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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이번 생生을 기록하기 위한 몇 가지 단어
-신현락 시집 『히말라야 독수리』(북인, 2012)
염 창 권
#. 들어가며
-당신과 나 사이를 이번 생이라 하리라-(「자서」)
신현락 시인과 필자는 20년 지기이다. 둘은 많이 비슷하고 다르다. 가난한 성장기를 보냈으며 나이도 같았다. 같은 대학원 지도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도 했다. 딸들 나이도 같아서 같은 해에 대학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서로 다르다. 그는 선언적이어서 늘 확신에 차 있었으나, 나는 논리적으로 가닥이 잡히지 않아서 우물쭈물했다. 내가 세상의 틈을 찾아 아귀를 맞추려 애쓰고 있을 때, 그는 저만치 벗어나서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그는 노래도 잘 하고 나보다 머리도 좋았다. 시인으로서 태도도 돼 먹었다. 이런 그가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지 못한 것은 세상사에 눈길이 머무르지 않은 탓이다.
이 글에서는 여섯 개의 단어를 징검돌로 놓고, 이를 중심으로 시의 행적行蹟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1. 사경寫經
꽃이 핀다고 하겠다 고요를 이 세상으로 운구하는 바람이라고 하겠다 사랑이라면 어쩌다 꽃 핀 자리에도 구름이 인다고 하겠다 아직 내려놓지 않은 꽃눈 같은 사연은 늦은 겨울과 이른 봄 사이라고 하겠다 나무는 겨울의 쇠약해진 바람을 처음으로 알아본 연둣빛 봄의 입술이라고 하겠다 살과 뼈는 우듬지에 걸린 연처럼 헐거워진 바람의 말이라 하겠다 불꽃은 그리움의 직립이라 하겠다 슬픔이라면 이따금 구름으로 흐른다 하겠다 재가 된 몸의 문자들이 하늘로 이식되는 구름의 사리라 하겠다 사람들은 생의 이전으로 날아가는 시간이라 하였으나 꽃 진 자리에 다시 꽃이 피는 건 구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구름나무 평상 아래 무소유를 다비하는 이 세상의 꽃이라 하겠다.
-「무소유의 사리- 법정 스님의 다비식을 보며」 전문
그의 화법은 독자와의 불화를 야기하는 조건이다. 독자에게 매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존의 직접성을 무차별적으로 제시하기만 한다.
우선 이 시는 의미구성의 단계성을 거부한다. 즉 “대상인식 → 진행 → 의미의 전환 → 결론”과 같은 기승전결의 논리를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다. 무차별적으로 11개의 문장이 나열된다. 물론 앞의 10개 문장은 “구름나무 평상 아래 무소유를 다비하는 이 세상의 꽃이라 하겠다.”에 오기까지의 과정에 해당한다. 다비식은 주체의 “보”는 행위에 의해 언어로 이전되는데, 이 보는 행위는 사유를 매개로 하기보다는 직관적으로 육박하는 느낌을 선언함으로써 발화된다. 즉 이해할만한 어떤 계기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언어 자체가 발화되면서 감각적 상태로 재현되는 것이다. 각 문장이 은유적인 것은 논리화될 만큼의 시간적 간격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겠다.”와 같은 언명은 감각의 즉자성을 나타내면서 의미 결정을 보류 상태로 남겨둔다. 따라서 기표는 기의와의 결합을 포기한 채 다비식의 전 장면을 즉시성을 가진 언어의 상태로 떠돌게 하는 것이다.
티베트 신도들이 마니경을 마니륜(윤장대) 안에 넣고 돌리듯이, 독자는 11개의 문장을 처음도 끝도 없는 고리로 연결하여 읽어 가면 각 문장의 은유가 가져다주는 미묘한 울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비식을 보는 것은 어떤 논리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현존체험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언어화되는 순간 다비식의 의미는 고정되어 화석화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시인의 작업은 사경寫經에 해당하는 것일 텐데, 받아써야 할 경전은 언어의 상태가 아닌 다비식이라는 현존체험의 상태이다. 이때 경전의 필사자는 어떤 의욕에 사로잡힌 의식자가 아니라 언어 자체가 즉자적으로 발설되도록 입을 빌려주는 펜과 같은 도구이어야 한다. 퐁티에 의하면 “발자국들이 몸의 운동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언어는 그 자신의 의미를 전달한다.”고 한다. 풀이하면, 존재하는 언어란 사유를 번역하는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하여 사유를 만들고, 다시 대상과 표현된 언어 간의 공백으로 인해 새로운 표현으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시인의 언어가 극한極限의 양쪽에 걸려 있음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잘못하다간 세상을 걸고넘어지려는 그의 의지 앞에 맞서기 어려워진다. 내가 안다리걸기를 당해봐서 알지만 그의 다리에 걸려 ‘꽈당’ 뒤로 자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의 언어는 지순至純과 극독劇毒의 양자를 걸고넘어진다. 그의 순한 언어의 후면에는 극독의 비애가 배접되어 있으니까,
“발화지점은 추위에 얼어버린 심장을 만져보면 안다/ 재가 되지 않은 극지의 우연이란 없다”(「불타버린 폐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안개를 그 지역의 명물이라고 하는 건 외지인이 지어낸 이야기이다 안개의 지도에서 이역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안개상습지역」),
“화상 입은 모래알처럼 굴러다닌 어떤 생을,/ 상처라 하고, 누구는 출가라고도 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사막이라고 부른다”,(「화두」),
“어떤 만남이든 우연이란 없다 우연한 길도 없다”, “도상에서 초하루를 맞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에서 우연이란 없다”(「그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내, 누구나 할 것 없이/ 막차를 탄 사람들은 아름답다”(「막차를 탄 사람들은 아름답다」)
에서와 같이, 그의 언어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가 얼마나 큰 슬픔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큰 비애를 무기 삼아 나에게 씨름을 하자고 협박을 할 때도 있었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내가 수원에서 살 때 두 번쯤…. 이후로 세월이 흘러, 옛날로 치면 이제는 둘 다 중늙은이가 되었다.
2. 배꼽
인식적 주체의 감각은 언어를 통과하면서 전환(translation)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시인의 문체론적 특성이 드러나게 된다. 대상 세계를 지각하는 시인의 의식은 지각된 내용과 언어가 뒤섞임으로써 구체적인 형상성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인식적 작용 그 자체가 시인의 시 문법이자 이미지의 기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태몽의 별자리를 봉인한 흔적
아득한 생가에 새겨진 첫울음의 인장
배냇저고리의 젖빛 매듭을 풀면
신생의 물방울 쏟아지던 때가 있었다
탄생 이전이 있었으니 처음은 아니지만
탄생 이후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마른 우물의 문장, 복제가 불가능한
인감도장은 누구나 자기의 배꼽을 닮은 것이겠다
배꼽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경건해진다 이별로부터
시작되는 생이라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평생을 울어도 넘어가지 못하는 국경인지 아는 까닭이다
울다가 지쳐 잠이 든 아이의 우물배꼽이 깊다
가끔 별빛만 두레박을 내리고
아득한 생가의 우물에서 차르르차르르
울려 퍼지는 숨결소리 물결소리 퍼올린다
-「우물배꼽」 전문
생가는 세계와의 첫 대면이 이루어지는 피투彼投의 공간이다. 이 생성의 공간을 통해 인연의 매듭을 한 번 더 묶는 새로운 윤회가 시작된다. “배꼽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생성의 의미를 배꼽의 매듭을 통해 거듭 확인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우물배꼽”이라 명명하는 까닭은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듯이 탯줄을 통해 생의 근원인 물길에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인식론적인 기틀은 일정 부분 인연론에 기대고 있는데, 생이 그 이전의 물길을 따라 흘러든 것처럼, 탄생은 그 이전의 생과 이후의 생의 사이에 끼어 있다. 따라서 탄생의 순간에는 “태몽의 별자리를 봉인한 흔적”과 같은 우주적 기호를 남긴다. 이 봉인을 열어보기 전에는 생과 생의 연결고리를 다 알아차릴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운명에 증거를 대려면 이 “마른 우물의 문장”으로 인감도장을 삼아야 한다. “아이의 우물배꼽”에서 이를 바라보는 주체가 지나온 생가의 우물물 소리를 듣는 것도 그 물길의 유전을 헤아려 보는 탓이다.
이처럼 생과 생을 걸고 결속되는 이어받기의 흔적을 “우물배꼽”의 매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인류사에서 최초의 문자도 “결승문자”라고 선언한다. “인류 최초의 문자는 매듭이었다/ 금기와 결속의 끈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 낳은 결승문자”, “그 빈 곳으로 가서 태어나는 최초의 문자가/ 비로소 당신의 매듭이다”(「매듭」)라고 했을 때, 매듭문자는 신성불가침의 신탁과 같은 신비성을 띤다. 배꼽을 통해 “이별로부터/ 시작되는 생”, “평생을 울어도 넘어가지 못하는 국경”이 있다는 언명은 윤회의 일회성에 갇힌 현존재의 한계에 대한 명백한 선언이다. 아득한 우물의 깊이에서 전존재의 현기증을 길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3. 구멍
진정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은 사물을 주체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보는 주체에서 벗어나 보이는 사물로 달아남(스며듦)”을 의미한다고 퐁티는 말한다. 이 경우 주체의 일부는 대상에 투사, 분할됨으로써 몸은 주체의 균열을 감수한다. 즉 바라보는 지각의 주체와 지각되는 주체로 분할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각의 이중성을 「얼음구멍」이 보여준다.
저수지에 얼음구멍이 뚫려 있다.
누군가 저 물 속을 오래 들여다보고 갔나 보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 눈빛을 기억하기 위해
저수지는 온몸을 꽁꽁 얼리고 있다
얼음구멍 가장자리로 살얼음 조각이 떠 있다
물방울에도 어떤 모서라기 있어서 둥근 얼음구멍 밖으로
투명한 결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빙어의 어신으로 고요한 그의 응시가 단 한 번 깨졌다는 것일까
단지 빙어가 기다림의 내용이 될 때는 아름답다
그의 내면을 회유하던 빙어가 한 번은 물 밖으로 나왔다는 듯이
둥근 얼음구멍이 잠시 출렁인다
얼음구멍을 통해 나는 그의 내면을 본다
말하자면 그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흔들리는 고요가
그와 나 사이에 놓인 기다림의 형식인 셈이다
발밑으로는 수심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인데
얼음구멍에 맑은 물이 찰랑거린다
문득 살얼음 엷게 깔리던 그의 눈빛을 생각한다
나는 얼음구멍을 다시 들여다본다
얼음구멍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이다
두 눈이 얼면서 오래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사람은 기다리면서 비로소 기다림의 내용이 된다
세상에서 사람이 기다림의 내용이 되는 것보다 외로운 일은 없다
-「얼음구멍」 전문
저수지의 얼음구멍을 통하여 타자인 “그”를 들여다보게 되고, 반대로 얼음구멍을 통해 그는 주체인 “나”의 내면으로 스며든다. 그러나, “두 눈이 얼면서 오래 기다려 본 사람”이라는 극독劇毒의 비애는 나의 들여다보는 행위가, “문득 살얼음 엷게 깔리던 그의 눈빛”으로 타자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실 주체가 호명하는 “그”의 기다림은 “그의 내면을 회유하던 빙어가 한 번은 물 밖으로 나”온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흔들리는 고요가/ 그와 나 사이에 놓인 기다림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즉, 화자는 그가 빙어를 잡았느냐 보다는, 얼음구멍을 들여다보는 기다림의 형식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 자체를 주체화 한다.
이 시의 의미를 간략화시키면, 얼음구멍을 뚫어놓고 빙어잡이를 하던 그가 있다. 그는 빙어를 낚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얼음구멍을 투시했을 것이다. 그가 떠난 후에는 얼음구멍이 살얼음을 깔고 있다. 주체는 얼음구멍을 통해 현존하지는 않지만 그 수심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그”를 호출해 낸다. 그리고 그 고요의 내면을 환기하면서 주체는 타자인 그에게 스며든다. 그가 빙어를 기다렸던 것과 주체가 사람을 기다렸던 것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으나, 기다림이 내면의 흔들리는 고요에 맞서는 일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리고 눈에 “살얼음 엷게 깔리던 그의 눈빛”이나 “두 눈이 얼면서” 오래 기다리는 그 형식조차 긍정한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에서 반전이 이루어지면서, “사람은 기다리면서 비로소 기다림의 내용이 된다”고 한다. 이 잠언적인 선언을 통해 주체가 가진 극독의 비애가 폭로되고 만다. 여기서 주체는 “기다림의 내용”이 됨으로써 행위의 수동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내가 빙어가 되어 당신에게 포획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기다림의 내용이 되면서 가장 외로운 순간이 임박한다.
4. 당신
당신은 떠나버리고 없다. 따라서 “두 눈이 얼도록” 기다림의 내용으로 남아있다 해도, 당신을 보려면 한 생 정도는 건너야 한다. 이로써 만남은 간접화되고 시인의 눈은 소멸 쪽으로 기울어진다.
「은유의 다리」는 현존의 건너편을 바라본다. 여기서의 “다리”는 구체성과 추상성의 양자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날이 저물었다”고 시작하는 이 시는 차안과 피안의 경계 지점을 향하여 조심스레 다가간다. 그리고 현존과 괄호로 묶인 부재의 사이에 “은유의 다리”를 놓는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날이 저물었다
발등이 부어올랐다
늦은 저녁 하산하던 사람들
다리 앞에서 잠시 멈춰 서곤 하였다
부은 발등 주무르며 생각한다
지난 생에서 우리 한 번은
이 다리를 함께 건넌 적이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번 생에서 당신은 저쪽 나는 이쪽에서
단 한 번은 마주치지 않았을까
비틀리고 휘어지는 우련한 몸으로
이쪽과 저쪽에 걸쳐진 나무다리처럼
그 시간은 높이보다는 깊이에 속하는 것이어서
다만 스쳐갈 뿐이었을 텐데…
얼마나 많은 이별의 하중들을 견디고서야
저 다리는 해탈에 들어서는 것일까
이별은 시간의 직유가 아니라 은유이다
다리의 이쪽에서 혹은,
지난 생과 이번 생의 차이에서 보자면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다
무거운 걸음으로 오늘 저녁 사람들이 은유의 다리를 건너갔다
언젠가는 그토록 오래 외로웠던 당신도 돌아가리라
하루가 또 하루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당신을 건네주고 다리는 내내 고요하리라
부은 발등 주무르다 드는 생각
다리를 견디게 하는 힘은 우연한 바람이 아니라
그토록 오래고 긴 이별의 은유이다
-「은유의 다리」 전문
발등이 부은 사람들 앞에 다리가 놓여 있다. “발등”은 곧바로 신체성의 ‘다리’에 인접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다리”는 이중의 의미부여가 이루어진다. ‘다리’는 나를 운반하는 신체에 속해 있는 몸의 일부분이고, 한편으로는 물질적 도구로서 골짝의 양안兩岸을 연결해 주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 이동을 통한 ‘운동’과 연결을 통한 ‘지속성’의 의미가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다리’는 현존과 부재의 틈에 끼어 생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 시에서 “다리”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만남’은 현존의 다른 이름이고 ‘이별’은 부재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부재는 없는 것, 즉 절대 무無가 아니라 단지 만나지 못하는 상태일 뿐이다.
흔히 몽상의 시간은 초월적 계기를 마련하는데, 주체는 하산 길에서 부은 발등을 주무르다가 부산하게 흩어지는 사람들과 그들의 운동에 지속성 부여하는 “다리”를 바라본다. 다리가 없었다면 그들의 진행은 단절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지속적인 진행 과정에서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스쳐지나가는 인연과 동시에 이별도 진행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그 가운데 “당신”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을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으나, 언제 이 다리 위에서 스쳐지나갔는지, 또는 진지하게 이별 의식을 치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다리 위에 서 있는 현존의 지점에서 부재하는 “당신”을 느끼고 있다. 그 틈에 다리가 놓여 있다. 따라서 “다리”는 당신과 나를 매개하는“시간의 은유”이자 “이별의 은유”가 된다.
시의 뒷부분인 “하루가 또 하루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당신을 건네주고 다리는 내내 고요하리라”에서 보듯이, 결국 이 시는 이별과 부재를 등가적으로 연결시키며, 부재가 이루어지는 생 자체를 어둡지 않게 긍정한다. 여기서 슬픔에서 힘을 얻는 유미적인 감수성과 함께 현존의 너머를 동경하는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5. 발목
불교의 가르침에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법구가 있다. 모든 존재는 시간에 따라 변해가므로 결국 ‘나’라는 존재도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 실체 없음과 소멸하는 시간관념에서 괴로움이 발생하는데, 이를 깨닫는 것이 무명無明을 벗어나는 일이 된다. 그러나 무명의 껍질을 뚫고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당신이 떠나는 동안 안개와의 혼숙을 풀고 나온 죽은 자들의 발목은 자신의 몸을 찾으려고 떠도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타인의 발목은 쉽게 알아보지만 자신의 것은 알아보지 못한다
당신의 발목 위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안개이다 정말이지 안개는 풍경의 잉여물이 아니다 안개의 시정거리가 얼마인지 알려진 바는 없으나 습한 관절에 접붙어서 익명의 빙의를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게 안개의 속성이다
당신이 안개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 풍경 탓이 아니다 자신의 발목을 의심해 보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꾸만 신문지 밖으로 흘러나오는 노숙의 발목을 지우고 서성이는 안개꽃이 허공에서 모가지를 꺾듯이 당신의 몸을 벗어날 때 다시 안개는 상습적으로 싱싱해지는 것이다.
-「안개상습지역」 부분
이 시에서 ‘발목’은 하나의 상징이다. 안개는 발목의 현장성을 강조하는 하나의 배경에 해당한다. 흔히 발목의 아래 부분인 발과 부은 발등은 지표에 닿아 있으므로 하나의 실존적 증거이자 현존의 거점을 마련한다. 그러나 상부의 무릎이나 상체 부위는 발목을 경계로 하여 지표면과 분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발목 아래의 발을 제외하고는 리얼리즘에서 멀어진다. 안개가 이들을 일체 허상이라는 혼몽의 공중에 매달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상의 사물들은 발목 아래의 것만이 진실이자 현존의 증거이다. “자신의 발목을 의심해 보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언명은, 한 번도 진여眞如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다.
보통! 안개는 우리의 시야를 가리면서 사물에 대한 순수한 이해를 왜곡하는 기체 현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안개상습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무명의 상태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저 부은 발등과 발목이 떠받들어 주는 허상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이다.
발목을 바꾸어 걸어가는 일은 그로테스크하다. 그러나 좀 신나는 일이지 않는가. 발목인 나는 발목의 원래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운반하여 줄 수 있다. 누추한 나를 벗고 발목은 더욱 신나게 길을 걷는다. 평소의 나는 이윽고 더욱 누추해진다. 발목은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습관적으로 숱하게 관절을 꺾는다. 반면! 발목이 나를 실어다 준다면 발목의 능동성에 의탁하여 수동적인 상태로 나의 운명을 즐길 수도 있으리라. 그것은 잉여의 부산물이 아니므로.
혼몽을 단죄하기 위해서는 소금을 쳐야 한다. 발목이 바뀌어 접붙지 않도록 소금을 쳐서 혹독한 정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기실 소금은 물기를 말려서 건져낸 광물질의 일종이다.
모래의 여자는 정갈한 소금으로 밥상을 차리고 바람을 기다린다 사막에서 바람을 많이 먹은 종들은 종종 변이를 일으키는데 그들이 사랑을 할 때는 서로의 입안에 소금을 조금씩 흘려보낸다 사랑을 구하기 위해서 남자들이 여자를 찾아오는 건 소금에 중독된 까닭이다
사랑을 많이 가진 남자의 입안을 들여다보면 소금바다가 출렁거린다 그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 사랑을 찾아 흰 뼈만 남은 몸으로 사막을 노 저어 간다 모래의 여자가 가시나무로 소금을 찍어 인간의 간을 맞추는 것은 이 세상으로 사막이 번져오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소금사막」 부분
사막은 시인이 즐겨 사용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르클레지오의 소설 「사막」에서 보듯, 사막은 원시적이며 원형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직관에 대한 은유이자 상징이다. “소금에 중독” 되는 것은 “여자에 중독” 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실상 사랑의 주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 “모래의 여자가 가시나무로 소금을 찍어 인간의 간을 맞추는 것”처럼 여자가 인간(남자)을 조리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구걸자는 남자이지만, 여자는 실행자이거나 봉사자이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이 “사막이 번져오는 이치”로 변환되면서, 여자들이 저지르는 사랑놀이가 혹은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일련의 행동들이 사막의 상징으로 환치된다. 여기서 사막은 불모나 폐허의 상징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일체의 가감을 배격하는 원시적이며 절대적인 시공간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물기를 거두고 순수한 것만 정제시켜낸 것에 시인의 유미적 감성이 닿아 있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자명한 독성의 그리움에 빠져 있는 것도 “당신”이라는 아니마를 거두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6. 상처
“독약처럼 자명한 시”라고 손현숙 시인이 말한 것은, 그의 시에 나타나는 말들이 투명한 상처인 ‘날 것’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서를 과장하거나 자극적인 이미지로 언어를 꾸미지 않고 소통되지 않는, 없는 요설을 풀어내어 사유의 깊이를 가장하지 않는다.(황정산)”고 말했을 때도, 그가 보여준 시적 진정성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가 ‘죽음’ 말했을 때는, 그냥 죽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몇 번이나 건너본 경험을 반추하는 것이다. 이상이 말한 바 “극한極寒을 걸커미는 어머니 기적奇蹟이다.(「화로火爐」)”라고 했을 때 이를 유희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진지한 사람이 아프다고 할 때 아픈 것이지만, 유희적인 사람도 아프다고 할 때 정말로 가끔은 아픈 것이다.
그러나 신현락 시인의 시에서 상처는 투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어서 별다르게 해석할 필요조차도 없다. 표제시 「히말라야 독수리」에서 나타나는 바, 시적 주제가 곧잘 ‘죽음’에 닿아 있는 것은 그의 상처와 무관하지 않다.
계곡에서 날아오는 한 무리의 독수리를 보며 나는 누구의 몸을 얻어 어느 정신으로 죽을 것인지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가장 가벼운 숨결 하나 날개 위에 올려놓는 일이란 걸 어릴 적 빠졌던 우물물을 다 마시고서도 어렴풋한 기억인데요
-「히말라야 독수리」 부분
이 시를 통해 드러나는 바, ‘죽음’ 의식은 “어릴 적 우물에 빠졌던” 초기기억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초기기억은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생애를 통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정신분석에서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물에 빠진 일은 죽음에 관한 최초의 체험이자, 어머니의 우물인 자궁으로부터 빠져나온 원초 체험에 관련된다. 즉 우물에 빠졌던 체험을 통해 그 이전 출생기의 흔적을 회복해냄으로써 탄생과 죽음이 등가성이나 동시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래서 “죽음이란 가장 가벼운 숨결 하나 날개 위에 올려놓는 일”이란 걸 스님의 법어처럼 일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체험은 다가올 죽음조차도 날개에 올라타듯 가벼워질 수 있다는 충족적인 경험으로 이전되면서 현재의 두께와 가능성을 확대시킨다.
눈길에 미끄러져 어머니의 팔이 부러졌다
그 보이지 않는 뼈와 뼈를
관통하는 비명처럼
눈 그친 푸른 하늘에 금을 그으며
새들이 날아간다
저렇게 날아가는 것들은
세월처럼 금세 사라져 어두워진다
날아간 새들의 맨발자국 찍혀져 있는
그 섣달의 음각화 속으로
얼어붙은 조각달이 하나 빠져나갔다
저녁으로 다시 눈이 내리고
어머니의 그믐은 후생의 먼 마을로
눈송이 같은 불빛 한 장씩 부치고 있다
-「어머니의 그믐」 전문
시적 화자는 어머니의 상처와 후생을 말하고 있지만, 실상 지상의 생명체들이 가진 유한성과 무한성을 넘겨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보이지 않는 뼈와 뼈를/ 관통하는 비명처럼/ 눈 그친 푸른 하늘에 금을 그으며/ 새들이 날아간다”와 같이 상처와 통증은 우주적인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날 생生은 생로병사의 괴로움 속에서 비명을 지르지만, 우주적인 시간은 이를 허공에 기록해 두는 친절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후생의 시간을 미리 마련해 두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적 특징인 “독약처럼 자명한 시”는 이 통증을 친절하게 어루만져 주는 데서 비롯된다. 우주는 원래 좋은 것도 없고 싫은 것도 없다.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을 예비한다는 점에서 좋은 것이다. “어머니의 그믐은 후생의 먼 마을로/ 눈송이 같은 불빛 한 장씩 부치고 있다”와 같은 표현에서 말갛게 고여 있는 독약의 색깔을 건져낼 수 있다. 극독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물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 나오며
신현락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히말라야 독수리』를 읽으면서, 이 시집을 지탱한다고 보는 여섯 개의 단어를 선정하여 필자 나름으로 해설을 붙이고자 하였다.
필자가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와서 좀 쉬려는 의욕으로 기쁨에 겨웠을 때, 그는 나를 불러서 당신의 발목 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여기서 내가 말한 것은 내 말이 아니라 안개 속에서 흘러나오는 당신의 말을 따라서 했을 뿐이다.
다만, 「시간의 허사」에서 “임연수”나 「아내의 생가」, 「여우」, 「흑석동으로 보내는 편지」 등에서 할 말이 더 있을 것 같았지만, 여기서 말문이 닫혀버리고 말았다. 눈 밝은 독자들이 자신의 몫을 해 주리라 믿는다.
그의 시적 특성을 “깊이 있는 허무(황정산)”라고 하거나, “독약처럼 자명한 시(손현숙)”라고 하더라도, 이들의 명명 또한 은유의 방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아래와 같이 그의 시는 은유적인 비의秘意를 깔고 있어 섣불리 해설을 달기도 쉽지 않다.
한때 나는 구름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를 쳤으나
새들만이 그 너머로 날아갔음을 안다
꽃잎 위에 비 내리고 어제가 오늘이 되었다
-「구름 위의 발자국」 부분
▶ 염창권 시인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등단.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으로 『일상들』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