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해를 말하다>
부정의 논리를 설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쌍부정
○ --아니고, --도 아니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다.
등등 현재의 이분론적인 개념을 모두 부정하는 경우가 있다.
○ 이런 부정적 개념이 다행히 이분적이 아닌 경우에는 중도를 찾을 수 있다.
많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다. -- 이는 적당한 것의 가장 좋은 예이다.
흰 것도 아니고 검정도 아니다. -- 이는 그런 색이 있지만 적당한 명칭이 없어서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 이런 부정을 雙否定 이라 하면
쌍부정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분적 개념이 아닌 경우에는 중도를 찾아서 이해가 가능하지만
이분적인 것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논리상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말이 안 되는 소리는 대상을 정확히 모르고 또한 자신이 지득한 것에 대한 표현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 표현하기 어려운 쌍부정의 대상이
심적인 것인가 물적인 것인가,
주관적인 것인가 객관적인 것인가,
우주를 포함한 물적인 것은 과학을 근거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심적인 것은 대개 주관적인 것인데 이는 자신의 심적 상태라면 표현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쌍부정하고 있는 대상이 어디에 해당하는가를 구분한다면
명확한 개념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개념에는 명확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있고 명확히 하기에 너무나 복잡한 경우 또는 명확한 것과 달리
다른 것이 필요한 경우 등 많은 경우가 있다. 즉 말로 풀어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다이빙하는 것을 설명하고 충분히 이해하였어도 담력이 없으면 못하는 것이다.
이런 실행요건과 이해요건에 있어서는 현실에서 전혀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 이해조차 어렵다.
그런데 이해 요건에 말이 필요없거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以心傳心으로 알게되는 미묘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부정의 형태는 대상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데서 표현된다고 본다.
즉 대상을 정확하게 알았거나 이해하였다면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아니고, -- 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과학으로 설명하고 사유와 논리로 설명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견해를 말하다>
아래의 글은 원래 위글 [영]님의 글 '부정의 논리를 설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란 글의 꼬리말로 적은 것이었으나 좀 더 상술할 필요가 있어 본글로 적는다.
위의 글은 이분법적 관념에 입각하여 쌍부정이라는 표현을 '~도 아니고 ~도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분법적인 관념에 입각하였다는 점은 [영]님의 글에 있는 표현 '부정적 개념이 다행히 이분적이 아닌 경우에는 중도를 찾을 수 있다'을 보아도 자명하다.
그런데 이분법적 관념은 필연적으로 자성을 드러내므로 불법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중생이 왜곡하는 불교 3-공'에서 노자 2장의 유무상생을 언급하면서 이미 전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중생이 왜곡하는 불교 3'에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는 자성을 부정하는 언명이라고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혹시 논리를 따지는 사람 중에 '있지도 않고'는 '있음'의 부정이며... '없지도 않음'은 '없음'의 부정이니... [영]님의 글의 쌍부정이 아니냐고 반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분야에 들어가든 해당 분야의 고유용어는 있기 마련이며, 그 분야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그러한 고유용어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알 것이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은 위와 같은 논리적 조합이 아니다.
불법은 그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술어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자성을 부정하는 언명이다.
불법에선 애초에 이분법적인 관념이 없다.
불법에서 '선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라고 할 때... 여기서 선이란 관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악이란 관념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 왜곡하는 불교 3'에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에서 이것이 '공'하고 저것이 '공'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선이 있을 때 악이 있다'란 언명만 가능할 것 같은가?
'선이 있을 때 선한 행위가 있다.' 혹은 '선이 있을 때 선한 마음이 있다.'등 무수히 많은 연기가 있을 수가 있다.
즉 '선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언명은 악과 필연적인 관련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전혀 이분법적인 관념하에서 '공'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왜 이분법적인 분별을 떠나지 못하는가?
우리가 냉장고를 볼 때... 온장고를 생각하면서 보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관념에는 그렇지 못한가?
관념은 무형의 것이라서?
무언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서?
불법에서는 관념은 색온에 속한다.
그것은 사대(지, 수, 화, 풍)의 파생물질인 소도색에 속하는 것이다.
불자는 관념을 유형물과 다르게 보지 않는다.
그것은 색이다.
따라서 일반인이 냉장고를 볼 때 온장고를 생각하지 않듯이...
불자는 선이라는 관념에 있어 악이라는 관념을 생각하지 않는다.
'관념이나 이분법적인 분별등'에서 벗어났다고 말장난만 치는 사람들은 실제 하나도 그렇지 못하다.
예로 극악인을 이야기함에 극선인을 운운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관념적 유희에 매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불자가 아니라면 별 상관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불법에 있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이는 자신이 얼마나 불법에 대해 무지한가를 살피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불법에 있어서 극악인은 극선인에 대칭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물론 본인이 근래에 수행에 관해 적은 글에서 '왜 극선인이 아니고 극악인인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빛의 길과 어둠의 길등을 이야기함에 있어 적고 있는 내용이 불법이 아니라고 분명 밝혔다. 그것은 불법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수행의 구조라는 일반론적인 의미에서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불법에선 그런 식의 구별이 원래 없다. '중도'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영]님의 글에 적혀 있는 그러한 의미의 쌍부정은 전혀 불법과 관련이 없다. 그러한 쌍부정은 차라리 '네띠 네띠 네띠(아니다 아니다 아니다)'라는 우파니샤드의 언명에 가깝다.
또한 '중생이 왜곡하는 불교 3'에서 자성의 의미에 대해... '무자성(자성없음)'의 의미에 대해... 충분히 현대적 언어로 설명을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이란 자성을 부정하는 언명이 모호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가?
실상이 그러함을 수용하느냐 마냐는 '부처도 강요할 수 없다'고 분명 '중생이 왜곡하는 불교 3'에서 적어 놓았다.
자신이 수용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모호하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가지 묻고 싶다.
[영]님 글의 쌍부정은 무엇인가? 우파니샤드의 언명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인가?
솔직히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불법의 표현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등을 염두에 두고 쓴 것 아닌가?
불법의 표현을 염두에 두고 썼음은 2736번 글에 있는 표현 '부정적 개념이 다행히 이분적이 아닌 경우에는 '중도'를 찾을 수 있다'을 보아도 자명하다.
정말 골 때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본인의 글 '중생이 왜곡하는 불교 3 - 공'에 두리뭉실하게 말도 안되는 비판을 하는 꼬리말은 잘도 달아 놓더니, 해당 글을 읽지도 않았다는 말이 아닌가?
본인의 해당 글을 읽었다면... 노자 2장... 부처도 강요할 수 없음...의 언급에서 위에서 내가 지적하는 사항을 알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더 황당한 것은... 말도 안되는 글에 불법을 잘아는 체하며 불자를 꾸짖던 자가 '옳다'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리석음이 하늘을 찔러~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조차 모르네~
그런데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 현명하다 하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래서 바보는 바보를 알아 보는 법이란 말이 있게 된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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