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녹색 꽃대 위에 달린 면류관
활활 타오르는 백제 무령왕 불꽃 왕관
선운산 발치에 꽃무릇 붉은 물이 들었습니다.
선운사 도솔천에 오롯하게 핀 꽃무릇은
달밤에 보면 눈부시고
새벽안개 속에서 보면 황홀합니다.
도솔천에 사는 미륵보살의 현신인가?
아니면 아기보살들의 가을 나들이인가?
꽃무릇은 단풍보다도 애틋하고, 동백꽃보다 더 쿨하게
한 꽃이 피면 한 꽃이 지고, 한 꽃이 지면 또 한 꽃이 핍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 이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 이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 시인 구상선생의 꽃자리 전문 -
젊었을 때는 꽃은 보이지 않습니다.
꽃은 구만리장천 너머 그 어디쯤에 있다고 믿기에
발밑의 들꽃 같은 것은 아예 눈에도 차지도 않습니다.
먼 훗날 만나게 될 그 크고 황홀한 꽃
우아하고 눈부신 꽃
가슴 두근두근 향기로운 꽃
젊은이들은 그 무지개 꽃을 향하여 달리고 또 달립니다.
꽃은 산에 오를 때도 보이지 않습니다.
산봉우리가 바로 꽃이기 때문입니다.
그 꽃은 손에 잡힐 듯 바로 가까이 서있습니다.
허겁지겁 기를 쓰고 오릅니다.
하지만 막상 한 등성이를 오르면 정상은 한 걸음 성큼 물러 서있습니다.
꽃은 산에서 내려갈 때 비로소 눈에 띱니다.
모든 꿈조차 사라져 터벅터벅 무심히 내려올 때
꽃은 길섶 저만치 혼자 웃고 서있습니다.
올라갈 때도 거기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곳에서 혼자 피었고, 홀로 꽃잎을 터트렸습니다.
혼자 바람을 견뎠고, 홀로 싹을 틔었고 그리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송가인 시인은 탄식합니다.
지나온 어느 순간인들
꽃이 아닌 적이 있으랴
어리석도다
내 눈이여
삶의 굽이굽이, 오지게
흐드러진 꽃들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으니
- 시인 송가인의 꽃이 필 때 전문 -
꽃은 역시 가을 꽃 자리가 한갓지며
계절이 익어야 꽃도 제자리를 잡습니다.
봄꽃은 불안합니다.
우르르 잎보다 먼저 피어나 바람 한 번 건듯 불면 우수수 떨어져
땅바닥에 나뒹구는 꽃잎은 참혹하여 짠하디 짠합니다.
남도에 꽃무릇 보살들이 불타고 있습니다.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장성 백양사, 하동 쌍계사 ....
이 중에서도 선운사, 불갑사, 용천사가 지천입니다.
선운사는 절 입구애서서부터 도솔암에 이르는 숲길이 붉습니다.
숲 발치는 봉숭아 물들인 것 같습니다.
꽃도 너무 많이 있으면 멀미가 납니다.
사람이나 꽃이나 떼지어 있어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무리 지으면 천해 보여
다른 것들과 어울려 있어야 더욱 아름답습니다.
어쩌다 달개비꽃과 하얀 고마리꽃이 눈에 띄어 반갑습니다.
꽃무릇은 봄꽃처럼 꽃이 먼저 피고
잎은 꽃이 다 진 뒤에야 비로소 돋습니다.
돌밭 모래땅을 좋아하여
한자로 석산(石蒜) 즉 “돌마늘”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마늘대 같은 연녹색 꽃대를 곧게 밀어 올린 뒤
붉은 면류관 꽃을 주렁주렁 매답니다.
백제 무령왕의 불꽃 왕관처럼 활활 타오릅니다.
인디언 추장 깃털머리인 후투티 새 같기도 하고
언뜻 보면 사이클 선수의 모자 같기도 합니다.
선운사 꽃무릇은 도솔천을 따라 있습니다.
도솔천은 미륵보살이 사는 불국정토이며
도솔천 머리에는 도솔암이 있고, 그 곳 절벽엔 마애불상이 있습니다.
꽃무릇은 9월말 까지가 절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꽃은 새벽안개가 아슴아슴 피어오를 때 보는 것이 으뜸입니다.
붉은 꽃잎들이 이슬을 먹어 촉촉할 때 보면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지고
또한 사람이 많지 않아 호젓하게 볼 수 있으며
낮엔 도솔천 물에 어리는 붉은 꽃을 그윽하게 감상하는 것이 일품입니다.
선운사 도솔천은 한해 세 번 물드는데
4월엔 핏빛 동백꽃 모가지가 툭툭 부러져 붉게 물들고,
9월에는 진홍 꽃무릇이 물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10월엔 온 산이 화끈화끈 발그레한 단풍에 물듭니다.
3월 봄꽃은 ‘어느 시레베 꽃’이라도 다 예쁘지만
하지만 가을꽃은 슬픕니다.
붉은 꽃은 더욱 그렇습니다.
숯불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목젖 같습니다.
꽃무릇은 향기가 거의 없으나
그래도 암갈색 부처나비가 찾아옵니다.
붉은 면류관 위를 나는
나비는 날아다니는 꽃이고
꽃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비입니다.
이제 꽃도 나비도 동안거(冬安居)가 머지않았습니다.
상사화와 꽃무릇은 잎과 꽃이 따로 핀다는 점과
둘 다 수선화과 알뿌리식물이라는 점도 같습니다.
하지만 상사화는 봄에 잎이 돋았다가 진 후 여름에 꽃이 피지만
꽃무릇은 9월 중순께 꽃이 먼저 피었다가 시든 후에 비로소 잎이 납니다.
꽃 색깔과 모양도 다릅니다.
상사화는 분홍 또는 노란색 계통이지만 꽃무릇은 붉은 색입니다.
꽃무릇이 필 때는 이미 상사화는 꽃이 진 이후입니다.
첫댓글 저 붉은꽃이 상사화인 줄 알고 있었는데 꽃무릇이였군요. 상사화를 검색해보니 꽃무릇과는 완전 다르게 생겼네요.
마음이 심란했었는데 이리 좋은 싯귀를 올려 주셔서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네요.
좋은 글귀 감사합니다.
저 선운사
제 고향과 가까워서 한 30번은 찾아갔으며
저곳에서 2년 여를 머물면서 공부를 한 적도 있지요.
그러하니
20대의 한 부분이
저곳 선운사에 있는 셈이지요.
언제나 힘이 되고 펜을 쥐게 하는 힘.
그 힘이 되어주심에 감사와 고마움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