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하나님의 언약과 공 예배
1.서론
우리 시대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 행위는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나아가 다수의 현대교회들은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예배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순종의 행위이며, 인간들의 즐거움을 위한 종교적 축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를 위해서는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치중해서는 안된다. 올바르고 참된 예배에 대한 승인은 인간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예배 가운데는 하나님의 언약적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즉 인간들의 정성이나 자기 취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요구된다. 죄로 가득찬 인간의 정성은 그것 자체로서 예배를 위한 기본 바탕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예배의 중심 자리에 인간들의 취향이 가미된 종교행위 자체가 두드러지거나 인간적인 목적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있어서는 안된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적 공간이나 예배시간 자체를 화려하게 꾸미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그것은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인간들 자신의 종교적 만족을 꾀하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그와 동일한 관점에서 즐거워할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들은 노래 가락과 춤사위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들이 꽃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그런 것들을 좋아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한분만을 기쁨의 대상으로 인정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화목제물로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성도가 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인간적인 결단이나 정성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때문이다.
매주일 하나님께 공 예배를 드릴 때 요구되는 중요한 외형적 요소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의 경건한 자세이다. 그것은 성경의 직접적인 교훈을 배경으로 한다. 각종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개발된 종교적 요소들을 첨가하는 것은 인간들의 죄악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교훈하고 있는바 의미들을 살펴 그에 기초하여 올바르게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애써야 한다.
2.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오해를 했던 예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 했다. 그러나 무지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요구를 뒤로 한 채 자신들의 인간적인 열정과 정성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다. 우리는 비신앙적인 그런 사건들을 면밀히 살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음으로써 그와 같은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 시내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경배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있었던 여러 재앙들을 직접 경험했으며 홍해바다를 기적적으로 건넜다. 그리고 그들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바라보는 가운데 살았다. 나아가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계심을 확인하며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이 아니라 저들의 판단과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며 증오하시는지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해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르셨다. 모세가 시내산 위로 올라간 후 백성들은 산 아래서 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저들이 예상하던 시기가 되어도 모세가 돌아오지 않자 조급증이 생겨났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의 판단과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준비를 했다.
"백성은,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으니, 아론에게로 몰려가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론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의 아내와 아들 딸들이 귀에 달고 있는 금고리들을 빼서, 나에게 가져 오시오." 모든 백성이 저희 귀에 단 금고리들을 빼서, 아론에게 가져 왔다.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 하고 선포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있다.""(출32:1-8)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의 핵심에는, 저들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데 모세가 늦게 내려옴으로 말미암아 그 일이 중단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심중에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자 하는 열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열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조급증으로 인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모세보다 훨씬 헌신적이며 화려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했다. 이는 그동안 율법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행하던 경배방법에 대한 불만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백성의 장로들은 모세 다음의 지도자 위치에 있던 아론을 찾아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으니 가장 화려한 방법을 동원해 하나님을 경배하자고 제안했다.
아론은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금붙이들을 가지고 오도록 했다. 아론 역시 장로들의 판단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할 때 애굽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금붙이들이 많이 있었다.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신앙행위라 선전했을 것이 분명하다. 무지한 백성들은 아론과 장로들의 요구에 따라 그대로 순종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론은 그 금붙이들을 모아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야 할 바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금으로 된 우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지금까지 저들을 인도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가시적인 방편으로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백성들은 그런 가시적인 형상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금송아지를 다 만들고 난 아론은, 그 이튿날을 ‘여호와의 절일’로 선포했다. 여호와의 절일로 선포된 당일이 되자 백성들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축제를 벌였다. 저들의 마음이 매우 즐거웠을 것은 틀림없다. 자기들이 바친 금붙이로 만든 가시적인 형상을 가진 금송아지 앞에서 번제와 축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저들의 마음이 전혀 거짓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원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금붙이를 바치고 하나님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하나님은 마땅히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판단과 취향에 따라 종교적 축제를 벌였던 것이다.
저들에게 종교적인 기쁨과 만족이 충만했던 것과는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자기를 버리고 악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산에서 내려가 그들이 만든 우상을 파괴하도록 명령하셨다. 물론 모세는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산 아래서는 백성들이 잘못된 경배행위를 하며 종교적 만족에 취해있을 때 산위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증스럽게 보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당시의 신앙적인 또 다른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그것은 아론과 백성의 장로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방편으로 집에 있는 금붙이들을 가져와 바치도록 요구했을 때 그에 순종하는 것이 과연 옳은 신앙자세였던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숙한 성도라면 그들의 요구에 저항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모든 백성들이 기쁨으로 금붙이들을 바칠 때 그에 거부하는 자들이 있었다면 저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함께 상당한 갈등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을 것이다.
우리는 앞에 소개된 출애굽기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냉철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들의 결단이나 취향에 따른 종교행위인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참된 예배인지 분명한 검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를 즐거워하고 만족스러워하는 것은 자칫 가증스런 종교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신약시대의 예배
우리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기 위해 사도교회 시대의 예배 형태를 주의 깊게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의 몸이 지성소에 바쳐졌음이 입증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의 십자가 사역 이후에도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가 여전히 살아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물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서 의미는 완성되었지만, 성전의 구속사적인 의미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으며(행2:46), 베드로와 요한은 정해진 시간에 성전을 방문했다(행3:1).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기도 했다(행21:26).
이러한 사실은, 사도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언약적 의미를 기억하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전 세계의 이방지역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 역시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예루살렘 성전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 본질적인 의미와 더불어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누가(Luke)는 사도행전에서 예배와 연관된 사도교회 시대 성도들의 모습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 날에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행2:41-47)
이 본문에서 ‘성전에서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46) 라고 기록된 부분의 ‘성전’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며 ‘집’이란 예배를 위해 특별히 모이는 성도들의 가옥으로써 오늘날의 예배당을 뜻한다. 사도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였던 것은 정례적인 집회를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도리어 성도들이 때에 따라 성전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집’에서 모인 것은 예배를 위한 모임이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독립건물로서 예배당은 없었다. 성도들은 약속된 성도의 집에 모여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여기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말은 성찬의 나눔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찬미했다’는 의미는 성경에 기록된 언약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미했을까? 오늘날 우리처럼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을까? 그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하신 구원 사역이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임을 고백적으로 노래했던 것이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말씀을 나누며 기억했을 것이며, 그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인해 시편을 통해 하나님을 노래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운데 공유적인 삶을 나누었던 것이다. 또한 본문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세례 받은 성도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온전히 힘썼음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는 단순한 교육차원이 아니라 교회에서 그것이 지속적으로 선포되고 상속되어 가야 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주 구약성경의 내용과 사도들의 가르침이 지속적으로 선포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나누며 온전한 기도에 힘썼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오늘날 우리시대에 만연한 개인 혹은 집단적인 욕망 채우기로 변질된 기도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기도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이 세상을 포기하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그 안에서 살고자 하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한다.
사도교회 시대에 성도들을 통한 많은 이적들이 일어났던 것은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음과 연관된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종료되기 전이었던 사도교회 시대에는 다양한 계시적 간섭이 존재했다. 일반 성도들은 사도들을 통한 모든 이적들과 가르침들을 배경으로 하여 올바른 예배를 드렸을 때 저들의 신앙적인 삶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그렇게 했을 때 교회의 칭찬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사도교회 시대의 공 예배는 직분과 더불어 점차 안정된 형태로 발전해 갔다. 사도들의 수가 줄어들고 교회의 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안정된 공 예배의 형태가 점진적으로 갖추어져 갔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에 대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교회로 모여 떡을 떼며(고전11:18-34), 찬송시(讚頌詩)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며 다양한 은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여기서 우리는 사도교회 시대의 예배절차와 내용에 관한 것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절차와 질서가 있었다. 즉 무질서하게 생각나는 대로 행동했던 것이 아니라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질서 있게 예배가 진행되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예배절차 역시 성경에 기록된 사도교회 성도들의 본을 따라 정해진 것이다. 이는 직분의 기능과 더불어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예배의 근본적인 배경이 된다.
4. 보편교회 시대의 예배
AD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사도교회 시대가 끝이 나고 보편교회 시대가 도래했다. 이때는 신구약 성경 66권이 완성되고 모든 계시적 은사들이 종료되었다. 그러므로 예배의 형식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어 갔다.
사도교회의 예배 시에 있었던 모든 절차들 가운데 특별은사와 연관된 내용들은 말씀과 성령으로 통합되었다. 사도교회에 있었던 예언, 방언, 통역의 은사 등이 더 이상 예배 절차 가운데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즉 보편교회 시대의 예배에서는 말씀선포, 성찬, 기도, 시편찬송, 언약에 대한 상속의 확인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보편교회의 예배 가운데는 구약시대의 모든 예배와 사도교회 시대 예배의 의미가 총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성전예배와 절기예배, 안식일을 통한 상시적 예배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사도교회 시대의 특별 은사적인 예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예배와 관련된 모든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의 공 예배 가운데 드러나게 된 것이다.
보편교회 시대의 예배는 오로지 성경과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다. 이는 단순히 관념적인 말이 아니다. 교회는 성경과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배를 드려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가운데서 매주일 되풀이되는 공 예배를 통해 역사적 교회의 상속을 이어가게 된다. 즉 매주일 행해지는 공 예배를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역사 가운데 상속되어 가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항상 말씀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세속적인 가치로 인해 예배가 오염되는 것을 정신 차려 방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교회에는 유년주일학교, 소년부, 청년부, 장년부 등의 각종 교육기관들이 있다.
교회의 교육기관은 단순히 기독교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리고 비슷한 연령 대에 있는 교인들을 따로 모아 종교적인 분위기를 활성화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교회에 교육기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 올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주일 공 예배에 참여해야할 의무가 있다. 다른 교육기관이나 각종 부서들의 모임은 원리적으로 보아 예배 모임이 아니라 교육을 위한 모임들이다.
특히 한국교회의 유년주일학교나 중고대학생들의 모임이 마치 예배모임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한 모임은 예배모임이 아니라 올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말씀을 공부하는 교육적인 모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것으로서 예배를 대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적으로 시정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인 집회인 수요모임이나 금요모임, 새벽기도 모임 등 역시 주일 공 예배에 연관되어 있다. 그런 모임들은 교회의 공 예배 모임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성도들이 교회적인 약속에 따라 기도회를 가지고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신앙적인 삶들은 근본적으로 참다운 공 예배를 위한 목적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매주일 시행되는 교회의 공 예배에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거기에는 나이어린 영아들과 유아들 뿐 아니라 태중에 있는 아이들도 참여해야 한다. 저들이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는 자들로 인정된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아가 유년주일학교를 비롯한 그 보다 높은 연령 대에 속한 모든 학생들도 마땅히 어른들과 더불어 진지한 자세로 공 예배에 참여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것을 위해 성도들은 주일학교에서 말씀을 익히며 별도의 모임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피게 된다. 즉 그런 모든 모임들을 통해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법을 배워 익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예외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성찬의 의미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5. 예배의 절차 및 내용
(1) 주일 공 예배 시작 전 예배당에서의 개별 기도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일반적으로 예배당에 들어가면 일단 자리를 잡고 앉아 기도를 한다. 단순한 형식에 빠진 습관적 행위가 아니라면 좋은 전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형식적인 종교 행위에 머물고 만다면 그것은 도리어 위험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예배당에서 개별적인 기도를 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그냥 혼자 예배당을 방문했을 때 먼저 기도를 하고 그 다음의 활동을 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예배당에서 어떤 모임이 있을 때 도착하자 말자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수요모임이나 새벽기도 모임, 금요 모임 등 모든 모임들을 포함한다.
셋째는 주일 공 예배를 위해 예배당에 갔을 때 도착하자 말자 하는 기도이다.
앞의 두 경우는 자신에게 연관된 일반적인 기도와 그 날 모임의 의미를 기억하며 기도하게 된다. 그렇지만 공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예배당에 왔을 때 기도하는 것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즉 주일 공 예배에 참여하기 위한 기도는 예배 공동체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특별한 기도가 요구된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각기 다른 다양한 형편에 놓여있다. 그들 가운데는 소위 세상에서 성공한 것으로 인정받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해 어려운 생활을 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고등 교육을 받아 학식 있는 자들도 있으며 전혀 그렇지 못한 성도들도 있다. 또한 건강하고 부유한 삶을 누리는 자들이 있는 반면 병약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이들도 없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각기 다른 형편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외형을 보고 서로 간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는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류의 차등이나 높낮이가 없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공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예배당에 들어온 성도가 조용히 앉아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영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동일한 ‘흰 옷’을 입은 자들로서 더 이상 세상의 지위와 능력에 전혀 구애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전 각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벗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으로 옷 입는 고백적인 기도여야 한다.
(2) 장로의 대표기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언약적 공 예배 시간에 이루어지는 장로의 대표기도는 성도들의 일반적인 기도와 그 성격이 다르다. 그 기도는 예전(liturgy)에 속한다. 공 예배 시간의 공적인 기도는 개인이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공 예배에서 대표기도를 하는 장로는 한 주간 동안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할 교회와 성도들을 기억하는 가운데 기도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 기도의 내용을 정리해서 공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할 수만 있으면 글로 적어서 준비한 기도의 내용을 교회 앞에서 읽음으로서 흐트러짐 없이 기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소위 기도에 능숙한 모습으로 보이는,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혹은 관습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도리어 조심스러운 것이다.
예배시간에 장로가 기도하는 것은 목사의 말씀선포와 그에 적용되는 성도들의 삶과 직접 연관된다. 따라서 장로는 목사가 선포하는 말씀에 온전히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성도들이 그 말씀을 좇아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감독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장로들이 성도의 가정을 심방하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 예배 시간에 이루어지는 장로의 대표기도는 그에 직접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3) 시편찬송
공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은 예배 중 성경에 기록된 시편들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자기를 찬양할 수 있는 방편으로서 다양한 시편의 말씀들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공 예배 시간에는 시편으로 노래해야 하며 그 범주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노래라고 하면 우선 음악과 악기 및 가락을 머리에 떠올린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노래란 종교적 음악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시를 일컫는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인간들의 노래 가락을 좋아하시는 분으로 단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세상의 유명한 가수들의 아름다운 음성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예술 중 음악과 악기 연주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랫말이 인간들의 두뇌에서 나온 창작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죄에 빠진 인간들이 창안하고 지어낸 것들은 어떤 경우에도 완벽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일반적으로 불려지고 있는 기독교 음악들 가운데는 인간들이 창작한 종교적인 예술작품에 불과한 것들로 가득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신중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들의 언어로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할만한 시작(詩作)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이 살펴보아 어느 정도 괜찮다는 검증만으로 인간들의 종교적 작품들을 예배 찬송에 사용하는 것은 여간 위험하지 않다. 이미 거기에는 타락한 인간들의 편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인간들이 작시한 내용들은 한결같이 긍정적이며 좋은 말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인간들은 자기 판단에 좋아 보이는 내용들을 시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만든 기독교 음악의 가사들 가운데는 사랑과 용서, 축복, 은혜, 자비, 긍휼 등이 주를 이룬다. 즉 증오, 저주, 미움 등을 거리낌 없이 노랫말 속에 온전히 담아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의 기록 가운데는 사랑과 용서 뿐 아니라 미움과 저주가 동시에 선포되고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 뿐 아니라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경배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요구하신 방법에 따라 경배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인간들이 창작한 찬송가에는 인간들의 취향에 따라 한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다.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종교 음악에도 인간들 편에서 좋은 말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선포된 심판과 저주와 증오에 관련된 노랫말들을 인간들 마음대로 함부로 재단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찬송은 원칙적으로 말씀 사역자인 목사가 지도하도록 되어 있다. 즉 찬양대 지휘자나 음악적 재능이 있는 성도가 찬송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성도들에게 찬송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에 ‘음악 목사’를 두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는 교사인 목사가 예배 찬송을 지도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공예배시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이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4) 성찬의 나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영적 임재를 상징하는 성찬은 세례를 근거로 하여 나누어지게 된다. 따라서 세례를 아무렇게 베푸는 행위는 거룩한 성찬을 더럽히는 악행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례 받을 자들에 대한 신중한 문답과 교육과정을 거쳐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교회가 소위 진중세례라는 이름으로 지속적인 성찬의 보장이 없이 군부대(軍部隊)에서 베풀어지는 세례는 극히 위험한 것이다. 세례 받을 자의 구체적인 삶을 지켜보지 않은 채 세례가 베풀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 예배 시간에 나누어지는 성찬은 말씀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가 성례를 집행하게 된다. 선포되는 말씀이 없는 성찬은 결코 있을 수 없으므로 원칙적으로 공 예배 시간에 성찬이 베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성찬은 성도들의 거룩한 교제의 기초가 된다. 성도의 교제란 단순한 친교(fellowship)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의 몸을 배경으로 한 교제(Holy Communion)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찬을 기초로 하지 않은 친교란 일시적인 종교적 인간관계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나 성찬을 통해 형성되는 진정한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공동체를 위한 본질적인 기초가 된다.
(5) 말씀선포
하나님께서는 신구약 성경 66권을 교회 가운데 계시의 말씀으로 주셨다. 공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도들은 목사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다해 귀 기울여 듣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공 예배란 있을 수 없다.
목사가 공 예배 중에 선포하는 말씀은 예언적 성격을 지닌다. 이는 목사가 예언자적 기능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 사역자인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드러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개별 성도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사적으로 깨닫는 것과 다르다. 목사의 공적인 말씀선포는 온 교회가 함께 듣게 되는 공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그에게 남다른 권리가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즉 그에게 설교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이 주어졌으므로 설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목사가 공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은 교회가 그에게 직분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단순히 개인적인 의도에 따라 설교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 역시 자기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즉 목사는 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미리 민감하게 듣고 그에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성찬을 나누면서 집례하는 목사 역시 다른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그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는 자신의 종교적인 의도를 주장하기 위해 성도들에게 호소하거나 설득하려 해서는 안된다. 나아가 성도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해서도 안된다. 목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앞에 그대로 드러낼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달변(達辯)의 오류(誤謬)’에 대한 자각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으로 변형시켜 성도들에게 효과적으로 주지시킬 수 있다면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사여구를 전혀 섞지 않는 눌변(訥辯)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공 예배 가운데 온전히 선포하게 될 때 하나님의 진리가 성도들 가운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들에게 전달하는 사역이다. 즉 ‘엄숙한 말 옮기기의 사역’이다. 남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거나 옮기는 자는 정확하게 그 말을 옮겨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면서 자기 생각을 보태게 되면 그것은 원래 말한 자의 의도를 부풀리거나 축소하게 된다. 따라서 남의 말을 옮기는 자는 정확하게 옮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들에게 전달하여 옮기는 직분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옮기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부풀리거나 축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위험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형편에 따라 지나치게 적용하려는 태도는 주의해야 할 일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모든 성도들이 성경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그 책을 펴놓고 말씀사역자인 목사에 의해 선포되는 말씀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역사 가운데는 15세기 구텐베르그(Gutenberg)에 의해 인쇄술이 발명되고 그로 인해 성경이 인쇄되기 전까지는 개인이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경이 인쇄되기 시작한 후 근래 까지 만해도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는 공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손에 성경책이 들려있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성경책을 직접 읽고 확인할 수 없는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목사가 하는 모든 말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고 믿게 될 것이다.
따라서 건전한 설교라면, 목사가 본문을 통해 선포하는 말씀과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일치되거나 근접해야만 한다. 만일 목사가 설교하는 내용과 본문이 일치하지 않거나 과장되고 축소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설교이다.
교회의 장로들의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는 목사의 설교를 선한 의도로 감독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감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씀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 참여함으로써 목사가 자의로 설교하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을 하게 됨을 의미한다. 즉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들에게 전달하여 옮길 때 온전히 잘 옮기고 있는지 사랑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의 모임인 당회에서 설교 본문을 함께 정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목사가 단독으로 설교 본문을 정하게 되면 개인적인 의도에 따라 설교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설교를 통해 하게 되는 위험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올바른 말씀선포가 이루어지지 않는 교회를 거짓교회라 칭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을 잊어서는 안된다.
(6) 연보
공 예배 시간에 연보를 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에 속한다. 이는 단순히 교회의 재정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만일 교회의 재정을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공 예배 시간에 연보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공 예배 시간에 연보를 하는 것은 그것이 성도들의 삶의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질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세상에 살면서 의식주는 기본 요건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하다. 그것을 얻으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건강과 재능, 기회를 통해서 부지런히 일해야만 한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은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제공받게 되는 것이다.
과거 화폐경제가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도 예배 가운데는 그와 연관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매주일 첫 날에 모일 때 각 성도들의 수입에 따라 연보를 하도록 요구한데서 그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다(고전16:1, 참조). 이는 성도의 삶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임을 말해 주는 고백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공 예배 시간에 연보를 하면서 돈만 내고 삶의 고백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7) 권징사역
한국교회에서는 권징을 징계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권징의 진정한 의미는 권면과 징계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교육(discipline)을 뜻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선생들을 통해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이라기보다 일종의 훈계를 통한 교육을 일컫는다.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보편적인 권징사역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떤 형제가 말씀을 떠나 사고하거나 생활하게 되면 그로부터 돌이키도록 권면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 사이에 성례를 통한 교제가 지속되고 있어야만 한다. 성도들 상호간 서로 긴밀한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권징사역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권징사역의 과정을 거친 징계에 대한 선포는 공 예배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그것은 장로들의 모임인 당회에 의해 검증되어 시행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권징의 시행은 성도들에게 말씀을 떠난 악행이 있을 경우 당회가 그에 대한 논의와 결정을 한 후 공 예배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공 예배 시간에 그런 식의 권징을 시행하는 경우는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 예배 시간에는 권징사역의 의무가 지속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공예배 시간에 권징사역을 시행하고 있는가?
공 예배 시간에 당회에서 주도하여 알리는 소위 ‘광고 시간’은 권징사역의 일환이다. 당회는 성도들의 중요한 일상에 관해 공 예배 시간에 교회의 회중에게 알린다. 즉 성도들이 전반적으로 나태하거나 게으르다고 판단되면 당회는 그에 대한 권면을 하게 된다. 나아가 성도들이 이사를 하거나 개업을 할 경우와 자녀 출산 등 성도들의 가정에 변동사항이 있을 때 당회는 그 사실을 교회에 알린다.
그것을 통해 온 교회는 다른 성도들의 삶을 알게 되며 저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는 성도들의 생활거처와 직업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 대해 서로 간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공 예배 시간의 ‘광고’는 단순한 알림이 아니라 권징사역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8) 축도
공 예배의 마지막에 말씀사역자인 목사가 축도를 한다. 이 축도는 모든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게 맡겨진 사역이다. 이는 목사에게 특권이 주어졌다는 말과는 다르다. 나아가 목사에게 교인들을 위해 복을 빌 수 있는 축복권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말씀 사역자가 공 예배 시간에 축도를 하는 것은 상속의 의미를 지닌다. 교회는 역사 가운데서 미래를 향해 흐르는 강과도 같다. 현재 우리가 한 지 교회를 이루고 있다면 그 교회는 소수의 몇 사람이 설립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상속받은 공동체이다. 따라서 현재적인 교회는 그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만의 교회가 아니라 후손들에게 상속해 주어야 할 신앙 공동체이다.
매주일 말씀사역자인 목사가 공 예배 가운데 축도를 하는 것은 교인들에게 축복해 주는 방편이 아니라 교회가 상속되어 가고 있음을 고백적으로 선포하는 말씀사역이다. 그것은 개별적인 의미가 아니라 전체 교회와 연관된 언약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축도의 의미가 상실되었을 뿐 아니라 남발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많이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모든 집회에서 목사가 축도를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므로 결혼식, 장례식 그리고 개업식 등에서도 축도를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신학교의 개강이나 종강예배에서도 축도를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축도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축도는 세례와 성찬이 베풀어지고 말씀이 선포되며 권징사역이 시행되는 지교회의 공 예배 가운데서 선포되어야 한다. 축도가 주일 공 예배 시간에만 시행되는 것은 교회의 상속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말씀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에서도 일반적으로는 주일 오후나 수요일, 금요일, 새벽기도 모임에서는 축도를 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 많이 해서 좋은 것이라면 그 때도 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교회의 상속을 선포하는 의미를 지닌 축도는 공 예배에서 말씀을 선포한 말씀사역자에 의해 선포되어야 한다. 공 예배에 여러 명의 목사들이 참여했을 경우에는 말씀을 선포한 목사가 축도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 연관되기 때문이다. 공 예배에 두 명 이상의 목사가 참여해, 삼십대 초반의 목사가 공 예배에서 말씀을 선포했다면 그가 축도를 해야 한다. 즉 그 젊은 목사는 설교를 하고 60대의 목사가 축도를 하는 식으로 나누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말씀선포와 마찬가지로 축도를 하는 말씀 사역자 역시 그 축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축도는 교회의 상속을 염두에 두고 행해지는 사역으로서, 그것을 선포하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 권위가 발생한다. 교회는 축도의 의미를 올바르게 깨달아야 하며, 공 예배 가운데 축도가 선포되는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6. 결론
교회의 공 예배를 회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도들의 모든 삶은 공 예배에 그 끈이 매여져 있기 때문이다. 공 예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면 교회가 아무리 외형적 성장을 이루어간다 할지라도 사상누각(沙上樓閣)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공 예배는 개별적이며 자의적인 종교행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숙한 성도들은 자기의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려는 종교적인 태도를 버리게 된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적 반응이어야 한다. 잘못된 인본적인 예배는 인간들에게 만족감을 제공하고 종교적 자부심을 느끼게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도리어 욕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올바른 말씀선포와 성례, 그리고 권징사역의 의미가 결여된 공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진심으로 ‘여호와의 절일’을 선포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욕된 종교행위였을 따름이다. 그들이 가장 귀한 보물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생각하며 모든 정성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우상숭배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아래서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종교적인 즐거움에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산 위에서 진노하셨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성전제사에 종사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역시 그러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생각하며 종교적인 행사에 최선을 기울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독설을 뿜어내셨던 것이다. 그들은 종교적 경배행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급을 기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더러운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이러한 예는 구약시대 제사행위자들 뿐 아니라 신약시대의 교회 역사 가운데서도 수없이 있어왔다. 성경을 통한 충분한 교훈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이제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 시대는 인본주의적 사고가 교회 가운데 넘쳐나는 매우 악한 시대이다. 어린 교인들은 자기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하면서,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종교적 분위기 속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통해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전에 과연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대로 예배가 준비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참된 예배의 목적은 인간들이 즐거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간들이 아무리 즐겁고 만족스러워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상숭배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현대교회에 만연한 세속화된 예배 형태를 극히 경계해야만 한다.
이광호 목사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