셜제도(에니웨톡도서)에서 세계최초로 수소폭탄 실험
▶1954 호남선에 특급열차 태극호 등장
▶1954 알제리 독립을 요구하며 7명의 프랑스인 살해, 알제리아 독립전쟁 시작
▶1956 소련군, 헝가리 침공
▶1956 영국-프랑스군, 수에즈운하 폭격
▶1956 오스트리아, 영국-프랑스와 단교
▶1956 국내 최초 TV방송국 HLKZ-TV 정규방송
▶1958 교원윤리강령 선포
▶1960 인도네시아, 석유 산업 국유화를 발표
▶1960 서울대생들, 민족통일연맹-장면총리 미소방문-남북학생회담등 주장
▶1961 알제리서 혁명7개군 데모
▶1961 군경유자녀보호법 공포
▶1962 소련, 화성에 로케트발사 성공
▶1963 베트남 군부쿠데타(1차)로 정반민 장군 집권(2일 고딘디엠 대통령 피살)
▶1963 부산 수산센터(종합어시장) 개장
▶1964 월맹게릴라, 월남 美공군기지 습격, 사상 56명, B57기 27기 파손
▶1966 문화예술 종합 월간지 <공간空間> 창간, *1966년 11월 건축가 김수근이 창간한 예술·건축 종합잡지이다. 1999년 7월 16일 윤석화가 예음문화재단으로부터 인수하였다 예술·건축 종합잡지로는 우리나라 최장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예술·환경·건축의 문제에 대한 전통과 역사를 되새기며, 한국인이 더욱 한국을 알도록 하고 현대의 상황을 기록, 정리, 비평하며 바람직하게 있어야 할 미래를 지향한다.’는 기치 아래 전통 문화의 재발견과 계승 및 현대의 예술 활동 전반에 대해 논평,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1975년 제100호 발간을 계기로 공간미술대상을 제정, 시상하고 있다. 그밖에도 공간국제판화대상, 공간학생건축상, 공간학생예술논문상, 공간학생환경논문상 등을 실시하여 우리나라 예술·건축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두산백과)
▶1966 잡지의 날 제정, *1965년 10월 20일 사단법인 한국잡지발행인협회(현 한국잡지협회)가 1908년 11월 1일 최남선(崔南善)이 《소년(少年)》지를 창간한 날을 기념하여 정한 날. 11월 1일. '국민 계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선인들의 행적을 새롭게 기억하고, 앞으로 더 나은 잡지를 만들어서 건전한 언론의 구실을 다할 것'을 다짐하여 제정하였다. 이날은 해마다 한국잡지협회와 한국잡지기자협회의 공동 주관으로 기념식을 거행하고, 잡지문화 발전에 기여한 유공자에게 잡지문화상을 준다. (두산백과)
▶1970 프랑스 크레노블 무도회장에 화재. 145명 사망
▶1971 인도 뱅골만에 해일로 2만여명 사망
▶1973 김용식 외무장관, 김대중 사건에 관한 한일간의 종결 조치 발표
▶1977 미국, 국제노동기구(ILO)의 탈퇴를 통고
▶1978 미국, 긴급 달러보호책 발표
▶1980 국무총리 직속 사회정화위원회 발족
▶1980 문교부, 중학교 의무교육 실시 결정
▶1980 전국 인구-주택 센서스 실시
▶1981 언론인 유광열 사망
▶1981 정부, 앤타카 앤드 바부다와 외교관계 수립
▶1981 정부, 국무총리 직속기관으로 사회정화위원회 설치
▶1982 한울회사건 고-대법원 핑퐁판결
▶1982 인도- 파키스탄 뉴델리서 정상회담
▶1983 새주민등록증 발급 개시
▶1983 미국 신형토마호크 미사일 영국 도착
▶1983 미해병, 그레나다 철수
▶1985 국군보안사령부, 5개 간첩망 16명 검거 발표
▶1986 광주시, 직할시로 승격
▶1987 1973년 10월 10일 해체됐던 해병대사령부 재창설
▶1988 경북 월성 원전서 중수 누출사고 발생
▶1988 서울시 인구 1천28만6천5백3명 기록
▶1988 외환보유-송금 자유화
▶1989 정부, 폴란드와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합의
▶1990 국무회의, 국군의 날, 한글날의 공휴일 제외 및 익일 휴무제 폐지 의결
▶1990 서울지법 남부지원, 보안사 강요 1980년 통폐합 무효 판결
▶1991 국세청,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일가에 1,361억 원 세금 부과 결정
▶1991 <문화일보文化日報, The Munhwa Ilbo]> 창간, *1991년 11월 1일 창간한 중앙 종합 일간신문이다. 주당 발행면수는 184면이며, 석간으로 발행한다. 지역별로 중앙에서 77%, 지방에서 23% 판매되고 있으며, 국내 380개소의 보급망을 두고 있다.주식회사의 형태로 납입자본금은 538억이며 주요주주는 문우언론재단, 동양문화재단이다. 2001년 현재 김정국이 대표이사 사장으로 있으며, 총 529명의 임직원이 종사하고 있다. 2개소에 전광판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자신문과 유료 인물 데이터베이스를 서비스한다. 사옥은 서울 중구 충정로1가에 있다. (두산백과)
▶1992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해온 마포구 성산동 다미선교회 교단 해체, 전국 92개 지부 자율운영에 맡기고 교인을 원래 교회로 복귀시키기로 결의
▶1993 유럽의 정치. 경제 통합에 관한 마스트리히트 조약 발효.
▶유엔총회,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대북한 핵사찰 결의안 가결(140대 1, 기권 9)
▶1997 해태그룹 화의 신청
▶1999 김우중 대우그룹회장, 계열사 사장단 14명과 동반 사퇴
▶2000 유고연방 189번째 회원국으로 유엔 가입
▶2001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을 합병한 새 '국민은행' 출범
▶2001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김병현, 한국인으로 첫 월드시리즈 진출
▶2002 전자정부 개통, 민원서류 인터넷 신청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