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1637년 항복하니 그 피해는 조선의 아녀자에게 가장 피해가 컸다. 그 잘난 사대부들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우다가 청나라의 군사앞에 여지없이 무능하였다.
청나라에 항복하니 이때 30만명에서 최대 70만명의 사람들이 인질 또는 포로로 붙잡여 갔다.정확한 숫자도 모르고 대충 그 정도로 짐작하고 있다. 그 중에는 사대부가의 아녀자도 있었다.
오직하면 효종의 비 인선왕후 장씨의 친정 올케까지 오랑케에게 포로가 되어 붙잡혀 갔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문제는 몇년 후에 잡혀간 사람들이 일부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들을 還鄕女라고 부른다. 사대부가에서 이들을 받아주지 않는데서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갈곳없이 떠도는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조정에서 논의를 하였는데 모두다 말을 못하고 있을때 오랑케 앞잡이라고 욕을 먹으며 청나라와 화의를 하여 난국을 수습한 최명길(崔鳴吉)이 앞장을 섰다.그가 왕에게 아뢰기를 "나라를 지키지 못해 붙들여 간 것이 어찌 아녀자의 잘못이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단 한날 한시에 나라에서 정한 강물에 묙욕을 하도록 하여 몸을 깨끗이 씻도록 한 후 각 가정으로 돌아가게 하면 사대부들은 이들을 맞이하도록 어명으로 정하는 것이 올은 일이 라고 생각됩니다."
얼마나 현명한 판단인가.최명길, 그는 전주 崔씨로 국난을 만나 일신의 명예를 버리고 국가와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선비였다.
이 때 국가에서 지정한 강은 대동강,임진강,소양강,한강.금강이였는데 이강을 洗節江이라고 불렀다.
과연 아녀자들이 가정으로 돌아가 전과같이 안방을 차지하며 살았을까? 한 많은 생을 뒷방에서 눈치를 보며 보내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여물(金汝물) 그는 순천 김씨로 1548년에 태어나서 1592년에 신립장군의 부장으로 임명되어 천혜의 요지 문경 조령을 지키자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드려 지지 않았으며 결국 배수진을 친 탄금대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렇게 김여물은 임진왜란때 순절하였는데 38년 뒤 병자호란때는 안타깝게도 그의 후처와 며느리 등 4대가 자살하여 절개를 지켜야 했다.
그의 후처 평산 신씨, 아들 김류의 처 진주류씨, 손자 김경징의 처 고령박씨,증손자 김진표의 처 진주정씨는 오랑케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한꺼번에 자결했다. 아내, 며느리, 손자며느리, 증손자며느리까지 4대가 한꺼번에 강화도에서 몸을 던진 것이다.
김류는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킨 선봉장이였다.대대로 무인의 기풍을 이은 집안이였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정문을 내려주었는데 이를 4세충렬문이라 부른다.
현재 경기도 안산에 있으며 건물 안은 두 칸으로 나뉘어 오른 칸에는 김여물의 충신 정문이 있고 왼쪽 칸에 4대 열녀 정문이 있다.
(사세충열문)
(김여물 장군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